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04년 3월 5일, 독일의 신학자로 ‘익명의 기독교인’ 주창한 카를 라너 (Karl Rahner, 1904 ~ 1984) 출생
카를 라너 (Karl Rahner, 1904년 3월 5일 ~ 1984년 3월 30일)는 독일의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로 버나드 로너건, 앙리 드 뤼박,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이브 콩가르 등과 더불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회 신학자인 휴고 라너의 동생이며, ‘익명의 기독교인’을 이론화하였다.
1904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출생해, 1924년 예수회에 입회철학과 신학을 뮌헨, 팔켄부르크 (네덜란드), 프라이부르크, 인스부르크에서 공부했다.
1932년 뮌헨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1937년부터 인스브루크, 뮌헨, 뮌스터 대학교에서도 신학자로 활동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 자문으로도 활약했다. 당시 칼 라너는 독일과 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안위를 우선시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침묵한 과오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사회역사적 책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1971년 은퇴 후에도 학문 활동을 계속했으며, 1984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별세하였다.

– 카를 라너 (Karl Rahner)
출생: 1904년 3월 5일, 독일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
.사망: 1984년 3월 30일 (80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학파: 기독교 철학, 신학
.영향을 준 인물: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이마누엘 칸트
.부모: 루이제 라흐너, 칼 라흐너
.형제자매: 후고 라흐너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칼 라너는 1904년 3월 5일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22년 4월, 열여덟 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해 평생토록 예수회 수도자, 사목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32년 신부가 되었다. 일찌감치 그의 학문적 잠재력을 알아본 예수회는 그에게 철학 공부로 수도회에 기여하는 사명을 맡겼다.
1934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의 세계로 진입했으며, 특히 당대 최고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상에 심취했다. 하지만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제출한 라너의 박사 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의 영향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1936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통과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세계 안의 정신 Geist in Welt, 1939』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각계의 찬사를 받았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고 인스부르크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없게 되자, 빈에 머물면서 교회의 일치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48년 인스부르크 대학교로 돌아와 교의신학 교수로 1964년까지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의 학문적 업적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자문 위원으로서, 가톨릭교회가 새 시대의 요청 앞에서 개혁적 방향을 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임기를 마친 뒤 뮌헨 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로마노 과르디니의 강좌를 이어받았다.
1971년부터는 대학 강단 바깥에서 왕성한 학문 활동과 대중 강연을 이어 나갔다. 1976년에 나온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 Grundkurs des Glaubens』은 라너 신학의 결정판으로 간주된다. 1984년 3월 5일, 인스부르크에서 친구들, 제자들과 함께 여든 번째 생일 축하연을 가진 다음날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바로 그달 3월 30일,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시신은 인스부르크 예수회 교회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 생애 및 활동
칼 라너는 독일 프라이부르그의 검은 숲이라는 이름의 도시에서 1904년 3월 5일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대가족이었고, 중산층의 매우 경건한 카톨릭 가정이었다. 그의 형 휴고처럼 칼은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고, 특별히 예수회 교단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교단은 칼을 교수로 키우기로 계획했고, 그는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 인식론에 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칼 라너는 1937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 신학부에서 교수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의하여 폐교되기도 했지만, 후에 다시 학교로 복귀하여 1964년까지 계속 강의했다. 이 학교를 떠난 해에 뮤니히대학교로 옮겨 기독교 세계관 석좌 교수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그 곳에서 동료교수들과 불협화음으로 뮌스터 대학으로 옮겨 교의학을 가르치게 된다. 1971년 교수 은퇴 후 뮤니히로 돌아와 살다가, 1984년 인스부르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칼 라너는 은퇴 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에큐메니컬 운동, 종교간 대화, 신학자 회의, 교황들의 신학 자문으로 활동을 했다. 그가 남긴 저서 분량은 가히 바르트나 틸리히와 견줄 만하다. 1984년까지 그의 이름으로 나온 논문과 책만 해도 3,500여 종이 된다. 논문 중 가장 중요한 것만 모은 「신학 연구」라는 20권짜리 책도 8천 쪽이 넘는다. 생을 마감할 때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그의 생애 신학적 작업을 간명하게 요약한 책으로 라너에 대한 탁월한 입문서가 된다.
칼 라너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칼 라너의 강의를 듣고 나온 사람이 그 내용을 설명할 때 라너가 말한 신학과 전혀 다른 신학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화로 그려져서 일간지에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칼 라너의 신학은 이해하기도 전달하기도 벅찬 내용을 담고 있다.

○ 칼 라너의 신학방법론
칼 라너는 생을 살면서 현대의 문화적, 신학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로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술들은 자명성을 갖지 못한다.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둘째 모든 학문 분야의 전문지식이 점점 증가하고 심화되기 때문에 하나의 종합이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신학의 궁극적 기본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종합이 필요하다.
셋째 신학의 전통적 개념들은 현대인의 삶과 변화된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신앙의 위기를 초래한다. 현대인이 갖게 되는 경험과 기독교 신앙이 서로 관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칼 라너의 신학은 이런 고민과 문제의식 속에서 전통적인 신학의 문제인 초월성과 내재성의 논쟁에서 하나의 종합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기존의 스콜라 신학이 인간의 삶과 거리가 먼, 추상적 개념에서 시작되므로 아래로부터 곧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하여 삶과 진리, 그리고 경험과 개념의 상응을 추구했다. 그래서 자신의 주체성과 실존 안에 있는 말씀에 반응하길 원했다.
칼 라너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도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이며, 거룩한 신비 없이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통해 경험하는 역사적 환경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를 마주하고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라너의 신학적 접근 방법의 핵심은 ‘초월론적 방법’이다. 그는 여기서 ‘초월론적’ (transzendental) 이라는 용어를 ‘초월적’ (transzendent) 이라는 용어와 달리 구분하여 사용한다. ‘초월론적’이라는 표현은 칸트에게 있어서는 ‘내재’ (immanent)라는 용어에 응하는 개념이다. 전자가 경험 세계의 한계 내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경험세계를 벗어 난 것, 따라서 경험될 수 없기에 인식될 수 없는 것, 즉 인식의 상이 될 수 없는 것에 사용된다. 이는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초월론적’이라는 개념은 경험 세계 내에서 어떠한 것이 인식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기 하여 인식대상으로부터 떠나 주체의 선험적 구조로 넘어서는 것을 뜻한다. 칸트는 ‘초월론적’이라는 용어를 ‘범주’ (kategorial)라는 용어의 대응개념으로 사용하는데, ‘범주’라는 용어의 개념이 경험되어지는 상의 인식과 관련이 되어있다면 ‘초월론적’이라는 용어의 개념은 ‘범주성’을 떠나는 것, 즉 의식인 경험 인식 대상으로부터 떠나 인간 주체의 선험성에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초월론적 방법이 철학적이기에 그가 철학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라너는 철학을 신학을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철학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작업인 기초신학의 측면”이라고 말한다. 즉 맹목적인 신앙의 비약을 넘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합리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라너는 인간 존재가 계시를 받을 수 있도록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초월론적 반성’이라는 하나의 철학적 도구를 사용한다.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무한하고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편향성을 가지고 있는 ‘초월론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은 늘 신적 계시에 대한 개방성과 편향성 그리고 수용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라너의 과제였다.
라너는 이것을 입증하는데 ‘초월론적 반성’을 사용한다. 초월론적 반성은 현상이나 사실에 대한 선험적 조건들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이는 인간의 경험과 인식에 선험적 조건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 선험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선험적인 조건은 인간의 보편경험을 초월론적 경험에 비추어 객관적으로 볼 때, 인간은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지향한다는 내적인 본성이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내적인 본성은 인식하는 자 안에서 전제되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의미에서 존재론인 것이다. 아울러 인간 실존의 지평이 된다. 이 지평 안에서 인간은 경험하고 질문하며 인간의 주체성을 찾아간다.
초월론적 반성을 위해서, 인간은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위해 추상화라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것은 사물을 자신으로부터 분리 (초월)시켜 사물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의 개념은 사물이 가진 범주나 관계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사물을 분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고유의 능력이며 초월론적 반성을 위한 선험적 자기 운동능력이다.선험적 조건은 선험적 자기운동으로 발현되어 초월론적 반성을 한다.
결과적으로 라너는 초월론적 반성을 통해 신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입증하기 원했다. 라너는 이런 신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청종적 능력이라고 말했다. 청종적 능력이란 인간은 원하시면 자신을 얼마든지 계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적 사물임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말씀의 청종자이다. 그 능력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어서 라너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 자체 안에 포함시켜놓은 일종의 지식이라고 간주하였다. 이 지식은 전의식적이고 잠재적이지만 인간 본성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신-지식’ 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위상을 가진다. 라너의 매우 정교한 철학적 인간학의 목적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공간이다.

○ 칼 라너의 신학
– 계시론
라너는 계시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첫 째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연적, 초자연적 성향을 초월론적 계시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이며 초월론적 경험들을 통하여 중개되는 이 계시는 항상 비테마적이며 비반추적이며 하나님에 대한 암묵적 지식을 제공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가지고 개념을 형성하거나 사상적으로 그 내용을 반추해 보여주며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초월론적 계시에서 하나님은 답이 아닌 질문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초월적 계시는 반추적이고 개념적 지식을 위한 선험적 기초를 제공한다.
라너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본성과 모순 관계에 있다고 보는 ‘외인주의’와 인간의 본성에 예속되어있다고 보는 ‘내인주의’의 극단 속에서 중재적 위치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를 ‘초자연적 실존’이라는 중재적 개념으로 극복해보고자 했다. 이 초자연적 실존이라는 것은 라너의 신학 전반에서 중심적인 개념이다. 라너는 실존을 하이데거에게서 빌려왔다. 인간의 어떤 특성이 타존재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성 자체에 내재되어 있든 말든 그것은 하나의 인간 실존인 것이다. 초자연은 꼭 기적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모든 것이다. 초자연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기 의사표현이다. 은혜는 인간에게 값없이, 근거없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전달로서 선사되는 초자연적 현실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경험하기 이전부터 선험적으로, 초월적으로 인간의 실존과 함께 언제나 주어져 있으며 인간의 역사적 삶을 동반한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 한가운데 현존한다. 정리하면 초자연적 실존은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에 대한 인간이 본성이다. 이것으로 인간은 타존재와 구별된다. 그는 초자연적 실존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라너에 따르면 초자연적 실존은 인간이 가진 청종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인간은 청종적 능력으로 하나님께 항상 열려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늘 초자연적으로 고양되는데 그러한 고양됨이 모든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존재구조에 있어 유한한 세계를 넘어 절대자 하나님을 향해 늘 개방되어있다. 이 초자연적 실존 때문에 인간은 초월의 종착점을 발견케 되며 그것이 은혜롭고 인격적이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란 초자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외인적인 것은 아니다. 이 초자연적 실존을 통하여 라너가 기대했던 요점은 외인주의와 내인주의 모두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본성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 개방성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다고오기 때문이다.
라너는 초자연적 실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와 충분히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특별 계시와의 관련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너는 그런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초자연적 실존은 인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이며 그것이 성숙되기 위해서는 범주적 계시가 요구된다고 했다.
라너의 두 번째 계시형태는 범주적 계시, 혹은 실제적 계시이다. 초월론적 계시와 범주적 계시는 상호의존적이다. 라너는 초월론적 계시를 인간의 경험으로 분석 (반성)함으로써 설명한다. 그것이 범주적 계시의 출발이다. 인간은 다양한 경험들을 한다. 이 경험들은 인간의 다양한 범주적 세계를 이룬다. 그런데 인간은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 개별적 사물들을 경험할 뿐 아니라 그들의 유한성을 경험한다. 그의 경험들은 유한성의 경험들이다. 그러나 인간 속에는 초월론적 구조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유한성의 경험 속에서 인간은 무한한 것의 경험을 찾게 된다. 초월적 계시는 범주적 계시를 통해 선명해진다. 범주적 계시는 초월론적 계시만을 통해서는 발견될 수 없는 하나님의 내적 실재를 드러낸다. 그 내적 실재는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과 그가 영적인 피조물과 가지는 자유로운 관계이다. 이것은 초월론적 계시를 반성적 지식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자기-의사소통’으로 하나님과 맺는 초월론적관계가 ‘자기-반성’적일 때 범주적 계시가 된다. 초월론적이며 동시에 범주적인 하나님의 보편적 ‘자기-의사소통’이 ‘자기-반성’을 통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주적 계시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 때문에 부분적으로 오류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차적이며 고등적인 유형의 존재가 있을 것으로 가정된다. 주로 신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적 계시이다.
끝으로 모든 계시의 절대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육신은 단순히 ‘자기-의사소통’의 최고 지점, 인류의 역사와 경험 속에 계시는 하나님 임재의 가장 치열한 매개적 지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전 보편적 역사를 해석하는 시금석이나 나머지 계시와 절대적으로 구별된다고 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초월’이 성취된 것, 곧 오메가 포인트이며 창조세계는 이것을 향해 이끌려간다.

– 신론
라너에게 하나님은 자연적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신비’이며 초자연적 실존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인간에게는 ‘거룩한 신비’이다. 하나님은 초월적 신비로서 인간의 경험 안에 내재한다. 라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무한성은 공리적이기에 어떤 한 개체로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어떤 기계적인 신이 아닌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는 인격적인 것은 인격적인 것을, 비인격적인 것은 비인격적인 것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인격적이다. 동시에 인간의 인격을 초월하는 분이다. 이는 하나님을 천사적 인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피치 못할 진술이나, 인간은 ‘거룩한 신비의 표현할 수 없는 경외적 흑암’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 인격’이라고 고백해야한다.
라너는 무로부터 창조한 하나님을 긍정했고, 나아가 하나님은 이 세계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세계가 하나님을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운 가운데 스스로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라너는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나뉘는 이원론에 대항했다. 그래서 그는 무로부터 창조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세계에 자신의 근거를 두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내재성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간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분이다. 그러나 그 차이 안에서 인간과 가장 밀접한 일치점이 존재한다. 즉 절대적인 차이점이 아니다. 라너에게 하나님은 ‘차이-속의-일치’, ‘일치-속의-차이’로 존재한다. 라너는 이처럼 조심스레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맞추려한다.
또한 라너는 하나님에 관하여 삼위일체를 말할 때, 내재적 삼위일체와 동시에 기능적 (경륜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며, 기능적 삼위일체는 역사 속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역할이다. 라너는 “역사 속 삼위일체의 구원을 위한 기능적 활동은 내재적 삼위일체 방식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성육신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육신 속에서 하나님의 내적존재가 포함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가운데 그 존재의 기능이 드러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여 예수처럼 되어간다. 피조물은 하나님과의 ‘자기-의사소통’을 통하여 점점 예수처럼 되어가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에 청종하므로, 초월론적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차이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며 ‘되어 감’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성육신이다.

– 기독론
라너의 기독론은 초월론적 기독론이다. 라너에게 예수는 절대적 구원자이다. 예수가 절대적 구원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기초는 예수의 자의식과 그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결합하며 찾았다. 예수는 하나님과의 탁월한 밀접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 밀접성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신성은 그가 절대적 구원자로서 어떤 기능을 했느냐가 증명해준다. 그는 단순히 선지자 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나누어주는-은혜’로 인간을 구원한 절대적 구원자이다.
인간의 구원은 단순한 메시지를 넘어 하나님과의 고상한 연합을 이루도록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으로 신성화하며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은밀한 본질로서 연합한다. 그 연합은 절대적 구원사건이며, 예수의 절대적 구원사건은 부활에 의해 입증된다. 그런 의미에서 라너는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찬성한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가진 예수의 자의식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과 다를 수 없다. 예수는 그 자아 속에서 하나님의 의식과 인간의 자의식을 가지며, 우리는 이 연합을 본체적 연합의 신비로 보아야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간이 되심, 곧 성육신은 “인간의 현실적인 본질이 일어난 최고로 유일한 경우”이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재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의 초월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하나님의 자기전달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초월성의 완성이요 정점이다.

– 인간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신적 개방성이 있는 유한하지만 초월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가진 인간의 신적 개방성은 하나님의 ‘자기-표현’을 위한 잠재력이다. 이런 인간은 ‘말씀의 청자’가 된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며, 그분에 대해 질문하고 반성하며 답을 찾아간다. 하나님은 인간의 비밀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암호이다. 인간이 질문이면 하나님은 해답이시다. 하나님은 인간 속에 자신의 비밀과 답을 두셨으며 인간은 자신 안에 질문 (자기-반성)을 통해 암호를 풀어나가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암호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그 존재가 암호이며 답을 찾아가는 존재이다. 그 답은 창조의 목적에서 드러나며, 창조의 목적은 ‘성육신’이다. 인간은 고로 성육신을 추구해야한다. 그것은 인간됨을 최대한으로 성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하여 로고스와 영원한 연합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가장 하나님과 밀접할 때 가장 인간다움이 나타난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궁극적인 성취와 실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통하여 자기를 외적으로 표현하며, 동시에 인간은 절대적 구원자를 찾던 하나님에 대한 개방성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하나님 계시 안에 있는 은혜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본성에 이미 가지고 있다. (초자연적 실존, 선험적 조건) 하나님은 무한하고 파악될 수 없으며 숨어있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에 대한 무한한 개방성의 존재”로 파악된다. 인간은 초월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정의 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자신에게 언제나 하나의 비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비밀을 지향한다.
– ‘익명의 그리스도인’ 주창
칼 라너 하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주창한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개념으로 말미암아 동시대의 탁월한 신학자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Hans Urs von Balthasar)와 신학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라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구원을 원하며 여기에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도 배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반성적 숙고가 없거나 거의 없다고 하더라도 양심에 따른 삶을 살고 선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고유한 운명에 대해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면 그들의 행하는 모든 선은 구원에 중요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 라너의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발타사르는 그의 책 ‘코르둘라’ (Cordula)를 통해 공산당 서기와 그리스도인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익살스럽게 썼다.
“그리스도인 : 당신이 여기 계시군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명예롭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공산당 서기 : 무례하지 마시오. 젊은이. 나도 충분히 알고 있소. 당신들은 자멸하였군. 그래서 우리가 당신들을 박해할 필요가 없어졌어. 꺼져.”
발타사르는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리스도적이지 않다고 했다.
“이 개념으로는 더 이상 선교도 필요 없고 신앙도 유지할 필요도 없다. 단지 양심적으로 살기만 하면 구원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너가 여든이 되던 해인 1984년 초부터 그에게 초청 강연이 쇄도했다. 그는 2월 11~12일 프라이부르그대교구 가톨릭 학술원에서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주제로, 2월 17일 런던에 이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것이 라너의 마지막 공식 강연이었다.

– 칼 라너의 하나님 이해
라너가 지난 세기의 시대 상황 안에서 대내외적으로 도전받고 영향력 감소에 직면한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신뢰 회복과 활력 도모를 위해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근세 이래의 서구 철학 사조의 정당한 소인을 신학 안으로 수렴하여 초월신학 정립을 위해 기울인 노고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초월신학 사상은 미증유의 역사적 격변기에 발해진 시대 요청과 외부 도전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의 하나님 상념은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 지속했던 교회의 쇄신과 대외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의 정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라너가 객관적 구원실재를 하느님의 자기전달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자기성취의 지평이면서 내적 심층임을 심도 깊고 치밀하게 제시하는 한편, 구원 실재의 수취자인 인간의 존재 구조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자기전달 양식을 초월적이고 범주-역사적 양식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하나님의 내재적이고 구원경륜적 신비와 계시 수용자로서의 인간의 신비와의 상관성을 명료하게 제시한 작업은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로 정연하게 제시된 라너의 신학적 작업은 현대 사조 일반과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는 데 있어 현대 신학계가 미래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정당한 통찰을 간직하고 있다.
라너의 하나님 상념을 포함한 신학 사상은 세계 신학계에서 광범한 호응과 찬탄을 받는 가운데에도 격렬한 비판도 상당히 받고 있다. 신학계 일각에서는 그의 인간학적 신학사상이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각박한 사회와 냉혹한 역사 현실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라너의 초월신학 사상이 지니는 문제점은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주변세력에 지나지 않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지역인 소위 ‘제3세계’에 속한 교회가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될 ‘제3교회’의 시대에 달리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본 취지의 타당성과 핵심 통찰의 정당성을 담지하고 있는 라너의 신학 사상 일반과 하느님 상념은 앞으로도 종파를 초월하여 전 그리스도교 신학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부단히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 칼 라너, 日常의 神學
칼 라너 (1904 ~ 1984)는 전통과 현대를 모두 어우르는 신학적 깊이와 넓이에서 20세기가 낳은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다. 특히 라너의 신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타종교와 문화에 대해 개방하도록 하는 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라너는 다소 독창적인 신학을 시도한다. 라너의 신학은 우리의 실존을 설명해 주는 근원적인 구조 (실존론적인 것)와 그에 합당한 실존적인 삶 (실존적인 것)이라는 기본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다소 독창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러한 원천적인 구조와 실존적인 삶이 일치할 때 의미 있는 것임을 드러내준다. 라너에 의하면, 은총이란 ‘하나님의 무상적 (無償的) 자기 전달“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인간 안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기에 인간은 원칙적으로 성화되어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으시며 스스로를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칼 라너는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하나님은 이미 일상 안에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구체적 일상사 안에 현존해 있고 그 일상사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라너에 의하면, 일상사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일상 자체가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시적으로 고양되고 승화되어 있다.
일상 ‘안’에 들어와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이 곧 인간 실존의 근거가 되고, 따라서 이 근거 위에서만 인간의 일상적 삶은 그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은 채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라너는 일상 안에 실질적인 은총 체험, 즉 하나님 체험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체험은 비일상적인 황홀경의 체험이 아니라 바로 일상의 신비에 대한 체험이 된다. 일상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신적으로 고양되어 있으므로, ‘높은’ 하나님 체험이 ‘낮은’ 일상 안에 현존하면서 일상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 무엇에도 갇히지 않는 무한한 하나님이 유한한 일상 안에서 알려지는 진리, 그래서 신비이다. 이런 신비가 일상 안에, 있는 그대로의 인간 안에 생생하게 부여되어 있으니, 이미 주어져 있는 일상에서의 자아 체험은 원천적으로 하나님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일상사에서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로 실재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있는 곳이란 곧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로 실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곳이다. 아울러 가장 일상적인 사소한 일도 실은 참으로 인간다운 삶에 본질적 요소로서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무게를 지닌 삶인 것이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로 실재의 깊이를 드러냄에서 ‘자유’는 인간의 자유이되, 동시에 그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이기도 하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를 자신의 자유로 누리는 사람은 자신의 실존이 자신의 실존이면서도 불가해한 신비에 개방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 신비에 근거지어진 삶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일상사가 거부되는 그곳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럼으로써 자기 삶의 진정성을 획득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 그 수도자적인 모습을 라너는 이렇게 적는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 하나님과 그 뜻이라고 부르는 저 신비롭고 소리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분 때문에 순명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일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 하나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만 같은데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 하나님 사랑이 죽음 같고 절대적 부정 같아 보일 때 ···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 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이 어찌할 수 없는데도 ···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는데 ···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영을 체험한 것이다.
영을 체험,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영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의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다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이다.
이 영의 맛을 체득한 사람, 이런 경험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사람, 이들이 바로 성인 (聖人)이다. “성인들은 영을 그대로 들이마신다. ··· 그래서 그들의 별난 인생, 가난, 겸손의 갈망, 죽음의 그리움, 고통의 감내, 순교의 은밀한 동경이 있는 것이다.”
결국 영으로서의 인간이란 단지 사변적으로뿐 아니라 실존적으로 신과 세계, 시간과 영원의 접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영의 체험이란 영원의 체험이고 신적인 삶의 체험이다. 현실 안에 있으면서 현실을 넘어서는 실존적 초월의 체험이다. 우리가 이처럼 영을 체험한다면 적어도 믿음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사실상 이미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런 체험이 용서하고 순명하고 희생하고 사랑하면서 고독한 ‘결단’을 내리는 일상의 행위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에 무엇인가를 덧붙임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일상 자체를 무시하거나 비일상적인 것으로 변화시킴으로써도 아니다. 도리어 일상 그대로 안에서 그대로 하나님, 은총, 무언의 신비를 보는 것이다.
라너가 조심스럽게 이름 지은 ‘일상의 신학’이란 일상을 축일로 바꾸어주는 신학이 아니다. 거기서는 일상을 일상으로 둔다.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는 체 견디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성실한 삶, 인내, 사랑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상의 삶 안에 일상을 넘어서는 하느님 체험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상은 “작은 것은 큰 것의 약속이요 시간은 영원의 생성이다”.
라너는 말한다. “누구든 인간으로서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핵심을 위해 조금이나마 시간을 낸다면, 그는 작은 것들도 가이없는 깊이를 지녔음을, 영원의 전조임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_ ‘인간은 신의 암호, 칼 라너의 신학과 다원적 종교의 세계’ (이찬수 저, 1999년, 분도출판사)

○ 저서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 (가톨릭출판사)
영성신학논총, (가톨릭출판사)
누가 너의 형제냐, (분도출판사)
침묵속의 만남, (광주가톨릭대학교 출판부)
말씀의 청자,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 Selected bibliography
1954–1984. Schriften zur Theologie. 16 volumes. Einsiedeln: Benziger Verlag.
1965. Homanisation. Translated by W. J. O’Hara. West Germany: Herder K.G.
1968. Spirit in the World. Revised edition by J. B. Metz. Translated by William V. Dych. (Translation of Geist im Welt: Zur Metaphisik der endlichen Erkenntnis bei Thomas von Aquin. Innsbruck: Verlag Felizian Rauch, 1939; 2nd ed. Revised by J. B. Metz. München: Kösel-Verlag, 1957)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9. Hearers of the Word. Revised edition by J. B. Metz. Translated by Michael Richards. (Translation of Hörer des Wortes: Zur Grundlegung einer Religionsphilosophie. München: Verlag Kösel-Pustet, 1941)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0. The Trinity. Translated by Joseph Donceel.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8, 1987.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 Translated by William V. Dych. (Translation of Grundkurs des Glaubens: Einführung in den Begriff des Christentums. Freiburg: Verlag Herder, 1976) New York: The Seabury Press; New York: Crossroad.
1985. I Remember. New York: Crossroad.
1990. Faith in a Wintry Season: Conversations and Interviews With Karl Rahner in the Last Years of His Life, with Paul Imhof & Hubert Biallowons, eds. New York: Crossroad.
1993. Content of Faith: The Best of Karl Rahner Theological Writings. New York: Crossroad.

○ 칼 라너의 연보
1904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출생
1924년 예수회에 입회, 네덜란드 활큰부르흐에서 신학공부
1929년 뮌헨에서 사제서품
1934~1936년 하에데거 문하에서 철학연구
1936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신학박사
1937년부터 그곳에서 신학 강의를 하면서 잘츠부르크에서도 강의
1939~1944년 나치스 치하에서 강의를 중단당하여 빈의 교구 고문 겸 사목위원으로 강연.저술
1945~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신학강의, 아울러 뮌헨에서도 강의
1948~1964년 인수부르크 대학교 교의신학 주임교수
1962년에는 로마로부터 출판금지령을 받았다가 같은해 교종 요한23세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호 고문신학자로 선임
1964~1967년 뮌헨 대학교에서 로마노 과르디니의 강좌를 계승, 그리스도교 세계관 및 종교철학 강의
1967~1971년 뮌스터 대학교 교의신학 주임교수로 재임하다가 정년퇴직
1971년부터 뮌헨에서 명예교수로서 철학과 신학의 접경 문제를 강의
1982년부터 인스부르크에서도 명예교수로서 신학 강의
1984년 3월 30일 타계
칼 라너의 저작 색인이 단행본으로 따로 나올 정도로 방대한 저술 중에도, 철학 대논문 Gwist in welt와 열 권에 달하는 그의 사상집 schriften zur theologie 및 대사전 Lezikon fiir Theologie und Kirche는 20세기 신학의 독보적 이정표를 이루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