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12월 24일, 청나라의 주문모 (周文謨, 1752 ~ 1801) 신부가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 최초로 조선에 입국
주문모 (周文謨, 1752년 ~ 1801년 5월 31일) 사제는 조선에서 순교한 중국인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다.
세례명은 야고보, 포르투갈어 이름은 벨로조 (Vellozo)이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서 6년간 활동했다.
○ 생애 및 활동
– 출생과 신학수업
1752년 청나라 장쑤성 (江蘇省) 쑤저우 (蘇州) 쿤산 현 (崑山縣)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7세에 어머니를 잃고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고모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과거를 보았으나 계속 낙방하자 20살 때 결혼하였다.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다가 늦은 나이에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 조선 입국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중국 교구에 속하였으며, 1784년에 청나라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 (李承薰)과 김범우 등은 임의로 교계제도를 제정하여 천주교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교리 문답을 하던 도중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천주교 교회법에 합치하는지 의문이 생겼고, 윤유일 (尹有一)을 보내 천주교 북경교구장 구베아 (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하였다 (1789년). 구베아 주교는 가성직제도로 교회법을 어긴 사실에 대해서는 책망했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은 칭찬했으며, 조선에 천주교 신부를 보내 주기로 하는 한편, 그는 조선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 (1790년). 금지령에 따라, 천주교 신도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 (神主)를 불사르자,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회를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가치관에 반대하는 사학 (邪學)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하였다 (신해박해, 1791년). 북경 교구는 청나라 사람 오 신부를 보냈으나 (1793년) 신해박해의 여파로 조선 입국에 실패한 후 병사 하였다. 재차, 구베아 주교는 외모나 분위기가 조선 사람과 매우 닮은 주문모를 보내기로 하였다.
주교의 명에 따라 1794년 (정조 18년) 봄에 북경을 떠난 주문모는 그해 음력 12월 3일 (양력 12월 24일) 조선인 신자 지황 (池璜) · 윤유일 (尹有一) 등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한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서 왔기 때문에 북경에서 국경까지 10개월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 뒤 주문모는 12일 만에 서울에 잠입하였고, 북촌 계동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미사를 집전하였다. 국경을 넘은 지 6개월 만에 도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 전교
1795년 6월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세례성사를 주고 전교하였다. 그러다가 배교자 한영익 (韓永益)이 밀고하는 바람에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음력 5월 11일, 양력 6월 27일), 그의 얼굴을 그린 벽보가 나붙기도 했다. 역관 최인길의 도움을 받아서 도피하였으며, 여성 교우 강완숙이 용감하게도 자신의 집을 은신처로 제공하여 피신 하였으며, 주문모 신부 대신 검거된 역관 지황과 윤유일은 붙잡혀서 순교했다 (을묘박해).
주 신부는 강완숙에게 세례를 주고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강완숙은 자신을 모시는 여종을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을 천주교로 인도 했으며, 양반신분을 활용하여 은언군의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하였다. 주 신부는 교리 연구회인 명도회 (明道會)를 만들어 정약종을 회장에 임명하고, 황사영을 비롯한 홍필주, 현계흠, 홍익만 등을 명도회 하부 조직인 육회 (六會)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교리 연구와 전도에 힘쓰게 하였다.
송씨와 신씨도 명도회 (明道會)에 가입하고, 자신의 종들까지 모두 입교하게 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의를 가졌는데, 이는 각각 남편이자 시아버지인 은언군이 강화도에 귀양가는 불행으로 마음을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에 집중했는지는 정순왕후가 송씨와 신씨에게 독약을 내려 함께 죽게 하라는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시어미와 며느리가 둘다 사학에 빠져서 외인의 흉추 (凶醜,주문모 신부)와 왕래하여 서로 만나고 나라의 금지함이 지엄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는 ‘순조실록’ 1년 3월 16일조와 천주교 순교자 이기양의 ‘추안’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주 신부는 서울에서 강완숙의 전도 등으로 목회에 자신이 생기자 지방으로도 발길을 옮겼다.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죽은 윤유일의 가족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경기도 여주, 충청도 온양, 공주, 남포, 내포, 전라도 전주에서 전교하여 5년 만에 신자 수가 4천여 명에서 1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교회 성장에 대해 황사영은 ‘백서’에서 조선 천주교회에서 강완숙 만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하여 강완숙의 도움이 컸음을 말하고 있다.
– 순교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 (邪學)을 믿는 자들이니,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정순왕후의 ‘사학엄금교서’ 발표로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도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소재지를 알리지 않는 강완숙 (골룸바)의 보호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고향인 청나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로 갔으나 사태가 매우 좋지 않음을 알게 되자 1801년 음력 3월 12일 (양력 4월 24일) 한양으로 돌아와 의금부에 ‘내가 당신들이 찾는 천주교 신부’라며 자수하였다. 그해 음력 4월 19일 (양력 5월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살아 있어서 도움이 안 되니 죽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우려하여 추방령으로 감형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사형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새남터에서 참형으로 순교한 주문모 신부의 유해는 신도들이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 시복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 영향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조선 입국전까지 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평신도들이 목회한 조선 천주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교리서와 신앙 안내서라고 생각하여’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라는 고해성사 지침서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문서선교는 천주교회의 세력 확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 부록 : 주문모 (周文謨) 야고보 (James)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조선 (한국, Korea)
.활동연도: 1752 ~ 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Jacobus)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주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주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 사바와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해 12월 24일 (음력 12월 3일) 밤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주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주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1801년 4월 24일(음력 3월 12일), 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 (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 (軍門梟首形,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뒤, 주 야고보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 (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디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곧바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 (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 참고자료
.유은희 지음, 이슬은 빛이 되어(순교자의 삶과 신앙) –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사제 하느님의 종 주문모 야고보’, 서울(도서출판 순교의 맥), 2009년, 198-205쪽.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 ‘주문모 야고보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84-86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자료집 제1집 – ‘주문모’, 서울, 2005년, 104-149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 ‘주문모 周文謨’,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년, 7843-7844쪽.
참고 = 위키백과, 가톨릭신문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