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93년 11월 6일, 러시아의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 별세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년 5월 7일 ~ 1893년 11월 6일)는 낭만주의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의 작곡자이다.
– 표트르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본명: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
.출생: 1840년 5월 7일, 러시아 제국 뱟카현 사라풀군 봇킨스크
.사망: 1893년 11월 6일(53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매장지: 상트페테르부르크 티흐빈 묘지
.국적: 러시아 제국
.직업: 작곡가
.부모: 일리야 차이콥스키, 알렉산드라 아시예르
.배우자: 안토니나 밀류코바 (1877년 결혼)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1862~1865년)
.사조: 후기 낭만주의
.활동: 1859 ~ 1893년
.종교: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이며,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언제나 꿈꿔왔지만 계획에 없던 음악가로서의 인생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거쳐 이제는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남겼다.
한국에는 1970년대부터 그의 음악이 광고삽입곡 등으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낭만주의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 생애 및 활동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우랄지방의 외딴 시골 캄스코보스킨스크의 광산촌 숙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 (1795 ~ 1880)는 우크라이나계의 정부 탄광 공학자였고, 하급 관료로 러시아 제국 정부 소유 광산의 감독관을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일부 프랑스계였다. 표트르에게는 위로 이복누이와 형이 한 명씩 있었고, 또한 친여동생 알렉산드라와 (1842년생)과 1843년 리폴리트, 쌍둥이 형제로 작가인 친동생 모데스트 일리치 차이콥스키와 안토니 일리치 차이콥스키 형제가 있었다. 아버지 일리아는 러시아 제국의 하급 관료였지만 경제적으로 상당히 무능력하였고, 가정에도 상당히 무관심하였다.
그는 우크라이나계 사람으로 증조부 표도르 차이카(Fyodor Chaika)가 표트르 대제 때 러시아군 장교로 폴타바 전투에 참전하고 러시아에 정착하였다. 할아버지 표트르 표도르비치 차이카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의료 훈련, 군의보조원으로 일했고, 아버지 일리아는 러시아 육군 중령, 야금학기술자연구소 산하 과학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아버지 일리아는 본처와의 사이에서 딸 지나이다를 남기고 젊었을 때 죽어 1833년 육군 중령으로 있을 때 재혼하였다. 캄스코-보트킨스크 광산 금속공장 수석 감독관 등을 지냈다. 어머니인 알렉산드리아는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피가 섞인 러시아 혼혈인 여성으로, 외할아버지 아시에르 (Assier)는 독일계 프랑스인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간질병 환자였고, 어머니 알렉산드리아 역시 병약하였다. 그리고 차이콥스키 역시 신체적으로 허약하였다.
차이콥스키는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나, 그는 어려서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역사, 지리, 문학, 불어와 독어 등을 배웠는데 어학쪽에 더욱 재능을 보여 6, 7세에 벌써 독어, 불어를 구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의 관습도 있었고 어머니가 프랑스계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인 여자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 프랑스 출신 가정교사를 무척 좋아했으나 아버지 일리아가 전근가면서 모스크바로 발령났다가, 그리고 나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1848년 그 가정교사는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를 잘 이해하고 따르던 소년 차이콥스키는 그녀와 헤어질 때 받은 충격으로 그는 말수 적은 아이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가정교사와의 이별의 충격은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사 생활 때까지도 갔다고 한다.
차이콥스키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으로 조숙했지만 그의 부모로부터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적극적인 후원을 받지 못했는데, 그의 부모는 음악가로는 돈을 벌수 없다고 판단한데다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고 신경이 예민한 그의 건강에 음악공부나 한가지에 몰입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48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 후 차이코프스키는 홍역 후유증 혹은 외할아버지의 간질병 유전 인자가 원인일 수 있는 뇌 중앙 신경 계통에 문제가 발생하여 차후 빈번한 신경 쇠약 증세가 발생하면서 그를 괴롭혔다. 1850년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 당시 상류 계급의 풍조에 따라 법률학교의 예과(예비 학과)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동급생이었던 아푸흐틴을 만나 평생을 친구로 지내였는데 아푸흐틴은 13세 학교재학 중에 벌써 동성애를 알게되어 담임교사와의 동성 관계도 소문이 나 있었다. 곧 법률 학교의 본과로 진학하여 공부한 후 법무성 임용되어 관리로 근무했으나, 공직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1860년 안톤 루빈시테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한 이 교실의 제1기생이 됐다.
유년시절에 따르던 가정교사와의 이별의 충격은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사 생활 때까지도 계속되어 더욱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이 무렵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게 되었으나, 제정 러시아 당시 종교적 교리와 사회 분위기 상 동성애는 죄악으로 취급되었기에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던 그는 친구가 몇 명 안 되었다.
1854년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과 어머니 알렉산드리아가 갑자기 콜레라로 죽자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가정교사와의 이별 과 기숙생활 중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연속으로 심리적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법률 학교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처음에 정규 음악 수업을 받지는 못했다. 법률 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산발적으로 받은 성악·피아노·화성법 레슨이 그의 음악교육의 전부였으며, 잦은 관현악단 공연과 오페라 극장 출입이 전부였고 이러한 관현악, 오페라 관람은 부족한 음악 교육을 보완해주었다.
1862년 법무부 서기로 재직하면서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로 설립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야간반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법무부의 관료가 되었지만 법무부 서기직은 점점 음악에 몰두하는 그를 막을 만큼 흥미있는 일이 못되었다. 하루는 넋을 잃은 채 공문서를 찢어 차근차근 씹어먹다가 그것이 한 장도 남지 않게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일도 있다. 그는 곧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주간반으로 전반, 음악에만 몰두하여 음악 학도가 되었다.
1864년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의 연극 폭풍 (The Storm)의 서곡인 관현악곡을 작곡하였다. 폭풍의 서곡을 본 그의 스승 안톤 루빈스타인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과 가볍고 천박해보이기도 한 음악 분위기에 놀랐다고 한다. 1865년말 루빈스타인 형제의 천거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법 교수로 천거되었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1860년대에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파인 러시아 5인조의 지도자 밀리 발라키레프와 교제하여 국민악파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반에는 낭만주의 경향의 곡을 작곡하였으며 베토벤, 슈베르트의 전통을 러시아로 확산시켰다. 말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을 다녀 성공하기도 했다.
작품 중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의 작품으로 고전 발레 음악 중 최고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93년 8월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6번 B단조 작품 74를 완성하고 그해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을 지휘했지만 청중들은 야유를 보내거나 호응하지 않았고 그는 실망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망상에 빠져 그릇된 기대를 가졌으며 자신의 작품을 쟁점으로 부각시키려 했다.
차이콥스키는 곧 방송에 출연,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교향곡 6번에 대한 ‘신비한’ 해설과 더불어 그는 이 작품 안에 그의 모든 영혼을 쏟아서 설명하였으나 청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1893년 11월 6일 콜레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향년 53세로 사망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문화성에서 부검한 결과 비소 중독이라는 결론이 나와 사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의 6번째 작품이자 총결산이랄 수 있는 ‘비창’ 교향곡을 자신의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하고 1주일 후였다.
게다가 교향곡 7번을 동시작곡하다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동생인 모데스트의 집으로 시신이 옮겨졌다가 그해 11월 10일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인파가 들끓었고, 그가 매장될 때 수도원 묘지에는 8천명의 조문객이 찾아왔었다.
조카 다비도프와 동생 모데스트는 그의 사후 차이콥스키 박물관, 기념사업을 하였으나 다비도프는 모르핀 환자로 자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한동안 콜레라로만 인정되었으나 1980년대부터는 자살설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콜레라로 인한 사망으로 알려졌으나 사인이 비소 중독으로 나타나면서 그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사후 일반적으로 콜레라가 유행할 때, 시냇물, 혹은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고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설과 그가 동성애로 지탄받게 되고 또한 동성애 대상이 황실의 남자들과 고관들이며 동성애로 비난받게 되자 추문을 피해 음독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 작품 목록
– 교향곡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교향곡 2번 ‘소러시아’》
《교향곡 3번 ‘폴란드’》
《교향곡 4번》
《교향곡 나단조 ‘만프레드’》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비창’》
《교향곡 내림마장조 (미완성)》
–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1번》
《바이올린 협주곡》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 관현악곡
《1812년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 환상 서곡》
《슬라브 행진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이탈리아 기상곡》
– 챔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현을 위한 세레나데 C 장조》
《플로렌스의 추억》
– 발레음악
발레 – 《백조의 호수》
발레 –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발레 – 《호두까기 인형》
– 오페라
오페라 – 《예브게니 오네긴》
오페라 – 《스페이드의 여왕》
오페라 – 《마제파》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