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99년 12월 4일, 한국 최초의 한글체 신문이자 최초의 영자 신문인 ‘독립신문’ (獨立新聞, 1896 ~ 1899) 폐간
독립신문 (獨立新聞)은 1896년 4월 7일에 한국에서 발간된 민간 신문이자 한글, 영문판 신문이었다. 최초신맹매신매일 국한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獨立協會)의 기관지로 발간되었다. 서재필은 당시 4,400원을 발급받고 또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 4월 7일에 처음 발간했다. 4면 중 3면은 순국문, 1면은 영문으로 문장을 썼다. 필진으로는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주시경 등이 참여하였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발간했으나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 헨리 아펜젤러를 발행인으로 하여 윤치호가 맡아 발행하다가 독립협회의 해산과 함께 폐간되었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순한글체 신문이자 한국 최초의 영자신문이었으며,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칼럼을 투고할 수 있었다. 1957년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독립신문 창립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발간자인 서재필이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발간자를 맡았다. 1899년에 윤치호가 물러나고, 선교사 아펜젤러가 맡았다. 1899년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벌리가 맡았으나, 정부가 이 신문을 매수하여 1899년 (고종 36년) 12월 4일자로 폐간하였다.
○ 배경
– 창간 준비
1895년 조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조선에도 신문을 발행하여 국민을 계몽할 것을 계획한다. 동시에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유길준, 박정양 등은 서재필이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적극 지지하고 고종에게 신문 발간을 건의하여 허락받는다.
1894년 박영효를 만난 서재필은 다시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서재필은 박영효의 권유로 망명 10년 만인 1895년 12월 배를 타고 하와이와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5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당시 내각을 맡고 있던 유길준은 서재필을 초빙형식으로 귀국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서울대 사학과 명예교수 신용하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던 교훈을 되새긴 유길준은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다. 갑오경장이 개화파 내각의 주도로 제도 개혁을 하면서 일본측의 한성신보에 대항할 신문을 만들 한국인을 물색했는데, 그가 서재필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유길준은 유길준 대로 개혁과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고, 일본은 일본 대로 1895년 무렵부터 조선에 신문 창간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신문 개설을 권고하였고,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의사 생활을 하던 필립 제이슨을 초빙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서재필은 귀국 직후 신문 창간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의 협력 거부와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실패하고 만다.
귀국 직후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다.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 1895년 서재필은 유길준의 벼슬 권고를 사양하였다. ‘갑신정변이 민중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느껴 민중 계몽 사업을 하겠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이후 서재필은 박영효, 박정양 등을 찾아가 신문 개설에 필요한 자금을 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결국 1895년 봄, 서재필은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을 지원받고 별도의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으며 월 300원씩 10년간 중추원 고문직을 맡기로 하였다.
– 일본의 지원
1895년 12월 3일, 일본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 (陸奧宗光)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쿠고로 (井上角五郞)에게 전보를 보낸다. “신문 발간을 위해 말씀해 오신 그렇게 많은 돈을 지출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이에 다시 한 번 절약․검소한 방법을 고려해 주기 바람. 또 신문기자는 첫째로 그 신문을 지배할 만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 나는 오다 이치로 (織田一郞)에게 그 임무를 맡겼으면 한다. 이의 없는지 알고 싶다.”
1895년 12월 4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신문기자로 활동할 인물은 선정해 두었다는 중요한 전보를 보낸다. “신문사 창립비는 최초의 설계는 조선의 기계류를 차용할 계획이었으나 그 가망이 없기 때문에 모두 다 새로 조달할 필요로 하기에 1200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금 물가가 4배나 올랐기 때문에 아무리 절검하여도 1천원은 필요하므로 꼭 1천원만은 지출해주기 바란다. 또 보조비는 전 (前) 설계로는 160여 원을 요하겠지만 이것은 조선 정부 기타에 파는 것을 예상하여 130원으로 감액한 것이다. 이런 것까지의 전액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앞서 진술한 대로 물가가 매우 비싼 때인지라 만일의 부족을 염려하여 130원만은 꼭 청구해 주기 바란다. 또 신문기자의 건은 이쪽에서 이미 적당한 자를 선택해 놓았다. 이것은 제가 사용하는 자이므로 그 인선은 꼭 저에게 맡겨주시기 바람.”
1895년 12월 5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한글 신문기자로 적합한 인물이 있는지 묻는 전보가 온다. “오쿠다 요시토 (奧田義人)를 출장시키기는 어려운 일인지라, 그 대신 내각의 하나부사 나오사부로 (花房直三郞), 시바타 카몬 (柴田家門) 중 1명을 출장시키는 쪽으로 하고 싶으며, 그 사무는 오로지 내각의 조직과 각 성의 장정을 정하는 일에 사용할 계획이다. 또 오늘의 경우 민간인을 넣는 일은 사실 곤란하다. 지금 조선 정부는 빈곤하기 짝이 없어서 군대의 급료조차 4개월간이나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민간에서 사람을 넣을 때는 즉시 급료 지불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조선문 (朝鮮文: 한글 – 필자 주)의 신문 발행의 일은 어떠한가? 기자로서 그 곳에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속히 답전하기 바란다.”
1895년 12월 5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글 신문’ 제작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요청서를 전보로 보낸다. “야스히로 (安廣) 비서관은 오늘 아침 9시 인천을 출발하였다. 동 관이 도착할 때까지 체재하시기 바란다. 또 한글 신문의 일은 지급 (至急)을 요하므로 저에게 일임시켜 주기 바람.”
1895년 12월 6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글 신문 창립비로 기밀비를 지불하고 싶다는 전보를 보낸다. “하나부사 (花房)․ 시바타 (柴田) 가운데서 출장을 전의 (詮議)하기가 어려우면 전 농상무성 특허국장으로서 지금 제2군을 수행중인 아루가 나가오 (有賀長雄)를 파견하도록 조치하시기 바란다. 특히 동인의 봉급 지출의 길이 없음에 있어서 조선 정부의 재정 형편이 조정될 때까지는 별도 기밀금 65,000원내에서 지불할 것을 승낙하여 주시기 바람. 또 조선 신문의 창립 보조도 지출할 길이 없음에 있어서는 위 별도 기밀금 안에서 지불하고 싶다. 여하튼 지급 답전을 기다리겠음.”
1895년 12월 6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신문사 창립비를 보낸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창립비 1200원은 지불하겠지만 그것은 돈으로 보내고, 기계 등은 그 곳에서 정비할 작정인지 답전하기 바람.”
1895년 12월 7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신문 발행을 위한 기계를 구입하겠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발행에 있어 기계 등은 새로 조달할 작정이지만 코베 (神戶)에는 고물로서 상당한 것이 있을 것이므로 대금을 혹 실감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를 위하여 이곳에서 사람을 차출할 작정임.”
1895년 12월 7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신문사 창립비와 신문 제작을 위해 관리를 파견한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창립비 1200원을 전신환으로 보냈음. 화방․시전 가운데 한 사람을 히로시마 (廣島)에 체재시킬 용무가 있다. 의회 개회 중 특히 분망할 것이므로 양인이 함께 귀하의 명에 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종종 협의한 결과 법제국 참사관인 이시즈카 에이조 (石塚英藏)라면 즉시 귀하의 명에 응할 것이다. 동인은 오랫동안 법제국에 있었다. 영문학에 능하고 일본 법률에도 정통하다. 그가 마땅하다면 전보하시는 대로 본인을 도한 (渡韓)시키겠음.”
일본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유길준, 서재필 등에게 신문 발행에 협력할 것을 약속한다.
○ 창간과 발행
– 창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은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되었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 1896년 4월 7일 창간 당시 국배판 (菊倍版)면으로 구성되었고 3면은 한글, 1면은 영어로 표기했다. 본문은 순한글 세로쓰기로 되어 있고, 논설과 광고, 국내외 소식 보도면으로 구성되었다. 한글판은 서재필과 주시경이 편집을 하였고, 영문판은 헐버트가 사실상의 편집자였다.
“만일 백성이 정부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이 많이 있을 터이요. 우리가 이 신문 출판하기는 취리하려는 게 아닌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여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 독립신문 창간호 사설
“우리가 독립 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잇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의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우히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 있을 것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설명할 터이옴.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정을 퍼일 터이요, 사사로운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옴.
또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함.
그러한 즉 이 신문은 꼭 조선만 위함을 가히 알 터이요, 이 신문을 인연하여 내외,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조선 일을 서로 알 터이옴.” — 독립신문 창간사, 1896년 4월 7일
필진으로는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주시경 등이 참여하였다.
– 신문 발행과 운영
특히 서재필은 주시경에게 회계사무원 겸 교열담당의 업무를 맡겨 신문사의 출납과 한글 교정을 맡게 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호러스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려면 한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려 했고,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 주시경은 한글 표준어와 방언, 발음 등에 정통하였으며 독립신문 발간 중에도 쉬운 단어 선정을 위해 직접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
1897년 1월 5일부터 영문판이 분리되어 4면으로 구성된 The Independent가 발행되었다. 영문판에는 국제정세에 대한 칼럼이나 서재필 등의 논설 외에도 국내 사정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헐버트의 동생 아처도 한국으로 건너와 1년간 독립신문의 발행을 돕다가 귀국하였다. 서재필은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 뒤 윤치호가 경영을 맡은 이후에 1898년 7월 1일 주3회에서 일간으로 바꿨다.
– 한글 맞춤법
독립신문은 최초의 한글판 신문이며 동시에 띄어쓰기를 지면에 반영하였다. 한글은 창제 이후 한자와 마찬가지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지 않았는데, 독립신문의 발행으로 인하여 띄어쓰기가 정착되었다. 헐버트 선교사가 발행한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의 1896년 1월호에는 한글의 점 찍기 또는 띄어쓰기라는 윤치호의 글이 실렸는데, ‘장비가 말을 타고’라는 예와 ‘장비 가말을 타고’라는 예를 들어 띄어쓰기가 필요하다고 설명을 하였다.
– 서재필의 망명과 폐간
독립신문은 근대적 여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립신문 창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동구락부, 정동파, 친미파 등으로 불린 영어파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 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1898년 7월 4일자 독립신문에는 영어 교습 광고도 실려 있었다. “대한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고자 하나 학교에는 다닐 수 없고, 또 선생이 없어서 못 배우는 이가 많다 하기로, 영국 선비 하나가 특별히 밤이면 몇 시간씩 가르치려 하니, 이 기회를 타서 종용히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독립신문사로 와서 물으면 자세한 말을 알지어다.” 라고 발표했다.
정부의 공격으로 출국하게 된 서재필은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을, 이상재,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등에게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에 윤치호는 서재필이 출국하면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독립신문 등을 3년도 유지시키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는 최소한 1년 이상은 유지시킨다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유지가 어렵더라도 1년 이상만 협회 등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한때 그는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팔아 넘길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일본 공사측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구두 계약까지 맺기에 이르렀다. 윤치호, 유길준 등은 대한제국 조정이 밉더라도 일본에는 넘기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일본 공사관 측에서 매입을 거절함으로써 백지화됐다. 서재필은 출국 직전 일본 공사관에 구두 계약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독립신문 매수의 건’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898년 1월 15일).
1898년 (고종 35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자와 동포들에게 올리는 인사말을 남기고 서울에서 출산한 큰 딸 스테파니와 부인을 대동한 채 용산에서 인천행 배에 올랐다. 5월 27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발간자인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발간자를 맡았다. 1899년에 윤치호가 물러나고, 선교사 아펜젤러가 맡았다. 1899년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벌리가 맡았으나, 정부가 이 신문을 매수하여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하였다.
○ 평가
독립신문은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영자 신문이라는 점과 정치, 시사, 국제정세를 국민에게 알기 쉽게 소개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독립신문의 창간자인 서재필이 일본 유학 시절에 접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시사신보》와 미국 체류 당시에 접했던 주간지 《네이션》 (Nation)이 독립신문의 발행 취지 및 방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독립신문은 정치 공동체의 인적 구성 원리에 대해 기존 조선 시대의 방식과는 다른 이해 방식을 보여주고 이를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킨 최초의 신문이었다. 또한 토론과 비판을 통해 입헌군주제 등의 근대 정치공동체 건설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독립신문은 청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기 때문에 친일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1898년 8월 20일자 독립신문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올 예정인데, 그는 세계적 정치가이고, 대한제국의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므로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란다는 사설을 실었다.
○ 독립신문사터
독립신문사가 있었다는 곳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서울특별시 문화재과 표석위원회에서 배재학당 대강당 앞쪽 계단 (정동 34-5번지)에 ‘독립신문사터’ 표석을 설치하고 있으며,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는 정동제일교회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신아빌딩’ (서소문동 39-1번지)이 독립신문사 자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추정을 한다. 또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이순우는 서울시립미술관 안쪽 (서소문동 38번지) 에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