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41년 1월 4일, 프랑스의 철학자 ‘과정철학’ 혹은 ‘생성의 철학’ 앙리 루이 베르그송 (Henri-Louis Bergson, 1859 ~ 1941) 별세
앙리 루이 베르그송 (Henri-Louis Bergson, 1859년 10월 18일 ~ 1941년 1월 4일)은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종교적 신심이 두터운 영국인 어머니를 두고 1859년 10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베르그송은 어려서부터 모든 과목에 뛰어난 성적을 보이며 각종 상을 휩쓸다시피 했고, 특히 고교 수학 경시대회에서 1등을 한 그의 문제 풀이는 이듬해 수학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프랑스 엘리트 집합소인 파리 고등사범학교 (ENS)에 입학해서는 프랑스 정신주의, 스펜서의 진화론 철학, 과학철학 등에 관심을 갖고 몰두했다. 22세에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30세에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62세때에는 교수직에서 은퇴하여 아인슈타인과 시간 개념에 대한 유명한 논쟁을 벌여 역사에 남기기도 했다. 그의 철학이 담긴 『지속과 동시성』은 과학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낳기도 했지만 지속적인 탐구의 결과로 68세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앙제, 클레르몽페랑, 앙리4세 고등학교 교수를 거쳐,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철학 교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국제연맹 국제협력위원회 (유네스코 전신) 의장을 지내고, 최고의 레지옹 도뇌르 명예 훈장까지 수상하면서,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폐렴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살아생전에 자신의 철학으로 최고의 명예를 누린 극히 드문 철학자였다.
그가 생전에 출간한 저서로는 박사 학위 논문이자 지속 이론을 정초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1889), 기억의 지속을 통해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규명한 『물질과 기억』(1896), 생명의 약동에 의한 창조적 생성의 우주를 그려 보인 『창조적 진화』(1907), 인류의 미래에 대한 준엄한 통찰과 열린사회로의 도약 가능성을 역설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 등 핵심 사상을 보여 주는 4대 주저가 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관중의 열광을 몰고 다녔던 그의 강연과 주옥같은 논문들을 모아 놓은 『정신적 에너지』(1919)와 『사유와 운동』(1934), 놀라운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철학적 희극론 『웃음』(1900)이 있다. 후학들의 열정으로 사후에 출간된 저서로는 『잡문집』(1972), 『강의록 I∼IV』(1990∼2000), 『서간집』(2002) 등이 있다.
– 앙리 루이 베르그손 (Henri Bergson)
.본명: 앙리 루이 베르그송 (Henri-Louis Bergson)
.출생: 1859년 10월 18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41년 1월 4일, 프랑스 파리
.학파: 대륙철학, 유심론, 생기론, 생의 철학
.국적: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군정청
앙리 루이 베르그송 (Henri-Louis Bergson)은 프랑스 파리 출생으로 192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고등사범학교 출신,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그리스-로마 철학을 강의했다. 폴란드계 유대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유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 3녀 중 둘째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조용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었다. 너무 그렇다보니 동료학생들은 계집애 같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이 성격은 평생을 가서 죽기 전까지도 계속 예의 바르고 차분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성적은 발군이어서 항상 학력경시대회 같은데 나가기만 하면 항상 입상이고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치른 학력경시 대회의 <교차하는 양 평면에 접하는 구의 면적을 구하라>는 그의 해법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수학 전문지에 게재될 정도였고, 그의 수학 스승인 데보브는 자신의 저서에 그의 <파스칼의 세개의 원>문제에 대한 해법을 소개할 만큼 수학에 뛰어났다고 한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후에 프랑스 철학사를 이끄는 에티엔느 질송이나 장 발, 혹은 샤를 페기나 T.S. 엘리엇과 같은 시인들이 베르그송의 강의를 들었다. 나중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다.
베르그송은 당대에 드물게도 이미 국제적인 학술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던 철학자였다. 베르그송의 강의록을 모아놓은 <잡문집>에는 영국,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행한 그의 강연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1913년에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초대로 미국에서 반년 간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 때 베르그송의 강연을 들으러 몰려든 사람들이 뉴욕 브로드웨이에 역사상 첫 교통체증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베르그송의 영향력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끊임없이 증대하였다. 특히 1907년 출간된 <창조적 진화>는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는데, 그의 영향력에 우려를 느낀 바티칸 교황청은 1914년 <웃음>을 제외한 그의 모든 저서들을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한다.
현실 정치에도 뛰어들어서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촉구하는 프랑스의 사절단으로 우드로 윌슨을 만나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윌슨은 베르스송의 흠모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윌슨의 보좌관은 베르그송에게 “당신이 각하의 선택에 미친 영향력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후 윌슨이 꿈꾸던 국제연맹의 학술분과 기구에서 의장직을 맡으며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행위가 격동의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언제나 신경을 쓰던 사람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으나 고통받고 있는 유대인들의 편에 서기 위해 끝까지 유대교인으로 남기로 결심한 일화는 유명하다. 말년에는 류마티스로 고생하다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떨어진 파리에서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비시 프랑스 정부의 예외로 해주겠단 말도 무시하고 유대인으로 자신의 신분을 등록하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죽음이다.
유언은 “여러분, 다섯 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Messieurs, il est cinq heure. Le cour est termine’)”
천재로 태어나 그 뛰어난 머리로 그저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지적으로 노동하며 일생을 다한 사람이다.
○ 생애 및 활동
1859년 10월 18일 파리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8년에 콩도르세 중등학교 (Lycée Condorcet, 입학 당시에는 보나파르트 중등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베르그송은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는데, 전국 학력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영어, 기하학, 그리스어, 불작문, 수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상을 휩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베르그송이 1877년 전국 학력경시대회의 수학 부문에 제출한 답안은 《수학 연보》에 소개되기도 했다.
1878년에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École normale supérieure Paris)에 입학하였고, 1881년에는 고등사범학교 졸업과 함께 철학 교수자격시험 (agrégation)에 합격하였다. 같은 해 앙제 중등학교(Lycée Angers, 현재의 앙리-베르그손 중등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군데에서 중등학교 교수로 일했다. 소르본 대학교의 교수직에 두 번 지원해서 두 번 모두 실패하였지만, 1898년에 고등사범학교의 전임강사 자리를 얻었고, 1900년에는 마침내 콜레주 드 프랑스의 그리스-라틴 철학 담당 교수로 취임하였다. 1904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현대철학 담당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21년 은퇴할 때까지 이 곳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였다.
1914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베르그송의 저작 대부분이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1928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3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1등 훈장 (grand croix)을 수여받았다.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윌리엄 제임스와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는 시간의 본성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 베르그손은 저명한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1917년에는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 대표단의 일원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고, 1922년부터 1925년까지는 유네스코의 전신인 지적 협력 국제위원회 (CICI, Commission internationale de coopération intellectuelle)에서 활동하였다.
앙리 베르그송은 1941년에 81세를 일기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 철학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속, 의식, 그리고 생명의 문제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의 대부분 저작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논의의 중심에 놓인다. 그의 철학은 선험적인(a priori) 그리고 논리적인 체계를 구축하려 하기보다는 한편으로는 동시대 자연과학의 실증적 성과들을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과 직관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과는 구분되는 면이 있다.
– 지속
지속 (durée)은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시간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혼동되어 온 시간의 두 측면을 서로 구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도입되었다. 즉 베르그송은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에서 “순수한 지속과 공간의 관념이 몰래 개입한 지속”을 서로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순수한 공간은 그 안에 놓인 것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포함하지 않는 ‘동질성’의 관계를 매개하는 반면, 순수한 지속은 “명확한 윤곽도 없고, 서로의 밖에 있으려는 어떠한 경향도 없으며, … 서로 침투하는 질적 변화의 연속”으로서의 “순수한 이질성”에 해당한다.
베르그송은 뒤이어 잘 알려진 제논의 역설에 빗대어 이 개념을 설명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운동과,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 사이의 … 혼동으로부터 엘레아 학파의 궤변이 태어났다.”다시 말해, 운동 그 자체를 운동한 물체가 지나간 궤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체의 궤적은 지속이 개입되지 않은 공간적 상태로서 모든 것이 동시에 주어지며 궤적 상의 점들 사이에 어떠한 질적 차이도 없다. 반면 운동 그 자체, 혹은 운동으로부터 추출된 운동성 (mobilité)은 공간 상의 특수한 지점을 점유하지 않는 이행 혹은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운동성은 순수한 이질성에 해당하기 때문에, 제논의 역설의 사례에서, 아킬레우스의 운동과 거북의 운동은 서로 다른 운동이며,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동질적인 비교 공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엘레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두 운동을 비교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비교하고 있는 것은, 아킬레우스의 운동이 남긴 궤적의 길이와 거북의 운동이 남긴 궤적의 길이일 뿐, 각각의 운동 자체를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속의 개념은 정지된 것이 기준이 되고 움직이는 것이 예외가 되는 전통적인 서구 형이상학의 구도를 뒤집어, 움직이는 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다. 플라톤 이래 서구의 형이상학에서는 정지된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움직이거나 변화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순수 지속의 개념을 통해 움직이거나 변화하는 것 또한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과학과 형이상학
베르그송의 철학은 동시대의 생리학, 심리학, 진화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상대성 이론이나 열역학과 같은 분야들 또한 자주 언급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베르그손에게 과학과 철학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은 「형이상학 입문」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이야기한다.
베르그송은 정신이 실재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서 직관 (intuition)과 분석 (analyse)을 구별한다. 이 때 직관이란 “대상의 내부로 옮겨가 그 대상 안에 있는 유일하고 표현될 수 없는 것과 합치하는 공감”인 반면, 분석이란 “사물을 그 사물이 아닌 것을 통해서 표현하는 … 번역이요 부호에 의한 전개”를 일컫는다. 베르그송은 분석은 과학의 방법이고, 형이상학은 직관을 목표로 해야 하며, 서양 철학 전통이 저지른 실수는 대체로 분석과 직관의 두 방법을 혼동한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참된 형이상학은 과학을 포함하거나 과학에 포함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과학과 상보적 쌍을 이루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결론이다. 형이상학은 과학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완성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선 실재의 표면적인 표현과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이루어 실재의 신뢰를 얻어두지 않았다면, 실재에서 직관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직관의 영역이 분석의 영역과는 다르다는 점을 끝까지 강조한다. 요컨대, 형이상학은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하면서도 과학에 종속되지 않는 고유의 방법과 지향을 가진 독립된 영역이어야 한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견해이다.
–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
사회와 도덕에 관한 베르그송의 견해 또한 지속과 생명을 중심에 두는 그의 존재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 닫힌 종교와 열린 종교,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를 구별하면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존의 고정되어 있는 전통적인 도덕의 체계보다 시시각각 움직이고 계속 변화되어 가는 원칙을 가지는 유기체적 도덕의 우수성을 옹호하였다.
○ 영향
이른바 과정철학 혹은 생성의 철학 등으로 불리는 현대철학 사조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베르그송은 플라톤으로 부터 이어지는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을 개혁함으로써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를 비롯한 20세기 이후의 존재론이 전개되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또 인간의 존재를 해명함에 있어 생명, 의식, 몸의 개념을 중심에 놓은 베르그송은 현상학의 프랑스 수용에 영향을 주어 마르셀,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현상학의 고유한 흐름이 형성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경험 과학의 논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는 바 과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제공했는데,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는 물리학자이자 프랑스 과학철학 전통의 개척자인 에밀 메이에르송, 수학자이자 사이버네틱스의 창안자인 노버트 위너, 의학의 역사와 철학을 다루는 연구로 잘 알려진 조르주 캉길렘 등이 대표적이다.
○ 저서들
La philosophie de la poesie: le génie de Lucrèce (1884).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
최화 옮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카넷 (2001).
물질과 기억 Matière et mémoire (1896).
박종원 옮김,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5).
최화 옮김, 『물질과 기억』, 자유문고 (2017).
Le Rire (1900).
정연복 옮김, 『웃음』, 세계사 (1992). ISBN 978-89-338-3010-9.
창조적 진화 L’Évolution créatrice (1907).
황수영 옮김, 『창조적 진화』, 아카넷 (2005).
최화 옮김, 『창조적 진화』, 자유문고 (2020).
L’Énergie spirituelle (1919).
엄태연 옮김, 『정신적 에너지』, 그린비 (2019).
Durée et simultanéité (1922).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1932).
송영진 옮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서광사 (1998).
박종원 옮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아카넷 (2015).
La Pensée et le mouvant (1934).
이광래 옮김,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 (2012).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