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명저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소크라테스는 ‘이성적 사유와 일치하는 삶’을,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라는 지고한 가치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그리스 철학의 상속자이면서, 이들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삶의 궁극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행복한 삶’이다.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들려준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처럼 관념적이지 않고 소박하다. 행복한 삶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상식에서 출발한다. 그리스어로 ‘행복’ (eudaimonia)은 만족한, 성취한, 그리고 활발히 활동하는 삶을 뜻한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선은 행복이며, 행복은 마음가짐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이 수행될 때 이루어진다고 한다.
행복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 곧 모든 것은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인데,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얘기다. 둘째, 행복은 활동이다. 활동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 (혹은 쾌감)은 활동의 부산물이다. 객관화와 계량화가 어려운 행복, 그러나 의지만 있으면 반복할 수 있는 명백한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행복은 인생 전체에 걸친 활동이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아침에 또는 단기간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권 7장) 행복한 삶은 인생 전체를 걸친 지속가능한 삶의 특질, 곧 행복은 그 자체로 좋은, 일생에 걸친 활동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통해 우리가 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과 예속과 자유에 대해서 보다 정확한 인식을 할수 있도록 함으로써 참된 인식과 자유와 만족의 길로 이끌고 있다.
스피노자가 진 (眞)보다도 선 (善), 인간의 행복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라는 것은 자주 지적되는 일인데, 에티카도 제목 (‘윤리학’이라는 뜻)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도덕을 해명하는 시도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현재 이 세계에 생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목적하는 것은 인간 도덕의 해명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세계의 성질과 인간의 본성이 밝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5부로 된 에티카는 그와 같은 문제의 고찰에서 시작된다.
제1부는 ‘신에 대해서’라는 제목인데, 이것은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고찰이다. 즉 스피노자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도 의지도 갖지 않고, 자기 본성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서 작용하는 유일한 실체로 이것이 무한한 속성 (屬性)을 통해서 변양 (變樣), 발현 (發現)한 것이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개물 (個物)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 ‘신은 곧 자연’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도덕이라고는 하지만, 도덕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정신에 관한 것인 이상, 정신의 본성이 파악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제1부는 인식의 문제를 취급하고, 인식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여 예컨대 감성지 (感性知), 이성지 (理性知), 직각지 (直覺知)로 구별하고, 이들 중 마지막 것이 사물을 ‘영원한 상 (相) 아래’ 파악하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도덕과 행복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정신의 고찰도 인식의 해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의 관찰에까지 전진하여 (제3부), 감정의 취급법을 검토할 (제4부)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서 행복이 ‘사랑’의 일종이라는 것, 사랑의 최고의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이 제시되어 인간 행복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그의 철학의 정점을 이루는 최고의 선인 ‘신의 지적애 (知的愛)’ 사상을 가지고 해답할 수 있게 (제5부) 되는 것이다.
– 칸트, 실천 이성 비판

칸트철학을 통해 서양근대철학이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순수이성비판’의 출간과 더불어 생긴 이론철학 영역 내에서의 변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 변화는 실천철학의 영역인 윤리학에서도 일어났다. 과학적 지식이 엄청난 발전을 이루고 있었던 당시에, 그 추진력의 모체인 인간의 이론이성에 비판과 한계를 설정하고, 그것이 실천이성의 체계에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칸트의 윤리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함께 서양 윤리학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서양윤리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칸트 윤리학을 지칭하는 표현들 또한 적지 않다. 형이상학 윤리, 규범 윤리, 법칙주의 윤리, 의무론적 윤리, 엄숙주의 윤리, 동기주의 윤리, 준칙 윤리, 형식주의 윤리 등 칸트 윤리학의 성격을 표현하는 다양한 표현들은 칸트 윤리학이 이제까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되고 이해되어 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바로 이러한 사상적 핵심을 담고 있는 책이 그 유명한 ‘실천이성비판’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윤리적 실천의 문제를 독특한 방법론으로 다룬다. 그는 단순히 이론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론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윤리학적 전략을 버리고, 인간 이성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근본적 체계 (건축술)가 단순히 이론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으며, 반드시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다. 인간의 행위를 윤리적으로 만드는 자유도 이론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윤리적 실천을 그의 초이론적 이성 체계의 불가결한 요소로 요구한다. 결국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윤리, 즉 단순히 하나의 이론적 유희로만 이루어지는 윤리학은 이론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의 윤리학적 모티브는 형이상학, 인식론, 미학, 인간학 뒤에 가려진 부차적인 부분이 아니라 칸트 사상 전 체계를 지탱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저 유명한 경구, 즉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라는, 후세 사람들이 칸트를 기념하는 동판에 새겨 넣기도 한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 첫 대목을 만날 수 있다. 이 절제된 말은 칸트가 우리에게 진심으로 일깨우고자 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 막스 셸러, 윤리학에 있어서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 윤리학

셸러는 현상학을 토대로 한 가치 이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질적 가치 윤리학을 제창하여 철학적 윤리학의 토대를 새롭게 정초하고자 하였다.
막스 셸러의 주저, ‘윤리학에 있어서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 윤리학’에서 ‘윤리학에 있어서 형식주의’가 칸트의 것이라면 ‘실질적 가치 윤리학’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칸트의 윤리학이 “엄밀한 학문적 통찰의 형식에서 볼 때 오늘날까지 우리가 철학적 윤리학에서 소유한 것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지만, ‘도덕법칙’이란 형식에 의해서만 윤리적 실천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할 때는 공허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실천적이고 실질적인 존재방식에 주목하자고 역설한다.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그것이 어떠한 실천과 선택을 하든지 간에 각자의 선 (행복)을 희구하길 갈망하며, 이 갈망하는 목적의 양태를 분석하는 윤리학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객관적 목적 윤리설’이고, 이것이 칸트의 윤리학에 의해 ‘의무(당위)론적 윤리설’로 다시 진전되게 되는데, 셸러는 이 칸트의 윤리학마저도 선험적 (a priori) 형식주의라고 비판한다.
이에 셸러는 선험적 형식에 대응되는 선험적 실질로부터 윤리학을 엄밀하게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선험적 실질을 셸러는 ‘가치 (Wert)’에서 찾고자 했는데, 이것에 근거하여 ‘실질적 가치 윤리학’을 역설한다. 그 당시 (20세기 초) 셸러는 후설과 함께 현상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현상학의 입장에서 가치의 본질을 내세우며, 한편으론 브렌타노의 영향을 받으며 가치의 공리를 정립한다. 이 공리에 의거해 가치의 높고 낮음이 결정되며, 다시금 더 나아가 가치서열에 대한 명증적 통찰을 하게 되고, 이러한 명증적 통찰을 현상학적 본질직관의 방법에 따라 해명한다.
이에 따라 가치는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 (이성이나 오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명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정서적 측면인 ‘감지작용’에 의해서만 직관적으로 통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셸러의 가치 현상학이 ‘정서적 생활의 현상학’이라는 것으로 나타나며, 칸트가 내세우는 ‘법칙에 대한 존경’이란 감정만을 중시한 파토스를 넘어설려고 시도한 것이다. 즉, 셸러는 ‘정서적 생활의 성층구조’를 밝히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설’과 칸트의 ‘의무 (당위)론적 윤리설’의 비판을 통해, 인간의 정서적 생활은 ‘오성의 논리’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심정의 논리’에 따라 해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셸러는 현상학적 가치론의 토대에 따라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윤리적 인격주의’라고 정초한다. 물론 이러한 인격주의는 칸트의 정언명령 (실천 이성 비판)에서도 나타나는 것인데, 칸트의 인격주의는 각 개별성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자기 의식의 주체성으로만 말해질 뿐이라고 말한다. 즉 칸트는 개별자들 가운데서 무차별적인 동일자를 뭉뚱그려 인격을 파악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우리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이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거나 역할 (연대)을 수행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셸러가 강조하는 인격체 조직으로서의 ‘공동체’를 역설하기에까지 이른다. 여기서 셸러의 독특한 인격 개념인 ‘사적 인격’이 중요시 여기게 된다.
사적 인격은 공공의 선이 결여된 인격의 내면적 측면을 의미하지만, 셸러에 따르면 사적 인격은 ‘고독’을 자신의 범주 (실질)로서 가지며 참된 ‘연대성의 원리’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즉 고독한 실존으로서의 연대성은 실존적 소통을 열어주며, 너와 나의 구별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로서 묶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셸러는 ‘가치’와 ‘인격’이라는 두 토대를 통해 ‘실질적 가치 윤리학’을 내세운다. 가치 윤리학에서의 핵심은 우리의 행위를 강제하거나 제약하는 의무 (당위) 의식이 아니라, 옳고 (선) 그름 (악)의 명확한 가치 통찰이다. 이러한 가치 통찰에 입각하여 우리의 마음은 고유한 내재성인 ‘사랑의 질서’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사랑의 질서는 우리가 스스로 부과하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이미 살아 숨쉬며 기능하는 것이다라고 보면서, 규범적 가치규제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즉, 규범적 기능이 ‘심정 (정서)’에 의해, 가치규제적 기능은 ‘양심 (양심 세력들의 연결고리에 의한 연대성)’에 의해 수행된다고.
그리하여, 셸러는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선은 하나의 적극적 가치의 실현에 부착된 의욕의 영역에 있는 가치이다.”
“선은 의욕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의 보다 높은 가치의 실현에 부착된 것이다.”
– G. E. 무어, 윤리학 원리

무어의 주저로 평가받는 ‘윤리학 원리’는 철학사에서 분석 윤리학의 효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대체 ‘윤리학 원리’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분석 윤리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가? 이 책의 집필 목적을 밝히는 서문의 첫 문장에서 우리는 그 일차적 답을 찾을 수 있다.
철학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에 있어서도, 윤리학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어려움과 불일치는 주로 아주 단순한 원인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그 원인은 당신이 대답하고 싶어 하는 물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먼저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로 그 물음에 답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논리학의 오류론을 원용하면, 이제까지의 윤리학적 탐구는 한 마디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무어의 지적이다. 다시 말해 정말로 물어야 할 물음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엉뚱한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에 답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윤리학적 탐구는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물어야 할 윤리학 고유의 본질적 물음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무어는 윤리학적 물음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어떤 종류의 대상이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는 어떤 종류의 행동을 수행해야만 하는가?”이다. 전자는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 때문에 존재하는 대상이 무엇인가의 물음으로, 우리는 이를 본래적 가치 내지 본래적 선에 관한 물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의 물음으로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가 무엇인가, 혹은 도덕적 의무가 무엇인가의 물음으로, 우리는 이를 옳은 행위에 관한 물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날 행위 윤리학으로 알려진 후자의 탐구를 무어는 실천 윤리학 (Practical Ethics)이라 부른다. 이 두 물음은 구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자의 물음이 후자의 물음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 무어의 지적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이 두 물음에 직접 대답하려고만 애썼지, 이 두 물음 각각이 묻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즉 물음의 참된 의미를 규명하고자 애쓰지 않았다. 두 물음을 구분하지 못한 혼동과 각 물음의 의미에 관한 무관심으로 인해, 철학자들의 학문적 탐구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무어는 비판한다. 즉 무어의 철학적 위대함은 이 두 물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 데 있지 않고, 이 두 물음을 처음으로 명료하게 구분하여 제시했다는 점과 이 두 물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해명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니까 무어는 단순히 물음에 답을 제시하려 하지 않고, 이 두 물음 자체를 철학적으로 분석한 ‘분석 철학자’인 셈이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충고하거나 훈계하는 일은 윤리 철학자의 일이 아니다.”, “윤리학의 일차적 목적은 실천 (practice)이 아니라 지식 (knowledge)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분석 윤리학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