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67년 2월 18일,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원자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Julius Robert Oppenheimer, FRS, 1904 ~ 1967) 별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Julius Robert Oppenheimer, FRS, 1904년 4월 22일~1967년 2월 18일)는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과 독일에 유학하였다. 미국에 돌아와서 오랫동안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재직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장이 되어 여러 학자들과 함께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해튼 계획을 수행하였다. 1950년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하였다가 모든 공직에서 쫓겨난 것으로 유명하다.
1962년 5월 2일 영국 왕립 학회의 국외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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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Julius Robert Oppenheimer)
.출생: 1904년 4월 22일, 미국 뉴욕주 뉴욕
.사망: 1967년 2월 18일 (61세)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국적: 미국
.분야: 핵물리학, 이론 물리학
.소속: 맨해튼 계획,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학력: 하버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지도 교수: 막스 보른
.지도 학생: 데이비드 봄
.주요 업적: 맨해튼 계획 참가, 원자 폭탄 개발
.수상: 페르미상(1963)
.자녀: 캐서린 오펜하이머, 피터 오펜하이머
.영화: The Day After Trinity, Atomic Power, Day One
미국의 물리학자.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세계대전이 극으로 치닫으면서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함대를 기습하며 선제공격을 하게 되고 이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는 미국쪽으로 기울게 되는데 몇번에 걸친 회담이 있었으나 일본은 항복요구를 거부해 결국 핵무기가 실전투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유야 어쨌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었기에 오펜하이머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전후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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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 유년기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뉴욕의 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줄리어스 오펜하이머(Julius Oppenheimer, 독: Julius Oppenheimer 율리우스 오펜하이머)는 1871년 독일에서 태어나서 17세 때에 기회의 나라로 혈혈단신 이민을 왔다. 그리고 양복지 안감의 수입상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미국 사회에서 기성복이 처음으로 등장하던 때였다. 8살 아래인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가 태어났을 때에는 그의 아버지의 사업은 이미 튼튼한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화가였다.
– 청소년기
초·중·고등학교를 마치는 동안 그의 관심은 광물 표본의 수집, 물리학, 화학 그리고 문학으로 발전해 갔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그의 학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그의 부모의 걱정은 다른 아이들과는 거의 함께 놀지 않는 그의 성격에 있었다. 성적은 뛰어나지만 운동신경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행동이 분명하지 못하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곧 얼굴을 붉히며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넋 빠진 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14살 때 여름 캠프에서는 고자질했다는 친구들의 오해로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갇혀서 하루밤을 지새우는 일까지 있었다.
– 대학 생활
1925년에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벤디시 연구소(물리학 연구소)의 J.J. 톰슨 밑으로 유학을 갔다. 이 때는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나, 화학을 배운 그가 갑자기 실험물리학에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오펜하이머는 결국 포기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교의 막스 보른 밑으로 옮겨 가서 이론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화학에의 응용분야인 스펙트럼의 양자론을 공부한다. 여기에는 닐스 보어의 결정적인 조언이 있었다고 전한다. 1926년서부터 1929년까지 괴팅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 당시 괴팅겐에 함께 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유진 위그너와 엔리코 페르미 등 20세기 물리학을 걸머지고 나가게 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고 있었다. 연속 스펙트럼의 양자론 이라는 학위 논문 외에 16편의 논문을 이 기간 동안에 쓰고 있다.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와 패서디나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Caltech) 두 군데에서 그에게 자리를 줄 의향을 표시해 왔지만 그는 두 군데 다 거절했다. 그는 버클리 분교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봄 학기에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가을과 겨울 학기에는 버클리에서 가르치기로 했다. 오펜하이머가 버클리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것은 1929년 25살 때였다. 그의 처음 수업은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학생을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가 배우고 사랑하는 이론 물리학의 포교자가 되려고 하는 심정이었다고 나중에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교사로서의 그의 자질은 급속하게 향상되어 갔다. 교육적 배려가 풍부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의 수업을 듣기를 원해서 세 번 이상 그의 과목을 들으려는 학생들을 퇴짜놓는 일에 골머리가 아팠다고 회상하고 있다. 한 대학원 학생이 던진 질문 하나에 대해서 한밤중까지 계속 답변을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자리를 잡아가면서 학생들에게는 인기가 높아지고 그의 행동이나 몸짓까지 흉내내는 학생들이 출현했다. 몸은 가냘퍼서 1m 80cm가 넘는 키에도 불구하고 평생 체중이 59㎏을 넘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펜하이머가 실제로 몇 나라 말을 읽고 쓰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괴팅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단테의 〈신곡〉을 원문으로 읽기 위해서 이태리어를 배웠고 버클리에서는 인도의 철학서적을 읽기 위해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서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희랍어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마스터해서 호메로스나 플라톤을 원어로 읽을 수 있었다.
버클리에서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어니스트 로렌스를 사귄 것은 오펜하이머의 그 후의 인생을 결정했다. 맨해튼 계획에의 참여도 로렌스의 추천에서 시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이론 물리학과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은 버클리를 세계적인 물리학의 연구 센터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들은 그들의 성격이나 사고 방식이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절친한 사이였다.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장거리 승마도 함께 하며 오펜하이머의 뉴멕시코의 별장에서 함께 휴가를 즐기기도 했다. “옷피 (오펜하이머의 애칭)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옷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학생들의 말버릇이었다. 카리스마를 갖는 그의 지도력은 이미 버클리 캠퍼스에서 1930년 중반에 길러지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충분히 발휘된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에의 관심은 1930년대의 중반서부터 고조되어 갔다. 그 전까지는 가르치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정치가 진, 선, 미 중에서 어느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냐라고 물을 정도로 무지했었다. 괴팅겐에서의 은사인 막스 보른의 추방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다. 추방된 유태인 물리학자들을 위한 모금 운동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된다. 노조운동 특히 교직원 노동조합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자연히 주변에 반 나치즘과 반파시즘 운동을 하는 좌익계의 친구들이 모여 들게 하였다. 약혼녀였던 진 테트록의 공산당원 경력 , 1940년 공산당원의 처였던 캬타린 해린슨(애칭 키티)과의 결혼은 2차 대전 후 미국을 휩쓴 매카시 선풍에서 오펜하이머를 궁지에 몰아넣은 주요 사건들이 된다.
1943년 3월에서 1945년 10월까지의 2년 7개월 동안 원자폭탄을 설계ㆍ제작한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는 그의 천재성 없이는 원자폭탄의 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극찬에서부터 그가 한 일은 실제로 별 것이 아니었다는 비하론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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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의 교수직
그는 귀국하여 칼텍에서 잠시 연구원으로 있다가 UC버클리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칼텍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칼텍에서도 매년 6주간 강의를 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UC버클리의 교수이자 연구자로서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 등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내었다. 1930년대 말, 태양 질량의 세 배가 넘는 중성자별이라면 자체 중력으로 별이 점점 안으로 무너져 내린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블랙홀의 특이점이다.
이 시기에는 UC 버클리 교수로 있던 실험물리학의 대가, 어네스트 로렌스(Ernest Lawrence)와 협업을 많이 하였는데, 로렌스가 이후 맨해튼 계획의 최고 책임자 중에 한명이 되면서 둘 사이의 인연은 맨해튼 계획에서도 이어졌다. 교수 시절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대인 관계에 서투른 천재’와 ‘잘난체하는 허식가’로 극명하게 나뉘는데, 그래도 그의 학생들은 대체로 그를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대공황 시절 유행하던 좌파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여러 좌파운동에 참여하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국군에 대한 모금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매카시즘 시절 그가 크게 곤욕을 치르는 원인이 된다.
– 2차 세계대전과 맨해튼 프로젝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 맨해튼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미 몇년 전부터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들은 우라늄을 이용한 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마침내 루즈벨트 대통령은 맨해튼 계획을 승인하고 육군이 프로젝트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애국심에 불타던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중성자에 관련된 계산을 수행하였다.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이미 원자폭탄 연구를 하고 있는 3개의 연구소와는 별도로, 실제로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제작할 또 하나의 연구소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로브스는 먼저 기존의 3개 연구소의 소장들(콤튼, 로렌스, 우레이)에게 새로운 연구소까지 담당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맡은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그 중에 콤튼은 자기 대신에 오펜하이머를 강력히 추천하였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제작에 필요한 지식은 누구보다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포함된 거대 연구진을 이끌기에는 경력이 부족하고 공산주의자라는 의심까지 받고 있었다. 미군 상부는 오펜하이머를 채용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로브스는 강행하였으며 이때 맨해튼 엔지니어 지구에 그가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
“상기 보내었던 오펜하이머에 대한 정보와는 관계없이 7월 15일에 있었던 내 지시를 따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허가를 지체없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는 프로젝트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처음 새로운 연구소의 위치로 자신의 농장이 있던 텍사스의 알버커키를 추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근처의 뉴멕시코주의 로스 앨러모스 고등학교가 선정되었다. 맨해튼 계획이 군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당시 형식적으로 중령 계급을 받았고 심지어는 체력 검사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군대식 환경이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연구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상부와 타협해서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를 군의 위탁을 받아 UC 버클리 대학교가 운영하는 연구 기관으로 바꾸었다. 그는 기존에 한번도 관리업무를 맡은 바가 없었으나 이를 훌륭히 완성하고 최대 6천명의 연구원을 잘 설득하며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로브스가 프로젝트 전체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 자원의 관리를 맡았다면 오펜하이머는 직접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론-기술 분야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결국 미국은 이들이 개발한 원폭으로 일본을 항복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끝낸다. 하지만 이 때 핵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에 대해 회의론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종전 후 맨해튼 프로젝트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 역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이 새로운 과학무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장을 그만두고 대학교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차별 살상을 하게 되는 대형 핵무기보다는 전술적인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전술용 핵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미국은 1950년부터 ‘셰이크 다운’ 또는 ‘오프 태클’이라는 소련 공격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진한 미국의 핵폭격기들이 소련의 곳곳에 400에서 600개의 핵폭탄을 투여하는 제3차 대전 시나리오이다. 결국 이 계획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다시 한번 미국의 핵 정책에 경악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특히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수소폭탄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초기의 수소폭탄 컨셉은 폰 노이만과 울람의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결과 실제 핵융합을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 기회를 틈타 오펜하이머는 일반 자문 위원회 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소폭탄 연구를 최대한 방해하였다. 하지만 1951년 텔러와 울람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디자인을 제시하였고, 오펜하이머는 더 이상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겼다. 미국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으므로, 미국 정부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킬 목적으로 이른바 ‘오펜하이머 사건’을 때마침 일어난 광신적인 매카시즘 속에서 유발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이념의 대립시기에 좌파로 몰리고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로는 미국이 실시한 최대의 원폭 시험인 1954년 비키니섬 핵실험 (캐슬 브라보)의 정보도 얻지 못했다. 친구 핵물리학자에게 ‘그냥 숫자 하나만’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15’라고 대답해줬다. 하지만 그로써는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3월 1일 폭발시험이 성공한 수소폭탄 규모가 15메가톤이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가 15킬로톤,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이 21킬로톤이었으므로 비키니섬 핵실험의 15라는 숫자는 당연히 메가톤급이라는 것을 유출할 수 있었다.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Few people laughed, few people cried, most people were silent. I remembered the line from the Hindu scripture, the Bhagavad-Gita. Vishnu is trying to persuade the Prince that he should do his duty and to impress him takes on his multi-armed form and says,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I suppose we all thought that, one way or another.”
“우리는 세상이 예전과 다르게 나아갈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지만,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누는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것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_ 트리니티 핵실험이 끝난 뒤 오펜하이머가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며 남긴 말
그가 생각했던대로, 그의 첫 핵폭탄 트리니티 (Trinity, 삼위일체)가 터진 이후, 인간은 자신을 멸망시킬 수 있는 생물이 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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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그가 만든 핵폭발의 위력을 여과없이 목격한 오펜하이머는 이후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고 한다. 이후 혼자서 백악관 까지 가서 1인으로 핵무기 탄원서에 관련된 시위를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쨋든 핵 계획에서 멀어진 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연구과목에 관계없이 누구나 서로 거리낌없게 토론하는 자유로운 풍토의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맨해튼 계획 총책임자를 맡던 당시 그는 “혼자서는 불가능한 것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면 해낼 수 있다. 여럿이 함께라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크게 절감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을 연구소에 적용하려 하였다.
.은퇴
1957년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해안가에 2500평 정도 크기의 땅을 산 후 그곳에서 아내, 딸과 함께 긴 시간을 보냈다. 정치권력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물리학에 관한 논문 작성을 계속하였으며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며 그곳의 사람들과 과학사, 사회과학의 역할, 우주의 본질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62년 영국 왕립 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63년에는 많은 과학자들의 촉구에 따라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로부터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받았다.
1965년에 후두암에 걸렸으며 투병하다가 1967년에 향년 62세로 사망하였다.
○ 기타
그가 죽기 1년 전 프린스턴 대학교가 그에게 준 명예 박사 학위의 학위기에 물리학자로서 뱃사람이고 철학자, 마술가 (馬術家)이며 언어학자이고 요리인이며 좋은 와인과 시의 애호가 라고 쓰여있던 것처럼 어느 분야에서도 취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그의 재능과 아름다움에 대한 수준높은 식견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그의 집에 걸려 있던 반 고호의 그림 석 장, 피카소의 그림 한 장, 그리고 르누아르의 그림 한 장 등이 보여 주는 재력 (財力)은 그가 살아온 수준 높은 생활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 이외에도 예술이나 문학 쪽에도 조예를 가졌는데, 어릴 적에 출판사에 보낸 편지를 너무 잘 써서 어른으로 착각당했던 일화가 있다. 일생 동안 시를 쓰는걸 좋아했으며 미술품들을 수집하는 것을 즐겼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 “나의 탁월함이 두렵다네.”라고 한 걸 보면 유머감각도 상당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물리학자 친구였던 폴 디랙은 오펜하이머가 시를 쓴다는 소리를 듣더니 “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물리학은 그 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둘은 병행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굉장히 부드럽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세심하다 못해 오히려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고 (본인이 매우 뛰어남에도) 친구들의 성취를 보며 초조해하고 심지어 열등감에 다른 친구의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 맨해튼 계획에서 세운 업적을 비롯해서 본인의 물리학적 능력 역시 상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저런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노벨상을 못 받았다는 정도일텐데,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열등감은 나중에 극복했고, 반항적인 젊은 천재 리처드 파인만은 원래 맨해튼 계획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아내와의 관계를 읽은 오펜하이머가 친절하게 매주 휴가를 주고, 병원 치료까지 제시해 줘서 그에 감동한 파인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오펜하이머를 위해 맨해튼 계획 참가를 결정했다고 하였다. 파인만의 저서 등을 보면, 다른 고위직 인사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조롱하는 내용만 잔뜩이지만 오펜하이머에게만은 그런 내용이 없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엄청난 애연가였다. 담배 파이프나 꽁초가 입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젊은 시절에 뉴멕시코로 놀러 갔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허기가 져서 몹시 지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파이프를 권했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고는 그때부터 헤비스모커가 되었다고 한다. 워낙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아서 이미 30대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았는데,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충고를 무시하고 그냥 계속 담배를 물고 살았고 결국 담배 때문에 후두암에 걸려 사망했다.
이 사람과 함께 언급되는 소련측 인물이 이고르 쿠르차토프이다. 마치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베르너 폰 브라운의 라이벌 구도처럼 쿠르차토프와 오펜하이머도 비슷한 라이벌이었다.
이 인물에 대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영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최형섭 교수가 한글로 번역했는데, 워낙 양이 방대하여 번역에만 수 년 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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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록
I can’t think that it would be terrible of me to say — and it is occasionally true — that I need physics more than friends.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내 자신이 끔찍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에겐 친구보단 물리학이 더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1912년 8월 14일 ~ 1985년 2월 3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If atomic bombs are to be added as new weapons to the arsenals of a warring world, or to the arsenals of the nations preparing for war, then the time will come when mankind will curse the names of Los Alamos and Hiroshima. The people of this world must unite or they will perish.
(전략)전쟁을 준비하는 국가, 혹은 전쟁”중”인 세계의 무기고에 원자폭탄이 신무기로써 추가된다면, 인류가 로스 앨러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을 저주하는 날이 올 겁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로 단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모두 멸망할 테니깐요.(후략) — 1945년 11월 16일, 육군과 해군이 (2차대전에서의) “우수함”을 시상하는 자리에서 상을 받을 때 연설하며.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Few people laughed, few people cried, most people were silent. I remembered the line from the Hindu scripture, the Bhagavad-Gita. Vishnu is trying to persuade the Prince that he should do his duty and to impress him takes on his multi-armed form and says, ‘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I suppose we all thought that, one way or another.
우리는 과거의 세계로 돌이킬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일부는 웃고, 일부는 울었으며,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누는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 트리니티 핵무기 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이 유명한 문구는 린킨 파크의 네 번째 앨범 A Thousand Suns의 수록곡 The Radiance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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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