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532년 1월 11일,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에서 ‘니카 반란’ (Nika riots) 발발
니카 반란 (Nika riots, 그: Στάση του Νίκα)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 (Hippodrome)에서 벌어진 전차경기가 끝난 후 청색당과 녹색당이 서로 충돌, 관중들이 경기장을 뛰쳐나와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니카 반란 (Nika riots, 그: Στάση του Νίκα)은 532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532년 1월 11일 일어나 약 일주일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었고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수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진압으로 약 수만 명 (3만 명 이상)이 죽었다.
○ 배경
고대 로마에서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경주가 상당히 발달했고 인기를 끌었다. 제국 전역에 큰 도시는 대부분 히포드롬이라고 부르는 원형경기장이 있었다. 또한 각 전차경주는 4개의 팀으로 나뉘어져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어 서로를 구분했는데 각각 적색, 청색, 녹색, 백색이었다. 로마 제국에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4개의 전차경주팀은 2개로 줄어 녹색당과 청색당이 남았는데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각각 큰 파벌을 이루고 현대의 정당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 당시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그리스-로마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고 그래서 전통 기독교인들이 많았는데 반해 녹색당은 상인, 기술자 등 중간 계층이 주로 후원했고 종교적으로는 단성론에 가까웠다.
양 파벌은 마치 정당처럼 조직을 이루고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황제는 중요한 공공사업을 그들을 통해서 벌였고 심지어 각각 사병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양측은 서로 빈번히 충돌했는데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의 시기인 493년, 501년, 511년에 충돌했고 특히 511년에는 황제가 직접 나서서 황제의 직을 걸고 폭동을 해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할 당시 청색당을 지지했고 이들의 지지에 입는 바가 컸는데 점차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녹색당뿐만 아니라 청색당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거기에 트리보니아누스와 카파도키아의 요한 등 휘하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로 시민들의 불만이 점차 팽배해졌다.
532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벌어진 전차경기가 끝난 후 청색당과 녹색당이 서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황제는 즉각 군대를 투입해 질서를 회복했는데 이것이 니카 반란의 발단이 되었다.
○ 반란의 경과
1월 10일의 충돌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청색당과 녹색당의 지도자를 처형하고 감금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양 세력이 서로 힘을 합쳐 시위를 벌였다.
사흘 뒤 전차경주가 재개되었으나 성난 군중은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황제를 향해 승리를 의미하는 “니카!” 를 외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황제는 피신하고 경주를 중단시켰다.
군중은 더욱 화가 나서 경기장을 뛰쳐나와 폭동을 일으켰고 감옥을 부수고 관리들의 집에 무차별 방화를 하였다. 이때 발생한 화재로 원로원 의사당, 하기아 소피아 성당까지 불에 타버렸다.
폭동은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황제는 군중의 요구대로 관리들을 경질했으나 군중은 전임 황제의 조카인 노인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경기장에서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황궁으로 피신했다. 황제와 측근들은 도망갈 채비를 하고 막 도피를 논의 했다.
그 때 황후 테오도라가 회의장에서 황제를 꾸짖으며 당당히 맞서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도망쳐서 안전할 수 있다하더라도 도망가서는 안되며 황제로서 부끄럽게 도망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은 끝까지 황궁을 지키겠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을 듣고 황제와 측근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란진압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젊은 장군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라는 장군을 불러들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 반란의 결과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는 몰래 군대를 이끌고 히포드롬으로 가서 동시에 무차별로 군중을 학살했다.
또 다른 장군인 환관 나르세스는 군중들이 도망을 치지 못하도록 막았고 경기장 안에서만 약 3만 명의 군중이 학살당했다.
군중들로부터 얼떨결에 황제로 추대된 노인 히파티우스도 황제 앞에 잡혀왔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가 자신의 의사에 반해 황제로 추대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용서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황후 테오도라가 제지하며 처형을 주장했다. 한번 군중에 의해 제관을 받은 몸이니 나중에라도 반란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였다.
결국 히파티우스도 처형되었고 이로써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다. 반란은 8일 만에 끝났다.
시민 3만명이 학살돼 비잔틴제국 1123년 역사상 가장 큰 소요사태로 꼽히는 니카 반란의 숨은 이유는 종교적 불만과 고율의 세금. 서로 다른 교리를 신봉하는 녹색당과 청색당에 종교토론을 금지시키고 세금을 올린 데 대해 누적된 불만이 초당파적 반란을 불렀다.
반란은 시민 3만여명 학살이라는 기록과 함께 역사에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소피아 대성당이 폭동으로 불타 없어진 옛 성당을 대신하기 위해 건립되고 함무라비 법전, 나폴레옹 법전과 함께 세계 3대 법전이라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편찬작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 니카 반란 피 위에 세운 소피아성당
니카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황제는 난동자들이 불태운 소피아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심했다. 반란이 진압된 다음달인 532년 2월, 황제는 소피아성당 재건축을 지시했다. 이반된 민심을 종교적 신앙심으로 되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황제 스스로도 이 성당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고 싶었다.
그는 새로 지어질 소피아 성당은 이전의 모습과 달라야 한다면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어야 하고, 정사각형이며 중앙의 높은 지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혁명적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Anthemius)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Isidorus)라는 두 건축가가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천재적인 두 건축가는 불과 6주일만에 설계를 마쳤다.
성당 북쪽에 5천명, 남쪽에 5천명의 인력을 배치해 서로 경쟁을 붙였다. 속주에서 고대 유물을 수도로 가져 오게 했다. 높이 48m, 너비 32m의 거대한 돔 천장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이전에 지어진 어느 성당보다 몇배나 넓고 높았다.
537년 12월 27일, 건물이 완공되었다. 5년 10개월 4일 걸렸다. 처음으로 성당에 들어온 유스티니아누스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솔로몬이여, 나는 당신을 이겼도다”고 중얼거렸다.
이 초대형 건축물은 1천5백년의 기나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니카 반란을 진압하고, 소피아성당을 재건한 이후 벨리사리우스에게 병력을 주어 북아프리카 반달족을 물리치고, 로마제국의 본향인 이탈리아를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