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14)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베네치아의 두칼레 궁전과 산마르코 성당
2023년 10월 18일(수) 우리 일행은 밀라노에서 베네치아까지 약 280km를 버스로 3시간 30분정도 이동, 베네치아 입구에서 바포레토 전세선에 탑승해 본섬으로 이동해 탄식의 다리를 거쳐 두칼레 궁전과 산마르코 성당을 둘러보았다.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은 베네치아 도제 (국가원수)의 공식적인 주거지로 9세기에 건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309년부터 1424년의 기간에 걸쳐 지어진 것이다. 고딕 양식의 건물로, 조형미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뛰어나다. 산마르코 대성당에 면한 쪽에 ‘문서의 문 (Porta della Carta)’이 있는데 옛날에는 여기에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을 붙였다. 문 위에 보이는 날개가 있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다. 두칼레 궁전의 ’10인 평의회의 방’에는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를 그린 그림, 원수 76인의 초상화 등이 있다. 두칼레 궁전에서는 산 마르코 광장과 베네치아 석호를 동시에 바라보며 즐길 수 있다.
두칼레 궁전의 원형이 세워진 것은 샤를마뉴가 죽은 해인 813년으로 베네치아인들이 정부의 소재지와 시의 중심지로 리알토섬을 택하면서 당시 도제였던 안젤로 혹은 아그넬로 파르티치파치오에 의해 도제의 거처로서 당시 다른 서유럽의 통치자들의 거주지들과 마찬가지로 요새화된 관저로 산 마르코 성당과 함께 세워졌다. 다만 그 형태나 위치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으며 대략적인 위치에 대해서도 온갖 가설이 대립하다시피 하고 있으나 건물의 대략적인 형태에 대해서 피에르로 오르셀로 2세가 도제로 있던 당시에 오토 대제가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그광경을 목격한 사고르니노란 인물의 기록에 의하면 폰다코 데 투르키와 같은 도시의 비잔틴 양식의 건축과 닮았으며 조각이라든지 황금과 찬란한 색체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다고 적어 놓았다.
이후 이 궁전은 칸디아노 4세에 대한 반란으로 인한 화재와 1106년에 있는 화재로 두 차레나 훼손되는 것과 동시에 재건을 반복됨과 동시에 확장되어 이후 1173년과 12세기말 사이에 도제 세바스티안 치아니에 의해 다시 보수 공사를 거치면서 확장되어 이후 14세기 초의 고딕화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백년 이상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1297년경 피에르트 그라데니고가 도제로서 집권하면서 베네치아의 정부에 중대한 변화와 함께 귀족들의 권력이 한층 더 공고해졌다. 이와중에 두칼레 궁전은 한차레 변화를 겪게 된다. 1309년 두칼레 궁전은 증축 공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외·내부를 보수·증축을 해 1442년에 완공된다.
궁전의 평면은 U자 형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과 붙어 있으며, 탄식의 다리가 있는 동쪽 면을 제외한 피아체타와 리바 드 스키아보니를 면한 부분들은 1·2층이 한 가운데의 작은 방을 두고 좌·우로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의 경우 첨두아치로 된 볼트로 처리되었지만 중정쪽은 평범한 아치로 구성되었다. 2층의 경우 외벽쪽은 오선아치로 되어 있었지만 중정쪽은 그냥 첨두아치로 되어 있었다. 3층은 큰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피아체타와 리바 드 스키아보니의 면한 외벽쪽은 붉은색, 흰색, 검은색 벽돌로 쌓아놓였으며, 마름꼴 형태로 붉은색, 다음으로 안쪽으로 같은 방식으로 흰색, 당시 안쪽으로 붉은색, 흰색을 샇아두다가 마지막으로 검은색 벽돌을 심자 형태로 마무리했다.
궁전 안 인테리어는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혼재하고 있다.
산마르코 성당 (Basilica di San Marco)
산마르코 성당 (Basilica di San Marco)은 이탈리아 베네토주 베네치아의 성당이다. 동로마 건축 양식의 가톨릭 성당으로 복음서 기자 마르코 (마가)에게 봉헌되었다. 산마르코 광장 동쪽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에 있는 두칼레 궁전과 연결되어 있다. 금박 모자이크로 벽면이 가득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황금의 교회 (Chiesa d’Oro)’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비잔틴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산마르코 광장과 두칼레 궁전과 인접해 있다. 원래 두칼레 궁전에 소속된 성당이었으나, 1807년에 베네치아 대주교가 이 곳으로 주교좌를 옮기며 바티칸 소유의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
– 마르코 (마가) 유해
산마르코 성당은 복음서 기자 마르코 (마가)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이면서 초대교회의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알려져 있다. 전승은 그가 이집트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의 주교로 있다가 순교를 당했다. 그의 시신은 모슬렘들이 지키고 해외 반출을 막고 있었다. 1063-1073년에 2명의 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마가 유골의 납골당으로 세워진 것 (829 ~ 832년)이다. 829-832년 이 유해를 보관하는 납골당으로 세워졌다가 1063-1073년 기간 동안 마가의 업적을 기념하는 교회로서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웠다.
– 산마르코 성당 개관
대성당의 기본적인 골격은 1060년과 1100년 사이에 대부분 완성되었고, 후에 추가적으로 이루어진 공사들은 대부분 대성당 건물을 장식하거나 더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그 중점을 두었다. 대성당은 고딕 양식의 돔으로 꾸며져 있으며, 성당을 덮고 있는 황금 모자이크를 만드는 데는 몇 세기나 걸렸다. 13세기에 원래 돔 위에 철골로 새로운 돔을 만들어 씌웠다. 내부의 돔 공간 자체의 크기를 확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보면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낫다.
대성당의 아름다운 디자인, 황금 모자이크, 베네치아의 부와 명성으로 인해, 산마르코 대성당은 11세기에 ‘황금 교회’라고도 불렸다. 당시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독창적인 방식으로 비잔틴 양식과 이슬람 양식을 섞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초기 건축
대성당의 원형은 828년에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훔쳐온 성물을 보관하기 위해 두칼레 궁전 옆에 지어진 건물이다. 976년에 일어난 반란 때 불탔고, 당시의 모습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은 1163년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1163년에 새로운 대성당을 짓기 위해 대공사를 벌였고, 성당을 모든 방향으로 확장, 특히 남북쪽으로 크게 확장하였다. 성당의 목조 돔들은 석조로 바뀌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더 두꺼운 벽들을 세웠다.
대성당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일반적인 성당과 다르게, 산마르코 대성당은 성당의 동쪽 날개를 중요시하여, 제단과 사제석을 이 곳에 두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몇 개의 파사드가 더 추가되었고, 성당의 모자이크들이 대부분 다 덮였다. 또한 두칼레 궁전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돔을 나무 재질로 크게 증축하였다.
베네치아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같이, 대성당은 벽돌로 지어졌다. 아치들은 테라코타와 벽돌로 장식되었고, 기둥, 점토로 이루어져 있다.
.증축
대성당의 기본 구조는 초기에 비해 크게 바뀐 바가 없다. 다만 그 안의 장식은 처음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내부의 벽과 천장에 황금으로 만든 모자이크들을 촘촘히 깔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이 것이 없었다면 대성당 내부의 분위기는 지금보다 많이 황량했을 것이다. 대성당은 끊임없이 보물들로 치장되었는데, 특히 1204년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에서 베네치아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의 예술품들을 대규모로 약탈, 이 곳에 전시하며 큰 변화를 겪었다. 대성당은 심지어 자신보다도 오래된 대리석 조각들과 장식들로 꾸며졌고, 또한 베네치아의 예술가들은 비잔틴 예술품들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시도했고, 거의 완벽한 수준에 달하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총독의 개인 성당에서 베네치아의 대성당으로
13세기 산마르코 대성당은 총독의 개인용 성당에서 대주교가 머무는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이로 인해 당연히 산마르코 대성당의 권위와 명성 또한 높아졌다. 이 곳에서 도시의 공공 행사들이 열렸고, 총독의 장례, 즉위 등이 이루어졌다.
.외형
건축 양식적으로 보면 로마네스크 양식과 르네상스시기 혼합되어 있다. 이 성당을 짓고 난 다음 베네치아인들은 외국에서 진귀한 보물을 구하면 가져와 성당의 외부와 내부를 장식했다.
이 성당은 동방양식 (양파모양)으로 지붕을 처리했고, 내외부가 모자이크로 만들어져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성 마르코의 말, 콰드리가 (La Quadriga) : 이 조각상은 청동으로 이루어진 4마리의 말들을 표현하고 있다. 본래 트라야누스 개선문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대경기장에 서있었다. 그러던 중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콘스탄티노플이 대약탈을 겪으며 이 동상도 약탈되어 베네치아로 옮겨져 1254년 성당 정면의 발코니 위에 설치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이 기념으로 이 동상을 가져갔으나, 1815년에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며 동상의 훼손이 우려되자 동상은 1970년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동상이 서있던 자리에는 복제품이 대신 세워져 있다.
사두정의 황제들 : 3세기 경 로마제국이 대혼란에 빠지며, 당대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를 4명으로 만들어 각자 제국을 통치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인 ‘사두정’을 만들어냈다. 이 조각에 묘사된 황제들은 그 사두정을 이루었던 4명의 황제들이다.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되어 대성당의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되었다. 자세히 보면 동상 중 1명의 발이 부서져 있는데, 이 발 조각은 1980년에 이스탄불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스탄불 시에서는 이 동상의 원래 주인이 자신이었음을 주장하며, 이 발 조각을 내어주지 않고 있다.
.내부
성당 내부에는 긴 쇠줄에 묶여서 천장으로부터 십자가가 내려져있다. 그리고 성당 내부는 황금빛으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가운데 돔은 예수 승천 돔으로서 천사들과 12사도, 성모 마리아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묘사한 모자이크이고, 왼쪽의 돔은 오순절 돔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 천장은 8,600개의 조각으로 모자이크를 했다. 이 성당 안에는 보석판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이스탄불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조각판이 돌려지면 이 보석 판이 나타난다고 한다. 예수님 옆의 인물은 마리아와 마가까지 합쳐서 14명으로 조각되어있다.
황금 모자이크 : 대부분의 이탈리아 성당들과는 다르게, 산마르코 대성당에는 프레스코화가 많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는 프레스코 대신 유리를 이용하여 대성당을 장식함으로써, 베네치아의 유리 산업과 보수적인 경향을 지키기 위해서인 것으로 풀이된다. 내부의 상층은 8,000제곱미터의 밝은 황금빛 유리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다만 베네치아 시에서 19세기에 오래된 중세 모자이크들을 대량으로 떼 버리고 새로운 모자이크들을 채워넣어, 중세의 모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모자이크들은 전체의 3분의 1 밖에 남아있지 않다.
내부 모자이크를 채워넣는 작업은 127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추가적인 작업은 그 후 20년을 끌었다.
산마르코 광장
이탈리아어로 광장을 ‘피아차’ (Piazza)라고 한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는 많은 광장 중에서도 그 이름을 가진 것은 산마르코 광장뿐이다.
이 광장의 역사는 두칼레 궁전과 산마르코 성당이 세워진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2세기에 운하를 메꾸고 세워지면서 광장이 확장되었고, 16세기에는 로마인 건축가에 의해서 르네상스 문화와 융합하여 여러 가지 공용건축 (도서관, 종탑아래 부분의 기둥 등)이 광장 주변에 만들어졌다.
이쯤에 종탑 (깜빠닐레)을 중심으로 한 산마르코 광장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나폴레옹에 의해 광장의 서쪽에 “나폴레옹 관”이 더해져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즉 광장의 중앙의 종탑으로 갈릴레오가 천체 관측을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길이 175m, 폭 80m의 대리석으로 구성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마르코 광장 주변에는 회랑이 설치되어 있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