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29년 1월 15일, 미국의 침례교 목사 ·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 ~ 1968) 출생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년 1월 15일 ~ 1968년 4월 4일)는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 해방 운동가, 권리 신장 운동가,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미국내 흑인의 인권 운동을 이끈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출생: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사망: 1968년 4월 4일 (39세),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모텔
.사인: 암살 (총기에 의한 사망)
.성별: 남성 / 국적: 미국
.직업: 목사, 신학자, 시민사회운동가, 흑인운동가, 인권운동가, 연설가
.종교: 침례교
.부모: 마틴 루터 킹 시니어 (부), 앨버타 윌리엄스 킹 (모)
.배우자: 코리타 스캇 킹
.자녀: 딸 – 욜란다 데니사 킹, 버니스 킹, 아들 – 마틴 루터 킹 3세, 덱스터 스콧 킹
.친척: 크리스틴 킹 패리스 (누나), 알프레드 다니엘 윌리엄스 킹 (남동생)
.수상: 노벨 평화상, 그래미상 명예의 전당 등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교회에 부임하였다. 1955년 12월 몽고메리 시립 공영 버스의 흑인 좌석차별 사건 이후, 버스 보이콧 운동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이끌어 1년 만에 범국민적 지지를 얻어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흑인 해방 운동 및 흑인 인권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을 비롯한 많은 흑인 관련 운동과 인권 운동을 이끌어 법률과 제도의 수정, 공민권법, 투표권법의 개정과 흑인의 권리를 증진했다.
1960년대에 흑인 권리 운동과 인권 운동을 통해 일정의 법률적인 결과를 획득하였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그는 맬컴 엑스의 폭력주의 노선에 반대하고 비폭력적인 저항 운동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테네시주의 흑인 미화원 파업운동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멤피스에서 흉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경찰은 북부 출신의 백인우월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40년~1944년: 부커 T 워싱턴 고등학교 (졸업)
1944년~1948년: 모어하우스 대학교 (학사)
1948년~1951년: 크로저 신학대학교 (석사)
1953년~1955년: 보스턴 대학교 (박사)
○ 생애 및 활동
– 출생과 가계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의 침례교 목사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는 아버지 마이클 목사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지만, 아버지가 1935년 마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틴이 이름이 된다. 할아버지 제임스 킹 역시 침례교회 목사였다.
그의 아버지쪽 선조들은 아일랜드인과 아프리카인의 혈통이 섞인 아이리시-아프리카 계열 흑인이었다. 증조부 나댠 번햄 (Nathan Brannum)은 침례교 목사가 되었고, 증조부 나댠 번햄이 성씨를 킹 (King)으로 하면서 그의 집안 성씨는 킹이 되었다. 한편 어머니 쪽으로는 부분적으로 백인의 혈통을 타고났는데, 어머니의 할아버지 윌리엄 넬슨 윌리엄스 (1804 ~ 1863)와 어머니의 증조부 윌리엄 윌리엄스(1772 ~ 1835)와 레이첼 넬슨 (c.1774 ~ 1851)는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백인이었다.
아버지 마이클 루터 킹은 침례교회 목사이다. 증조부 때부터 침례교 목사였고 3대째 침례교회 목사였지만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 백인들에게 멸시와 폭행을 당했고, 어릴적부터 그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성장, 인종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신념을 어릴 적부터 품게 되었다.
– 유년기 ~ 청년기
경찰의 인종 차별에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항의하는 부친의 실천은 어린이였던 루터 킹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굴종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항의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한국삐아제에서 출판한 ‘마틴 루서 킹 목사’ 전기에 따르면, 경찰이 부친에게 “어이, 꼬마. 운전면허증을 보여줘”라고 하자, “꼬마는 여기 있는 아들입니다. 면허증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꾸하였고, 그 말을 듣고 경찰은 자신의 무례함을 부끄럽게 여겨서 물러났다고 한다.
소년 시절에 그는 침례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회의적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13세 되던 해 부활절에 침례교회의 주일 학교에서 그는 “의심을 버리고 가차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성서에는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신학교 진학을 결심한다.
그는 9학년과 12학년을 월반하여 15세 되던 해에 모어하우스 대학 신학과에 입학,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의 크로저신학교를 수료하였다. 대학교 재학 중 넉넉한 가정환경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았지만, 흑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신학교를 마친 뒤 다시 매사추세츠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 인권, 사회 활동
.사회 부조리 해결에 참여
1955년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신학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학위 재학 중 그는 주일학교때 학력이 낮은 교사들에게 배운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적 신앙으로 신앙성격이 바뀌게 된다. 한편 주일학교에 나가 흑인 및 빈민가의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후 보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권 운동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게 된다. 당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침례교회에서 목사안수는 받았지만,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회와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1955년 백인들은 ‘몽고메리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흑인은 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려고 하였고,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던 중 1955년 12월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시 경찰서에 체포, 연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 지도자들이 봉기하여 몽고메리 시내버스업체들을 상대로 보이콧 운동을 기획했다. 킹 목사는 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받아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함께 운동을 이끌었다. 보이콧 운동을 통해 수천 명의 흑인과 백인이 버스 이용을 거부했고, 시민들은 카풀을 조직하고 도보로 이동했다. 보이콧 운동은 계속되자, 시내버스업체들은 재정적으로 크게 손해를 보았다.
킹 목사는 참가자들에게 흑인 해방 운동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위자들 및 그 지지자들은 불평등한 제도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에게 지속적인 위협과 공격을 받았으며, 시위자 가운데 상당수가 체포되고 구속됐다. 킹 목사의 사택에도 폭탄이 날아들었다. 다행히 아내와 자녀들은 무사했다.
이윽고 1956년 12월에 미국 연방 대법원이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마침내 381일 만에 몽고메리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이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애틀랜타의 침례교회 목사로 있으며 미국 각지의 인권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마틴 루터 킹 2세와 같이 인종차별반대운동에 참여한 동역자로는 장로교 목사인 윌리엄 슬로언 코핀 (1924 ~ 2006년), 침례교 목사인 랠프 애버내시 (1926 ~ 1990년) 등이 있다.
앨러배마의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을 통해 미국의 인종 불평등과 킹 목사의 지도력에 국제적인 이목이 쏠리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킹 목사는 이 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국제적으로는 흑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진영의 대표 인물로 여겨졌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 활동에 대해 그는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 (1958년)이라는 책을 통해 보고서 형식으로 남기기도 했다. 1957년 미국 남부의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 목사 및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남부기독교지도회의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의 조직,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는 비폭력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였다. 그러나 맬컴 엑스 등은 그의 운동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비토했다. 일부의 흑인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엑스를 지지하며 그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는데, 왜냐면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 인권 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투옥, 석방, 워싱턴 대행진에서의 연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63년 4월 12일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열린 항의 데모 때, 스스로 버밍험 시 경찰에 찾아가 체포되었으며, 4월 19일까지 구치소의 독방에 투옥되었다. 같은 해 8월 워싱턴 DC에서 열려 약 2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 때 집회의 연사로 참여하여,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인종 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 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평이한 말로 호소해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 연설문 ‘I Have a Dream’ 중에서
이 연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하다. 이후 여러 지식인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비흑인 지식인들도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권 법안과 차별 금지 법안 통과의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노동 운동 참여 및 정부의 사찰
킹은 흑인 차별 철폐운동 외에도 인종차별 철폐, 노동 운동, 시민 권익 운동에도 참여, 이를 후원하였다. 킹은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인 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으로써 자본가와 투쟁하는 계급투쟁 곧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멤피스의 흑인 청소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자,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다.
“자신이 지닌 엄청난 자원을 빈곤을 종식시키고,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역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노동자로서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적절한 임금을 받고 싶다면 투쟁해야 합니다.” — 마틴 루터 킹 2세
그의 활발한 사회운동은 미국의 인종 차별주의자 외에도 미국의 우파와 정부 인사들까지 자극하여, 당시 FBI 국장이자 우파인사였던 존 에드거 후버는 흑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킹을 위험 인물이라고 규정하여 활동 내역을 감시하였다.
한편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 중 존 F. 케네디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가 무릎을 꿇고 관의 중간 부분에 키스를 하는 부분을 본 뒤 그는 ‘음, 이 부분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지’라고 성적인 농담을 한 것이 재클린의 귀에 들어가게 됐다. 존 F. 케네디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한 말실수가 재클린 케네디의 귀에 들어가면서 재클린은 그의 사생활에 대한 폭로와 위선자라는 기록과 녹음을 남기게 된다.
– 생애 후반
.반전 운동
그는 1963년부터 베트남 전쟁에의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에도 동참했다. 그는 무의미한 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서 희생시킨다는 점과 베트남 국민들을 학살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 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1964년 10월 14일, 미국의 인종 차별을 끝내기 위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 후,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또한 베트남인들의 운명은 베트남인들에게 맡겨야 된다며 미국의 개입은 부당하고, 죄없는 미국 청년들의 피를 헛되이 쏟는 것이라며 전쟁을 비판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반전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킹은 흑인 민권 운동 외에도 베트남 전쟁의 폭력성을 지적하며 반전운동 등도 함께 추진해 나갔다. 그는 1963년 타임 선정 올해의 인물에 지정되기도 했다. 1964년 초 예일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 인종협력회의로부터 존 F.케네디 상을 수상받았다.
.노벨상 수상 전후
1964년 10월 14일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50년 동안 FBI 국장으로 8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을 정보 정치와 공작 정치로 벌벌 떨게 만들었던 에드거 후버에게, 급성장한 킹은 위험인물이자 제거 대상이었다. 에드가 후버는 64년 10월 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자 분노하였다. 한편 후버는 사람들을 고용, 그가 여러 여성들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을 녹화, 사진 촬영하여 각 미국의 각 신문사에 보냈다. 그러나 이를 보도한 신문사는 없었다. 오히려 후버에게 치졸하게 남의 뒤를 캔다는 야유가 돌아왔고, 후버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1964년 11월 18일 후버는 기자들을 FBI 사무실로 초청, ‘욕을했다.인터뷰 도중 “킹은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이며 가장 비열한 사람 중 하나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1963년 8월 28일 연설을 전후하여 킹 목사는 위싱턴 윌러드 호텔 (Willard Hotel)에 투숙하였다. 이 때에도 호텔에는 FBI의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후버는 킹 목사가 친구와 함께 창녀들을 불러 난잡한 파티를 즐기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64년 11월 20일 윌리엄 설리번 FBI 국장보가 익명으로 써 킹 목사 부부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킹, 당신의 천한 계급을 생각해 미스터나 목사, 박사 따위의 호칭은 붙이지 않겠다. 당신은 완전한 사기꾼이며 우리 흑인 모두에게 큰 짐이 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 나라의 백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협잡꾼이 많지만 지금 어디에도 당신과 맞설 협잡꾼은 없다고 확신한다. 다른 모든 사기꾼들과 마찬가지로 너도 끝장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 윌리엄 설리번 FBI 국장보가 익명으로 써서 보낸 편지 전문
이때 다른 여성과 정사중인 킹 목사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가 함께 전달됐다. 후일 설리번은 회고에서 “조사 결과, 킹은 창녀 두 명과 함께 밤을 보낼 때가 많았고, 술과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파티를 수시로 벌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12월 10일에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노벨 상을 전달받고 동시에 미화 5만 3천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한편 흑인인권 운동을 비롯한 여성운동, 인권 운동을 적색분자가 정치적으로 이용, 선동한다는 에드가 후버의 주장을 색깔론이라고 반박하는 동시에 흑인의 분리 독립 운동과 폭력적인 시위에 반대하면서 맬컴 엑스 등과도 갈등하게 된다. 맬컴 엑스와의 갈등은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미화원 파업지도와 암살
그는 맬컴 엑스 등의 활동은 극단적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 양심을 죽이느니 차라리 앨라배마의 고속도로에서 죽겠다’며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협박이나 일부 백인 지도자들의 타협 주장 역시 거절하였다. 1968년 테네시주의 흑인 청소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원하러 그해 4월 멤피스로 내려와 모텔에서 생활하며 흑인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동참하였다. 당시 루터 킹 목사는 “주님의 자녀들인 여러분들이 적절한 임금을 받고자 한다면, 투쟁해야 합니다”라고 파업투쟁을 지지하는 설교를 했다.
한편 그를 암살하기 위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사람을 보냈다는 파다한 소문이 그의 귀에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고 답했다. 4월 3일 열린 흑인 청소노동자 모임에서도 이 소문을 접한 흑인 청소노동자들은 그에게 피신을 권고 하였다. 그러나 킹은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오래 살고 싶다. 나라고 왜 오래 살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싶다”라고 답했다.
베트남 전쟁 장기화 시기인 1968년 4월 4일 멤피스의 한 모텔 2층 발코니에서 미리 잠입해 있던 테네시 출신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킹 목사는 머리를 맞고 죽었다. 옆방에 있던 친구들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왔을 때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근처 다른 방에서 침구와 지혈제를 가져와 조치했지만, 그는 과다 출혈로 병원 이송 도중 구급차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킹 목사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선포하였다.
– 사후
워싱턴 D.C.와 다른 도시들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흑인들은 도시 중심부에서 방화와 건물, 차량 파괴, 약탈 등 폭력시위를 했지만 그의 뜻이 아니라는 일부 흑인 지도자들의 자제 요청과, 수천명의 군인, 경찰이 출동하면서 시위대는 저절로 해산되었다. 제임스 얼 레이는 바로 배편으로 영국으로 도망쳤으나 런던 시내에서 그를 본 목격자의 제보로 체포되어 다시 테네시주 멤피스로 송환되었다. 1968년 레이는 멤피스 법원에 회부, 1969년 징역 99년형을 최종 선고 받은 뒤 1998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폭력 노선과 흑인 분리 독립을 주장하던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달리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많은 지지자를 획득했고 흑인도 인간이라는 시각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1986년부터 미국에서는 그를 기려 그의 생일 (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정하고 연방 정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 사상과 신념
– 비폭력 사상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폭력에 반대하는 비폭력 사상가였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벌어지던 베트남 전쟁을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비폭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 외에도 근대 약소국의 식민지 해방 운동 등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인권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해 오래도록 연구하였다. 또한 그는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사해동포주의 (四海同胞主義) 사상에 적극 공감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그와 동의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맬컴 엑스를 지지하며 그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는데, 왜냐면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인권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생 때 부모님으로부터 대학교 입학선물로 자동차를 선물받을만큼 부유한 집에서 자란 킹 목사의 성장환경과 그의 온건민권운동은 일부 흑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 민주사회주의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세상에는 왜 빈곤이 있는가?” 라는 고민을 했고, 대학생 시절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 자본론등을 읽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물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에는 공감을 했던 민주사회주의자였다. 오히려 자본주의야말로 유물론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 논란과 의혹
– 성추문 의혹
재클린 케네디는 그가 여성들과 섹스파티를 즐긴 위선자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명연설을 하기 전날 밤, 여성들을 섹스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호텔방에서 전화를 걸어댔다는 연방수사국 (FBI)의 도청 정보를 언급하기도 했다. 2011년 9월 언론에 공개된 내용에 대해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따르면 재클린은 “마틴 루터 킹의 사진을 볼 때마다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재클린 오나시스는 킹 목사를 위선자 (phoney)라고 평가했다. 1964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서 M. 슐레진저 (Schlesinger)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이는 보스턴의 케네디도서관 소장고에 다른 자료들과 함께 보관되다가 2011년 9월 공개되었다.
– 불륜 사건
1968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치과의사의 부인과 간통, 성관계를 맺어오다가 FBI에 발각되었다. 1968년 FBI가 도청한 킹 목사의 한 전화통화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흑인 치과의사의 아내였다. 그의 불륜을 눈치챈 것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야구팀의 스타 선수인 이먼 돈 뉴컴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다. 돈 뉴컴 등 야구선수들의 제보를 받은 에드거 후버는 바로 킹의 전화를 도감청하고 사람을 붙였다.
후버는 보고서를 작성, 1968년 2월 20일자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킹 목사는 1962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유명한 흑인 치과 의사의 아내와 불의의 성관계를 맺고 있음. 킹 목사는 전기의 여인을 매주 수요일 장거리 전화로 불러내며 전국내 각 도시를 전전, 밀회하고 있음.” — 에드거 후버의 보고서
후버의 보고서에는 “한번은 뉴욕 시 뉴욕시티 호텔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고 술이 약간 취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안하면 13층 호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했고 성관계를 하자고 위협했다.”이라는 보고도 들어 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킹 목사의 성적 일탈에 대한 의혹의 근거는 FBI 파일밖에 없다. 증인도, 다른 증거도 없어왔고 오직 FBI 파일이 현재 유일한 의혹의 근거이다.
하지만 파일은 2027년까지 봉인되었다. 이 봉인이 풀린다 할지라도 이 파일의 진위여부는 다시 따져보아야하며, 법적인 효력은 이미 전무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도청이라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 논문 표절 의혹
1950년대의 그의 논문 중의 일부는 다른 박사학위 논문이나 자료의 내용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 FBI의 도청 논란
재클린 케네디가 그의 사생활을 폭로, 비판한 것과 관련하여 FBI가 그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재클린 케네디가 입수한 마틴 루터 킹의 섹스파티는 연방수사국 (FBI)의 도청 정보를 통해 입수됐다. 연방 정부의 도감청 행위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또다른 논란거리가 되었다.
후버는 64년 10월 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예의 그 정사 장면이 녹음된 테이프를 언론사에 보냈다. 이를 보도한 신문사는 없었다. 그러자 후버는 녹음 테이프를 아내인 코레타 스콧 킹 앞으로 보냈지만 그 무렵 킹은 ‘공작 정치’가 아닌 암살자의 총탄에 의해 39세의 생애를 마감했으며, 정작 후버 자신이 공작 정치가 탄로나 파멸의 길을 걸었다.
– 기타
재클린 케네디 녹취록에서 “그가 남편 (존 F. 케네디)의 장례식 날 킹 목사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도 했다
○ 가족
부인 코레타 스콧은 작가이면서 역시 흑인 운동, 인권 운동가로 활동했다. 딸 욜란다 데니사 킹 역시 인권운동가였다.
증조부 : 네이선 번햄 (Nathan Brannum or Branham, 1829년 1월 – 1900년)
증조모 : 멀린다 (Malinda, 1845년 9월 – 1900년)
조부 : 제임스 앨버트 킹 (James Albert King, 1863 12월 – 1933년 11월 17일)
조모 : 딜리아 린지 킹 (Delia Linsey King, 1875년 7월 – 1924년 5월 27일)
아버지 : 마틴 루터 킹 시니어 (Martin Luther King, Sr, 1899년 12월 19일 – 1984년 11월 11일)
어머니 : 앨버타 윌리엄스 킹 (Alberta Williams King, 시집 오기전 본명은 앨버타 크리스틴 윌리엄스 (Alberta Christine Williams), 1904년 9월 13일 – 1974년 6월 30일)
누나 : 크리스틴 킹 패리스 (Christine King Farris, 1927년 9월 11일 – )
남동생 : 앨프리드 대니얼 윌리엄스 킹 (Alfred Daniel Williams King, 1930년 7월 30일 – 1969년 7월 21일)
부인 : 코레타 스콧 킹 (Coretta Scott King, 1927년 4월 27일 – 2006년 1월 30일)
딸 : 욜란다 데니사 킹 (Yolanda Denise-King, 1955년 11월 17일 – 2007년 5월 15일, 인권운동가)
아들 : 마틴 루터 킹 3세 (Martin Luther King III, 1957년 10월 23일 – , 침례교회 목사)
며느리 : 앤드리아 워터스 (Arndrea Waters)
아들 : 덱스터 스콧 킹 (Dexter Scott King, 1961년 1월 30일 – , 배우)
딸 : 버니스 킹 (Bernice Albertine King, 1963년 3월 28일 – )
외할아버지 : 애덤 대니얼 윌리엄스 (Adam Daniel Williams, 1861년 – 1931년 3월 21일)
외할머니 : 제니 설레스트 윌리엄스 (Jenny Celeste Williams, 시집 오기 전 본명은 제니 설레스트 파크스 (Jenny Celeste Parks), 1873년 4월 – 1941년 5월 18일)
외증조부 : 윌스 윌리엄스 (Willis Williams, ? – 1874년)
외증조모 : 루크레시아 대니얼스 (Lucrecia Daniels)
외고조부 : 윌리엄 넬슨 윌리엄스 (William Nelson Williams, 1804년 – 1863년)
진외증조부 : 짐 롱 (Jim Long, 1844년 – ?), 할머니 다니엘라 린시 킹의 친정아버지
진외증조모 : 제인 린지 (Jane Linsey, 1853년 – ?)
외외증조부 : 윌리엄 파크스(William Parks, 1825년 – 1900년 ? ), 외할머니 제니 설레스트 윌리엄스의 친정아버지
외외증조모 : 패니 (Fannie)
○ 저서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 (1958)
우리 흑인은 왜 기다릴 수 없는가 : Why We Can’t Wait (1964)
흑인이 가는 길 (1967)
– 한국어 번역서
1989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설교집, 채규철, 김태복 옮김, 예찬사)
2001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전기)
2005년,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
2005년, 양심을 깨우는 소리
– Works
Stride Toward Freedom: The Montgomery Story (1958)
The Measure of a Man (1959)
Strength to Love (1963)
Why We Can’t Wait (1964)
Where Do We Go from Here: Chaos or Community? (1967)
The Trumpet of Conscience (1968)
A Testament of Hope: The Essential Writings and Speeches of Martin Luther King Jr. (1986)
The Autobiography of Martin Luther King Jr. (1998), ed. Clayborne Carson
“All Labor Has Dignity” (2011) ed. Michael Honey
“Thou, Dear God”: Prayers That Open Hearts and Spirits Collection of King’s prayers. (2011), ed. Lewis Baldwin
MLK: A Celebration in Word and Image Photographed by Bob Adelman, introduced by Charles Johnson
○ 연설문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전문
“I HAVE A DREAM” _ MARTIN LUTHER KING, JR.
I am happy to join with you today in what will go down in history as the greatest demonstration for freedom in the history of our nation.
우리나라 역사상 자유를 위한 가장 위대한 시위가 있었던 날로서 역사에 기록될 오늘 나는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Five score years ago, a great American, in whose symbolic shadow we stand today, signe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백 년 전, 오늘 우리가 서있는 자리의 상징적 그림자의 주인공인, 한 위대한 미국인이, 노예해방선언문에 서명하였습니다.
This momentous decree came as a great beacon light of hope to millions of Negro slaves who had been seared in the flames of withering injustice.
그 중대한 법령은 억압적 불평등의 불길에 타들어가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위대한 희망의 횃불로서 다가왔습니다.
It came as a joyous daybreak to end the long night of their captivity.
그 법령은 그들의 길었던 구속의 밤을 종식하는 기쁨의 새벽이었습니다.
But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still is not free.
그러나 백년이 지난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the life of the Negro is still sadly crippled by the manacles of segregation and the chains of discrimination.
백년이 지난 후에도, 분리의 수갑과 차별의 쇠사슬에 의해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슬픈 불구의 상태입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lives on a lonely island of poverty in the midst of a vast ocean of material prosperity.
백년이 지난 후에도, 물질적 번영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한가운데 홀로 떨어진 빈곤의 섬에서 흑인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is still languished in the corners of American society and finds himself an exile in his own land.
백년이 지난 후에도, 흑인들은 미국사회의 한 구석에서 여전히 풀이 죽고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And so we’ve come here today to dramatize a shameful condition.
그래서 이 수치스런 상황을 알리고 바꾸고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In a sense we’ve come to our nation’s capital to cash a check.
어떤 의미로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수도에 온 것입니다.
When the architects of our republic wrote the magnificent words of the Constitution an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ey were signing a promissory note to which every American was to fall heir.
우리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은 헌법과 독립선언문에 숭고한 단어들을 써넣었으며, 모든 미국인들이 상속받게 될 약속어음에 서명하였습니다.
This note was a promise that all men, yes, black men as well as white men, would be guaranteed the “unalienable Rights” of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그 약속어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 백인들처럼 흑인들에게도, 생존,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보장된다는 하나의 약속이었습니다.
It is obvious today that America has defaulted on this promissory note, insofar as her citizens of color are concerned.
오늘날 미국이 시민들의 피부색과 관련하여서만은 지금까지 그 약속어음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Instead of honoring this sacred obligation, America has given the Negro people a bad check, a check which has come back marked “insufficient funds.”
이 신성한 의무를 존중하지 않고서, 미국은 잔고부족이라고 표기되어 되돌아 온 수표, 부도수표를 흑인들에게 주었습니다.
But we refuse to believe that the bank of justice is bankrupt.
그러나 우리는 정의의 은행이 파산했다고 믿기를 거부합니다.
We refuse to believe that there are insufficient funds in the great vaults of opportunity of this nation.
우리는 이 기회의 나라의 금고에 자금이 부족하다고 믿기를 거부합니다.
And so, we’ve come to cash this check, a check that will give us upon demand the riches of freedom and the security of justice.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넘치는 자유와 정의의 보장을 가져다 줄 수표, 그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We have also come to this hallowed spot to remind America of the fierce urgency of now.
우리는 또한 미국으로 하여금 지금의 이 무서운 절박함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이 신성한 장소에 왔습니다.
This is no time to engage in the luxury of cooling off or to take the tranquilizing drug of gradualism.
지금은 ‘냉정하자’라는 사치스런 말이나 점진주의라는 안정제를 취할 때가 아닙니다.
Now is the time to make real the promises of democracy.
지금은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Now is the time to rise from the dark and desolate valley of segregation to the sunlit path of racial justice.
지금은 어둡고 황량한 차별의 계곡에서 양지 바른 인종적 정의의 길로 나와야 할 때입니다.
Now is the time to lift our nation from the quicksands of racial injustice to the solid rock of brotherhood.
지금은 인종적 불평등이라는 모래에서 형제애라는 단단한 바위 위로 우리나라를 들어 올려야 할 때입니다.
Now is the time to make justice a reality for all of God’s children.
지금은 모든 하느님의 자식들을 위해 정의를 현실화해야 할 때입니다.
It would be fatal for the nation to overlook the urgency of the moment.
지금의 절박함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이 나라에 치명적이 될 것입니다.
This sweltering summer of the Negro’s legitimate discontent will not pass until there is an invigorating autumn of freedom and equality.
흑인들의 정당한 불만으로 가득 찬 이 무더운 여름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상쾌한 가을이 오기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Nineteen sixty-three is not an end, but a beginning.
(지금의) 1963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And those who hope that the Negro needed to blow off steam and will now be content will have a rude awakening, if the nation returns to business as usual.
흑인들이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고 적당히 만족할 것을 바라는 사람들은 만약 이 나라가 예전의 그 일상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면, 거친 깨달음을 얻게 될 것 입니다.
And there will be neither rest nor tranquility in America until the Negro is granted his citizenship rights.
흑인들이 그들의 시민권을 인정받기 전까지 미국에는 휴식도 평온도 없을 것입니다.
The whirlwinds of revolt will continue to shake the foundations of our nation until the bright day of justice emerges.
저항의 회오리바람은 정의가 출현하는 밝은 날이 올 때까지 우리나라의 기반을 흔들 것입니다.
But there is something that I must say to my people, who stand on the warm threshold which leads into the palace of justice.
그러나 정의의 궁전에 이르는 흥분되는 입구에 서있는 여러분께 내가 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In the process of gaining our rightful place, we must not be guilty of wrongful deeds.
우리의 정당한 지위를 얻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법행위에 따른 범법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Let us not seek to satisfy our thirst for freedom by drinking from the cup of bitterness and hatred.
비통과 증오의 잔에서 흘러내린 물로써 자유를 향한 우리의 갈증을 풀려고 하지 맙시다.
We must forever conduct our struggle on the high plane of dignity and discipline.
우리는 품위와 절제의 고귀한 수준을 유지해 가면서 우리의 투쟁을 영원히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We must not allow our creative protest to degenerate into physical violence.
우리의 건설적 항거가 물리적 파괴로 변질되도록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Again and again, we must rise to the majestic heights of meeting physical force with soul force.
계속, 계속해서, 우리는 영혼의 힘과 물리적 힘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저 장엄한 고지를 올라가야 합니다.
The marvelous new militancy which has engulfed the Negro community must not lead us to a distrust of all white people.
흑인사회를 휘감고 있는 새로운 투쟁의 기운이 우리를 모든 백인들의 불신의 대상으로 이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For many of our white brothers, as evidenced by their presence here today,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ir destiny is tied up with our destiny.
오늘 이 자리의 참석으로 증명되듯, 많은 우리의 백인형제들은, 그들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과 맺어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And they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ir freedom is inextricably bound to our freedom.
그리고 그들의 자유가 우리의 자유와 떨어질 수 없게 묶여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We cannot walk alone.
우리는 홀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And as we walk, we must make the pledge that we shall always march ahead.
그리고 걸으며, 우리는 언제나 행진에 앞장설 것을 맹세해야 합니다.
We cannot turn back.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There are those who are asking the devotees of civil rights, “When will you be satisfied?”
인권운동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쯤 당신들은 만족하겠느냐?”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the Negro is the victim of the unspeakable horrors of police brutality.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이 경찰들의 만행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의 희생자가 되는 한.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our bodies, heavy with the fatigue of travel, cannot gain lodging in the motels of the highways and the hotels of the cities.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여행의 피곤으로 무거울 때 고속도로의 모텔과 시내의 호텔에서 잠자리를 얻지 못하는 한.
We cannot be satisfied as long as the Negro’s basic mobility is from a smaller ghetto to a larger one.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의 이주의 권리가 (그저) 작은 구역에서 큰 구역으로의 이동인 한.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our children are stripped of their selfhood and robbed of their dignity by signs stating “for white only.”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린이들이 자존심을 박탈당하고 “백인 전용”이라 쓰여진 문구에 자신들의 존엄성을 강탈당하는 한.
We cannot be satisfied as long as a Negro in Mississippi cannot vote and a Negro in New York believes he has nothing for which to vote.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이 투표조차 할 수 없고 뉴욕의 흑인들이 투표할 대상이 없다고 믿는 한.
No, no, we are not satisfied, and we will not be satisfied until justice rolls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like a mighty stream.
절대로, 절대로,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정당함이 거대한 흐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I am not unmindful that some of you have come here out of great trials and tribulations.
여러분들 중 일부는 거대한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여기에 왔다는 것을 나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Some of you have come fresh from narrow jail cells.
여러분들 중 일부는 좁은 감방에서 이제 막 나왔습니다.
And some of you have come from areas where your quest for freedom left you battered by the storms of persecution and staggered by the winds of police brutality.
여러분들 중 일부는 자유에 대한 당신의 요구가 당신을 박해의 폭풍 앞에서 부서지게 하고 공권력의 만행이란 바람에 비틀거리게 했던 곳에서 왔습니다.
You have been the veterans of creative suffering.
여러분들은 의미 있는 고통에 익숙해진 노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Continue to work with the faith that unearned suffering is redemptive.
그 고통도 과분하다 여기고 보상을 받으리란 믿음으로 계속 해나가십시오.
Go back to Mississippi, go back to Alabama, go back to South Carolina, go back to Georgia, go back to Louisiana, go back to the slums and ghettos of our northern cities, knowing that somehow this situation can and will be changed.
돌아가십시오, 알라바마로, 남부 캘리포니아로, 조지아로, 루이지애나로, 북부 도시들의 빈민가와 흑인거주지로, 어떻게든 지금의 이 상황이 변화될 수 있다는 그리고 변화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서 돌아가십시오.
Let us not wallow in the valley of despair, I say to you today, my friends.
절망의 계곡에서 몸부림치지 말자고,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께 말합니다.
And so even though we face the difficulties of today and tomorrow, I still have a dream.
그래서 우리가 오늘과 내일의 역경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It is a dream deeply rooted in the American dream.
그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를 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일어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진실을 우리는 자명으로 유지한다.”라는 이 나라 강령의 참뜻대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서 함께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stat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injustic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로 무더운, 억압의 열기로 무더운, 저 미시시피마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모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네 명의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로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개별성으로 판단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oday!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down in Alabama, with its vicious racists, with its governor having his lips dripping with the words of “interposition” and “nullification”, one day right there in Alabama little black boys and black girls will be able to join hands with little white boys and white girls as sisters and brothers.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악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있는 알라바마주, 연방정부의 법과 조치를 따르지 않겠다는 발언을 내뱉는 주지사가 있는 알라바마주, 언젠가는 바로 그 알라바마주에서, 어린 흑인 소년들과 어린 흑인 소녀들이, 어린 백인 소년들과 어린 백인 소녀들과 형제자매로서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oday!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an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골짜기들은 메워지고, 모든 언덕과 산들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This is our hope, and this is the faith that I go back to the South with.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이것이 내가 남부로 돌아갈 때 함께 하게 될 신념입니다.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hew out of the mountain of despair a stone of hope.
이 신념으로서, 우리는 절망의 산을 깎아 희망의 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transform the jangling discords of our nation into a beautiful symphony of brotherhood.
이 신념으로써, 우리는 우리나라의 소란한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형제애의 교향곡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work together, to pray together, to struggle together, to go to jail together, to stand up for freedom together, knowing that we will be free one day.
이 신념으로써, 우리가 언젠가는 자유로워 질 것이라 믿으면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투쟁하며, 함께 감옥에 가고, 함께 자유를 위해 버텨낼 수 있을 것입니다.
And this will be the day, this will be the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will be able to sing with new meaning.
이 날이, 이 날이 모든 하느님의 자식들이 새로운 의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바로 그 날이 될 것입니다.
My country ’tis of thee, sweet land of liberty, of thee I sing. Land where my fathers died, land of the Pilgrim’s pride,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나의 나라 그것은 하느님의 것, 달콤한 자유의 땅, 내가 노래하는 하느님의 것 나의 조상들이 죽은 땅, 개척자의 자부심이 있는 땅, 모든 산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And if America is to be a great nation, this must become true.
미국이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이것은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And so let freedom ring from the prodigious hilltops of New Hampshire. Let freedom ring from the mighty mountains of New York. Let freedom ring from the heightening Alleghenies of Pennsylvania. Let freedom ring from the snow-capped Rockies of Colorado. Let freedom ring from the curvaceous slopes of California.
그래서 뉴햄프셔주의 경이로운 언덕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뉴욕의 거대한 산맥들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펜실베니아주의 높다란 엘리게니산맥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콜로라도주의 눈덮인 록키산맥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캘리포니아주의 굽이진 비탈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But not only that Let freedom ring from Stone Mountain of Georgia. Let freedom ring from Lookout Mountain of Tennessee. Let freedom ring from every hill and molehill of Mississippi.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조지아주의 스톤산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테네시주의 룩아웃산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미시시피주의 크고 작은 모든 언덕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모든 산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And when this happens, when we allow freedom ring, when we let it ring from every village and every hamlet, from every state and every city, we will be able to speed up that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black men and white men, Jews and Gentiles, Protestants and Catholics, will be able to join hands and sing in the words of the old Negro spiritual
이렇게 될 때, 자유가 울리게 할 때, 모든 마을과 부락으로부터, 모든 주와 도시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모든 하느님의 자식들이, 흑인과 백인이, 유대인과 이교도들이, 개신교도와 카톨릭교도들이,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의 구절을 노래 부를 수 있는 그날을 우리는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Free at last! Free at last!
마침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마침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Thank God Almighty, we are free at last.
전능하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희는 마침내 자유가 되었습니다.
* 연설자 ‘마틴 루터 킹 2세’ (Martin Luther King, Jr.)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29년 출생으로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 특히 흑인 해방 운동가로서 미국 내 흑인의 인권 운동을 이끈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교회에 부임하였다. 1955년 12월 몽고메리 시립 공영 버스의 흑인 좌석차별 사건 이후, 버스 보이콧 운동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이끌어 1년 만에 범국민적 지지를 얻어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흑인 해방 운동 및 흑인 인권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을 비롯한 많은 흑인 관련 운동과 인권 운동을 이끌어 법률과 제도의 수정, 공민권법, 투표권법의 개정과 흑인의 권리를 증진시켰다.
1960년대에 흑인 권리 운동과 인권 운동을 통해 일정의 법률적인 결과를 획득하였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그는 맬컴 엑스의 폭력주의 노선에 반대하고 비폭력적인 저항 운동을 주도하였다. 1968년 4월 테네시 주의 흑인 미화원 파업운동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멤피스에서 흉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경찰은 북부 출신의 백인우월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The Great American Speech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마틴 루서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가 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행했던 연설에 붙은 별칭이다. 1900년대 초까지도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했다. 이 연설은 흑인과 백인의 평등과 공존에 대한 요구였다. 킹의 연설은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 설치된 연단에서 이루어졌다.
이 연설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존 F. 케네디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와 함께 미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연설로 손꼽힌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