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41년 1월 24일, 로마제국 제3대 황제 칼리굴라 (Caligula, AD 12 ~ 41;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암살당하다
칼리굴라 (Caligula)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 (12년 8월 31일 ~ 41년 1월 24일, 재위 37년 3월 16일 ~ 41년 1월 24일)이다.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이며, 칼리굴라는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가 지휘하고 있었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귀여워하며 붙여준 ‘꼬마 장화’라는 뜻을 가진 별명이다. 재위 기간은 37년 3월 16일 ~ 41년 1월 24일까지다.
– 칼리굴라 (Caligula)
.재위 기간: 37년 3월 16일 ~ 41년 1월 24일
.본명: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황제 이름: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출생: AD 12년 8월 31일, 이탈리아 안치오
.사망: AD 41년 1월 24일 (28세), 이탈리아 로마 팔라티노 언덕 (언덕 내 궁전과 극장 사이 통로)
.매장지: 이탈리아 로마 아우구스투스 영묘
.전임: 티베리우스 / 후임: 클라우디우스
.가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부모: 부) 게르마니쿠스, 모) 아그리피나 미노르
.배우자: 유니아 클라우딜라, 리비아 오레스틸라, 롤리아 파울리나,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자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율리아 드루실라
형제: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종교: 로마 이교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가이오 체사레 “칼리골라”, 칼리골라라고 부르며, 황제본명을 부를 경우에는 가이오 (Gaio), 카이오 (Caio)라고 한다.
칼리굴라 (Caligula)는 별명으로 ‘작은 군화’라는 뜻이다.
로마 황제로서 살아생전 이름은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Gaius Iulius Caesar Germanicus)다.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 중 처음으로 황제가 된 인물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로마인들에게 역대 로마황제 중 카이사르라는 명사를 황제 지칭 표현이 아닌, 황제 개인 공식 성씨로 불린 마지막 황제이다. 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친혈육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모두 이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이기도 하다.
로마 황제 중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카이사르 (CAESAR)를 황제라는 개인명사가 아닌, 형식상 공화국인 원수정 로마 아래에서 개인 성씨로 황제 본인과 원로원이 사용해 부른 마지막 ‘카이사르’이다.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래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의 직계를 중심으로 한 혈육 간의 입양 형식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 하지만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이레아와 그를 따르는 일부 근위대 병사들에게 배신당해 일가족 전체와 살해됨으로써 역사상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원로원 회의록, 금석문, 관보, 타키투스, 필로의 기록 등 당대기록에서는 이 황제를 오늘날 통칭으로 부르는 칼리굴라 대신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어린 시절 불렸던 별명을 통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황제 본인을 비롯해 로마 원로원과 로마인들도 공식석상에서는 가이우스, 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역시 이 황제를 다룬 저서의 이름은 ‘가이우스’였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기록에서 가이우스를 칼리굴라로도 혼용해 기술했는데, 반대로 최대한 관보, 회의록, 당대 로마인들의 표기 등을 존중한 타키투스는 살아생전 칼리굴라를 부른 것처럼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고 별명을 넣더라도 가이우스 칼리굴라라고 했다. 따라서 이 황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연대기’에서도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람들이 이 황제를 굳이 별명이자 통칭 ‘칼리굴라’로 부르거나 이름 뒤에 넣어 언급하는 이유는 풀네임이 거의 비슷한 외삼촌 가이우스 카이사르 (가이오 체사레)와 비교하기 어려운 까닭과 살아 생전 로마인들에게 이 사람의 별명이 이름 뒤에 같이 불리거나 별칭만 불렸던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과 국내 논문 중에서 이 황제의 외교정책이나 국방정책 등을 언급하는 경우 로마 공식 관보와 황제 본인 생전의 통칭을 존중해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하면서 칼리굴라라는 이름을 통칭, 별칭으로 각주, 괄호로 언급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고대 전승기록에서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보여준 통치 방식에 대한 반발로 광기에 휩싸인 사치, 폭력, 쾌락”으로 서술됐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타키투스의 저서에서도 가이우스 카이사르 편을 다룬 7권, 8권은 분실됨에도 간접적으로 그의 통치시대가 티베리우스 시대와 비슷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고대 기록의 작성자들인 원로원과 재위 내내 갈등을 빗다가 일부 근위대에게 암살된 황제라서 오늘날 대중들에게 네로, 도미티아누스,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과 함께 로마 제국의 폭군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고, 고대 전승기록을 토대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구제 불능의 미치광이 폭군”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이 황제의 짧은 4여년간의 재위기간은 실패로 끝났지만 권력강화와 애매모호했던 로마황제 권력의 절대화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대는 초기 원수정 시대 (과도기적 상태의 제정 시대) 임에도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 권력강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원수정과 비슷했고, 본인은 지중해 동부 헬레니즘식 전제군주를 지향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기대했다가 후기 티베리우스때와 비슷한 광기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 이후에는 의외로 자신의 직책에 대한 이해도와 통치철학은 확고한 군주였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이런 그의 행동이 광기, 불안, 과대망상으로 인식됐고 마크로 숙청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해 황제의 암살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치닫게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 그의 암살 사건은 말년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집약된 불만이 폭주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칼리굴라는 현대 연구 등을 통해 중병을 앓게 된 이후 얻게 된 후유증으로 통치에 어려움을 겪은 암군 내지 프린켑스 권한 강화 도중 근위대에게 암살된 실패한 황제로 재조명받고 있다. 그러면서 스카레와 같은 현대학자들은 칼리굴라가 변덕스럽고 잔인한데다 불안정하며 흥분을 잘하는 젊은 황제여도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의 악의에 찬 평가를 그대로 반영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분명히 드러냈다.
즉, 로마제국의 세번째 황제인 가이우스라는 인물이 위험하고 불쾌한데다 과대망상 환자에 가까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담긴 소문들이 많은 탓에 무작정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현대 서양 학계에서는 그가 짦은 재위 기간동안 했던 공공건축과 건설, 화폐발행권 일원화 등 행정 개혁과 내정 정책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행정적 측면에서는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괜찮았다”고 평가해주고 있고, 칼리굴라가 죽기 전 추진한 로마와 이탈리아 건설 사업은 후임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오스티아 인공항구를 제외한 대부분 건설 프로젝트에서 계속 이어졌다고 말한다.
○ 생애 및 활동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 (大)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또한, 네로의 어머니인 소 (小)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 (사망 당시 77살)의 젊은 후계자 (즉위 당시 24살)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유서에 티베리우스 게메루스를 공동상속인으로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가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로 취임했다.
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고열이 나 쓰러져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 그 후유증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미친듯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칼리쿨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마차를 끌어온 인부에게 거액을 주는 등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시키고 이로 인해 민심의 급속한 이탈을 불러왔다. 또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는 등 비 (非) 정상적인 통치를 하였다. 특히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고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신들과 같은 복장을 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41년 1월,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에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Cassius Chaerea) 등에 의해 아내, 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의 통치기간은 3년 10개월이었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원로원이 제정 대신 로마 공화정의 부흥을 기획했었지만,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된다.
○ 평가
구제불능의 폭군으로 평가받았던 칼리굴라는 과거와 달리, 오늘날 권력강화 중 그 결과를 보여주기 전에 실패한 황제 내지 갑작스런 질병의 후유증에 시달린 암군 정도로 재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그는 로마 대화재 이후 화재 원인을 크리스트교도들에게 돌려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자신의 사치를 위해 죄없는 황족들과 제국 내 부자, 장군 등을 죽인 네로, 내란 당시 로마군의 피냄새가 향기롭다며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말한 비텔리우스, 본격적으로 암흑기에 들게 만든 장본인 콤모두스, 겨우 안정기에 접어든 제국을 피바람으로 몰고 가고 세금징수를 위해 꼼수로 안토니누스법을 만들어 로마 제국 시스템 전체를 망가뜨린 황제로 비난받은 카라칼라,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폭군 포카스와 달리 폭군 대열에 포함되어 있지만, 했다고 주장되는 일들이 사실이 아니거나 실제 한 일로 치부되는 것도 비방성 풍문인 이유가 많아서, 카라칼라와 함께 실제로는 이미지와 달리 그렇게 나쁜 황제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특히 칼리굴라의 악행이나 이상한 외모는 세상의 온갖 뜬 소문을 기록하고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공화정을 없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혐오”를 이어받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동시대 역사가 중 칼리굴라를 서기 39년 암살하려는 혐의로 기소된 전과가 있는 세네카와 파비우스 루스티쿠스의 사라진 기록, 그리고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한 카시우스 디오의 주장들이 활용되고 근대 이전까지 주된 평가의 자료로 활용됐다. 하지만 이 기록들은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가이우스 칼리굴라에 관한 4여년간의 기록이 개인적 원한을 이유로 한 의도적인 비난과 증오에 가까운 서술만 남게 했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현대 사가 중 하이켈하임, 존 영거, 스카레 등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을 가지고 칼리굴라를 미치광이, 4년동안 악행만 하다가 살해당한 황제로 단정짓지 않고 있다. 가령 39년 금융위기라고 부르는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막대한 유증을 다 써먹고, 국고까지 바닥나게 했다는 주장은 2003년 샘 윌킨슨 등의 연구를 통해, 로마 제국 원수정 초기의 재무부에서 벌인 귀금속을 통한 화폐 주조 등으로 쉽게 반박되고 있다. 아울러 세네카가 주장한 칼리굴라가 곡식수송선을 가지고 장난질했다, 공공마차를 압류했다는 이야기 역시 로마 정부가 갈리아에서 벌어진 기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벌인 조치였기 때문에, 현대에는 칼리굴라가 왜 낭비만 하고 악행을 전부 했다고 까이는 지 의문이라는 의견을 듣고 있다. 또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과 세네카의 기록 중, 세네카의 기록은 자신과 친구들의 당대 브리타니아 일대에서 벌인 악행을 칼리굴라와 황실에게 돌리는 시도 등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 황제의 잔인한 광기를 평가할 때도, 칼리굴라가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행보를 ‘정신 착란 증세와 발작으로 최고 권력에 집착한 미치광이’ 라는 고대의 저서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 특히,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들은 그 악행을 중구난방식으로 서술하면서 근거없는 소문들을 같이 적어놓은 경우가 많다. 또한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필로 등 당대 기록들의 차이가 심하다. 이는 당대 로마인 사가인 필로의 조카이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를 직접 경험한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같은 인사들도 비슷한 입장인데, 요세푸스는 “재정적으로 무리처럼 보인 남부이탈리아 일대의 항구 건설들은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곡물 수급을 증대시키고, 기근을 해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할 정도였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대차대조를 통해 분석하면서 고대부터 실제로 했다고 하는 일들이 거짓이거나, 비방성으로 만든 경우가 많아 칼리굴라가 했다던 악행과 기행 중 대부분에 대해 거짓말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늘날에는 칼리굴라를 평가할때, 무작정 패도자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이외에도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이 지나치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에 비해 노골적으로 점증된 지위 향상으로 비춰진 탓에 원로원과 반대파들에게 ‘미치광이’로 기록되었고, 제2의 세야누스 등장을 의식해 자신의 장인을 비롯한 근위대장들을 숙청하면서 견제를 해왔다가 결국 근위대장과 일부 근위대 병사들에게 자신이 암살되는 결과를 맞았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가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한 이후 동료 공모자들을 모을 당시 “지나치게 원로원과 기사계급 부자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통보를 했다는 것과 암살 사건 당시 친황실파와 게르만 호위대의 대응,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일어난 아시아티쿠스 사건, 요세푸스의 주장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칼리굴라 시대에 로마 제정의 중요한 정책들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가 취한 속주 정책들 역시 기존의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와 그 스타일만 다를 뿐, 전반적으로 이전 로마 공화정 시대의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비슷했다. 또 칼리굴라는 네로처럼 돈이 궁해졌다고 속주세를 인상하지는 않는 등,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결정한 중요 사항을 제멋대로 교체한 경우가 없었다.
상술한 것처럼 칼리굴라가 즉위 후 무절제하게 국고를 낭비하긴 했다는 부분의 경우, 그가 이렇게 비난받은 진짜 이유는 여러 연구들을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원로원이 가지고 있는 화폐발행에 관한 권한들을 황제가 완전히 장악하고 루그두눔으로 그 시설을 옮긴 탓이 컸다. 그래서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암살당한 이후, 이 조치를 원상복귀 시키길 원했는데,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한 어떤 후임황제도 이 조치를 되돌려주지 않았다. 또 칼리굴라의 사치와 악정이라고 불리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그의 치세기때 결정이나 행보들은 네로처럼 그것이 심각한 부채와 제국 전체를 흔드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처럼 엄청난 유증금을 다 쓰고 국고까지 바닥낸 까닭에 국가 재정기능이 망가지거나, 이를 이유로 속주민들에게 강탈을 하거나 군대 월급을 밀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즉,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의 악정이라고 주장되는 부분은 이후 네로, 콤모두스처럼 로마 역사에 큰 해가 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칼리굴라가 한 일들은 순전히 전임황제가 아우구스투스 시대 때 결정난 무언가를 중지시킨 것을 되돌려 계획대로 짓거나, 황실어른들의 중지된 유언장을 집행 또는 큰 행사를 여는 등 돈을 쓰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는 개인적으로는 사치가 전임자보다 심했다고 해도 다른 폭군들과 달리, 순전히 개인적인 쾌락만을 위해 국고를 낭비하지 않았다. 또 그의 시대동안 로마 재무부에서 발행하는 화폐주조, 발행 등의 일과 국가 업무 재정 정책들은 제대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연구 역시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세네카의 주장이 쉽게 반박된 이유이다.
칼리굴라는 자기과시적인 인물이지만, 개인 취향을 담당하는 전용관리나 사치품 조달 담당관 등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굴라가 같이 묶이는 네로, 콤모두스처럼 개인적인 사치로 낭비한 황제라고 평가받았던 이유는, 그가 벌인 일들이 선제인 티베리우스가 남긴 막대한 자금을 썼기 때문이다.
100여년 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등에게 칼리굴라가 비판받는 또 다른 이유는 칼리굴라가 암살직전까지도 원로원과 끊임없이 기싸움을 벌인 이유도 컸다.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등극 당시 원로원에 대한 반역죄를 없애고 기록도 불태우는 등의 행동으로 원로원의 지지를 얻었지만 이후 원로원 의원을 정면에서 모욕하는 일이 흔했으며, 원로원의 각종 특권을 박탈하고, 반역죄로 원로원 의원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몇몇 원로원 의원을 고문하고 자살시키는 등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칼리굴라의 방식이 두 전임자처럼 세련되지 않고 과격하긴 했어도, 원로원과 황제 모두의 판단처럼 마우레타리아 문제는 로마의 국력으로는 동방에서 벌어지는 문제보다 빨리 해소할 수 있었다. 또한 필로 등 당대 기록처럼 시한폭탄과 같았던 알렉산드리아 내 그리스인들과 유대인 갈등 문제도 직접 양쪽 이야기를 들은 뒤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결했다.
중병에서 회복한 직후, 칼리굴라는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화폐 발행권을 빼앗아 그 권한을 갈리아 지방의 리옹으로 옮겼고, 원로원에게서 속주 총독 임명권을 빼앗는 등의 행동으로 평가가 상당히 나빠졌다. 이런 까닭에 즉위 후 기반을 만들고 있던 시점부터 원로원과 꾸준히 대립했다. 아울러 제국 전역에 자신과 황조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를 강화해 암살 전 원로원에게 노골적으로 프린켑스 지위를 전제화킨다고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짦은 4여년간의 통치 기간동안 프린켑스와 원로원 간의 관계는 티베리우스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이런 이유 등으로 당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성격,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은 교차 검증되지만 악정에 대한 기록은 중구난방이고 대부분 불확실한 서술들이라서 실제로 악정인지도 의문일 정도로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전 티베리우스 시대에 비해 사치를 부린 것도 사실이지만 네로처럼 제국 내 재정을 흔들릴 정도로까지 몰고 가지 않았고, 로마 제정 특성상 재위 초기에 황제들이 민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베푸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보면 짧은 재위기간인지라 황제권을 다지기 위한 준비 도중에 죽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때 원로원 의원들에게 노골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하고 자신과 여동생들을 신격화하는 등 원로원 길들이기와 황제권 강화를 본격화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굉장한 폭군으로 그려지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조치들을 과거처럼 ‘미치광이 폭군’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짧은 재위기간을 가진 탓에 남아있는 기록조차 극소수인, 뭘 보여주기도 전에 죽은 황제 내지 처음으로 가면을 벗고 노골적으로 원로원에게 프린켑스의 점증화된 권력을 보여준 황제라고 재평가하고 있다.
– 수에토니우스 기록에 따른 기행들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 (오늘날의 알제리 안나바) 태생인 수에토니우스는 사실 칼리굴라 시대를 직접 살아본 인물도 아니고 100년이 지난 이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칼리굴라의 폭군 이미지는 모두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물인 “황제들의 삶 (De vita Caesarum)”이라는 저서에서 나왔다.
수에토니우스는 지독하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싫어했던 집안에서 이 시대 이야기를 들었고, 고향인 북아프리카와 성인 이후 살게 된 로마 거리에서 100년이 지난 이후에도 떠도는 온갖 뜬 소문을 모으고 모아 책을 출간하였다.
특히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외모와 잔인함, 폭력성 등과 카이사르 간질설, 카이사르 동성애자설 등 역시 수에토니우스의 책에서 처음 기록되었다.
또 다른 인물들의 동시대 저서에서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 검증되지 않은 채 상당수 나와있기에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읽을 때 유념할 필요가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