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12)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이탈리아 밀라노 (Milano)의 브레라 미술관 (Brera Art Gallery)
10월 16일까지 이집트 일정을 마친 우리 일행은 17일 오전 11시 30분경 밀라노에 도착해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광장, 스칼라 극장, 빅토리아 엠마누엘 2세 겔러리아를 둘러보고 이어 브레라 미술관 (Brera Art Gallery)을 방문했다.
예정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이 위치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을 찾으려 했으나 현지 사정상 브레라 미술관으로 일정이 변경된 것이다.
아쉬움은 있었으나 브레라 미술관 또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술관중 한 곳이기에 기대하는 마음을 방문했다.
브레라 거리 (Via Brera)
브레라 미술관은 두오모에서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 일행은 밀라노 대성당과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스칼라 극장을 지난 브레라 거리 (Via Brera)를 따라 브레라 미술관으로 향했다.
일행은 미술관으로 향하다 약간의 시간여유가 생겨 거리의 카페에서 커피와 차를 나누며 달콤한 쉼을 가졌다.
브레라 거리는 액세서리 전문점과 가구, 갤러리, 인테리어 점, 주방용품점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이동해 브레라 거리 28번지에 이르자 브레라 미술관이 나타났다.
브레라 미술관은 로마의 바티칸,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과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높이 평가받는 곳으로 특히 회화 컬렉션이 유명해 회화관이라는 뜻을 강조해 ‘피나코테카’ (Pinacoteca)로 불린다.
브레라 미술관의 역사적 배경
1층에는 브레라 미술아카데미가 있고, 2층에 미술관이 있는 브레라 궁 (Palazzo Brera) 건물은 처음 지어진 17세기 당시에는 예수회의 밀라노 본부였다.
14세기부터 있던 수도원 자리에 바로크 건축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리치니 부자의 설계로 1627년 완성된다.
브레라 미술관은 예수회의 건물다운 외간으로 차분하다.
이곳이 미술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이다.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1773년 예수회 해체를 명하자 이곳은 원래의 목적을 잃게 된다.
계몽군주를 자처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이곳을 문화와 예술을 계몽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것을 명했다. 그에 따라 미술 교육기관 브레라 아카데미가 들어섰고 학생들이 고상하고 세련된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조각과 회화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천문대와 도서관이 들어섰다.
건물은 1776년 아카데미의 교수 주세페 피에르 마리니의 설계로 추가 증축을 거쳤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기증한 소규모 컬렉션은 요제프 2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들)가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통치할 때 종교기관을 환속시키면서 많이 늘어났다.
수도원들이 문을 닫고 몰수한 교회의 제단화들을 옮겨 왔고, 아카데미 교수들이 이탈리아 명작 회화 컬렉션을 확보하면서 미술관의 규모를 갖추자 1786년 작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미술품은 나폴레옹 통치 시대 (1799 ~ 1815)에 크게 증가했다. 나폴레옹은 밀라노를 이탈리아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북이탈리아 전역의 궁전과 귀족들로부터 약탈한 미술품들을 브레라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나폴레옹 군대는 수천점에 달하는 회화 작품을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교회와 귀족들로부터 압수해 브레라로 보내왔다. 그동안 쌓인 방대한 작품들을 바탕으로 1809년 새로운 미술관을 개관했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프랑스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몰수된 예술품은 그 자리에 남아 오늘날 브레라 미술관의 주요 컬렉션을 이루고 있다. 미술관은 개관 이후 브레라 아카데미의 일부로 존재하다가 1882년 공식 분리돼 북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국립미술관으로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브레라 미술관의 작품들 둘러보기
브레라 미술관에 들어서 1층 브레라 미술아카데미를 지나 오른 쪽 큰 계단으로 올라가면 미술관이다.
오른 쪽부터 전시실이 이어지는데 방을 따라서 관람하다보면 처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구조다.
브레라 미술관의 컬렉션은 13세기에서 20세기까지를 아우른다.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바로크, 베네치아 화파와 롬바르디아 화파의 그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북이탈리아 르네상스 부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만테냐의 작품을 비롯한 북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컬렉션은 이 미술관의 백미로 꼽힌다.
다음은 브레라 미술관 홈페이지를 참조해 소장 작품들을 살펴 본 것이다. 가능한 만큼 각 작품들의 내용을 살펴보려 한다.
- 안드레아 만테냐 (Andrea Mantegna, 1431 ~ 1506)의 ‘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 1480년)
안드레아 만테냐 (Andrea Mantegna, 1431년경 ~ 1506년 9월 13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야코포 벨리니의 사위로 로마 고고학의 취미를 작품에 반영한 화가이다.
만테냐는 파도바 근처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 이탈리아 이조라 디 카르투로 (Isola di Carturo)에서 태어났다.
11살에 파도바의 화가 프란체스코 스카르초네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는 1506년 9월 13일 74~75세의 나이로 만토바에서 사망했다.
작품 ‘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 1480년)는 연대에 논란이 있지만 1475년 ~ 1501년 사이, 아마도 1480년대 초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리석 석판 위에 누워있는 그리스도의 신체를 묘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모 마리아, 성 요한, 성 막달라 마리아가 지켜보고 있다.
함께 소장하고 있는 작품 ‘성누가 제단화’ (1453년), ‘성모자와 아기 천사들’ (1485년)도 명작이다.
-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 1430 ~ 1516)의 ‘피에타’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 1430년?∼1516년)는 이탈리아의 화가로, 야코포 벨리니의 아들이며 젠틸레 벨리니의 동생이다.
브레라미술관에는 그의 작품 ‘피에타’와 ‘성모자’가 소장되어 있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벨리니의 ‘피에타’ (1460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와 그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 제자 요한의 슬퍼하는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벨리니의 ‘성모자’ (1510년)는 그가 80살 가까이 되었을 때인 1510년, 말년의 원숙한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림을 보면 윤곽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색채감으로 윤곽선을 대신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아래쪽 옷 주름을 보더라도 윤곽선 없이 다양한 푸른빛들의 조화가 눈에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 비토레 카르파초 (Vittore Carpaccio, 1460 ~ 1527)의 ‘마리아 사원 봉헌’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 비토레 카르파초 (Vittore Carpaccio, 1460년경 ~ 1527년)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파의 화가로 벨리니에게 배웠다. 풍부하고 조화가 잘 된 색채와 안정된 공간 감각에 의해 고전적인 화면을 구성하였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파의 화가로 벨리니에게 배웠다. 풍부하고 조화가 잘 된 색채와 안정된 공간 감각에 의해 고전적인 화면을 구성하였다.
주요작품으로 ‘산우르술라 이야기’, ‘산지롤라모의 서재’ 등이 있으며 브레라 미술관에는 ‘마리아 사원 봉헌’이 있다.
마리아 사원 봉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150년경에 쓰여진 신약외경 야고보원복음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3살이 되자 자신들에 딸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축성을 바치고자 예루살렘의 사원으로 데려갔다.
이는 안나와 같이 늦은 나이가되도록 임신하지 목사다 늦은 나이에 아이를 얻은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아기가 젖을 떼자 실로에 있는 야훼의 유대사원으로 아이를 데려가 바치는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 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 ~ 1520)의 ‘마리아의 결혼’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 (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예술가·화가이며, 흔히 라파엘로 (Raffaello) 라고 불린다. ‘아테네 학당’이 특히 유명하다. ‘아테네 학당’은 에피쿠로스, 피타고라스, 안티스테네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가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브레라 미술관에는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마리아의 결혼’ (1504년)이 있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의 예술적인 성숙이 본격화되는 출발을 알렸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성전은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를 모델로 그렸다. 원형의 성전 모습이 원근법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묘사되어 있다. 정면 중앙의 제사상을 중심으로 요셉이 마리아에게 반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요셉 주변에 있는 청년들은 마리아에게 청혼한 구혼자들이다.
마리아의 결혼에 관한 ‘황금전설’에 따르면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딸이 세 살이 되자 성전에 데려갔고, 마리아는 이곳에서 자랐다. 마리아가 14살이 됐을 때 제사장은 기도를 통해 “다윗 가문의 남성들 중 혼인하지 않은 자들이 막대기를 들고 제단에 모이면 막대기에 꽃이 핀 사람이 마리아의 남편이 될 것이다”라는 응답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젊은 남자들이 막대기를 들고 제단으로 모여들었는데, 요셉은 나이가 많아 마리아의 남편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해 막대기를 가져가지 않았다. 제사장이 다시 기도를 올리자 “막대기가 없는 자의 막대기에 꽃이 필 것이다”라는 응답이 들렸다. 요셉이 막대기 하나를 들자 거기서 꽃이 피었다. 결국 요셉이 마리아의 약혼자가 되었고, 다른 청년들은 하나 같이 낙담한 표정이다. 심지어 화가 나서 막대기를 부러뜨리는 청년도 있다.
스승인 페루지노는 인물들을 다소 경직되고 부자연스럽게 배열한 것과는 달리 라파엘로는 다양한 자세와 표정, 동작을 표현했다.
이제 막 결혼반지가 끼워지는 순간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전면의 결혼장면과 후면의 성전이 사실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공간과 인물들이 조화롭게 표현되어 있다.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6 ~ 1492)의 ‘몬테펠트로 제단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본명 Piero di Benedetto, 1415년경 ~ 1492년 10월12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투시도법을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이것을 작품에다 응용하였다. 그의 작품은 너무 이론적인 것 같아 보이나 풍부한 감정이 넘쳐 흘러 벽화나 초상화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처음 피렌체로 나아가 도미니크 베네치아의 조수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1445년경에 그린 <자바의 마돈나>는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오래 된 제단화라고 전해진다. 성 프란체스코 사원의 벽화 <성 십자가 이야기>는 최대의 걸작으로서, 세련된 색채와 완전한 구도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초상화로 <우즈비노 공의 초상> 등이 있는데, 주로 옆얼굴을 많이 그렸다. 그 밖의 작품으로 <시바 여왕의 예배>가 있다.
브레라 미술관에는 작품 ‘몬테펠트로 제단화’ (1474년)가 있다.
돈을 위해 싸웠던 용맹한 군인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1422 ~ 1482)는 많은 재산을 모아 우르비노를 부유하게 만들었고 그때까지 문화적으로 고립됐던 이 도시를 인문학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화가 라파엘, 건축가 브라만테가 바로 우르비노 태생이다. 또 그는 책을 많이 읽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을 모아 당시 바티칸 다음으로 가장 큰 도서관을 가지게 됐다. 학자들을 시켜 방대한 고대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게도 했다.
1470년대, 아마도 1472년에서 1474년 사이 무렵에 그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게 큰 제단화를 주문했다. 바로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경배하는 성인, 천사, 그리고 성모자’다. 이 작품은 현재 브레라에 있기 때문에 흔히 ‘브레라 제단화’라고도 불린다. 그림에는 반원형의 후진(apse) 공간을 배경으로 6명의 성인과 4명의 천사들이 성모자를 둘러싸고 있다. 성인들은 왼쪽으로부터 세례요한, 성 베르나르디노, 성 히에로니무스이며 오른쪽에는 성 프란체스코, 순교자 성 베드로, 복음사가 요한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견고한 입체감을 지니고 부동적이고 사색적인 엄숙한 분위기를 준다. 이러한 구성을 ‘사크라 콘베르사지오니 (sacra conversazioni)’ 이라고 하는데 성모자와 성인들이 마치 무언의 ‘성스러운 대화’를 하는듯한 장면을 의미한다. 단 하나의 실제 인물인 주문자 페데리코는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 조금 떨어진 앞쪽에 반짝이는 강철 갑옷을 입고 헬멧과 목이 긴 장갑을 벗어 앞에 놓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지만 자세는 아주 꼿꼿하다. 단면도로 보면 인물들이 오메가 글자 (Ω)와 같이 대칭으로 배열돼 있는데, 단 하나 대칭을 흩어놓는 것은 페데리코의 앞 자리가 비어있다는 점이다.
이 제단화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부분은 원근법에 충실한 장엄한 건축공간이다. 이 그림은 후일 옆 부분이 잘린 것이 발견돼 원래 그림에서는 건축 공간과 인물의 관계가 훨씬 여유로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15세기 피렌체에서는 수학이 명확한 신의 진리를 나타낸다고 믿었고, 수학에 근거한 원근법은 시각의 과학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당대의 건축가 알베르티의 영향을 받은 이 건축물은 실제 재현할 수 있으리만큼 정확하게 계산됐다. 학자들은 건축과 인물의 비례를 계산해 측정한 결과 성모와 성인들이 서 있는 공간은 트란셉트 (transept), 즉 제단과 청중의 공간이 교차되는 장소로 설정된 것을 알아냈다.
이 제단화의 절대적인 중심은 정중앙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의 머리이다. 머리 위에는 조개껍질에서 내려온 은빛 줄에 달린 알이 함께 수직축을 이룬다. 달걀은 흔히 부활을 상징하는데 이 경우 크기로 보아 타조의 알로 추측되고 있다. 타조 알은 어미 새가 품지 않더라도 햇빛에 의해 부화한다 해서 하나님의 아이를 낳은 마리아를 상징하며, 아직도 일부 교회에서는 타조 알을 제단에 걸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제단화는 이제까지의 ‘성스러운 대화’ 장면과는 다른 점이 많다. 왜 타조 알일까. 종교화에 갑옷을 입고 등장하는 예는 없는데 왜 페데리코는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페데리코의 앞자리가 비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인물들은 수직으로 서 있거나 앉아 있는데 왜 아기 예수만 비스듬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이후 많은 논의를 낳았지만 아직도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고 있다.
일련의 학자들은 이 작품을 페데리코의 개인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즉 그의 첫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주문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섯 번째 아기이자 첫 아들을 가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부인 바티스타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므로 페데리코 건너편에 비어있는 자리는 원래 바티스타를 위한 자리라는 것이다. 타조 알이 등장한 것은 타조가 군인 페데리코의 문장에도 나타나고 부인 바티스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자고 있는 아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미래를 예고하는데 성모와 성인들은 모두 아기가 부활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 부인의 영생을 비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아기의 목에 걸린 산호 목걸이와 구슬도 최근 주목을 받았다. 산호는 원래 악한 기운을 물리침을 의미하지만 산호의 가지는 그리스도가 마지막 숨을 쉬는 폐를 상징하며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다. 또 다른 해석은 이 작품이 마리아에게 바치는 봉헌도라는 것이다. 페데리코는 마돈나로 표상되는 교회의 축복을 기원하고, 반면 완전무장한 자신은 그림을 의뢰한 주문자일 뿐 아니라 용맹한 군인으로서 교회의 수호를 약속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모든 해석은 나름대로 흥미롭지만 정확한 의미를 모르더라고 그림 자체가 완벽하게 매혹적이다. 빛나는 갑옷과 정교한 무늬의 카펫, 페데리코의 손에 낀 반지, 교황이 내린 선물인 빨간 벨벳 장식의 칼, 보석이 장식된 천사의 의상 등의 세밀한 묘사는 물질에 대한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끌리게 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은빛 톤의 광선이 비쳐 주는 차갑고도 아름다운 대리석 건축의 디테일, 조각적인 인체와 삼차원 공간의 통일감이다. 원근법에 근거한 건축과 인물들은 모두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묘사됐는데, 기하학적 형태는 인간의 불완전과 우유부단함을 극복하는 확고부동하고 완벽한 형태로 생각됐다. 피에로는 후기 작품에서 지나치게 수학에 몰두해 인간적인 감수성에 소홀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것은 일상의 사소함을 벗어난 초월적인 세계였을 수도 있다. (참고 : 김영나 / 미술사학자·前 국립중앙박물관장)
- 벨리니 형제 (Gentile and Giovanni Bellini)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가’
이탈리아의 화가 벨리니 형제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가’ (St. Mark Preaching in Alexandria, 1506년)는 1504년도에 형인 젠틸리 벨리니 (Gentile Bellini, 1429 ∼ 1507)의 의뢰에 의해 그려졌지만 1507년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인 채로 남겨졌었다.
그 당시에 그림이 어디까지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에는 형인 젠틸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의 동생이 작업을 이어간다.
동생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 1430년? ∼ 1516년)는 형의 작업을 이어 완성해, 브레라 미술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작품중 하나로 남아있다.
어떤 부분을 젠틸리가, 어떤 부분을 조반니가 작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그림 속의 베네치아 건축물의 요소들을 지중해와 동양적인 색채가 뚜렷한 건축물 (예: 오벨리스크와 모스크의 뾰족탑)과 함께 배치한 주요 스케치가 젠틸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이 작품이 그려지기 전인 14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 터키 이스탄불)의 메흐메트 2세를 위해 파견된 작가인 젠틸리에게 더 친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반니는 좌측의 뚜렷한 인물들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 틴토레토 (Tintoretto, 1518 ~ 1594)의 ‘성 마르코 유해의 발견’
이탈리아의 화가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을 주제로 경이로운 세 연작을 남겼는데, ‘성 마르코 유해의 발견’, ‘성 마르코의 유해를 옮김’, ‘노예를 구한 성 마르코의 기적’이 그것이다. 브레라미술관에는 ‘성 마가의 유해 발견’ (Discovery of the Body of Saint Mark, 1566년)가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뚫려 있는 궁륭을 크게 배치했다. 음산한 분위기의 지하묘지의 구도는 비정상적인 각도로 되어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바닥이 열린 모습이다. 이런 불균형한 원근법은 작품 전체에 전혀 새로운 종류의 왜곡된 균형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무덤의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라파엘로의 균형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포기한 것이다. 왼쪽 구석에는 후광이 빛나는 키가 큰 사람이 서 있는데, 그가 바로 복음사가 성 마가이고,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멈추게 하려는 듯이 왼손을 들고 있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면 오른쪽의 궁륭 천장 바로 아래에서 막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무덤에서 다른 시신을 내려놓으려한다. 그들은 관의 뚜껑을 열고 터번을 쓴 또 한 사람에게 시신을 내려주고 있다. 터번을 쓴 사람은 관에서 내리는 시신을 받고 있다. 뒤에 서 있는 검은 옷을 입은 귀족은 횃불을 들고 다른 무덤의 비명을 읽으려 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히 지하 무덤을 파헤치고 있는 중이다. 시체 하나가 양탄자 위에 널브러져 누워 있는데, 그 모습이 괴이하게 단축법으로 그려져 있다. 시신 옆에 화려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시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가 바로 이 작품을 주문한 톰마소 랑고네(Tommaso Rangone)이다. 그는 무덤을 더 이상 뒤지지 말라고 외치는 마르코 성인의 환영을 보고 깜짝 놀라며 성인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의 유해는 이미 발견된 것이다. 성인의 유해는 성인의 발치에서 온몸에 빛을 발하며 누워 있고 벌써 그 시신의 존재가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전면 오른쪽 끝에는 마르코 성인의 환영을 보고 놀라며 커다란 몸짓을 하고 있는 남녀의 무리가 있다. 몸부림치고 있는 남자는 그를 사로잡고 있던 악마로부터 해방되어 악마가 그의 입에서 한줌 연기로 변해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로 자빠지고 있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그 여인이 넘어지지 않게 다리를 붙잡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그림을 처음 보고 아주 기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과 근경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을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틴토레토가 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우리들 앞에 전개되고 이 엄청난 기적의 인상을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곧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틴토레토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던 원숙한 색채의 아름다움까지 희생해야만 했다.
- 카라바지오 (Caravaggio, 1571 ~ 1610)의 ‘엠마오의 저녁식사’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년 9월 29일 밀라노 ~ 1610년 7월 18일 포르토 에르콜레)의 강렬하고 참신한 작품은 그 자연주의적 특징으로써, 가끔은 거칠기도 한 사실주의로써, 그리고 테네브리즘 (ténébrisme) 까지 나아가는 명암 (clair-obscur) 기법의 강한 사용으로써, 17세기 회화를 변혁했다.
카라바조는 당대에도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으며, 카라바조주의 (caravagisme)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카라바조는 수많은 위대한 화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브레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엠마오의 저녁식사’ (Supper at Emmaus, 1605년)는 그가 한창 명성을 날리던 무렵 그려진 종교화로, 카라바조의 종교화 중 걸작이다.
신약성서의 누가복음 24:13-32에 나오는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 엠마오로 가서 사도들 앞에 나타난 이야기이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두 사도는 이날 처음으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카라바조는 엠마오라는 동네에 가서 저녁을 먹을 때 제자 두 명 앞에서 자신이 예수임을 밝히는 장면을 포착했다.
중앙에 있는 예수님이 본인의 신분을 밝힐 때 우측 제자는 깜짝 놀랬는지 왼손으로 테이블을 꽉 잡고 벌떡 일어서려는 것 같다.
왼쪽 제자 역시 두 손을 벌리고 놀라워하고 있다.
배경은 어둡고 중앙에 빛이 비친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눈빛과 표정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다.
한편 카라바조는 ‘엠마오의 저녁식사’라는 제목으로 두 작품을 그렸다.
다른 하나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 주세페 몰테니 (Giuseppe Molteni, 1800 ~ 1867)
주세페 몰테니 (Giuseppe Molteni, 1800 ~ 1867)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재정적인 이유로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몰테니는 볼로냐에서 주세페 기자르디의 제자로서 고대 그림 복원을 시작했다.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곧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복원가 중 한 명이 되었고,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의 컨설턴트가 되었으며, 밀라노와 유럽 전체의 주요 수집가이자 감정가가 되었다. 그는 또한 그림 그리기에 힘을 쏟았다.
1828년 그는 호화로운 의상과 배경을 세심하게 묘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초상화 장르를 시작했는데, 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그를 프란체스코 하예즈와 직접 경쟁하게 만들었다.
1837년 비엔나 궁정에서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보낸 기간은 비더마이어 그림에 대한 감상과 화가 프리드리히 폰 아메를링과의 우정, 그리고 요한 프리드리히 오버베크의 스타일로 이어졌다.
장르화로의 전환은 1837년에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일상 생활을 담은 장면은 대중과 비평가들에게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850년대에 몰테니의 브레라 전시회에 대한 정기적인 참여는 줄어들었고, 1854년에 아카데미 갤러리의 큐레이터로 임명되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완전히 중단되었다.
한편 주세페 몰테니가 밀라노에서 활동할 당시 그가 주도한 편안한 스타일의 낭만주의적 초상화가 유행했다.
밀라노는 상류도시로, 당시 중산층이 급증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술후원을 통해 자신들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했다.
몰테니의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 (Mother Mourning the Death of her Child)은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슬픔을 너머 허망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 움베르토 보초니 (1882 ~ 1916)의 ‘자화상’과 ‘아케이드에서의 싸움’
움베르토 보초니 (Umberto Boccioni, 1882년 10월 19일 레조디칼라브리아 ~ 1916년 8월 17일 베로나)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로 미래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브레라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 ‘자화상’과 ‘아케이드에서의 싸움’ (1910년)이 있다.
움베르트 보초니가 이 그림 ‘아케이드에서의 싸움’을 완성하던 해에 발표한 ‘미래주의 화가 선언문’은 ‘투쟁’, ‘잔인한’, ‘경멸’ 등과 같이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어휘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폭력성은 ‘아케이드에서의 투쟁’에서도 발견된다.
이 작품은 밀라노의 가장 유명한 쇼핑 아케이드에서 발발한 상류층 그룹의 집단 흥분을 보여주고 있다.
점잖게 차려입은 인물들은 마치 그들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팔을 올린 채 화면의 초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
그들이 달려가는 곳에는 매춘부로 보이는 두 여인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보초니는 우리를 그 장면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빌딩 카페의 휘황한 불빛, 또는 우리를 내쫓는 듯한 전경의 신사를 그려 넣음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을 화면 밖으로 달아나게 만들고 있다.
근대 도시의 속도와 움직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다른 미래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주의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와 러시아에서 성행한 운동이었다.
이탈리아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를 중심으로 모인 미래주의자들은 예술의 전통 개념은 물론 일반적인 과거를 거부했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케이드에서의 싸움’이 가까운 과거 예술에 빚지고 있는 작품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보초니가 1902년 파리에서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양식을 공부했고, 이러한 지식에 기반하여 색채를 사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긴 선보다는 점점 (點點)의 채색을 즐겼던 그의 기법은 19세기 말 조르주 쇠라에 의해 개척된 점묘주의 화법에 곧잘 비견된다. _ 명화 1001
-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1488/90 ~ 1576)의 ‘참회하는 히에로니무스’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1488/90년경 ~ 1576년)는 북이탈리아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출생한 이탈리아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했던 화가이다.
그의 창작 시기는 베네치아 공화국 회화의 황금기와 맞아 떨어졌다.
그 당시 베네치아는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티치아노는 9살이 되었을 때 베네치아로 가서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 형제에게 사사했다.
브레라 미술관에 그의 작품 ‘참회하는 히에로니무스’ (1550 ~ 1555)는 놀랍도록 자유로운 양식으로 그려진 명작으로, 자연이 성인의 고통과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과 온순하게 자고 있는 사자에 덧붙여진 다른 요소들은 히에로니무스 성인과 관련되어 해석되고 있다.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 (라: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년 ~ 420년 9월 30일) 또는 예로니모, 제롬 (Jerome)은 기독교 성직자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보편교회 신학자이자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특히 서방교회에서 중요한 신학자이다.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 성경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히에로뉘모스 (Ἱερώνυμος, 신성한 사람)’에서 유래한다. 서방교회 지역의 중요한 신학자이다. 현재 천주교회에서는 중요한 성인으로 추대하는 교회박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축일은 9월 30일.
흔히 상체를 벗은 은수자로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거나 돌로 가슴을 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상징물은 십자가·해골·모래시계·책·두루마리이며, 학자·학생·고고학자·서적상·순례자·사서·번역가·수덕생활을 하는 사람의 수호 성인이다.
- 파올로 베로네세 (Paolo Veronese, 1528 ~ 1588)의 ‘마지막 만찬’
파올로 베로네세 (Paolo Veronese, 1528년 ~ 1588년 4월 19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서 티치아노에게 큰 영향을 받아, 빈틈없는 구도와 화려한 색채의 장식화를 주로 그렸다.
‘베네치아파’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주요 작품으로 ‘성모의 대관’, ‘레비 가의 향연’ 등이 있다.
브레라 미술관에 소장된 ‘마지막 만찬’은 원래 산티 조반니의 파올로 수도원에 걸기 위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주문됐던 것이다.
거대한 캔버스화는 그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거기에는 고전시대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색채의 대가인 베로네세는 방의 실제 공간 너머까지 시야를 확장시키는 환영적인 구도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 지암페이트리노의 ‘성모자’
- 빈센조 캄피의 ‘The kitchen’
- 카밀로 보카치노 (Camillo Boccachino)의 ‘비너스와 큐피드’
- 패리스 보르도네의 ‘The Venechian Lovers’
- 보카치오 보카치노 (Boccaccio Boccaccino)의 ‘성모자’
- 세사레 다 세스토의 ‘성모자’
- 암브로지오 베르공 (Ambrogio Bergognone)의 ‘성모와 잠자는 아이’
- 안드레아 슬라리의 ‘젊은 남자의 초상’
- 베르나르디노 부티노네의 ‘성모자’
- 베르나르디노 루이니의 ‘성모자’
- 로렌조 코스타의 ‘동방박사의 경배’
- 루도비코 마졸리니의 ‘나사로의 소생’
- 안토니오 코레지오
-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 안토니 반 다이크
-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 ~ 1640)의 ‘마지막 만찬’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다.
루벤스의 ‘마지막 만찬’에서 유다는 예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데, 그림 하단 유다의 발끝에는 개가 그려져 있다.
개를 사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 가운데 오직 유다의 식탁 아래의 개만이 관람자를 쳐다보고 있다.
불안해 하는 유다의 눈과 슬픈 개의 눈이 대조를 이룬다.
- 지아코모 세루티
- 주세페 보시
- 지오바니 파토리의 ‘휴식’
- 실베스트로 레가 (Silvero Lega)의 ‘After Lunch’
- 지오반니 파오로 로마조 (Giovanni Paolo Lomazzo)의 ‘자화상’
- 브론치노의 ‘안드리아 도레아의 넵튠초상화’
- 바티스텔로 카라흘로의 ‘우물가의 사마리안 여인’
- 다니엘 크레스피의 ‘최후의 만찬’
- 프란체스코 아이예즈 (Francesco Hayez, 1791 ~ 1882)의 ‘달콤한 입맞춤’
낭만주의 화가 프란체스코 아이예즈 (Francesco Hayez, 1791년 2월 11일 ~ 1882년 2월 12일)는 브레라 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냈고 30년간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화가이다.
그는 19세기 중반 밀라노의 낭만주의의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웅장한 역사적 그림, 정치적 우화, 초상화로 유명하다.
프란체스코 하예즈는 베니스의 비교적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는 프랑스 출신이고 어머니 키아라 토르첼라는 무라노 출신이었다. 프란체스코는 다섯 아들 중 막내였다. 그는 부유한 선주이자 미술 수집가인 조반니 비나스코와 결혼한 어머니의 누이에게서 자랐다. 하예즈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의 삼촌은 그의 조숙한 재능을 알아차리고 그를 베니스의 미술 복원가에게 제자로 보냈다. 하예즈는 나중에 화가 프란체스코 마조토의 제자가 되었고 3년 동안 그와 함께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1806년 베니스의 신미술 아카데미의 회화 과정에 입학하여 테오도로 마테이니의 지도를 받았다. 1809년 그는 베니스 아카데미에서 로마의 산 루카 아카데미에서 1년간 레지던트 생활을 위한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는 1814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가 나폴리로 이사하여 요아킴 무라트의 의뢰로 알키노우스의 궁정에 있는 율리시즈를 묘사한 주요 작품을 그렸다. 1830년대 중반에 그는 클라라 마페이가 주최한 밀라노의 마페이 살롱에 참석했다. 마페이의 남편은 나중에 하예즈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1850년에 하예즈는 브레라 아카데미의 이사로 임명되었다.
하예즈는 긴 경력 동안 다작했다. 그의 작품에는 후원자들의 애국적 감성에 어필하도록 디자인된 역사적 그림과 성경이나 고전 문학에서 가져온 웅장한 주제에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수반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 작품이 포함되었다. 그는 또한 연극 공연의 장면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게 빠진 것은 제단화다. 아마도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한 나폴레옹의 침략 때문일 것이다. 미술사학자 코라도 리치는 하예즈를 고전주의자였지만 이후 감정적 격동의 스타일로 발전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브레라 미술관 소장작품으로 ‘달콤한 입맞춤’ (1859년), ‘위대한 희생’, ‘가족의 초상화’, ‘멜랑콜리’, ‘Pierto Rossi’, ‘불길한 예감’, ‘The to Foscan’ 등이 있다.
브레라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프란체스코 아이예즈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참고 = 위키백과, 브레라미술관 홈페이지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