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32년 1월 7일, 프링스 마지노 선의 건설자 앙드레 마지노 (André Maginot, 1877 ~ 1932) 별세
앙드레 마지노 (André Maginot, 1877년 2월 17일 ~ 1932년 1월 7일)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1910년 이후 하원 의원을 지냈다. 민주 사회 운동파에 속하며, 1913년 육군 차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1917년 식민상, 1921년 은급상이 되었고, 1922 · 1926 · 1931년 세 차례에 걸쳐 육군상을 지냈다. 독일의 지크프리트 선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의 동부 국경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지노 선”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우회 작전과 항공기의 발달 등으로 간단히 돌파되었다.
– 앙드레 마지노 (André Maginot)
.출생: 1877년 2월 17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32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
.전투/전쟁: 제1차 세계 대전
.국적: 프랑스
.수상: Croix de guerre 1914 ~ 1918, 무공훈장
*직위 : 육군성 장관 (1922 ~ 24년, 1929 ~ 32년)
.마지노 요새 방어선 건설: 동부 프랑스 (기간: 1930 ~ 1935년)
마지노선 (Maginot Line)은 ‘최후의 방어선’ ‘넘지 못할 선’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쓸모없는 요새’라는 비아냥도 숨어 있다. 마지노선의 제안자는 프랑스 정치가 앙드레 마지노 (1877 ~ 1932)였다.
1910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병으로 참전했다. 용감하게 싸우다 베르덩 전투에서 다리를 다쳐 제대했다. 육군성 장관 (1922 ~ 24년, 1929 ~ 32년)을 하면서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 국경선을 따라 거대한 방어 요새를 짓자고 제안했다. 참전 당시 강력한 진지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았던 경험에다 어릴 때 살던 알자스로렌 지방의 집이 전쟁으로 부서진 데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열정적으로 의원들을 설득하고 로비를 벌인 끝에 1926년 시범적인 요새를 짓는데 성공했다. 1930년부터 본격 공사에 들어갔지만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오늘, 장티푸스로 죽었다. 천문학적인 예산과 10년간 공사 끝에 1936년 총연장 750㎞, 난공불락의 요새가 완성됐지만 1940년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공격으로 프랑스를 유린했다.
○ 마지노 선 : 전간기에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건설한 요새
마지노 선 (프: Ligne Maginot) 또는 마지노 요새는 1936년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에 쌓은 긴 요새이다.
프랑스의 국방부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요청에 따라 1927년에 짓기 시작하여, 1936년에 알자스부터 로렌에 이르는 마지노 선이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160억 프랑이 들었다.
마지노 요새에는 벙커형태의 건물에 포와 총을 쏠 수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독일군이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940년 독일은 벨기에로 침입한 다음, 우회하여 프랑스에 침공하면서 마지노 선은 쓸모없게 되었다.
현대에는 “최후의 방어선” , “넘어서는 안되는 선”, “넘지 못하는 선” 등을 일컬을 때 마지노 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 마지노 선 (Ligne Maginot) 개요
.소재지: 동부 프랑스
.종류: 요새, 방어선
.건설: 1930년 ~ 1935년
.건설자: 앙드레 마지노, 파울 파인레베
.건설 재질: 콘크리트, 강철
.사용: 1935년 ~ 1969년
.현재 상태: 폐기상태로 개방
.통제: 프랑스
.전투/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공방전, 북풍 작전
마지노 선 (Maginot Line)은 1927년부터 1936년까지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프랑스-독일 국경에 설치한 대형 요새이다. 이름은 건설을 제안한 육군성 장관 앙드레 마지노 (André Maginot)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건설비 16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지만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에는 독일군이 이를 우회해 베네룩스를 거쳐 프랑스를 공격해 전쟁에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에는 관용적으로 물러설 수 없는 선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한국에서도 관용어로 많이 사용되는데 이를 고사성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마침 어감이 한자어 같은 데다 한글로 옮기면 네 글자고 네 글자 모두 한자의 음으로 많이 쓰는 글자라서 착각을 한다. 이 때문에 “마지노 선”이라고 띄어 쓰기도 한다. 참고로 이 의미의 고사성어는 배수진 (背水陣)이다.
– 왜 만들어졌나?
프랑스 침공에 의한 무력화로 인해 후대의 비웃음을 사는 것과 별개로, 당시 프랑스에게 마지노 선의 건설은 군사전략적으로는 물론, 국가전략상으로도 매우 합리적이며 현명한 선택이었다. 후대의 비판을 받더라도 당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충분히 건설할 만한 이유가 많았다.
.1차대전 서부전선의 참호전 체계
1차대전 서부전선은 개전 첫 1달을 제외하면 전쟁기간 내내 참호전으로 유지되었다. 포병과 기관총의 화력지원 속에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상대의 참호로 돌격해 그곳을 점령, 사수하는 것이 모든 군사행동의 기반이 되었다. 20년대 군사전문가들의 사상은 모두 참호전에 기반하였으며, 때문에 참호선을 몇 단계나 강화시킨 거대한 요새선은 돌격해오는 적군에 맞서싸우기 최적의 시설물이었다.
후대에서 공군과 기계화부대라는 요소를 간과했다고 비판받았지만, 1920년대 기준으로 공군 및 기계화부대 모두 초창기 수준이었다. 공군기들은 복엽기, 삼엽기가 주력이었고 폭격능력에 심각한 제약이 있었으며 기계화부대는 탄생하기도 전이었고, 전차는 여전히 초창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프랑스의 인구사회 구조 – 인구의 역전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인구를 가진 국가였으나 19세기 후반부터 독일이 통일국가를 이루고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그리고 프랑스의 출산율이 저하되는 등의 이유가 겹치면서 인구가 역전되고 만다. 인구는 병력은 물론 노동력 등 생산인구, 그리고 경제와 국가조세 등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기에 프랑스로선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전 전 독일의 인구는 6천 5백만 명에 육박했는데, 프랑스의 인구는 고작 4천만 명으로 1.6배의 차이가 났다. 물론 식민지 인구까지 합치면 프랑스가 압도적이겠지만, 인도차이나 식민지나 서아프리카 식민지 사람들은 아무때나 동원할 수 있는 인구가 아니다.
더구나 1차대전으로 프랑스는 135만의 전사자와 426만의 부상자 (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 30~40만)를 내었다. 독일이 전사자 203만, 부상자 421만 (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 10~60만)을 내어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독일은 19세기 이래 역전한 인구를 바탕으로 이 피해를 어느정도 메꿔내었던 반면 프랑스는 출생률 감소 및 식민지로의 이민 등으로 인구 증가세가 크게 꺾였기에 130만이 넘는 전사자가 가져오는 인구충격을 흡수하기 버거웠다. 사실상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트라우마로 손꼽힐 정도. 대전으로 잃은 인구 비율은 프랑스가 4.32~4.39%로 독일의 3.39~4.32%보다 높았다.
이런 상황에 놓인 프랑스로선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전략은 국가의 미래를 망가트리는 무모한 짓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미래전쟁이 참호전이라고 생각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프랑스는 국가인구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젊은 청년층의 추가적인 인명 피해를 피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다가올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이겨야 한다는 딜레마에 놓였다.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방어전에 올인하여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규모 요새선의 건설이었다. 막대한 예산을 낭비했다고 비판받지만, 프랑스 미래 인구를 위한 예산 투입이었다.
.프랑스의 국가적 자존심 – 영토 절대사수주의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은 철저히 찢겨져 나갔다. 이는 독일과의 전쟁시 주력을 모아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총공세를 펼친다는 1차대전 이전의 작계 (17계획)에서도 드러난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알자스-로렌을 되찾았으나, 프랑스인들에게 여전히 1871년의 굴욕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었고, 그때와 같은 일을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열망이 있었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바로 영토 절대사수주의로 발전하여 국경을 따라 건설되는 요새선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영토 절대사수주의는 단순한 트라우마와 자존심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었다. 1차대전의 주전장은 벨기에와 프랑스 동북부 지역이었고, 이들 지역은 4년여에 걸친 전화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전후복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자국 영토가 전쟁으로 초토화되는 것을 경험한 프랑스로선 영토 절대사수주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