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536년 12월 9일,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 (Flavius Belisarius) 장군이 동고트 왕국의 로마에 입성
동고트의 테오도릭은 454년 테오데미르 (Theodemir)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오도릭은 유년기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인질로 보내며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테오도릭은 로마의 귀족 칭호와 집정관 직위 등 로마식 관직으로 치장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행동했다. 488년, 테오도릭은 제논의 위임을 받고 이탈리아를 오도아케르로부터 수복하러 나서 493년 오도아케르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점령하고 손수 오도아케르를 죽였다. 동고트족의 지배는 서로마의 중요지대인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와 알프스 이남까지 미쳤으며, 기록에 따르면 이 전쟁중에 동·서고트족이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세력의 정점에서 테오도릭이 툴루즈의 서고트 왕국의 섭정이 되며 그의 영향력은 갈리아의 많은 부분과 스페인 거의 전체에 미쳤다.
이런 상황에 동로마의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Flavius Belisarius, 505년경 게르마네 (오늘날 불가리아 사파레바 바냐) ~ 565년 3월 경 (50/60세), 칼케돈 루피니아나이]가 505년 출생한 비잔티움 제국의 유명한 장군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장군이다.

– 벨리사리우스 (Flavius Belisarius)
.출생: 505년 경, 게르마네 (오늘날 불가리아 사파레바 바냐)
.사망: 565년 3월 경 (50/60세), 칼케돈 루피니아나이
.별명: 폴란드의 바야르
.배우자: 안토니나
.복무: 비잔티움 제국
.최종 계급: 장군
.근무: 비잔티움 제국 육군
일리리아 (현재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군에 입대했다.
530년 다라의 전투에서 사산 제국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으나 531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칼리니쿰의 전투에서 완패,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었다.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교가 되었고, 536년 12월 9일, 동고트 왕국의 로마에 입성하는 등 서로마의 영토회복에 힘썼다.

○ 생애 및 업적
벨리사리우스 (Flavius Belisarius) 장군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즉위하던 시기 영토확대에 많은 기여을 했다.
– 반달족과의 전쟁
533년 아프리카로 항해해 레프키스 마그나 근처에 상륙, 당시 반달족이 수도로 하고 있던 카르타고로 향했다. 반달왕국의 왕 겔리메르를 맞은 벨리사리우스의 비잔틴군은 카르타고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에서 아드 데키미움의 전투를 벌여 완패했다. 그러나 겔리메르의 조카가 전투에서 죽어 전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벨리사리우스는 티카메론의 전투에서 반달군을 격파, 534년 항복하게 만들었다.
– 동고트족과의 전쟁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나르세스를 동고트 왕국전선에서 해임하고 벨리사리우스를 투입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빠르게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했다.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수복하고, 540년 동고트 수도인 라벤나를 점령했다. 동고트족을 비잔틴 황제는 믿지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괜찮다고 여겨 그에게 왕국 절반을 주었고,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왕관을 받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분노를 샀다.

수도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재투입되었으며, 빼앗긴 시리아를 놓고 페르시아와 한동안 교전을 벌이다가 545년 금 5천 파운드를 전쟁 보상금으로 페르시아에 넘겨주는 대신 페르시아군이 로마령을 5년간 침공하지 않는 것으로 강화협정을 맺었다.
541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그가 옹립한 동고트 왕 일디바드는 암살되었고 토틸라가 왕이 되어 있었으며, 토틸라의 동고트군은 비잔틴군을 무섭게 몰아내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토틸라에 대해 공세로 들어갔으나, 머지않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나르세스로 교체되었다.
– 말년 업적
559년 벨리사리우스는 도나우 강을 건넌 불가르족 전선에 투입되어 그의 장수로서 경력의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562년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횡령 혐의로 고소되어 징역이 선고되었으나,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프로코피우스가 꾸며낸 모함이었다. 황제는 곧 벨리사리우스를 풀어주었다.
565년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 평가
고트족계 집안에서 태어나 13세 무렵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0년 정도 만에 부대장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게다가 그는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고도 하는데, 심지어 장군들과는 앙숙이라고 할 수 있던 환관들조차 니카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그의 공적을 고평가해 벨리사리우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그를 지지했고, 527년 장군의 직위에 오르며, 530년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다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내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3년만에 동고트 전선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황제 역시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출중한 능력에 어울리게 수많은 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가 해내지 못한 유일한 임무는 당시 동로마 근해에서 날뛰는 고래를 잡는 일 정도였고, 이것도 휘하 부하들의 실수가 문제였지, 그의 실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업적 중 손꼽을 만한 일은 역시 대제의 명을 받들어 멸망해버린 서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한 고토 수복 원정이다. 그는 턱 없이 높은 이상에 비해 부실한 지원만을 해주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령을 받들어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에 1만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 10만 대군을 이끌고 마중나온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를 단숨에 격파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

이후에는 재차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는데 당시 지원받은 병력은 7천명으로 아프리카 상륙 당시보다도 적었다. 당시 이탈리아 지방에는 동고트 왕국의 15만 병력에 육박하는 세력이 버티고 있었음을 감안해본다면 매우 어려운 전투였으나 군말없이 명을 받들고 이탈리아에 상륙, 그야말로 한줌의 병력으로 연전연승하며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수복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후 열린 휴전협상에서 로마 황제를 믿지 못한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를 믿고 협상에 임해, 왕국 절반과 왕위를 주기로 제안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왕위를 받는 척하고 주동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그리고 테오도라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질 못했다. 이미 젊어서 황제와 고토수복의 현실성을 두고 입씨름을 벌였고, 로마 정복 이후에도 통치방식을 두고 다퉜다. 덕분에 의심많은 황제는 그에게 제대로 된 병력지원을 해준 일이 없었다. 게다가 동고트 왕국과의 휴전협상에서 그가 왕위를 제안받은 사실은 큰 오해를 낳았다.
이탈리아 원정 종결 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하고,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도 맡게 되었으나 그의 모반을 두려워한 황제는 거의 병력을 보내주지 않는 지경이었고, 겨우겨우 전선을 유지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본인이 지친 탓도 있거니와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오랜 기간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에 지쳐서 총사령관직을 반납하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에도 불가르족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562년 횡령혐의를 받아 재산이 몰수되고 면직되었다. 물론 곧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지만, 이 당시 몰수 당한 재산 때문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병사들에 밀린 급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 고생하게 된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각가지 설이 많은데, 횡령혐의를 받았을 때 황제가 그의 양눈을 뽑아버려 장님이 되어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로 살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널리 퍼졌다. 그와 관련해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그림들은 이 설에 근거하여 옛 부하가 놀라거나 적선해주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의 일로 인해 한차례 면직되었다가 복권한 후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해 병으로 사망했다.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전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뛰어난 장군으로 칭해진다. 벨리사리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의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당대 명장이라 칭해지는 인물들과 비견되는 이유는 대략 이와 같다. 정복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 떼어놓은 수비병을 제외하면 초기에는 단 1만명의 병력, 후기에는 수천의 병력만으로, 그것도 사실상 아무런 지원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지역을 탈환한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 트라야누스, 후의 바실리우스 2세조차 이렇게 적고 부실하며 보급조차 제대로 받기 힘든 이 상황에서 탈환의 목표인 각 지역의 상당 수를 점유하고 있던 적국들을 정복하진 못했다. 벨리사리우스와 같은 악조건으로 싸운 인물은 이라클리오스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빼고는 찾기 힘들다.
다만 그가 정복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반달 왕국은 긴 내전으로 인해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반달족의 지배에 염증을 느낀 북아프리카인들이 카르타고로 가기까지 스스로 성문을 열어 주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자신의 사병까지 포함해 1만명도 되지 않았으나 이탈리아인들의 호응으로 로마까지 순조롭게 갔다. 로마에서는 다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삼만명의 민병대 지원을 받는다. 다만 일부 이탈리아인들은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동로마인들을 해방자가 아닌 전쟁을 일으키는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다.

실제로 동로마군이 로마시를 방어하는 로마 공방전 때 성문 열쇠를 몰래 가져다 주려다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이렇듯 고트족과 이탈리아인들은 그렇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으나, 이 전쟁 이후로 고트족들은 이탈리아 토착민들을 불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전까지의 상대적으로 평화롭던 통치는 끝나고 밀라노시의 시민들이 전부 학살되기까지 한다.
황제와의 반목으로 시련을 겪는등 불행한 삶을 보내기도 했으나, 당대에 벨리사리우스는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적군들에게도 명성이 높았었는데, 그의 명성과는 다르게 부인인 안토니나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였으나 남편과 달리 고결하지도, 정숙하지도 않은 희대의 난봉꾼이였다.
그럼에도 벨리사리우스가 그녀와 이혼하지 않았던 이유는 안토니나가 황제의 부인인 테오도라 황후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벨리사리우스가 의심병 환자라는 조롱을 들을 만큼 조심성이 강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게 실각당하거나 암살당하지 않았던 점도 아내인 안토니나와 테오도라 황후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안토니나가 양자였던 테오도시우스와의 스캔들에 휘말리고 원채 여장부였던 탓에 가정 내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앞서 언급되었듯이 안토니나는 심각한 바람둥이로 유명했기에 벨리사리우스는 아내를 믿지 못해 전쟁터에 까지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사실 황제와의 반목의 원인중 하나로 제시되는 것도 바로 안토니나와 테오도라의 친분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벨리사리우스가 안토니나와 싸우게 되면 안토니나는 테오도라-유스티니아누스를 통해 남편을 압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벨리사리우스는 황제 뿐만이 아니라 황후에게도 원정군에 많은 후원을 받았는데, 안토니나의 말 한마디로 이게 모두 끊길 수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벨리사리우스는 세운 공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반감을 크게 샀으나, 테오도라의 사망 이후에서야 어느 정도 반감이 누그러지게 되었다.
‘로마 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벨리사리우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의 훤칠한 키와 당당한 용모는 가히 영웅의 풍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관대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 그는 백성들의 애정도 잃지 않으면서 병사들의 사랑도 받았다. 병들고 다친 병사는 약과 돈으로 구할 수도 있지만, 사령관의 병문안과 미소로써 더 효율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 군대에서 그가 술에 취한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고트족이나 반달족의 포로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를 그에게 바쳤으나 그는 그들의 매력을 멀리 했고, 안토니나의 남편으로서 부부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 그의 무훈을 목격한 사람과 기록한 역사가는 전쟁의 위험 속에서 그가 용감하되 경솔하지 않고, 신중하되 겁먹지 않으며, 상황의 급함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는 것을 익히 보았다. 그는 곤란한 역경 속에서도 희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순조로운 흐름 속에서도 겸손하고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제41장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