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62년 6월 1일, 이스라엘 법정에서 교수형 선교받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Otto Adolf Eichmann) 사형
나치 독일의 군인으로 홀로코스트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Otto Adolf Eichman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6월 1일)은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독일의 SS 중령 (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다.

–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 (Otto Adolf Eichmann)
.생애: 1906년 3월 19일, 독일 슐레지엔
.사망: 1962년 6월 1일, 이스라엘 라믈라
.복무: 나치 독일
.최종 계급: SS상급돌격대지도자 (SS-Obersturmbannführer)
.근무: 나치 친위대 국가보안본부
.주요 참전: 홀로코스트
.배우자: 베로니카 리블 (1935년–1962년)
.자녀: 리카르도 아이히만, 클라우스 아이히만, 호르스트 아돌프 아이히만, 디터 헬무트 아이히만
.형제자매: 프리드리히 아이히만, 로버트 아이히만, 오토 아이히만, 에밀 루돌프 아이히만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치하의 독일로 이주해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축출 및 학살 전문가로 통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직접 지시를 받고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의 일부)의 실무 총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 물론 최고책임자는 당연히 히틀러이지만, 그 실무를 책임지고 관할하고 집행한 건 바로 이 사람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일단 미군에 체포됐지만 가짜 이름을 사용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다가 걸렸다. 일단 이탈리아로 도주했다가 1950년 가짜 여권을 이용해 수배 중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살았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돼 이스라엘에서 공개 재판 후에 1962년 6월 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아이히만 (Karl Adolf Eichmann)은 독일의 서부도시인 솔링겐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아돌프 칼 아이히만이 1913년 오스트리아 린츠로 직장을 옮겼고 다음 해 1914년에 나머지 가족들도 오스트리아의 린츠로 이사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아이히만은 안색이 검었기에 다른 아이들은 그에게 유대인같다며 놀려댔는데 여기에서 그의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아이히만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에 종군했다가 전후 다시 린츠에서 사업을 시작해 1920년에 가족들은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1925년~1927년까지 북오스트리아 전기설비 회사 판매부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했다. 아이히만은 기계공학을 공부하기위해 다시 오스트리아로 갔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부진하여 학비가 떨어지자 대학을 중퇴한 후 린츠 지역 정유회사에서 외판원 근무(5년 반. 1932년 린츠에서 잘츠브루크로 전임. 불성실한 근무태도로 해고)으로 일하다가,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1930년에 다시 독일로 갔다. 아이히만은 야외집회에서 나치당과 처음 접하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훗날에도 자백했듯이 1932년 4월 린츠의 변호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유에 따라서 나치당에 가입했고 친위대에 들어갔다(26세).

– 나치당 경력
아이히만은 NSDAP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의 회원 번호 889895번을 받고 오스트리아 분기에 합류했고 그는 1932년 4월 1일에 나치당에 들어간 아이히만은 1932년 11월에 나치 친위대 오스트리아 지부에 들어갔고 슈츠슈타펠의 회원 번호 45326를 받았다. 처음에 아이히만은 그닥 나치당에 엄청난 관심이 없었으나 아이히만은 곧 동료 예를 들어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와 같은 나치당원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아이히만은 일반친위대의 임원으로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했으며, 1933년 오스트리아가 나치당을 불법화했지만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독일로 귀국했다. 독일로 귀국한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당의 친위대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1934년 베를린에 자리잡아 나치 친위대의 보안국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
1933. 8월~1934. 9월까지 레히펠트와 다카우에 있던 두 개의 바이에른 친위대 훈련소에서 소대 지휘관 Scharführer [중사급]) SS의 멤버가 되어 정치범을 수용하던 강제수용소인 뮌헨 교외의 다카우 강제수용소에서 일하면서 친위대의 실력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목을 받았다. 주목할 점은 그가 린츠에서 독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보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경력을 쌓은 아이히만은 1937년에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대량이주계획을 평가하기 위해서 헬베르트 하겐의 부관으로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하이파에 도착했지만 비자를 받지 못해 카이로로 향했다. 여기서 영국의 방해공작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입국을 거부당한 아이히만은 독일의 유대인 강제이주 정책은 모순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경제적인 이유를 덧붙여서 유대인의 이주를 반대하는 입장을 보고서로 올렸다. 한마디로 이주가 아니라 학살만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193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친위대 보안국의 유대인 추방을 떠맡았고, 그는 이때부터 이미 권력을 추구하며 냉혹한 나치당원으로 이름을 알렸다.
1932년 나치당에 가입, 1933년 나치 정보부인 SD에 들어갔다. 유대인 업무 책임자였다. 1932년 1월 20일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게슈타포 유대인 과장으로서 유대인을 유럽 각지에서 폴란드 수용소에 열차로 이송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자신이 500만 명을 이송했다고 자랑했다.

– 나치당에서의 학살행각
아이히만은 단순히 서류만 성실히 작성 하는 고위 관료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 추방, 수송, 학살의 최고위급 전문가였다. (훗날 모사드의 납치에는 법적 단죄뿐만 아니라 그를 조사해서 진상을 더 확실하게 밝히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1년 아이히만은 친위대 소속 대대장 (중령)으로 진급하며 국가안보부 제5국 즉, 게슈타포의 유대인과의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임명된 후 폴란드 서부지역에 있는 수용소에 파견조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의 시체가 쌓여있는 끔찍한 광경을 봤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명령으로 각 차관급 인사들이 베를린 교외의 고급주택지인 반제에 모여 이른바 “반제 회의”가 열렸는데 아이히만도 여기에 참석했으며, 특히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책”이 결정되는 그 회의석상에 참석했다. 다만 말단이라서 한 일은 서기 비슷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이때의 회의가 아이히만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끼쳤는데, 첫째로는 하이드리히와 뮐러를 비롯한 상관들과 친분을 쌓은 것이고, 둘째로 이렇게 높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통계자료마냥 유대인 “최종해결책”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공무원이며 국가를 위한 행위일 뿐이다.”라고 자기합리화를 해버린 것이다.
전쟁 중 아이히만은 제국안전중앙부에서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가 되었다. 아이히만은 “500만의 유대인을 열차에 태웠다”라며 자랑했는데 이 실적은 상부의 주목을 받아 그는 1944년에 헝가리로 급파되었다. 아이히만은 바로 유대인 수송 과정에 착수해서 현지 화살십자당의 지원을 받아 무려 40만명의 유대계 헝가리인들을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절멸 수용소와 학살의 현장을 확인하고 지도하면서 여러 학살 지역에 나타나서 학살을 지시했다. 그는 유대인 대학살을 고안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관리자이자 조직가로서 유대인이라는 적을 말살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이러한 업적을 통해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다. 유대인들을 얼마나 열심히 쓸어냈는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었던 하인리히 뮐러는 ”만약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1945년에 독일의 패색이 깊어지자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는 유대인 학살중지령을 내렸지만 총통의 명령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이히만은 이에 따르지 않고 계속 헝가리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홀로코스트를 계속해서 수행했다.이 행동은 후일 이스라엘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자발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주도 및 수행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아이히만은 소련군이 진군해오자 헝가리에서 탈출해 지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있던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지만 친구였던 칼텐부르너는 아이히만이 자신과 똑같이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연합군의 중범죄자라 책임 추궁이 무서워서 그와 만나기를 거절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의 책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패전이 가까워지자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어느 날 자신의 사진이 찍히게 되자 그는 화를 내면서 카메라를 부숴서 사진 찍은 사람에게 카메라 값을 변상해준 적도 있었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잠시 미 육군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아이히만은 신분을 숨기고 가명을 사용하면서 퇴역 공군 장교라 주장해서 재판을 피했고 1946년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옛 친위대 동료들과 가톨릭교회 및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도움을 받아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로 몰래 빠져나가 1950년 6월 17일에 독일을 떠나는 데 성공했고 7월 14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아이히만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탈출했을 때의 가명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건설사 직원, 물류업체 감독관 등으로 지내며 15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는 망명지인 아르헨티나에서조차 계속해서 나치 잔당과 모임을 가졌고 독일의 청년 세대에게 새로운 반유대주의 독일인의 사명을 부과하고자 했다. 그곳에서 그는 1960년 옛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로 활약하던 빌렘 사센 (Willem Sasen)과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유대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 자신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아이히만의 이러한 사상을 잘 드러내는 말을 빌렘 사센에게 고백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1천만 명의 유대인, 아니 지구 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만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한 놈에 불과했을 겁니다. 나는 나치당원들과 똑같이 생각했으며, 함께 지구 상에서 유대인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이상주의자였습니다”

– 체포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추적으로 납치되었다.
사실 아이히만은 비교적 잘 숨은 편이었는데, 장남이 1957년 여자친구인 유대계 소녀 실비아 헤르만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유럽에서 ‘유대인 제거’에 앞장섰다고 자랑하다가 (…) 덜미가 잡혔다.
실비아의 아버지 로타어부터가 아이히만의 희생자로, 부모를 잃고 자기 역시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던 것.
그녀는 이스라엘 외무장관에게 즉시 신고했고, 그녀의 고발로 2년에 걸친 추적, 수사 끝에 모사드는 요원 7명으로 아이히만의 자택 인근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그를 납치했다.
차에 태워진 아이히만은 체념한 듯 독일어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증거는 귀였다고 한다.
코나 입은 성형수술로 고치지만 귀까지 고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가방에 카메라를 숨겨서 촬영한 사진이 모사드가 그가 아이히만임을 확신하게 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엘알항공 특별기 편으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아이히만은 9개월간 예루살렘의 감옥에 수감된 채 집중적인 심문을 받았다.
심문을 주도한 애브너 레스 경감은 독일계 유대인이었는데, 그의 수사팀은 3,500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증거기록을 가지고 하루도 쉬지 않고 아이히만을 심문했다.
심문 과정에서 레스는 아이히만이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깨닫지 못하고, 후회하는 감정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다만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는 등 심문 자체에는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 재판과 처형
재판은 1961년 4월 11일 시작되었다. 주심 판사는 대법원 판사였던 모셰 란다우, 배석판사는 베냐민 할레비와 이착 라베였다. 기소를 맡은 담당검사는 법무장관이었던 기드온 하우즈너, 야콥 바오르, 가브리엘 바흐였다 흥미로운 점은, 하우즈너를 제외한 모든 판사와 검사들이 독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며,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가족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재판이 보복이라는 비난을 그나마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폴란드 태생이었던 하우즈너 역시 독일어에 능통 했으므로, 모든 판사와 검사가 독일어를 모국어로서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재판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였다. 아이히만에 대한 심문 및 법리적 공방 과정에서 언어장벽으로 인한 어려움을 최소화 하기 위해,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을 최대한 기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재판 진행이 독일어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피고와 원고는 통역을 거쳐 서로 말을 주고받았으며, 판사와 검사들 모두 히브리어를 최대한 이용하여 아이히만을 심문하였다. 그러나 피고와 논쟁이 거세질 때나 즉각적인 답변을 들으려는 경우에는 통역을 거치지 않고 독일어로 직접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변호인단은 독일인 로베르트 제르바티우스 변호사가 이끌었다. 이스라엘 내에는 당연히 아이히만을 변호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이었던 제르바티우스가 그의 변호를 맡았다. 당시 이스라엘 법정은 외국인 변호사의 변호를 원칙적으로 금지했으나 변호사를 안 쓸수도 없었으므로 살인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의 경우에만 외국인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을 바꾸어야 했다.
검찰측 증인심문은 56일간 지속되었으며, 총 112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증언하였다. 하우즈너는 심문에 앞서 “저 피고석에 앉은 자는 단순히 개인이나 나치 독일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초기 재판에서 제르바티우스는 재판에 제시된 수많은 홀로코스트 증거물들 중 아이히만과 직접 관련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고,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검찰 측은 빌렘 사센과 나눈 대화 내용을 다시 증거로 제출했으나, 아이히만이 직접 쓴 메모 일부분만이 증거로 인정되었다.
검찰측은 아이히만이 쿨름호프, 아우슈비츠, 민스크 등 학살이 이뤄진 장소들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담긴 자료를 제시하고, 아이히만이 대량학살에 대해 몰랐다는 주장을 부정하였다. 특히 민스크의 경우는 아이히만이 직접 처형 순간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며, 따라서 그가 홀로코스트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을 부각하려던 변호인단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은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크건 작건 ‘아돌프 히틀러’나 그 외 어떤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그저 힘러, 하이드리히 등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며, 대량학살에 대한 관여는 자신의 직접적 의지가 아니었다고 항변한 것이다. 즉, 본인은 단지 상급자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우즈너 검사는 이와 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이히만에게 “명령이 잘못되고 불법적인 경우에는, 명령을 마지못해 따른 것 또한 불법적인 행위로 성립된다”는 명제를 대며 아이히만의 주장을 무력화시켰다.
아이히만은 끝까지 자신은 유대인을 특정하여 학살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여러 차례의 교차심문 과정에서 증언을 번복하며 결국 자신이 유대인 학살을 의도했고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결정적인 증언 번복은 “내가 500만 명을 죽였다는 사실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특별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내게 묘한 웃음을 짓게 한다”라는 발언이었다. 아이히만은 이 500만 명이 소련인, 즉 제국의 적을 지칭한다고 모호하게 답변했으나, 이후 교차심문 과정에서 이 500만 명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서 자신이 수행했던 능동적인 역할과 반유대주의 신념을 숨기고, 단순히 자신은 국법과 체제에 따른 선량한 시민이자 공무원으로 행세했지만, 이와 같은 모르쇠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재판 결과는 반유대주의적인 신념의 소유자가 홀로코스트 수행 과정에 적극 참여하여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었다. 게다가 굳이 재판 결과를 들이댈 것도 없이 연합국이 다른 전범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미 그의 역할이 드러날 만큼 드러나 있었다.
결국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15일 텔아비브의 공개재판에서 당시 법정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3심 끝에 기각. 1962년 5월 31일 23시 58분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죽음이 완전히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 이츠하크 벤츠비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자신은 하수인일 뿐이라면서 교수형을 면하게 해달라고 탄원한 편지를 보낸 것이 남아 있다. 그는 최후의 만찬으로 와인, 치즈와 빵, 올리브, 그리고 차 한잔이라는 소박한 식사를 했다. 사형은 당시 서양의 관례대로 사복을 입고 집행하였고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참관인들의 참석이 허용되었고 유언은 다음과 같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 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준비되었다”
그리고 참관자들을 향해 추가로 덧붙였다.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을 거요.”
아이히만을 추적하며 납치공작을 전두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진 전직 모사드 간부 라피 에이탄의 회고에 따르면, 1962년 5월 31일 사형장을 방문했을 때 아이히만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대인 친구, 자네도 나를 따라서 죽게 되어 있어.” – 고든 토마스 저, 『기드온의 스파이 1』, 「철가면을 쓴 스파이 – 유대인 학살의 원흉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라」, 2010. 09, 예스위캔, p.119
에이탄은 여기에 “그래.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아돌프. 지금은 아니라고.”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이후 아이히만의 시신은 화장되어 이스라엘 해군 경비정에 의해 지중해 공해상으로 옮겨졌고 모사드, 신 베트 요원들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시신들은 대부분 화장로에서 소각되었는데 그가 생전 저질렀던 그대로 앙갚음을 받은 셈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은 극심한 외교적 마찰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아이히만 확보는 이유야 어떻건 외국인들이 아르헨티나에서 불법 납치를 벌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아이히만의 납치가 공개된 즉시 아이히만의 송환을 요구했고 UN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이스라엘의 주권 침해를 인정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에게 사과, 배상함으로써 아이히만을 돌려보내지 않고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 법정은 불법납치에 의해 확보된 피의자에 대해서는 법원의 관할권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아이히만측의 주장에 대해, 피의자의 확보수단은 재판관할권과 무관하다고 답변했다. 이는 불법납치를 통한 재판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국제법학계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 기타
그는 애초 1962년 5월 30일 자정에 처형될 예정이었지만, 지연된 끝에 6월 1일에 처형됐다.
재판 당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후에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통해 부당한 명령이라도 해도 한 번 받아들이면 무비판적으로 그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 즉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억압하는 사회 · 정치적 구조악에 대한 저항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실험으로 밝혀낸 것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스라엘이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지 않고, 주권을 침해했다고 이스라엘에 항의했다.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바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나치즘의 광기로든 뭐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 뿐이다”고 적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멕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이야기로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독가스실이 있는 기차를 고안해 냈다고 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