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8년 11월 17일, 영국의 여왕으로 일명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 ~ 1603) 즉위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는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 (Elizabeth Tudor)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를 세계 최대 제국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 (The Virgin Queen)으로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짐 (朕)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게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본명: 엘리자베스 튜더 (Elizabeth Tudor)
.출생: 1533년 9월 7일, Palace of Placentia
.사망: 1603년 3월 24일 (69세), Richmond Palace (매장지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가문: 튜더
.부모: 부) 헨리 8세, 모) 앤 불린
.형제자매: 메리 1세, 에드워드 6세, 콘월 공작 헨리, 헨리 피츠로이
.종교: 성공회
*직위: 잉글랜드 여왕 / 아일랜드 여왕
.재위: 1558년 11월 17일 ~ 1603년 3월 24일
.대관식: 1559년 1월 15일
.전임: 메리 1세 / 후임: 제임스 1세
.별호: 처녀 여왕 (Virgin Queen)
16세기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다. 헨리 8세의 적차녀로 어머니는 앤 불린이다.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이자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으로, 언니인 메리 여왕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자식 중 마지막 생존자인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튜더 왕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이후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던 펠리페 2세의 스페인 제국 무적함대를 칼레 해전에서 완전히 격파하고, 동인도회사를 세우는 등, 수많은 치적을 남겨 약소국이었던 잉글랜드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한 여왕이다.
어려운 시대에 잉글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강대국이 될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군주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서 영국은 크게 부흥했고 그 때문에 영국은 여왕이 통치해야 강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 즉위 이전 삶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녀이다. 어머니 앤 불린은 왕자를 낳지 못했고,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지 3년도 안되어 사형을 당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헨리 8세와 그의 제1계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앤 불린은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 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 토마스 시모어
헨리 8세는 1547년 엘리자베스가 열 세살 때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이복 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헨리의 마지막 부인인 캐서린 파는 곧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일부 역사가는 엘리자베스가 그 곳에서 경험한 감정적인 위기가 나머지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는다. 당시 시모어는 나이가 40세에 가까웠지만 “매력적인 남성”이었고, 열 네살이었던 엘리자베스와 소란스럽게 희롱에 가까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결국 캐서린 파가 두 사람이 서로 포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캐서린은 그 일로 토마스와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1548년 5월에 엘리자베스는 그 집에서 쫓겨났다.
– 메리 1세
이복 남동생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이 된 이복 언니인 메리 1세의 재위기간 동안 성공회에 대한 탄압을 피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로 위장하였으며, 때로는 죄수로 몰려 런던 탑에 갇히기도 하였고 숱하게 고문과 감시를 당했으며 살해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밝고 활기찬 성격을 가졌던 엘리자베스는 결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좌절하거나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를 본받아 외국어에 밝고 운동을 잘하는 재주꾼이었다고 한다.
○ 재위 기간
1558년 11월 17일에 메리 1세가 병으로 죽자, 그의 유일한 후계자 엘리자베스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25살의 나이로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며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추밀원과 균형적 관계를 유지했다. 엘리자베스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모욕하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경험들을 충분히 흡수했다. 전제적이지만 신중한 군주와 충성스럽지만 의심해보고 또 결정을 재촉하는 추밀원 사이에 균형이 계발된 것이다. 이것은 거의 집단적인 리더십에 가까웠다.
– 중용 (Via Media) 정책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은 종교분쟁을 지혜롭게 해소했다는 사실이다. 메리 1세의 로마 가톨릭 복고 정책 그리고 성공회와 개신교에 대한 탄압으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등의 성공회 주교들을 포함한 약 300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화형으로 순교당한 공포 정치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성공회 신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를 환호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는 성공회였지만,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독실한 성공회 신자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고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종교분쟁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 극단성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1559년 헨리 8세의 반 (反) 교황법령을 되살린 ‘왕위지상권’ (흔히 수장령이라고 부르는데, 왕위지상권이라고 하는 게 맞다)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영국 성공회를 다시금 영국의 국교로 확립하여 자신을 영국 성공회의 상징적인 수장으로 선언하였다. 물론 왕위지상권은 근대에 이르러, 잉글랜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으며, 세계성공회공동체 (Anglican Communion)에 속한 성공회 교회들은 영국 왕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 (관구교회)들이기 때문에, 성공회를 영국국왕이 수장인 교회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노선을 걸음으로써, 종교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바로잡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중용정책은 성공회가 개혁하는 보편적 교회 (Reforming Catholic Church)로 설명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 경제정책
대내적으로는 추밀원을 중심으로 유능한 정치가들을 등용했으며 정치는 성실청을 통해, 종교는 특설고등법원을 통해 통제하였다.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장려하였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히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지만 양을 키우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한 인클로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방황은 심각해서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 또는 튜더구빈법으로 불리는 사회복지정책을 제정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근로의욕을 꺾을 수 있는 구걸과 개인적인 자선행위를 금지한다.
.구빈세를 제정하여 사회복지비용 마련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은 공공사업을 마련하여 일을 하게 하고,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 (장애인, 노령자 등)은 구빈세로 마련한 사회복지비용으로 돌보았다.
.교화소를 두어 노동의욕이 없는 자들을 강제노역으로 처벌하였다.
– 애민정책
엘리자베스 1세가 실시한 정치 방식의 핵심은 민중의 소리를 듣는 애민정치였다. 그녀는 1년에 두 번은 순시를 하면서 민중들의 여론을 들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의 왕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횟수이다.
– 반 (反) 에스파냐 정책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도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들을 지원하여 에스파냐를 견제하였다.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그 결과 가톨릭을 국교로 한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금이 가게 되었고, 그 이래로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가 장로교를 믿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린 아들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메리는 그 후 약 20년 동안 자신이 헨리 8세의 누나의 적손녀임을 내세워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여 영국의 왕위를 차지할 온갖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가 마침내 엘리자베스 1세 암살 계획이 모의된 배빙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1587년 2월에 메리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메리 스튜어트의 참수는 에스파냐에게 잉글랜드 침공에 대한 결정적 근거 (명분)가 되어 주었다. 1588년 5월 20일,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 130척이 리스본을 출발하여 7월 19일에 영국해협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에 패하고, 스코틀랜드 방향으로 퇴각하다가 북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상당수가 파손, 침몰되었고 53척만이 스페인에 귀항하였다.
다음해인 1589년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를 제독으로 하고 존 노리스 장군과 함께 영국함대를 스페인으로 보냈다. 잉글랜드 군인 23,375명을 태운 150척 전함이 스페인 해군과 해전을 벌였으나 이번에는 잉글랜드 해군이 대패하였다. 잉글랜드는 약 15,000명에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40척의 선박이 침몰 또는 포획되었다. 이번 승리를 통하여 스페인의 해군력은 부활하였다.
– 르네상스 시대
잉글랜드는 외국과의 대결 속에서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났으며, 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를 국민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였다. 당시 영국 민중들은 집안에 악기를 갖추어 문화활동을 즐길 정도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 문화는 꽃을 피웠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아시아에는 후에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식민지 경영기관인 동인도회사를 창설하여 그 세력을 세계로 뻗어나가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 (Elizabethan era)라고 부르게 된다.
○ 말년
이처럼 화려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리 엘리자베스 1세가 ‘훌륭한 여왕 베스’ (Good Queen Bess)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인기를 받았지만, 그녀 역시 절대군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권력이 돈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손쉽고 빠른 수입을 올리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예로 신흥 사업에 대해서 멋대로 독점권을 설치하여, 아첨하는 신하나 귀족 또는 상인에게 팔았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그동안 순수하게 복종하면서 협력하던 의회도 반대의 조짐을 보이더니 치세 말기에는 의회가 반 (反) 독점 논쟁의 도가니로 변했다. 또 엘리자베스 1세가 원했던 의회조종법도 언론 탄압이라는 이유로 의회가 반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는 1596년 ~ 1597년의 흉년과 무역 쇠퇴로 인해 지속적인 물가 폭등 및 실업자 대량 발생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국민들의 의욕도 땅에 떨어졌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여왕의 총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아일랜드를 정복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 1세의 마지막 총신인 에식스의 백작 (Earl of Essex) 로버트 데버루 (Robert Devereux)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른다. 데버루는 아일랜드 총독의 자격으로 아일랜드의 반란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불리한 조약을 체결해야 되는 상황에 이르자, 갑자기 총독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여왕에게 직접 해명하겠다며 영국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고 반란 진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의 관직을 박탈했다. 데버루는 이에 앙심을 품고 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1601년에 런던에서 대중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런던에서 겪은 반란의 후유증은 심각하였다. 우울증과 지병이던 노인성 질환들이 심각하게 발생되면서 기력을 잃어가던 그녀는 1603년 3월 24일 7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신하들이 쉬어야 한다고 하자 엘리자베스는 “무엇을 해야 한다, 하는 것이 좋다는 왕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고, 얼마 뒤 서거했다.
○ 평가
– 내정
여왕은 아버지인 선왕 헨리 8세 이후로 빈곤했던 나라의 재정을 꾸려가기 위해 왕궁 살림을 최소한도로 줄이고 검약을 실천했다. 덕분에 당시 빈곤하던 왕실과 잉글랜드의 재정을 많이 살릴 수 있었고 빚도 상당히 줄였다. 물론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 관리들의 임금은 한 푼도 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검약은 왕실 재산을 최대한 매각하고, 영지나 궁전을 귀족들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그녀는 보석 컬렉션과 드레스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살아있던 당시 이미 수천 벌의 가운을 소유했으며 방대한 보석 컬렉션은 교황마저도 탐을 냈을 정도라고 한다. 특히 진주를 많이 수집했는데 당시 진주는 아주 귀한 보석이라서 어지간한 왕족이나 귀족도 갖기 힘든 것이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는 그걸 대량으로 수집했다. 초상화에도 진주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아무래도 화려함을 과시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치품들을 수집했다고 해석도 있다.
귀족들이 원하던 왕과 국회의 관계 개혁이나, 당대 내정에서 가장 민감한 세금 문제에 대해서 비판을 많이 받는데, 내정에 관해서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던 왕”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신하들이 왕명을 받기 전에는 물러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울면서 더 이상 말하기 싫다고 자리를 떠나버리기도 했다.
모든 문제의 결정을 임시적으로 신하들한테 미루고 문제가 생기면 그들에게 죄를 물어 숙청하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결국 이 세금 문제는 후계자인 제임스 1세가 뒤집어 써야 했고, 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신하들에 의해 목이 잘리기에 이르는 원인이 된다.
당시 정치의 풍조상 궁정 내에는 여러 파벌이 있었으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엘리자베스는 때로 변덕을 부리거나 은전을 내림으로써 이러한 파벌들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견제했다. 하지만 통치 말년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애를 먹었다.
– 종교
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이긴 한데 당시 잉글랜드에는 프로테스탄트란 말보다는 ‘잉글랜드 국교회’라고 칭했다.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국교회와 가톨릭 구분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시대이며 신앙이라기보단 정치적인 문제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 메리 1세가 개신교도들 (잉글랜드 국교회, 청교도)들을 화끈하게 탄압한 것처럼 엘리자베스 시대에도 가톨릭 탄압만으로 나오는데 즉위 초기에는 메리 시대 탄압받던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소망과 달리 가톨릭 교회의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강대국 스페인을 자극하지 않을 입장으로 종교 타협 정책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1558년 2차 수장령을 내려서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직을 포기하였고, 1559년 프로테스탄트 통일령 (Protestant Act of Uniformity)을 선포하여 귀족들은 종교적 맹세를 면제받고,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즉위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치적과 성과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생모 앤 불린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바빌론의 창녀나 이세벨급 마녀 타령을 들었고 엘리자베스도 사생아 취급을 받았지만, 1570년까지 12년 넘게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을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신교 탄압 성향과 이단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주장하던 교황 바오로 4세 시기였다. 이것은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지만, 교황청에서 엘리자베스의 종교 정책을 보고 잉글랜드 국교회가 언제든지 가톨릭으로 복귀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가톨릭 탄압은 형부였던 펠리페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전후로 하여 가톨릭교도는 매국노이며 외세의 앞잡이 역할을 한다고 국민적인 공분이 일어났기 때문에 섣부른 원정으로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교회는 오히려 큰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앞서 즉위 초반부터 연간 60명을 태워죽인 언니의 치세와 달리 집권 초 1570년까지 12년동안 단 1명의 가톨릭 처형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 후 33년 동안 9명이 처형되고 9명이 옥사했다.
1570년 가톨릭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파문을 내리고 스페인의 침공이 임박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이에 대응하여 헨리 8세 시절처럼 1584년 종교적인 일로 로마 교황청에 상소 (上訴)하는 법을 폐지하고, 가톨릭 교회의 사제를 반역자로 정죄하고 벌한다는 법을 제정하였다. 이미 가톨릭은 정치적으로는 몰락했으나,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에는 가톨릭에 온정적인 성향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동안 유화책을 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동안 잉글랜드와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의 상황과 주변 강대국들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고, 국내 청교도들의 내부 반발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어디까지나 중도를 강조했으며 아버지처럼 대놓고 가톨릭을 박해하지는 않았다. 물론 자국의 상황에 따라 비밀리에 에스파냐에 적대적인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을 지원하거나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을 지원하는 일은 있었다.
중도 (Via Media)를 강조했기 때문인지 그녀 자신은 그다지 엄격한 종교인은 아니었다. 앞서 서술한 극장 폐쇄에 관한 일화도 그렇고, 그녀 자신은 종교적 신념이 극단적인 청교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재임한 대주교 중 그린달 대주교는 강경한 청교도였는데, 그로 인해 엘리자베스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엘리자베스는 대주교를 램베스 궁에 가택연금시켜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한동안 잉글랜드 국교회에는 신앙의 중심이 부재하는 결과를 빚었다.
개신교도들은 성인 공경도 우상 숭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왕가의 수호성인 성 조지 공경을 오히려 부추겼다. 또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가톨릭 교도들을 보며 크게 기뻐하기도 했는데, 한때 에스파냐 대사와 길을 가던 중 한 사내가 그녀의 가마로 달려와 외쳤다. “여왕 폐하 만세! 사념을 품은 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그러자 여왕은 에스파냐 대사를 보고 말했다. “이 선한 자는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일세.”
엘리자베스의 치세 하에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종교적 이유로 사형당했다고 하는데, 메리 1세 때 사형당했다는 사람들의 수가 과장되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역시 과장이다. 메리 시대 5년 간 개신교도 284명 처형, 34명 옥사인데 비하여 엘리자베스 시대는 재위기간이 45년임에도 9명 처형, 9명이 옥사한 것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시킨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가톨릭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가톨릭교도들을 처형하는 것은 일종의 자극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왕은 주로 벌금형이나 구금을 선호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치세에 대규모 처형이 있었던 것은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본보기를 위해 주동자 등의 처형이 있었을 때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 반대되는 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헌병 활동과 고문은 헨리 8세 때와 함께 잉글랜드 역사에서 최고조로 이르렀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우외환 속에 봉기 조짐이 일어나던 1595년 ~ 1598년의 일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볼 면도 있었으나, 톱클리크와 같은 이들이 악명 높은 고문을 자행한 것도 사실이다. 반면, 가톨릭교도들이 죽을 짓을 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달라서, 상당수 가톨릭교도들은 잉글랜드 수호를 위해 자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장 해제와 (적은 수이긴 했지만) 처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숫자상으로 볼 때 근거가 약하다. 앞서 처형자 숫자만 봐도 메리 1세 시기와 넘사벽이고 그런 논리라면 메리 1세가 정통성과 기반이 취약해서 더 많이 처형하고 더 많이 학살하고 더 많이 고문 추방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앞서 엄격한 개신교 칼뱅파 교육을 받고 자라난 에드워드 6세 시절과 엘리자베스 1세시절에는 가톨릭교도 뿐만 아니라 개신교 과격파에 해당하는 재세례파와, 대륙에서도 탄압받던 유니테리언까지 처형했었다. 즉 가톨릭교도들만 본보기로 처형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헨리 8세는 가톨릭교도들 60여명을 반역죄로 처형하긴 했지만, 그보다 좀 더 많은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을 이단이라며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화형시켰다. 성공회와 가톨릭만이 대척점이 아니라 성공회나 가톨릭 용인파, 복음주의 성향, 대륙의 신학에 영향을 깊게받은 청교도들까지 복잡한 양상의 스펙트럼이 존재했고 이들 또한 목소리를 크게 내고 탄압받고 했기 때문에 가톨릭만을 주적으로 삼는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한편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 12년 간 처형자가 없다가 1570년대 이후 처형자가 생긴 건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메리 스튜어트를 공동왕으로 추대하고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생하고, 이를 소탕하러 나선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고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하고 나선 것은 교황청에서 엘리자베스를 가짜왕으로 선포하고 가톨릭 국가 스페인 및 프랑스와 준전시 상태에 들어간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가톨릭교도들이 잉글랜드를 떠났나? 그렇지 않다. 많은 수의 가톨릭 교도들은 여전히 종교적으로 그다지 열성적 개신교 신앙이 아닌 엘리자베스에게 충성했고, 엘리자베스도 1570년 이후 성공회 예배 불참석 시 귀족들에게 부과한 벌금을 올릴망정 아예 가톨릭 신앙을 금지한 적이 없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피터 마셜 (Peter Marshall)이 그의 저서 ‘종교개혁’에서 지적하듯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도덕적 우위를 호소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을 ‘이단 혐의’가 아니라 ‘반역 혐의’로 처형하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몇 명이 이단 혐의로 죽었는지를 가지고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는 것은 어렵다. ‘공식적인’ 희생자 숫자의 논리를 그대로 쓴다면,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공식적으로’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이렇게 말이 엇갈리는 건 이 시기 유럽에서 종교와 정치는 결코 딱딱 나누어지는 개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건만 하더라도 엘리자베스는 개인적으로 그녀의 가톨릭 신앙에 대해 깊은 의심과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실제로 정치적인 행동도 그에 기반해 스코틀랜드 내부의 칼뱅파 귀족들과 손 잡고 메리를 필두로 한 친프랑스파 가톨릭계 귀족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정작 벌리 경, 프랜시스 월싱햄 등이 10년 넘게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닦달할 때는 되려 같은 군왕의 입장에서 (자국이던 타국이던) “신하들의 손에 그 왕위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노골적으로 불쾌해 하며 더 과격한 개신교파 중신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참고로 종교와 연관되어서 영국 요리의 원흉의 원흉이 되는데, 기존의 느슨했던 음식에 대한 반응이 청교도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엄해져 부랑자법을 통해 요리사를 부랑자하고 똑같이 보아 처형시키게 하였다. 덕분에 요리사들은 가톨릭교도들과 함께 처형당하거나 해외로 나가거나 2지선다의 운명에 처해졌다. 영국 요리의 그 끔찍함은 산업혁명이나 세계대전으로 인해 완성되었지만, 그 근원은 엘리자베스 시대 때 생겨난 거라 생각하면 된다.
– 외정
그러나 이렇게 국가 재정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세 유럽 국가 경제의 최악의 재앙이었던 전쟁의 마수만은 엘리자베스도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그녀가 상대한 스페인의 경우 당시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라는 무려 4개 대륙에 중남미의 귀금속, 벨기에 (스페인 왕령 네덜란드)의 상업, 이탈리아의 공업, 동남아시아의 무역과 향신료라는 방대한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어 무적함대라는 엄청난 병크에도 불구하고 일이년 만에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반면, 비교적 소국이었던 잉글랜드는 이러한 압도적인 물량의 기반이 없었다. 말년에 들어 점점 경제가 어려워지고, 해외 원정의 실패로 경제가 피폐해져 죽을 때는 상당한 액수의 빚을 남겼다. 그렇기에 이미 죽기 직전에는 스튜어트 왕조가 있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아부를 떠는 이들이 늘었으며, 엘리자베스 자신도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그리 고평가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총평
여자에다 사생아라는 논란 때문에 입지적으로는 불안했으나 왕족에 대한 충성심과 백성들의 지지, 현명한 통치로 끝까지 왕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백성들과 접촉하기를 즐겨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내를 여러 번 연례 순행하기도 했다. 이는 백성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군주에 대한 신뢰감과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과 인플레이션, 실업으로 백성들의 삶 자체는 1300년대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도 있었고, 실제로 전쟁중인 1595 ~ 1597년엔 여러차례 식량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의 검소한 태도와 여러차례의 순행은 그런 흉흉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는 평이 있을 정도. 하지만 뒤의 스튜어트 왕가가 각종 혁명에 시달린 나머지 해가 갈수록 엘리자베스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비단 엘리자베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헨리 7세의 시절 부터 잉글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집중화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순수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생산하는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지출은 엄청나게 먹어대는 왕실 내각과 휘하의 관료 조직의 비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독립 전쟁 지원과 대 스페인 전쟁 등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시절 이러한 왕실 조직의 비대화는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물론 이는 이 시기 자체가 잉글랜드에게 있어 백년전쟁 이후 처음으로 외딴 섬나라가 아닌 유럽 정치 무대 속 하나의 열강으로 등극하는 시점이었으니 비단 엘리자베스의 책임만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결국 엘리자베스 시절 감당 못하게 커진 왕실 조직과 이에 대해 튜더 왕조 초기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의회와 지방 귀족과 젠트리 세력의 반발은 결국 훗날 잉글랜드 내전과 청교도 혁명이라는 격란의 원인이 된다.
사실 엘리자베스 본인의 치세만 하더라도 내부 가톨릭 파벌과 메리 스튜어트를 기반으로 한 수많은 반역 음모, 봉건적 자치권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북부 귀족들의 반란 등 내적으로도 충분히 굴곡이 많은 시대였다. 여기서 엘라자베스가 단순한 호기심 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적으로 굉장한 명군이었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는 점이 이러한 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잘 봉합하고 국가가 나아갈 뚜렷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단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외세에 시달리고 있던 잉글랜드의 불안한 때에 즉위한 후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통치하였고,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의 침략을 막아내어 잉글랜드 해군의 위명을 떨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버지에 못지 않을 만큼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남기기도 했으며 잉글랜드를 이끈 위대한 여왕으로 현재까지도 칭송받는 군주이다
사회복지의 역사에 반드시 나오는 왕이 엘리자베스 1세라는것도 눈여겨봐야하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구빈법이라 일컬어지는 이 법은 1601년에 시행되어 많은 빈민을 살렸다. 노동능력의 유무와 의지에 따라 구분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이 법안이 사회복지의 시초가 되었다는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초수급권, 조건부수급권과 같은 의미의 복지 서비스를 왕조 시대의 17세기에 이미 기초가 되는 법안을 만들어 시행했다는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