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69년 11월 17일,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 (Suez Canal) 개통
수에즈 운하 (Suez Canal)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로,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되었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를 지날 때 육로로 혹은 아프리카로 우회해서 갈 필요 없이 유럽과 아시아를 해상로로 바로 연결해준다. 운하의 북쪽 종착지는 시나이 반도 서쪽인 포트 사이드이며, 남쪽 끝은 수에즈 인근이다. 이스마일리아가 두 곳 가운데 지점에 있다.
수에즈 운하의 길이는 192km이다. 가운데에 그레이트 비터 호를 통과하여 수에즈 만과 지중해를 잇는다. 수에즈 운하에는 갑문이 없으며, 바닷물이 양쪽 바다에서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자유로이 흘러들어온다.
운하는 대표적인 중립지대로서 이집트에서 관리하며 주권 행사에 제약이 있다.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수에즈 운하는,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하며, ‘운하계의 제왕’이라는 수식어도 가지고 있다.
○ 건설
오늘날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의 주도로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 공매가 시작되었다. 이를 주도한건 페르디낭 M. 레셉스 (Ferdinand M. Lesseps)로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되어 있던 중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의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였고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총 40만 주의 주식을 발행하여 이를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천주에 달하는 프랑스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기타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어할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 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감히 프랑스가 영국의 세계지배를 위협할 수 있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 것을 가만 보지 않았다. 이집트 정부와 사이드 파샤에 대한 직접적 압력은 물론이고, 형식적으로 이집트의 지배자인 오스만 제국을 통해서도 압력을 넣었으며 수에즈 회사의 주식구입 권유도 단칼에 거절하고 다른 나라들이 해당 주식을 사는 것도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당대 최강 대영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다른 나라들 (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등) 이 수에즈 회사 주식 구입을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17만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맡게 되었다.
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 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방법으로 건설을 방해했다. 때문에 레셉스가 항변하기도 하였다. 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회사이며 이집트 소유이고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선박은 영국 해군 연안포함 HMS 뉴포트 (Newport)다. HMS 뉴포트는 운하 공식개통 전 날인 11월 16일 밤에, 모든 조명을 끄고 몰래 운하를 통과했는데, 운하회사 관계자들은 영국에게 항의도 못했다. 이후 뉴포트의 함장은 공식적으로는 불필요한 긴장행위를 했다며 비판받았다.
이 공사를 지휘한 페르디낭 드 마리 레셉스는 국제적 명성을 얻지만 1880년 파나마 운하 공사에도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몰락한다.
○ 영국 지배
운하 개통 불과 2년 만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프랑스가 참패하고 말았다.
단일개체로서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최대보유자는 17만 주의 이집트 정부였으며, 그 이집트 정부의 최대 스폰서는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지만, 이집트의 자체적인 경제력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영국이 방해한 거였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수에즈 운하를 적극 지지하고 이집트의 스폰서를 자처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퇴위했던 것이다. 뒤이은 공화정부도 이집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패전상황을 추스르며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국방력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생기고, 또 당장 주요 은행에 대한 채권 만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1875년 사이드 파샤는 눈앞에 닥친 재정 폭탄을 피하고, 또 프랑스가 주도한 수에즈 운하에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는 제스처로서 보유 지분 17만 주를 통채로 시장에 내놓았다.
그리고 시장에 내놓은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17만 주를 통째로 매입한 건 영국 정부였다. 영국 입장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당연히 인도,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크게 단축되는 것이며 군사적으로는 제1차 아편전쟁, 세포이 항쟁, 제2차 아편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유사시 인도와 중국에 최대한 빨리 군사력을 투입할 수단이 필요해진 것이다. 다만 외교관계가 좋지 않은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를 지었고 그 운영에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전쟁 여파로 프랑스가 권리가 약화되고, 수에즈 운하가 프랑스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영국은 즉시 지분 확보라는 방법으로 운하 운영권을 노린 것이다. 이는 당시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주도했는데, 디즈레일리는 주식을 매입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전부터 연줄이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400만 파운드의 자금을 부탁했다. 이에 로스차일드 측에서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는지 묻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보는 영국 정부입니다.” 그렇게 수에즈 운하의 주인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은 1882년 이집트에서 반제국주의 시위가 벌어지자 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그 뒤부터 수에즈는 영국의 이익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랍 방면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는 공세를 단행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군대 주둔을 합법화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은 이전 수에즈에 관한 조약을 모두 무효로 돌리고 완전히 운하의 소유권을 자신들의 손에 넣었다.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과 함께 이집트 점령 및 수에즈 운하 차단을 시도했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막히고 만다.
○ 이집트로 귀속
종전 후 이집트가 완전히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뒤 이집트는 이전 조약에 따라 수에즈를 되찾기 위해 주식을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에즈 운하가 완전히 이집트에게 국유화된다. 이에 수에즈 운하를 빼앗길 생각이 없었던 영국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중동전쟁 (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집트는 전쟁에서 졌지만 수에즈 운하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소련이 이집트를 지원하고 여타 중동국가들이 이쪽으로 기울자 중동에서 친소련파 정권의 득세를 경계하던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를 주저앉히고 이스라엘에도 경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물러나야 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쟁으로 인해 서방 세력의 주도권을 완전히 미국에게 빼앗겼다.
1960년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한때 수에즈 운하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되어버려 운하가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겪었고, 결국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교 정상화로 시나이 반도 전체가 다시 이집트에 귀속되면서, 수에즈 운하는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차례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마지막 확장 공사는 2015년에 있었고, 현재까지도 수에즈 운하의 통행은 이집트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