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69년 12월 31일, 존 터틀 우드 (John Turtle Wood, 1821 ~ 1890)가 아르테미스 신전 발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하지만 이름만 존재하던 아르테미스 신전 (에페소스 신전)은 유럽인들에게 관심은 컸지만 발굴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스 신전의 발굴에 착수한 사람은 영국의 건축가이자 엔지니어로 이후 고고학자로 명성을 얻게된 존 터틀 우드 (John Turtle Wood, 1821년 2월 13일 ~ 1890년 3월 25일)로 1869년 12월 31일 발굴에 성공한다.
1858년 우드는 터키의 Smyrna 및 Aidin 철도역을 설계하는 의뢰를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아르테미스 신전 유물에 관심이 생겼다. 에베소 신전과 관련해 신약성경 에베소서 19:34에 “위대한 에베소의 다이애나”란 기록에 기인했고 그는 신전발굴에 대한 사명감 마져 들었다.
1863년에 그는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영국 박물관으로부터 에베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물에 대한 재산권을 댓가로 발굴에 필요한 허가와 비용을 지급받았다.
1866년 2월 에베소 극장을 발굴하던 중 우드는 정기적으로 사원에서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극장으로 운반되는 다양한 금과 은 조각상을 언급하는 그리스 비문을 발견했다. 그는 마그네시아 문에서 성전으로 이어지는 포장 도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67년에 그는 길을 발견했고 그 길을 따라 성전 벽을 발견했다.
그는 계속해 파나가다 1869년 12월 31일에 20 피트의 모래 아래에 묻힌 신전을 발견했다. 그가 발굴한 지역은 엄청났다. 안타깝게도 신전은 잔해만 남았지만 발굴지 면적은 거의 200미터 각으로 거의 12,000평이나 되며 길이도 6미터에서 9미터나 되었다. 신전의 돌들로 석회를 만들었던 용광로의 자리도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발견된 건축물 조각품들, 조각상들과 동전들은 모두 영국으로 보내졌다.
당시 에베소 신전 발굴지는 세계 각지에서 유명인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문지가 되었다. 우드는 귀빈들의 안내로 발굴을 중단해야 할 정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871년 겨울에는 슐리만이 그를 찾았다. 슐리만은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는데 터키 정부에서 발굴중단 명령을 내리자 철수해야할지, 아니면 터키 정부의 허가장을 청원해야 할지 여부를 우드에게 묻기 위해 찾은 것이다. 이때 우드는 트로이 유적 발굴을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고 결국 슐리만은 우드의 조언에 의해 터키 정부로부터 발굴 허가장을 받고 2년 후 1873년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기에 이른다.
슐리만의 방문이 있은지 20일 후 세계7대 불가사의인 마우솔레움을 발굴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대영박물관의 뉴턴 경이 방문했다. 뉴턴 경은 우드를 격려하면서 대양박물관 측에서 발굴에 필요한 보조금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고고학계가 우드의 발굴을 인정한 것이다. 대영박물관의 지원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발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발굴지를 구입하여 대대적인 불굴에 착수했다. 이때 스코파스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조각이 있는 36개의 기둥 중에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 기둥은 현재 대양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는데 대양박물관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다.
우드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질 때인 1874년 공교롭게도 뉴턴 경이 대영박물관의 감독관이 된다. 뉴턴 경은 이때 에베소 발굴작업 지원을 전액 삭감하고 대신에 아이아솔뤼크에 있는 이사베이 모스크를 발굴한다면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통보한다. 우드는 이사베이 모그크의 발굴에 착수하지만 회교도인 촌장이 밝굴 허가를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뉴턴경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을 알아차린 우드는 아르테미스 신전 발굴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생각한다.
우드는 에베소 신전의 발굴자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발굴 지역은 방대하고 자금은 부족했다. 이 즈음에 우드의 건강은 신전 부지의 잔해만큼이나 황폐해졌다. 그는 발굴하는 동안 고열, 산적, 지진, 부상을 견디고 여름 더위와 추운 겨울을 견뎌냈다.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남은 몇 년 동안 왕립 연구소에 강연과 출판활동 등을 하면서 발굴 자금을 모금했다.
그는 1884년 까지 20여년 동안 아르케미스 신전 발굴에 헌신했으며 자신의 발굴을 토대로 아르테미스 신전의 복원도를 작성하고 그림을 그려 때때로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했다.
1874년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의 연구원으로 선출되었고, 1875년에는 고고학 협회의 연구원으로 선출되었다. 영국 정부는 그의 발견을 인정하여 그에게 연간 200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했다. 1877년에는 ‘대신전의 장소와 유물을 포함한 에페소스의 발견’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우드는 1890년 3월 25일 69세에 심장발작으로 자택 (66 Marine Parade)에서 사망했다.
○ 아르테미스 신전과 디디마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지만 로마시대의 동전에 신전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 단편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의 터키 밀레토스 남쪽에 위치한 디디마의 고대 성소이자 아폴론 신전의 유적으로도 아르테미스 신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디디마 신전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길이에서 2미터가 작을 정도로 규모가 거의 같은데다 현재도 비교적 온전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디마 신전은 터키 아나톨리아 이즈미르 (Izmir)에서 에게해 해안을 따라 약 160㎞ 남쪽에 있다. 중요한 점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한 많은 건축가들이 디디마 신전의 건설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평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있지만 두 신전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특히 디디마 신전의 정교하고 세심한 조각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이다.
디디마 신전은 아르테미스 여신의 오빠인 아폴론에 봉헌되었으므로 아폴론의 신전이 동생인 아르테미스 신전의 혈통을 이어 받은 셈이 되었다.
터키 남서부 셀축 (Selçuk)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 (Temple of Artemis, 또는 Artemision)이 있었다. 당대 최대였다는 신전은 무너지고, 127개였던 기둥들 중 하나만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 번째 지어진 신전이며, BC 356년 7월 20일, 헤로스트라투스 (Herostratus)라는 미치광이의 방화 (放火)에 의해 무너진 아르테미스 신전은 두 번째 지어진 신전이다.
방화범 헤로스트라투스의 신분에 관해 알려진 게 없다. 방화범은 에페수스인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며, 노예였다는 설이 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이름이 길이 남을 방법을 찾다가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우기로 했다. 신전의 지붕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는 불을 질러 신전을 태우고 붕괴시켰다. 즉시 에페소스 당국에 체포되어 형틀에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재판관들은 허명심에 불탄 그를 저주하기 위해 아무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고 명했다.
하지만 테오폼푸스 (Theopompus)라는 역사가가 자신의 역사서에 그의 이름을 기록했고, 그후에도 사가들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페로스트라투스는 자신의 뜻대로 이름을 길이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이로부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현상을 일컬어 헤로스트라투스 명성 (herostratic fame)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었다.
두 번째 신전에 관해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스 시인 안티파트로스 (Antipatros)는 7대 불가사의를 서술하면서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전차 (戰車)를 위한 길이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 (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
두 번째 신전이 방화로 붕괴된 날은 BC 356년 7월 21일이었고, 그날은 우연하게도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탄생한 날이었다고 한다.
○ 아르테미스 신전 개관
아르테미스 신전 (그: Ἀρτεμίσιον, 아르테미시온)은 드물게는 디아나의 신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소아시아의 에페소스 (오늘날의 터키 셀추크 부근)에 있었다.
이 신전은 2번이나 완전히 새로 세워졌는데, 첫 번째로는 거대한 홍수로, 두 번째로는 방화로 인한 재건이었고, 3번째로 지어진 아르테미스 신전이 바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기원후 401년에 최종적으로 파괴되었고,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남아있다.
– 역사
.첫 번째 신전
첫 번째 신전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칼리마코스는 그의 아르테미스 찬가 중에서, 그 신전을 오래전에 존재했다가 사멸한 아마존족이 지었다고 믿고 있다. 건립 시기는 언제인 지는 알 수 없고 정황상 히타이트의 구성 국가 중에서 누군가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나, 기원전 7세기에 옛 신전은 홍수에 의해 조각 파편 한점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파괴된다. 이 때문에 이 신전의 생김새는 영원히 알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 신전
그 재건은 1세기가 흐른 기원전 550년에 시작되는데, 리디아 출신의 크로이소스가 자금을 대었고 크레타 출신의 케르시프론과 그의 아들 메타게네스가 건축하였다. 그 계획에 10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후 헤로스트라투스의 방화 (放火)로 파괴되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한 시돈의 안티파트로스는 당대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전차 (戰車)를 위한 길이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 (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
.세 번째 신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번째로 다시 세워지기로 하였으나, 착공은 알렉산드로스 사후 (死後)인 기원전 323년에 시작되었다. 세 번째 신전은 규모가 더 커졌다. 길이 137m, 너비 69m, 높이 18m에 127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신전은 600여 년을 살아남아, 에페소스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기록에 몇 번이나 등장한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41절에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에페소스에서 사도 바울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설교를 하자, 아르테미스 신상모형장사로 부를 쌓던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바울이라는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설교를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위대한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업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라고 직공들과 시민들을 선동했다. 덕분에 바울과 같이 선교활동을 하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아리스다고가 연극장에 잡혀갔고 2시간이나 아르테미스를 찬양하며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척하는 집회가 벌어졌는데, 시의 지도자인 서기장이 시민들에게 “항의할 것이 있으면, 총독들과 민회에 고소하여 시비를 가리십시오. 불법집회를 일으키는 것은 책망받을 것이니 신중하지 못합니다.” 라면서 이성을 되찾아서 진정하도록 설득했다.
또한 2세기 작품인 위경 (僞經) 요한행전 (Acts of John)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파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도 요한이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매, 그 악령을 몰아내고 “갑자기 신전의 제단이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 신전의 반이 무너졌다.” 그리하여 비탄에 잠겨 있던 에페소스 사람들이 즉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한다.
– 방화
BC 356년 7월 20일 (알렉산더 대왕의 탄생한 날) 헤로스트라토스(Herostratos)의 방화로 두 번째 재건된 아르테미스 신전은 타버렸다. 그 뒤에 신전이 재건되었는지 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의 기록이 불확실하다.
서기 268년, 신전은 고트족의 약탈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고트족의 이러한 행위는 신전에 최후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의 기둥 몇 주(柱)는 원래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이었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서 ‘Parastaseis syntomoi chronikai’는 신전의 몇몇 석상과 재료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여러 건물들에 재활용되었다고 기록한다.
– 재발견
아르테미스 신전은 파괴된 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대영박물관이 후원하고 존 터틀 우드가 이끄는 탐사대가 6년의 탐색 끝에 1869년 재발견한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