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375년 11월 17일, 로마 47대 황제로 ‘최후의 서방 대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 (Valentinianus Ⅰ) 타계
발렌티니아누스 1세 (Valentinianus Ⅰ)는 364년부터 375년 죽을 때까지 로마 제국의 47대 황제로 제국을 침입한 이민족들과의 전쟁에 일평생을 바친 ‘최후의 서방 대제’ (The Last Great Western Emperor)였다.
발렌티니아누스는 판노니아의 밧줄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군대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복무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일개병사에서 시작해 혼자 힘으로 상당한 계급까지 승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율리아누스 휘하에서 부관으로 있을 때 기독교 신앙을 고집해 율리아누스의 눈밖에 났다고 한다. 그는 363년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율리아누스의 전사 이후 황제가 된 요비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를 진급시킨 직후 세상을 떠났다.
요비아누스가 죽은 지 10일 만에 그는 니케아 (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황제로 선포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서 3월 28일에 그는 동생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를 맡게하고 자신은 서부를 다스렸다. 황제가 된 이후 발렌티니아누스는 계속된 야만족의 침입과 맞서 싸워야 했다. 365년 갈리아에서 알레마니족의 침입으로 로마군이 패하자 그는 파리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계속 그 곳에서 머물면서 야만족과 싸웠다. 동생 발렌스가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으로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는 알레만니족과의 싸움으로 병력을 빼 수 없다고 그 도움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는 우리 형제만의 적이지만, 알레마니족은 로마 세계 전체의 적이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장군인 요비누스는 알레마니족을 상대로 3차례 승리하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갈리아 지방을 안전하게 했으나 발렌티니아누스는 367년 브리타니아에서 피트족과 스코트족의 침입을 받았다. 자신은 갈리아에 있어야 했으므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아버지)에게 브리타니아 원정을 맡겼는데 테오도시우스는 성공적으로 원정을 마쳤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들의 왕위계승권을 강화하기 위해 당시 9세인 아들 그라티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는 트리어에서 7년 동안 머물면서, 제국의 국경을 안정화시키고 373년 갈리아에서 돌아왔다.
374년 판노니아의 도나우 강 건너편에 살던 콰디족이 로마가 요새를 세운데 불만을 품고 제국의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듬해 발렌티니아누스는 콰디족의 사절을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분노한채로 죽고 말았다.
– 발렌티니아누스 1세 (Valentinianus Ⅰ)
.출생: AD 321년 7월 3일, 크로아티아 빈코비치
.사망: AD 375년 11월 17일, 헝가리 코마롬 Szőny
.본명: Valentinian I
.배우자: 저스티나
.부모: 그라티아누스 더 엘더
.자녀: 발렌티니아누스 2세, 그라티아누스, Galla, Grata
.재위: 364 ~ 375년
.전임: 요비아누스 / 후임: 발렌스,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그러나 아무리 신랄한 비평가라도, 제국을 통치하는 문제와 관련된 황제의 실패 없는 철저함에서는 잘못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로마 제국의 제47대 황제로 최후의 서방 대제 (The Last Great Western Emperor)다.
364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으며, 여섯 번째 세습왕조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창건자이다. 전통적으로 정규군의 병참기지이자 수많은 군단병들을 배출한 동네인 판노니아 속주 출신으로 일개 병졸에서 능력 하나로 장교를 거쳐, 율리아누스, 요비아누스 밑에서 부관과 장군까지 지낸 뒤, 로마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즉위 후, 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해 본인은 서방을, 동생에게는 동방을 담당하도록 한 뒤, 제국을 침입한 이민족들과의 전쟁에 일평생을 바쳤다.
○ 생애 및 활동
– 즉위 이전
그라티아누스 푸나리우스 (혹은 대 그라티아누스)의 아들로 321년 판노니아의 키발라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대 그라티아누스는 원래 밧줄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는데, 힘이 세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후 그는 군에 입대하여 아프리카 코메스의 지위까지 이르렀다. 어린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면서 자랐다. 대 그라티아누스는 배움이 짧은 것이 한이 되었는지 아들에게는 교양 교육을 시켰는데, 단순히 읽고 쓰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고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그의 군 경력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356년 그는 율리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 간의 정치적 대립에 휘말려 해임되었고, 일설에 의하면 율리아누스가 즉위한 후 등용되었다가 종교적 문제로 또 해임되었다고 한다. 그가 다시 군에 들어온 것은 요비아누스 황제 때였다. 요비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의 용맹을 높이 사 스콜라이 스쿠타리오룸의 장교로 임명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요비아누스의 장인을 따라 갈리아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이후 제국 동방으로 돌아온 발렌티니아누스는 안키라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364년 초, 요비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던 길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고위 문무관들은 니케아에 모여, 다음 황제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들이 두 명의 후보를 제치고 선택한 사람은 다름아닌 발렌티니아누스였다.
– 즉위 이후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이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니케아로 달려왔다. 앞서 율리아누스와 요비아누스의 잇따른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은 새 황제에게 공동황제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의 친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제국 서방, 발렌스가 제국 동방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두 형제는 같은 해 8월경까지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데 필요한 준비들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발렌티니아누스는 제국 서방의 밀라노로 향했고, 그곳에서 본격적인 제국 통치를 시작했다.
.군사정책
발렌티니아누스는 치세 대부분을 라인 강 – 다뉴브 강 유역의 변경 지대에서 보냈을 정도로 제국의 방어에 힘썼다. 집권 초기~중기에는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알라마니족이 갈리아 변경지대를,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갈리아 해안 지대를 침략하는 일이 잦았으며, 브리타니아에서도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집권 후기에는 주로 다뉴브 강 유역의 사르마티아족과 콰디족이 판노니아와 발레리아의 변경지대를 침략했다.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라마니족과 사르마티아족, 콰디족에 대한 원정에 나섰으며, 다갈라이푸스, 세베루스, 요비누스, 테오도시우스 등 휘하의 유능한 장군들을 파견하여 멀리 떨어진 속주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침략에 대응했다.
이민족의 침략에 더해서, 제국 내부에서 반란도 발생했다. 365년 발생한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은 발렌티니아누스의 정통성이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369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발렌티누스의 반란이, 372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피르무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두 반란 모두 테오도시우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가 진압하였다.
한편으로 발렌티니아누스는 변경 지대에 적극적으로 요새를 쌓고 보수하기도 했다. 황제가 세운 요새들은 적군을 감시하고 강을 순찰하는 선단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어느 정도는 황제의 군사적 업적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행정정책
거의 변경지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서민들을 위한 정책에도 비교적 관심을 보였다. 발렌티니아누스는 ‘데펜소레스 플레비스’를 조직하여 농민들이 따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법적인 변호를 받을 수 있게 했고, 로마 시민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공급하는 정책을 보완했다. 한편으로는 양돈 농가, 광부 조합, 도시의 짐꾼이나 소방대 등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고자 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황제는 갓난아기를 버리는 것을 금지하고 로마에 학교와 의료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이 제대로 수행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데, 황제가 제국 전역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통제하기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종교정책
발렌티니아누스는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중립과 관용을 지킨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는 희생 제의나 남을 저주하는 의식만 하지 않는다면 이교 제의를 수행하는 것도 허용했다. 한편으로, 그는 사제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사제들이 과부에게 유산을 받거나, 과부나 고아의 집에 분별없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했다.
– 원로원과의 대립
원로원과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던 황제들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측근 막시미누스를 로마에 파견하여 마술이나 간통 혐의를 빌미로 원로원 계층을 대거 숙청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로원 의원의 특권이었던 고문 금지도 무시했다. 황제의 측근들이 고위 관직을 장악하고 원로원에까지 진입함으로써 원로원의 불만은 커졌고, 그들은 로마의 행정정책을 두고 황제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물론 발렌티니아누스는 전적으로 원로원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특히 군사정책이나 종교정책은, 그가 어느 정도 원로원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황제와 원로원 간의 반목은 깊었고, 그것은 황제의 이미지가 사후 상당히 왜곡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원로원 측이나 도시 지식인들이 기록한 사료에는 황제와 그 측근들을 주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무식하고 탐욕스럽다’고 비판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과장되었거나 왜곡된 것도 적지 않다.
– 죽음
375년 겨울, 황제는 콰디족 사신단을 만나고 있었다. 사신들은 황제에게 “변경을 약탈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도적떼이며, 우리 영토에 먼저 요새를 세운 것은 당신들이지 않느냐”고 변명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사신단에게 욕을 퍼부으며 꾸짖다가,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졌다. 신하들은 급히 의원을 찾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황제가 역병에 걸린 병사들을 치료하라며 의사들을 다른 데로 보냈고 근처에 의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켈리누스는 이후 의사가 오긴 왔으나 황제의 병을 나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황제는 그날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 사도 성당에 안장되었다.
황제의 죽음 직전에 혜성이 떨어지는 전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혹은 황제가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황후가 상복을 입은 채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가족사
발렌티니아누스는 두 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 마리나 세베라와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결혼했는데, 369-370년경 이혼하고 두 번째 부인 유스티나와 재혼했다. 일설에 따르면, 세베라 황후와 유스티나는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함께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황후는 별 생각 없이 황제에게 “유스티나는 정말 아름답다” 고 칭찬했고, 그 말을 들은 황제는 도대체 얼마나 예쁜 아가씨인지 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자녀들은 거의 요절했다.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고, 딸 플라비아 갈라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황후가 되었으나 셋째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했다. 나머지 두 딸 그라타와 유스타는 결혼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요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키가 크고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발에 잿빛 눈이었다고 한다. 대단한 다혈질로 유명했다. 마르켈리누스는 황제가 전쟁에 있어서는 신중하며,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쓰며, 새로운 병기를 고안하는 것을 좋아하고, 방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욱하는 성격과 잔인함, 신랄한 말투 등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인노켄티아’와 ‘미카 아우레아’라는 이름의 곰 두 마리를 키우며, 죄인을 잡아먹게 했다고 한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의 지방 지사가 더 큰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 승진하고 싶어했다. 이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테오도시우스도 아프리카누스의 뜻을 지지했다. 그러자 황제는 테오도시우스를 향해 “그러면 갔다 오시오, 코메스. 그 자가 다스리는 지방을 바꾸고 싶다고 하니, 그대가 가서 그 자의 머리도 바꾸어 놓으시오.”라고 하는 일화가 있다.
○ 서로마 국경의 발렌티니아누스 –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중에서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직 밀라노에 머물 때 궁정의 마지스테르 오피키오룸 (master of the offices) 우르사키우스 (Ursacius)에게 하찮은 대우를 받고 분을 삭이던 알레마니족이 명년이 시작되자 마자 갈리아를 침공했다. 라인 전선을 지키던 카리에토 (Charietto)가 늙고 무능한 세베리아누스 (Severianus)가 합류한 속에서 알레마니 분파와의 회전에서 패하고 두 백 (伯) 모두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효과적인 도주법에도 밝았던 적들은 많은 전리품과 약탈물들과 함께 다시 국경 건너 도망간 이후로 다갈라이포스 (Dagalaiphus)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파리(Paris)로 자신의 궁정을 옮길 것을 생각하고 출발하려던 황제에게, 365년 11월 1일에는 동로마 트라키아에서 고트족을 뒷배경으로 하는 프로코피우스의 내란과 서로마에서의 알레마니족의 침공 소식이 동시에 전해졌다. 외정 계획을 바꾸어 내부의 적을 칠지에 대한 고민의 끝에 그는 “프로코피우스는 나 자신과 내 동생의 적이지만, 알레마니는 전 로마의 적이다”라는 말을 토한 채 알프스를 넘어 전선으로 향한다. 아에퀴티우스 (Aequitius)를 대장군으로 승진시켜 동방의 문제를 처리케 했는데 일단 서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참제의 야심을 적절히 좌절시켰다. 황제가 랭스 (Rheims)에 도착했을 때는 아프리카 속주 역시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기관 (notary) 네오테리우스 (Neoterius), 도미티스키의 장교 마사우키오 (Masaucio)와 자기 지인인 가우덴티우스 (Gaudentius) 등을 파견했다. 그 옆의 트리폴리타니아 (Tripolitania) 역시 인근의 무어인들의 침입에 고통받고 있었다.
파리에서 황제는 아들 그라티아누스 (Gratian)와 함께 집정관이 되는 다갈라이포스 대신 요비누스가 알라마니 문제를 맡게 하고 전의 전투에 비겁하게 군기 (軍旗)를 빼앗기고 도주한 바타비족 (Batavian)과 헤룰리족 (Heruli) 부대를 로마군법에 따라 노예로 팔겠다는 노여움 까지 표하며 분위기를 일신하려 했다. 366년 한 해, 효과는 곧 나타났다. 메츠(Metz) 부근 스카르포나(Scarponna)에서 방심을 틈탄 기습으로 일단의 알레마니 족을 물리쳤고 모젤강(Moselle) 인근에서 약탈 후 멱을 감으며 휴식을 취하는 다른 알레마니족에게도 큰 승리를 거두었다. 패잔병들은 마지막으로 살롱앙상파뉴 (Chalons in Champagne) 카탈라우니아 평야 (Catalaunian plains)의 본진으로 모여들었으며, 이들과의 결전에서 약간의 위기는 있었지만 6,000명의 알레마니족을 참하는 큰 전과를 올리며 파리로 개선한 후 다음 해 집정관의 영예가 예정된다. 이 해에 프로코피우스의 난이 진압된 소식이 그의 목과 함께 이송되었어, 이로써 재위 초의 위기가 일단 진정되었다. 다음 해 중병에서 깨어난 발렌티니아누스는 근심 속에 그라티아누스를 군대 앞에서 공동황제로 선언했다. 이 즈음 황제는 트레베 (Treves)에 있었는데 브리타니아에서 해안을 수비하던 백 (伯)이 사망하는 등의 소동에 대해 전해 듣고 도미스티키 백 (伯) 세베루스 (Severus)에게 일차 조사시키게 한 뒤 테오도시오스 (Theodosius:
테오도시오스 황제의 아버지)를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368년, 황제는 무방비된 도시 모군티아쿰 (Moguntiacum) 즉 현 마인츠 (Mainz)에서 기독교축제 중 알레마니의 한 왕인 란도 (Rando)가 한 약탈에 대한 보복으로 아들과 함께 마인 (Main) 강을 건넜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최후로 라인을 건넌 로마 황제다). 사실 그 직전엔 친로마에서 적대로 돌아선 알라마니의 궁정에 내분을 야기해 왕을 암살해 침략을 일시 막았었다. 대장군 요비누스와 세베루스가 함께 한 황제의 친정을 세바스티아누스 (Sebastian) 백 (伯)이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때 프로코피우스를 도운 이) 일리리아와 이탈리아의 부대를 이끌고 라에티아 (Rhaetia) 방면에서 도우며 수많은 마을들을 불태웠으며 전력에 완연한 열세에 있는 알레마니군은 뷔르템베르크 (Wirtemberg)의 솔리키니움 (Solicinium) 산으로 도망가 있었다. 이들을 퇴치하러가다가 황제 자신이 복병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으나 산을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절망적인 항전을 계속하던 알라마니족은 죽거나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갔다. 이를 계기로 이 곳에서의 주도권을 쥐게 된 황제는 트레베로 귀환 한 후 라인전선의 요새를 보수 건설하는 등으로 국방을 강화하였다. 역시 색슨족의 난동도 이 즈음 세베루스가 투입되어 진압되었는데 항복한 적을 배신하는 기만적 방법을 사용하기 까지 했다. 절망에 찬 알레마니의 지속적 대항에 발렌티아누스는 점점 더 잔인한 꾀들을 생각해 좀 더 멀리사는 부르군디족과의 싸움을 더욱 부추기고자 재물로 그들을 불러들이고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것은 마크리누스 (Macrinus)라는 알레마니왕에 대한 미칠 듯한 증오 때문이었는데 그를 잡기 위해 후에 몸소 라인을 건너기도 했었다. 다시 한 참 후에는 외적 정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모르지만 그와 몸소 회담까지 한 후 동맹관계에 들어가기도 했다.
갈리아와 다뉴브 전 국경을 누비며 전선을 관리하던 황제가 바다까지 건너 가지는 않았는데, 아프리카와 브리타니아의 문제 만큼은 테오도시오스란 장군에게 맡겨 졌다. 373년 아프리카에서 오랜 폭정을 해온 로마누스 (Romanus)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곳의 무어족 속국왕이 죽자 피르무스 (Firmus)가 로마누스가 아끼는 동생 자마 (Zamma)를 살해한 것이다. 로마누스와 피르무스는 다투어 황제의 궁정에 탄원을 하였다. 이번에도 궁정의 고관과 끈을 가진 로마누스 측의 의견만 반영이 되어 토벌이 결정되고 요비누스의 후임 대장군 테오도시오스가 파견되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그의 행적을 쫓아 브리타니아 평정 과정으로 돌아가 보자. 황제의 명을 받고 그는 헤룰리 (Heruli), 바타비아 (Batavians) 요비 (Jovians), 빅토르 (Victors) 등의 부대를 이끌고 샌드위치 (Sandwich)에 상륙해 런런 (London)으로 들어간다, 주변에 산재한 게릴라 부대들을 섬멸한 뒤 질서를 바로잡고 다시 투항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군기를 확립해 지역을 안정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발렌티누스 (Valentinus, 로마에서 학정을 한 막시미누스의 동생)라는 반란의 주모자의 음모를 분쇄하고 섬을 회복하여 새로이 황제단의 이름을 따 발렌티아 (Valentia)란 속주를 추가했다.
돌아와 한동안 알레마니족 등을 다루던 테오도시우스는373년 이번에는 갈리아에서 새로 모은 소병력을 배에 태워 아를르 (Arles)에서 바다 건너 마우렌타니아 (Maurentania)의 이길길리스 (Igilgilis)의 해변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모든 갈등의 원흉이었던 사령관 로마누스 (Romanus)을 쫓아내고 부사령관 빈센티우스 (Vincentius)에 대해 체포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으로 아프리카의 문제는 어느 정도 끝난 것이었다. 시티피스 (Sitifis)로 진입해서 피르무스의 평화 제의와 인질을 일시 받아들여 시간을 끌며 주변 상황을 점검하고 작전을 짰다. 계속되는 평화요구를 물리치고 투부수툼 (Tubusuptum)을 거치며, 피르무스 형제들과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한다. 놀란 적들은 기독교 사절까지 동원해 용서와 평화를 구했으나 계속해서 이코시우 (Icosium)과 티파사 (Tipasa)를 거쳐 카이사리아 (Caesarea)에 입성했다. 아프리카 부족들은 로마의 군사기술에 제대로 맞설 수 없었고 피르무스는 이사플렌세스족 (Isaflenses)에게로 도망갔는데, 키케로의 “salutaris vigor vincit inanem speciem clementiae (온전한 힘이 헛된 자비를 보이를 보이는 것보다 우월하다)”란 말을 모토로 삼은 테오도시우스의 원정은 무자비한 것이었다. 로마군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그 왕 이그마젠 (Igmazen, 이그마젠은 베르베르족이 자칭명으로 자유롭고 고귀한 사람들이란 뜻이라 함. 대부분의 전투는 Mauretania Caesariensis에서 일어난 듯 함)은 피르무스를 넘겨 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일찍 예감한 무어인 폭군은 그를 지키는 간수들과의 술로 고통의 감각을 무디게 한 후에 로마의 고문과 개선식의 치욕을 피하려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회복 후 테오도시오스에 의해 아프리카를 로마에서 떨어져 나가게했던 로마누스와 그를 둘러싼 궁정관리들의 부패상의 극악한 수준이 오에 (Oea, 현 트리폴리시로 나머지는 두 곳은 폐허로 변해있었다), 렙키스 (Leptis), 사브라타 (Sabrata)의 세도시 연맹을 의미하는 트리폴리타니아 (Tripolitania) 주민들과 벌였던 갈등에서 드러났다. 아우스토리아니족 (Austoriani)에게 위협을 받던 렙키스 주민들의 보호 요청을 아프리카 백 (伯) 로마누스는 4,000 마리의 낙타를 군수품으로 요구하며 사실상 거절했었다. 트리폴리타니아 의회와 민중은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이 일을 탄원했지만 이미 렙키스와 오에는 이미 야만족의 침입에 엄청난 고통을 그 과정에서 겪고 난 후였다. 중간에서 궁정에 끈을 가진 로마누스는 황제의 조사를 이래저래 저지했다. 답답한 시민들은 다시 한번 사절을 파견했고 이미 눈과 귀가 가리워진 황제는 뒤늦게 팔라디우스 (Palladius)란 부패한 관리를 파견해서 조사시키지만 로마누스의 뇌물과 협박을 받은 그가 거짓 보고를 하는 바람에 도리어 총독을 비록한 고발자 다수가 “신성한” 임금의 귀에 거짓말을 한 죄 등으로 극형을 받게 되었다. 어이없고 부당한 판결에 침묵하게 되어 수 년간 묻혀졌던 사건이 테오도시오스의 조사에 의해서야 로마누스가 가진 서신에 팔라디우스의 이름이 발견되어서야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에게 보고되었었으며, 이에 팔라디우스는 소환되는 도중 자신이 받을 잔인한 처형을 짐작하고 자살했다. 로마누스는 당시에 레미기우스 (Remigius)라는 마지스테르 오피키오룸을 뒷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은퇴한 레미기우스 역시 자신의 영지에서 목을 매었다. 암미아누스는 로마누스를 언급하면서 발렌티니아누스가 “군관리들의 방약무인”을 드높인 제국의 첫 황제라고 했는데, 로마누스는 이런 조사를 받으면서도 끝내 사형을 피했다. 자신과 함께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모처럼 그의 귀가 열리긴 했지만 같은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로마누스에 대해서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실상 아프리카 문제의 원흉이었던 로마누스는 경미한 처벌에 그쳤음에도, “신성한 귀에 불경한 죄”를 내세워 아예 황제 앞에 아무 말도 함부러 하지 못하게 하는 괴상한 법이 그 당대에 있었던 것이다.
말년을 향하는 발렌티아누스는 대체로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요새는 종종 국경 너머를 침입할 정도였는데 쇠잔해져 있는 콰디족 (Quadi)의 항의를 받자 공사를 맡던 마르켈리아누스 (Marcellianus)가 그 왕을 초대해서 살해한 사건으로 자유사르마티아인들과 합심해 판노니아에 침입했을 때 매시아의 공 (公)이었던 테오도시우스가 격퇴한 일이 있었다. 한 사람은 극악무도한 막시미니우스의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아프리카에서 피르무스와 싸우고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아들들이었다. 사실 사태에 대한 공정한 처리가 올바른 해법이었지만 잘못을 인정할 용기는 황제에게 없었고, 도리어 콰디족과 사르마트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몸소 다뉴브를 건넜으며 엄청난 학살을 하고 별다른 손실없이 복귀했다. 콰디족 사절의 애걸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의 비슷한 원정을 준비하다가 375년 11월에 사망하였다. 그에겐 중혼의 혐의가 있어 그라티아누스의 어머니인 세베라 (Severa) 외에도 유스티나 (Justina)와 결혼해 네 살난 아들을 두기도 했다. 전자는 아마 교회법에 어긋나는 이혼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콰디족과 사르마트족의 소동 와중에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말년 결혼에서 난 딸이 프로코피우스의 손을 거쳐 그 지역에 머물러 있다가 동란의 해를 가까스로 면해 그의 후계자인 그라티아누스와 맺어지게 되어서 발렌티니아누스조는 이전 플라비우스조의 정통성을 잇게 되었다. 황제가 있던 브레게티오 (Bregetio)의 병영에서는 멜로바우데스 (Mellobaudes)와 아에퀴티우스 (Aequitius)가 주동이 되어 유스티나와 그 어린 아들을 불러와 후자를 황제로 선언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애매모호한 방법으로 그가 아버지의 모든 영토를 물려받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