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69년 7월 20일, 미국 아폴로 11호 달 착륙 ·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 걸은 최초의 인간
미국 아폴로 11호 (Apollo 11)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유인 우주선이다. 아폴로 계획의 다섯 번째 유인우주비행인 동시에 세 번째 유인 달 탐사이기도 했다.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되었으며 선장 닐 암스트롱,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달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탔다. 7월 20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발을 딛은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당시 콜린스는 달 궤도를 돌고 있었다.
아폴로 11호의 탐사 성공으로, 존 F. 케네디가 주장했던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는 것’은 달성되었다. “나는 이 나라가 1960년대가 지나가기 전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킨 뒤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함을 믿었다.” _ 케네디, 1961년 연설

○ 아폴로 11호 달 착륙과 귀환 과정
– 1969년 7월 16일 발사부터 달 착륙까지
7월 16일 13시 32분(현지시간) UTC에 플로리다 주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새턴 5호 로켓으로 발사되었다.
NASA의 5번째 아폴로 프로그램 유인우주선 임무였다.
7월 20일 20시 17분 UTC에 달착륙선이 달의 표면에 착륙했다. 선장은 닐 암스트롱 중위, 조종사는 버즈 올드린이었다.
달에 착륙하고 6시간이 지나서 7월 21일 02시 56분 15초 UTC에 암스트롱이 달에 내렸다. 버즈 올드린은 20분 후에 내려왔다.
2시간 30분을 달에서 걸어다니면서 21.5kg의 달 모래 등을 채집했다.
달 궤도를 돌고 있는 사령선에는 마이클 콜린스 (우주비행사)가 혼자 남아있었다.
달에 착륙하고 21.5 시간이 지나서 달착륙선이 이륙해 사령선과 도킹했다.

– 승무원
.닐 암스트롱 (Neil Alden Armstrong) – 선장
.마이클 콜린스 (Michael Collins) – 사령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 (Edwin Eugene Aldrin jr.) – 달 착륙선 조종사
콜린스는 원래 아폴로 8호 때 사령선 조종사를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등 부상으로 인해 탈락하고 짐 러벨이 대신 임무를 맡았다. 또한 아폴로 11호 달 착륙선 조종사를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령선 조종사는 우주 비행 경험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제미니 계획에서 우주비행을 한 경험이 있던 콜린스 비행사가 사령선 조종사로 일종의 ‘진급’을 하게 되었다.

– 달 착륙 순간
달 표면으로부터 최초의 말을 한 사람은 올드린이었다. 강하하고 있는 동안, 그는 쭉 조종을 담당하는 암스트롱의 옆에서 항법 데이터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착륙한 순간에 그가 말한 말은, “접촉등이 점등했다. OK, 엔진 스톱. ACA 해방”으로, 암스트롱이 “ACA 해방 이해”라고 확인해, 다시 올드린이 “모드 컨트롤 자동. 강하용 엔진 지령 모두 정지. 엔진 암, 오프. 413 인”이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에 암스트롱이, 유명한 다음의 말을 했던 것이다.
“휴스턴, 이쪽 고요의 기지. 이글은 착륙했다.”(Houston, Tranquility Base here. The Eagle has landed.)
암스트롱이 우주선의 명칭을 갑자기 이글로부터 ‘고요의 기지’로 변경했기 때문에, 관제 센터는 일순간 혼란스러웠다. 통신 담당관이 즉시 착륙을 확인해, 관계자들은 가장 곤란한 작업인 착륙 조작이 무사히 행해진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선외 활동 준비를 개시하기 직전, 돌연 올드린이 이렇게 말했다.
“이쪽은 달 착륙선 파일럿입니다. 이 기회를 빌려, 나는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누구도, 또 어디에 있어도, 당분간의 행동을 멈추고, 이 수 시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심사숙고 해, 각각의 방법으로 감사를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 후, 올드린은 혼자서 성찬식을 실시했다. 당시 NASA는, 아폴로 8호의 비행사들이 달을 주회하고 있을 때에 성서의 창세기를 낭독했던 것에 관계해, 무신론자인 마다린 마레이 오헤일로부터 “우주비행사는, 우주에 있는 동안은 종교적 활동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라고 고소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올드린은, 달에서 성찬식을 실시한다는 자신의 이 계획을 아내한테도 사전에 밝히지 않았고, 또 지구에 귀환하고 나서도 몇 년 동안이나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는 텍사스주 웹스타에 있는 교회의 신자로, 성찬 용구는 동교회의 딘 우드 러프 목사가 준비해 주었다. 이 사실은 올드린 자신의 저서 ‘달로부터의 귀환’ 중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후에 동 교회는, 이 때에 이용된 잔을 그로부터 받아, 매년 7월 20일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달의 만찬의 날’로서 기념하게 되었다.

– 월면 활동
비행사들은, 우선 최초로 60도의 시야가 있는 착륙선의 삼각형 창으로부터 밖의 모습을 관찰해 성조기와 과학 관측 기기를 설치하는 데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선외 활동의 준비는 예정보다 2시간이나 불필요하게 더 걸려 버렸다. 존 영 비행사에 의하면, 착륙선의 해치는 개발 도중에 사이즈가 작게 변경되었지만, 우주복의 생명유지장치에는 아무 변경도 없었다. 그 때문에 암스트롱은 선외로 나오는 데 엄청난 고생을 해, 비행사의 심박수는 해치를 출입할 때에 최고치에 올랐다고 한다.
암스트롱이 발 밑을 확인하면서 구단의 사다리를 내려가고 있는 동안, 마이크는 그의 숨결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리의 옆에 설치되어 있는 촬영기기의 D의 형태를 한 링을 당기면, 슬로우 스캔 TV의 카메라가 작동되어, 사다리를 나오는 암스트롱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그러나 이 영상은 TV 중계의 규격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방송에서는 화질이 뒤떨어지는 종래형의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이 표시되고 있었다. 신호는 미국의 골드 돌 기지가 수신하고 있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계 기지가 감도가 보다 선명했다. 몇 분 후, 중계 임무는 보다 감도가 양호한 오스트레일리아의 파카스 전파 망원경에 이양되었다.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 달 표면으로부터의 사상 최초의 선외 활동을 파악한 영상은 전 세계에 전달되었다. 지구상에서는 이 순간, 적어도 6,0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슬로우 스캔 TV로 촬영한 고화질의 영상은 녹화 테이프가 아직도 행방 불명 상태이다.
암스트롱은 착륙선의 다리 위에 내려서 달 표면 상태를 “밝고, 거의 가루와 같이 보인다.(fine and almost like a powder)”라고 보고한 후, 착륙으로부터 대략 6시간 반 후의 1969년 7월 21일 02:56 UTC(미 동부 시간 오전 10시 56분), 달 표면에 역사적인 발자국을 찍었다.

암스트롱은 말했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암스트롱은 또, 중력이 지구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달 표면은 걸어 다니려면 아무 문제도 없고, 오히려 훈련보다 상당히 편하다라고 보고했다.
아폴로 11호의 비행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1960년대가 가기 전까지 인간을 달표면에 도달시켜서”라는 최고 지령의 실현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술에의 도전이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암스트롱은 후의 비행의 참고가 되도록 여러가지 각도로부터 착륙선의 사진을 촬영해, 그 후 홀쭉한 봉으로 달 표면 샘플을 모으고 가방에 채워 우퇴의 포켓에 밀어넣었다.
한층 더, 착륙선의 다리로부터 텔레비전 카메라를 꺼내 달표면을 파노라마 촬영한 후, 그것을 12 m 떨어진 장소에서 삼각대 위에 장치했다.
카메라의 케이블에는 감았을 때의 둥글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잡아늘이는 데에는 약간 고생을 했다.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내려간 지 15분 후, 올드린도 달표면에 내려가서, 달의 모습을 ‘장엄하고 황량한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양 다리로 하는 ‘캥거루 점프’등 여러가지 보행법을 시도하면, 등에 지고 있는 생명유지장치를 위해서 상체가 뒤로 젖혀지는 경향은 있지만, 밸런스를 취하려면 아무 문제도 없고, 익숙해지면 오히려 황새 걸음으로 걷는 편이 좋았다.
다만 이동할 때는 항상 6, 7보처를 예상할 필요가 있었다. 또 달 표면의 밝은 부분은 극히 미끄러지기 쉽고, 태양빛이 비치고 있는 곳으로부터 착륙선의 그림자에 들어갔을 때에는, 우주복 안의 온도에는 전혀 변화는 없었지만, 헬멧의 내부에는 명백한 온도차가 느껴졌다고 보고했다.

비행사들이 달표면에 성조기를 세우고 있는 동안, 갑자기 긴급 연락이 들어왔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의 것이었다.
“일찍이 백악관의 전화 통화 가운데 가장 역사적인 것”이라고 후에 닉슨 자신이 말하고 있는 이 전화 중에서, 그는 준비하고 있던 긴 스피치를 읽어 내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악관과의 연락 담당관을 맡고 있던 NASA의 프랭크 보먼은, “월면 착륙은 당신의 것이 아니고 케네디 대통령의 유산이다.”라고 하는 것은 물론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비행사들의 스케줄은 가득 차 있는 것을 설명해, 전화를 빨리 끝맺도록 설득했다.
그 후 비행사들은, 지진계나 레이저 반사경등이 탑재된 과학 실험장치를 설치했다.
한층 더, 암스트롱이 사진 촬영을 위해서 착륙선으로부터 120m 떨어진 이스트 크레이터까지 로프를 늘리고 있는 동안, 올드린은 삽이나 신장식의 가위를 사용해 토양 샘플이나 암석을 채집했다.
이전에 관제 센터는, 암스트롱의 대사율이 약간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조금 페이스를 떨어뜨리도록 전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내에 임무를 완수하려고 너무 급하게 일을 해내고 있었다.
비행사들의 호흡이나 심박수는 예상되고 있던 값보다는 낮았지만, 관제 센터는 신중을 기해 예정을 15분 연장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렇지만 달표면 활동의 시간이 예상외로 길어졌기 때문에, 샘플 채집 활동은 예정되어 있던 34분간의 도중에 끝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무사 귀환과 아폴로 11호 전시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은 1969년 7월 24일, ‘콜럼비아’는 웨이크 섬으로부터 2,660 km 동쪽, 존스튼 환초로부터 380 km 남쪽, 항공모함 호넷(USS Hornet)으로부터 불과 24 km 떨어진 서경 169도 9분, 북위 13도 19분의 태평양 상에 무사히 귀환했다.
아폴로 11호의 사령선은, 현재는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항공 우주 박물관의 중앙 전시 홀에,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 벨 X-1, 노스아메리칸 X-15, 머큐리 우주선 프렌드십 7호, 제미니 4호 등, 미국의 항공사를 개척해 온 기체와 함께 전시되고 있다.
격리 병동, 구명조끼, 천구의 등은 버지니아주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