역사의 오늘
1866년 8월 21일,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발생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 (조선 고종 3년, 미국 앤드루 존슨 대통령 2년) 8월 21일, 평양 군민 (軍民)들이 미국 상선 (商船) 제너럴셔먼 (General Sherman) 호 (號)를 응징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행패를 부렸는데, 이에 박규수의 지휘 하에 관민들의 저항으로 배는 소각되고, 선원들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서구의 열강들은 아시아에서 새로운 통상을 개설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중국 및 동남아시아에서의 통상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매튜 페리 준장이 1853년 7월 8일 에도 (현재의 도쿄) 부근의 우라가 항까지 항해한 뒤, 일본도 통상을 개방하였고, 미국의 무력의 위협 하에 일본과 미국은 1854년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찍이,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이었던 1832년의 미국에서는, 피콕 호에 승선했던 에드먼드 로버츠에 의하여 조선의 통상 개방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미국은, 제1차 아편 전쟁 (1840~42년)의 여파로 힘을 잃은 청나라와 왕샤 조약 (1844년 7월 3일)을 맺어 불평등한 통상을 개시하였다. 이 조약은 처음으로 아시아가 미국의 상인들에게 문을 여는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해에, 미국 의회는 조선의 문호 개방을 위한 안건도 마련하였으나,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어쨌든 미국과 조선의 첫 번째 접촉은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1853년 사우스 아메리카 호가 일본으로 항해하던 도중, 부산에 입항하여 열흘을 머물렀다. 이때, 이 배의 관리들은 조선의 관리들과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1855년, 65년, 66년에 조선에서 난파되었던 여러 번의 사례에서도 미국인들은 잘 대우받았고, 본국 송환을 위하여 청나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제1차 및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중국을 전통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세력이 축출된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비슷한 재앙을 피하고자, 외부 세계와의 교역을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 제너널 셔먼호 사건의 결과
– 통상요구와 거절
상선 셔먼 호는 미국의 군인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이름을 딴 것이었고, 톈진(天津)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 (W. B. Preston)의 소유였다. 그는 톈진에 기반을 둔 영국 회사 메더우즈 앤 컴퍼니 (Meadows and Co.)로부터 비단 · 유리그릇 · 천리경 · 자명종 등의 상품을 사들여 적재하였고, 중화기로 무장하였다. 이 배의 승무원은 선장 페이지 (Page), 1등 항해사 윌슨 (Willson), 13명의 청국인, 3명의 말레이시아인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소유주 프레스턴도 배에 올랐고, 영국인 호가스 (Hogarth)와 항해사 겸 통역인 역할을 위해서 런던 선교회 소속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도 승선했다. 이들은 1861년 5월에 굴욕적으로 개항된 체푸 (Chefoo, 현재의 옌타이)를 8월 9일에 출항하여 8월 16일에 조선의 해안가에 당도하였다. 셔먼 호는 중국 정크선의 (선장 유화태, Yu WauTai) 인도로 8월 20일 (음력 7월 1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유화태는 1865년말 토마스가 황해지역에 왔을 때 타고 왔던 배의 선장이며 토마스에 의하면 20년 이상 조선인과 무역을 하였다.
마침, 프랑스의 군함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은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는 것을 보고, 지방 관리들은 페이지 선장을 만났고, 원활히 의사소통을 하였다. 즉, 이들은 셔먼호가 평양에 온 목적을 물었다. 토머스는 백인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항해 목적에 대하여서는 상거래를 위한 것일 뿐임을 강조하며, 그들이 가져온 비단 · 자명종 등을 쌀 · 사금 · 홍삼 · 호표피 등과의 교역하자고 제의하였다. 조선인들은 모든 상거래 제의를 거부하되 승무원들에게 식량과 보급품을 제공하는데에는 동의하였다. 조선인들은 좀더 고급 관리와 상의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페이지 선장에게 말해 두었다. 그러나, 셔먼 호는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 평양 서쪽에 정박하였다. 많은 비와 조수차로 인하여 대동강은 여느 때보다 깊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제너럴 셔먼호의 공격과 평양성 군민들의 반격
8월 21일 (음력 7월 12일) 조선 측의 이와 같은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만경대 한사정 (閑似亭)에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 (中軍) 이현익 (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 (官民)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소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셔먼호의 무모한 행동에 대하여 강변의 군민은 돌팔매 · 활 · 소총으로 맞서 대항하고, 퇴교 (退校) 박춘권 (朴春權)은 배를 타고 가서 이현익을 구출해 내었다.
영국인 최난헌이 (매천야록에 미국인 최난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난헌은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목사의 한국이름이다.) 군함 1척을 이끌고 조수를 타고 대동강에 들어왔지만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군함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며칠씩 계속된 비로 강의 수위가 높아졌다가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평상시 수위로 돌아가게 되자 셔먼호는 양각도 (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선체가 걸려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대포를 발사하는 등 폭력을 자행하여 평양 사람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박규수는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돈을 주고 구하던 중 한 교졸이 지원했다. 이 교졸은 어촌의 괴피선 (작은 배) 수백 척을 동원하여 배안에 기름을 끼얹은 뒤 섶을 가득 실어 불을 지르게 하고 궁수로 하여금 일제히 화살을 당기게 하였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 (鐵山府事) 백낙연 (白樂淵) 등과 상의하여 8월 30일 (음력 7월 21일)부터 포격을 가한 뒤 대동강 물에 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승무원 23명 가운데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배에 불이 번지자 영국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와 중국 상인 조능봉이 뱃머리로 기어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박규수는 이들을 강안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성난 평양부민들이 삽시간에 달려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나머지 생존자들도 전원 사망했다.
박규수는 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고, 미국 군함은 한번에 화살세례를 받았으며, 군함 안에 있던 인화물질로 인해 군함은 불타고 말았다. 미국 상인들은 불길 속에서 튀어나와 도망쳤지만 그들을 추격해 대포를 쏘아 4, 5명을 쓰러트렸다. 이것이 조정에 전해지자 박규수는 승자 (품계가 승진됨)하였고 교졸 또한 진장이 되었다. 이후 박규수는 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를 얻게 되었다.
○ 영향
당시 조선의 흥선대원군 정권은 이 사건과 같은 해 10월 26일에 일어난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인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 (攘夷政策)인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5년 미국 링컨 대통령의 암살 사건이후 권력을 승계받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탄핵 (1868년) 등 어수선한 미국 국내 사건으로 바로 처리되지 못하고 5년 후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대동강에 침몰한 제네럴 셔먼호를 인양하여 이를 복제, 철갑증기선을 건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수십만 냥을 들여 10개월 만에 복원하기는 했으나,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사실상 실패했다. 그러나 그 뒤에 통상수교거부 정책이 한창임에도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