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8년 1월 22일, 영국의 시인 제6대 바이런 남작 조지 고든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1788 ~ 1824) 출생
제6대 바이런 남작 조지 고든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FRS, 1788년 1월 22일 ~ 1824년 4월 19일)은 영국의 시인이다. 존 키츠, 퍼시 비시 셸리와 함께 낭만주의 문학을 선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글재주로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2살 때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집을 옮겼으나 1798년에 제5대 바이런 남작이 죽었으므로 제6대 바이런경이 되어 조상의 땅 노팅검으로 옮기게 된다. 이듬해, 런던에서 나와 해로우 스쿨에 들어간 뒤 1805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지만 학업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나날을 보냈다. 1808년에 케임브리지를 떠나, 1811년까지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등을 여행하고 귀국한 뒤 런던에 살다가 1812년에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Childe Harold’s Pilgrimage)를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 후 ‘돈 주앙’ (Don Juan) 등 유명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여 19세기 낭만파 시인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1815년에 아나운서 안네 이자벨라 밀 뱅크와 결혼하였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이다. 그러나 이듬해 별거하여 흐트러진 생활로 비판을 받아오다가 영국을 떠나 스위스에서 퍼시 비시 셸리 (Percy Bysshe Shelley)를 만나 스위스 각지를 떠돌면서 퇴폐한 생활을 계속한다.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던 그는 1823년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여하여 독립군에게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오늘 나는 36세가 되었다’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그는 사망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생각하는 시를 쓴 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다 죽은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가운데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가진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복누나 어거스터 리 (Augusta Leigh)와의 근친상간 루머가 있다.
– 조지 고든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출생: 1788년 1월 22일, 영국 런던
.사망: 1824년 4월 19일 (36세), 오스만 제국 아이톨리아 메솔롱기 (現 그리스 에톨로아카르나니아)
.직업: 시인 / 국적: 영국
.학력: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1805–1808)
.장르: 낭만주의 / 사조: 시
.자녀: 엘리자베스 메도라 리 (1814–1849), 에이다 러브레이스 (1815–1852), 클라라 알레그라 바이런 (1817–1822)
.주요 작품: 돈주앙,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영향 받은 인물: 알렉산더 푸쉬킨, 샤롯 브론테
.영향 준 인물: 존 밀턴, 알렉산더 포프
○ 생애 및 활동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1788년 1월 22일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사 악명이 높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잭은 이런 바이런 집안의 전형적인 인물로 재혼을 한 후에도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고서 가족을 버리고 프랑스로 도피해 거기서 비참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캐서린은 세 살 난 외아들 바이런을 데리고 그녀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애버딘 (Aberdeen)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애버딘으로 가서 적은 수입으로 세를 얻어 살았던 그는, 절름발이라는 사실에 매우 민감했던 소년 시절에 애버딘 그래머 스쿨 (Aberdeen Grammar School)에 다녔다. 그가 열 살 때 자식 없이 죽은 부도덕한 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작의 작위를 물려받아 ‘바이런 경’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고 큰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잉글랜드에 있는 본가인 뉴스테드 (Newstead)로 돌아갔다. 변호사인 존 핸슨 (John Hanson)의 도움으로 바이런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1799년 가을에 덜위치 (Dulwich)에 있는 학교에 가기도 했다.
1801년에 바이런은 해로 스쿨 (Harrow School)에 입학했고 곧이어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진학하게 되는데, 학창 시절 동안 학교 공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시를 쓰고 소설과 역사책을 즐겨 읽었다. 또한 그는 선천적으로 불구인데도 운동을 좋아했고 술과 나쁜 친구와 천박한 여자들을 접하고 도박에도 손을 대 빚을 지는 등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진보적인 휘그 (Whig)당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1807년 여름 바이런은 그의 초기 시들을 묶어서 11월에 ≪덧없는 시편들 (Fugitive Pieces)≫이라는 시집을 자비로 인쇄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에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시집 ≪한가한 시간 (Hours of Idleness)≫을 정식 출간했다. 하지만 이 시집이 <에든버러 리뷰 (Edinburgh Review)>에 의해 혹평을 받자, 그는 1809년에 <영국의 시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비평가들 (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을 써서 비평가들을 통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에 성년이 된 그는 1월에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귀족원의원이 되어 당시의 귀족 자제들의 관습에 따라 일찍부터 꿈꾸어 오던 유럽 대륙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포르투갈, 스페인, 몰타, 알바니아, 그리스, 콘스탄티노플까지 두루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체험하고 문학적인 시야를 넓힌 후 1811년 7월 14일 런던으로 귀국했다.
1812년 2월 27일에 바이런은 상원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으며, 3월 초에 출간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1·2편은 2년간에 걸친 그의 유럽 여행에 대한 기행문인 셈인데, 이 시에서 주인공인 차일드 해럴드는 동방 제국을 순례하면서 보고 체험했던 이국의 풍물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노래한다. 이 시는 바이런에게 “어느 날 아침에 깨어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뜻하지 않은 성공을 가져다주어서 미모의 청년 귀족 바이런이 휘그당 모임에서 명사 취급을 받도록 했으며, 영국 상류 사교계의 열렬한 갈채와 찬양을 받으며 여성들의 애모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 그에게 무절제한 여성 편력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1813년에 ≪이단자 (The Giaour)≫와 ≪아비도스의 신부 (The Bride of Abydos)≫, 1814년에 ≪라라≫와 ≪해적 (The Corsair)≫, 1815년에 ≪히브리 가곡 (Hebrew Melodies)≫, 1816년에 ≪코린트의 포위 (The Siege of Corinth)≫와 ≪파리지나 (Parisina)≫ 등 수많은 걸작 시집들을 잇달아 출판하고 호평을 받았다.
바이런은 복잡했던 많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 1814년 9월 앤 이저벨라 밀뱅크와 1815년 1월 2일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되는 바이런의 가정적인 추문은 런던 사회 전체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고 신랄한 비방을 자아내게 됨으로써 바이런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16년 4월 바이런은 이혼을 하고 유럽으로 떠나 스위스, 이탈리아의 도처를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 생활을 했고,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지내는 도중 이탈리아 비밀 혁명 단체에 들어갔으며, 이탈리아인의 생활을 어느 때보다 가깝게 접하는 한편 신성동맹에 대한 반란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면서 1816년과 1818년에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3·4편, 1816년에 ≪시용의 죄수 (The Prisoner of Chillon)≫, 1817년에 ≪베포 (Beppo)≫와 시극 <맨프레드>, 1820년에 ≪단테의 예언 (The Prophecy of Dante)≫과 ≪마리노 팔리에로 (Marino Faliero)≫, 1821년에 ≪두 사람의 포스카리 (The Two Foscari)≫와 시극 <카인 (Cain)>, ≪심판의 계시 (The Vision of Judgement)≫, 그리고 그의 필생의 대작인 ≪돈 주안≫을 1818년부터 1823년에 걸쳐 출간했다. 또한 시인 리 헌트 (Leigh Hunt)를 계속 도왔고, 그가 편집하는 ≪리버럴 (The Liberal)≫에 원고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1823년 4월 런던에 있는 그리스 위원회로부터 터키에 대항해서 독립 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돕는 요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제 자유와 정의와 인류애를 위한 정치 운동에 정열을 불태우고자 했던 그는, 터키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그리스의 독립 운동을 돕고자 스스로 원군을 조직해 7월 16일에 그리스를 향해 출범했다. 하지만 그는 1824년 1월 그리스의 미솔롱기 (Missolonghi)에 상륙한 후 그리스 독립군 최고 사령관이 되어 터키와의 전투를 기다리던 중 불운하게도 열병에 걸렸고, 의사가 고집한 사혈 요법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어 그해 4월 19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리스 전체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곧 그는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유해는 영국으로 옮겨졌으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 안치가 거부되어, 7월 16일에 뉴스테드와 가까운 한 교회 묘지의 집안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45년 뒤인 1969년에 그를 추도하는 기념비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세워졌다.
○ 작품
– 주요작품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 (1812 ~ 1818)
프로메테우스 (1816)
마제파 (1819) + 프래그먼트 (fragment)
돈 주앙 (1819 ~ 1824, 미완성)
– Bibliography
*Major works
Hours of Idleness (1807)
Lachin y Gair (1807)
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 (1809)
Childe Harold’s Pilgrimage, Cantos I & II (1812)
The Giaour (1813)
The Bride of Abydos (1813)
The Corsair (1814)
Lara, A Tale (1814)
Hebrew Melodies (1815)
The Siege of Corinth (1816)
Parisina (1816)
The Prisoner of Chillon (1816)
The Dream (1816)
Prometheus (1816)
Darkness (1816)
Manfred (1817)
The Lament of Tasso (1817)
Beppo (1818)
Childe Harold’s Pilgrimage (1818)
Don Juan (1819–1824; incomplete on Byron’s death in 1824)
Mazeppa (1819)
The Prophecy of Dante (1819)
Marino Faliero (1820)
Sardanapalus (1821)
The Two Foscari (1821)
Cain (1821)
The Vision of Judgment (1821)
Heaven and Earth (1821)
Werner (1822)
The Age of Bronze (1823)
The Island (1823)
The Deformed Transformed (1824)
Letters and journals, vol. 1 (1830)
Letters and journals, vol. 2 (1830)
*Selected shorter lyric poems
Maid of Athens, ere we part (1810)
And thou art dead (1812)
She Walks in Beauty (1814)
My Soul is Dark (1815)
The Destruction of Sennacherib (1815)
Monody on the Death of the Right Hon. R. B. Sheridan (1816)
Fare Thee Well (1816)
So, we’ll go no more a roving (1817)
When We Two Parted (1817)
Ode on Venice (1819)
Stanzas (1819)
Don Leon (not by Lord Byron, but attributed to him; 1830s)
○ 명언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그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언제나 이상하니까, 소설보다 더 이상한 것이니까.” (시 ‘돈주앙’ 中)
“고난은 진리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인생에서 수많은 적을 만났지만, 아내여. 너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남자의 사랑은 인생에서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여자의 사랑은 삶 그 자체이다.”
“바쁜 사람은 눈물을 흘릴 시간이 없다.”
“부를 경멸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말라.
부를 얻는 것에 절망한 인간이 부를 경멸한다.
이런 인간이 부를 얻었을 때, 제일 결말이 좋지 않다.”
“인간은 웃음과 눈물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이다.”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처녀를 로버트 사우디의 잔 다르크와 비교하며 평하면서) 잔 다르크는 광신적인 프랑스 창녀다.(…)”
“이러한 폭동은 가난에서 오는 것 (러다이트 운동 당시 의회연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