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81년 2월 3일, 한국 개신교의 사상가 다석 (多夕) 류영모 / 유영모 (柳永模 1890 ~ 1981) 별세
다석 (多夕) 류영모 (柳永模 1890년 3월 13일 ~ 1981년 2월 3일)는 한국의 개신교 사상가이며 교육자, 철학자, 종교가이다. 호는 다석 (多夕)이다. 조만식, 김교신 등과 같은 세대로,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이현필 등의 스승이다.
호 ‘다석’ (多夕)은 많은 세 끼 (多)를 다 먹지 않고 저녁 (夕) 한 끼만 먹는다는 뜻이라 전한다.
다석(多夕) 류영모 (柳永模) 서울에서 유명근 (柳明根)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0년 수하동 (水下洞) 소학교에 다니고, 다시 한학에 몰두하였다.
1905년 기독교에 입교하고, 경성일어학당 (京城日語學堂)을 거쳐 1907년 경신학교 과정을 마친 뒤 1909년 경기도 양평학교 (楊平學校)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부터 2년간 평안북도 정주 (定州)의 오산학교 (五山學校) 교사로 2년간 재직하는 동안 교주 이승훈 (李昇薰)을 기독교에 입교하게 하고, 톨스토이 연구에 정진하여 시종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1912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물리학교에서 수학하던중, 신앙에 대한 회심으로 출세 거부의 결단에 따라 유학 도중 귀국하였으며, 종교철학을 독학으로 탐구하여 나갔다.
1914년 최남선 (崔南善)과 교류하며 『청춘』지에 「농우 (農牛)」 · 「오늘」 등을 1918년까지 기고하였다.
1921년 조만식 (曺晩植)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부임하여, 1년 재직하는 동안 김교신 (金敎臣) · 함석헌 (咸錫憲) 등 제자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1928년 YMCA 성경연구반 지도를 맡아 35년간 계속하는 한편, 김교신의 『성서조선 (聖書朝鮮)』지에 신앙의 글들을 발표하여 성서조선사건으로 1942년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1940년 후반 생애를 하루 한 끼의 일중 (一中)으로 금욕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선구적인 비교종교학 연구가이자 독보적 종교철인으로 기독교를 비롯한 동서양의 진리를 끊임없이 설파하였다.
또 1955년부터 『다석일지 (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하여 종교적 묵상을 만년까지 기록하고, 『노자』 국역 (1959)과 한글연구에도 탁견을 보였다.
– 류영모 / 유영모 (柳永模)
.출생: 1890년 3월 13일, 대한제국 서울
.사망: 1981년 2월 3일, 서울
.저작: 다석일지, 노자
.경력: 양평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장
.관련사건: 성서조선사건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 (究竟覺)에 이른 대한민국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5세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 (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처음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나아가 ‘노자’ (老子)를 한글로 완역한 것을 비롯해 여러 성인의 말씀을 우리말과 글로 알리는 일에 힘썼다.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씨알(민중)’ ‘얼나’ ‘제나’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
단순하고 소박한 금욕의 삶을 살고자 했던 류영모는 50살 무렵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얇은 잣나무판 위에서 생활하고 잠도 그 위에서 잤다. 새벽 3시면 일어나 명상을 한 후 일기를 썼다. 그 일기를 모은 ‘다석일지’는 그가 쓴 유일한 저술로 남았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45살 때 북한산 밑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았다. 나이를 햇수로 세지 않고 날수로 하루하루 세었는데, 33,200일을 살았다.
○ 생애 및 활동
– 출생과 성장
1890년 3월 13일 서울 숭례문 인근에서 아버지 류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 맏아들로 태아났다. 5살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6살때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을 배웠다. 10세에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고 다시 한문 서당에 다녔다. 12살때부터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서 3년 동안 맹자를 배웠다.
– 기독교 신앙에 귀의
15세에는 YMCA 한국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개신교에 입문하여 연동교회에 다녔다.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9년 경기도 양평의 양평학교에서 한학기동안 교사로 일하였다. 1910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하였다. 1912년에는 기독교 사상가요 문인인 톨스토이를 연구하여 그 영향으로 기성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짧은 소설들(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에서 드러나듯이,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교회에 나가는 종교행사의 충실한 참여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복음을 이웃에 대한 자비, 정직한 노동, 양심적 병역거부, 악을 선으로 이기는 비폭력투쟁등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일본 도쿄에 가서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 결혼과 YMCA활동
1915년 김효정과 결혼하였고, 이후 최남선과 교제하며 잡지 《청춘》에 ‘농우’, ‘오늘’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때에 이승훈이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원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였다. 후에 이것이 적발되어 압수당하였으며 류영모 대신 아버지 유영근이 체포되어 105일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일년간 재직하였다. 1928년 YMCA의 연경반 모임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계속하였다. 1928년 이전에는 아버지의 경성피혁상점의 일을 도왔는데, 이후로는 아버지 유명근이 차려준 솜공장인 경성제면소를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잡지 《성서조선》에 기고를 하였으며 이 일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57일 만에 서대전 형무소에서 아들 의상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들에 의하여 추대되었다.
– 사상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던 류영모는, 1921년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나 이후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 불, 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했다. 그의 강의중 일부는 제자들에 의해 남아 있고, 해설과 함께 나오기도 했다. 강의들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으나, 기발한 표현이 많고 함축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학자들은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그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의 에든버러 (Edinburgh)대학에서 강의되었다.
– 제자들
제자 중에서 가장 아끼던 이는 함석헌이었다.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류영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류영모와 제자 함석헌의 사상은 2008년 8월호 《기독교사상》에서 특집기사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로 소개되었다.
○ 저서
다석일지(多夕日誌)
노자 (늙은이)
○ 다석 류영모 연보
1880년 3월 13일(경인년 2월 23일) 출생
1905년 기독교에 입신
1910년 남강 이승훈의 초빙으로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
1912년 일본 토쿄 물리학교에 입학, 1년 간 수학
1917년 육당 최남선과 교우하며 잡지 『청춘』에 기고
1928년 중앙 YMCA에서 연경반 모임 지도. 1963년까지 약 35년간 지속
1955년 『다석일지』를 쓰기 시작
1959년 『노자』를 우리말로 완역
1981년 2월 3일 별세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