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18)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피렌체 (Florence)의 우피치 미술관 (Uffizi Galleries) 방문
우리 일행은 친퀘테레 (Cinque Terre) 다섯 마을 중 ‘리오마조레’ (Riomaggiore)와 ‘마나롤라’ (Manarola)라는 두 마을을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인 피렌체를 향해 가다가 몬테까티니에 위치한 Tuscany Inn에서 묵었다.
다음날인 10월 20일 (금) 호텔 조식 후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로 향했다.
가는 길에 비가 오락가락했다.
2시간 정도 달려 피렌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켈란젤로 (언덕) 광장’에 도착했다.
미켈란젤로의 대표적인 작품 다비드상을 복제한 조각상이 언덕에 자리해 미켈란젤로 (언덕) 광장이라 불린단다.
피렌체 두오모까지 한눈에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미켈란젤로 광장 언덕에서 피렌체 전체를 둘러보고 단체사진도 찍은 후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메디치가의 사무실이었던 ‘우피치 미술관’ (Uffizi Galleries) 개관
우피치 미술관 (이: Galleria degli Uffizi)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피렌체 역사 지구에 있는 시뇨리아 광장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이자 가장 큰 미술관 중 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뛰어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지배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몰락 이후, 그들의 미술품 컬렉션은 마지막 메디치 가의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가 상의를 한 끝에 피렌체 시에 기부되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최초의 현대적 박물관 중 하나이며, 1765년에는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개방되었고, 1865년에 정식 박물관이 되었다.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은 피렌체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중 한 곳이다. 우피치 미술관은 2016년에 2백만 명이 방문했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은 미술관이 되었다. 성수기 (특히 7월)에는 대기 시간이 다섯 시간에 이른다. 입장권은 사전에 앞서 온라인으로도 구매 가능하며, 상당한 대기 시간을 줄여 준다. 박물관은 작품을 전시하는 데 사용 하는 방의 수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리기 위해 개조하고 있다.
메디치 가문의 기증으로 공개된 미술관
우피치 단지의 건물은 조르조 바사리가 메디치 가의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를 위하여 1560년도부터 짓기 시작하였다. 그의 치안 판사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우피치 (uffizi)는 이탈리아어로 사무실을 뜻한다. 그 후 알폰소 파리지와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가 이어서 건축하여, 1581년도에 완성하였다. 안마당은 상당히 길고 좁으며, 끝에 가서는 공간을 구획짓는 도리아식 기둥들을 지나 아르노강으로 열려 있다. 건축 역사가들은 이것을 유럽 최초의 규칙적인 가로 (街路)라고 평가한다.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바사리 (Vasari)는 마주보는 정면의 연속적인 처마 돌림띠 (cornice)와, 층 사이의 끊어지지 않는 돌림띠, 그리고 궁궐의 정면이 서 있는 연속적인 3개의 계단을 통해 원근법적 길이감을 강조하였다. 기둥사이의 벽의 벽감 (壁龕, niche)에는 16세기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조각으로 채워져 있다.
메디치 가문의 몰락 후 미술품 컬렉션은 메디치 가의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가 피렌체 시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기부한다. 사무실에서 미술관으로 전환된 우피치 미술관은 최초의 현대적 박물관 중 하나로, 1765년에는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개방되었고, 1865년에 정식 박물관이 되었다. 그림마다 작품명을 기재해 당시 관람객들의 편의를 고려한 최초의 미술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미술관 건물 자체도 한 폭의 미술품 같은 아름다운 곳이다.
우피치는 행정사무실과 함께 기록 보관소 (Archivio di Stato)도 같은 곳에서 운영했다. 기록 보관소에는 메디치 가문이 소유하던 미술품들을 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미술 컬렉션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확장 건설을 했고, 더 많은 작품들과 조각상, 보석들이 보관되었다. 이로 인해, 그란 투리스모의 가장 인기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3층 규모의 미술관에는 약 200년 동안 미디치 가문에서 수집한 소장성 높은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요 전시품
고대 그리스 조작 작품에서부터 18세기의 베네치안 회화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유명한 켈렉션을 연대순으로 전시했다.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 대부분의 작품들이 한곳에 소장중인 우피치 미술관은 총 45개의 관에 2,500점에 이르는 작품들이 전시중이다.
치마부에, 두초, 조토 디 본도네, 시모네 마르티니, 파올로 우첼로,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알브레히트 뒤러, 라파엘로, 티치아노, 카라바조, 렘브란트 등의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전체 전시관을 다 방문하지 못하고 주요작품들 전시관을 중심으로 작품들을 감상했다.
– 치마부에: 산타 트리니타 마에스타
치마부에 (Cimabue, 1240년 경 ~ 1302년 경)은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조토 디 본도네의 스승이며 피렌체 파 화가의 스승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비잔틴 예술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우아함·자연스러움·현실감 등이 깃들어 있다.
작품으로 산프란체스코 성당의 <십자가형> <묵시록> <성모> 등의 벽화가 있다.
‘소의 머리’라는 뜻의 치마부에는 본명이 아닌 별명이다.
치마부에라고 불리게 된 것은 거칠고 오만한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본명은 벤치비에니 페포다.
그는 중세에 이탈리아 회화를 지배한 비잔틴 양식의 최후를 장식한 거장이었고, 르네상스 초기 대가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라고 인정받고 있다.
또 잘 알려진 사실은 그의 화풍은 피렌체파의 거장 두초 디부오닌세냐와 조토 디 본도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의 예술에 바탕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화가를 직접 가르쳤는지도 모르지만, 생전에 이미 그들에게 최고 화가의 자리를 빼앗겼다고 알려져 있다.
치마부에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생애와 작품에 관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다, 그는 그림에 서명도 하지 않았다.
치마부에가 그린 ‘마에스타’ (1290~1300년)는 피렌체 산타트리니타 성당의 중앙 제단에 걸려 있었으나 이후에 옆쪽의 예배당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 두초: 루첼라이 마돈나
두초 디 부오닌세냐 (이: Duccio di Buoninsegna)는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반 시에나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그는 시에나 회화의 아버지이자 다른 이들과 함께 서양 미술의 창시자로서 손꼽힌다.
그는 인생 전부를 이탈리아 전역에서 정부와 종교 건물들에 많은 중요한 작품들을 제작하도록 고용되었다.
두초는 트레첸토 화풍 스타일과 시에나 화파를 만들어냈고, 시에나 고딕 미술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두초는 ‘루첼라이 마돈나’를 1285년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화로 완성했다.
두초는 이 작품에 당시 인습적인 비잔틴 양식에서 탈피하여 우아하고 정서적인 표현기법을 사용해 새롭게 주목받았다.
– 조토: 오니산티 마돈나, 바디아 폴리프티카
조토 디 본도네 (이: Giotto di Bondone, 1267년 ~ 1337년 1월 8일)는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이다.
피렌체 근교의 끌레 디 베스피자노에서 탄생했으며 피렌체에서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치마부에에게서 미술을 배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하였다.
마침내 투시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에 성공하였으며, 생기 있는 묘사로 종교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중인 조토의 ‘온니산티의 마돈나’ (Madonna d’Ognissanti, 1310년)는 목판에 템페라 테크닉으로 실현된 1310년경 작품이다.
이 그림은 그 시대의 특징적인 작품으로 제약된 공간안에 마리아와 아기를 위치해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원근법과 이상적인 비율로 가장 인간적으로 배치된 작품이기도하다.
우피치에 소장중인 조토의 다른 작품 ‘바디아 폴리프티카’ (1305~1308년 경)는 1300년 유럽 전역에 전쟁과 전염병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만들어졌다.
세상에 내려진 재앙과 참회, 그리고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구하는 심정이었으리라. 정확한 제작 연도에 대해서도 논쟁중이다.
– 시모네 마르티니: 성 마르가리타와 성 안사누스의 성모영보
시모네 마르티니 (Simone Martini, 1283년경 ~ 1344년경)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비잔틴 양식에서 르네상스로 바뀌는 과도기 때의 화가이다.
아름다운 색채의 장식적인 화풍을 나타낸 시에나 공회당, 아시시 교회, 아비뇽 교황궁 등의 그림에서 그의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작품에 <장엄> <성모와 성자들> <성고> 등이 있다. 시에나 및 아비뇽의 화가들에게 준 그의 영향은 크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성 마르가리타와 성 안사누스의 성모영보 작품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성모영보 (聖母領報, 라: Annunciatio)라 부르는데, 성모 마리아에게 대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성령에 의해 처녀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고 고하고, 또 마리아가 그것에 순응하고 받아들인 사건을 말하며, “복되신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태어나심을 알림 (Annunciation to the Blessed Virgin Mary)” 또는 “성모영보 (the Annunciation of Our Lady)”나, “주님의 태어나심을 알림 (the Annunciation of the Lord)”으로 불리우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는 그리스도교 축일이 되었다.
– 암브로조 로렌체티: 봉헌
암브로지오 로렌체티 (Ambrogio Lorenzetti, 약 1285년 또는 1290년, 시에나 공화국 ~ 1348년 6월 9일, 시에나 공화국)는 이탈리아의 화가로 동생인 피에트로 로렌체티도 화가이다.
작품 ‘그리스도의 사원봉헌’ (Presentation of Christ at the Temple, 1342년작)은 우피치 미술관 14세기 시에나화파의 방에 소장중이다
시에나화파 (Sienese School of painting)는 13-15세기 중세 말기부터 르네상스에 걸쳐 시에나에서 꽃피웠던 화파로 당시 피렌체 작가들 보다는 좀 더 보수적으로 이탈리아 비잔틴 양식 (Italo-Byzantine Style) 즉 마니에라 그레카 (maniera greca)에 충실하여 장식적인 아름다움과 후기 고딕 미술의 고상한 우아함으로 기울었지만 쌍벽을 이루었다.
자연주의적인 피렌체화파의 작품이 합리적이고 극적 감동을 주는 조형성을 중시한 데 반해, 시에나화파는 신비로운 사건에 촛점을 맞추어 중세적인 신비 속에 인간적인 정감이 깃들인 세련된 양식으로 소극적인 묘법이면서도 온화하고 정서적인 도해성과 장식성을 중시하여 시간과 장소의 왜곡, 그리고 다소 비율은 상관않은 체 마치 꿈과 같은 몽상적 분위기의 채색을 사용하였다.
16세기 매너리즘 작가 도메니코 베카푸니 (Domenico Beccafumi)와 소도마 (Il Sodoma)도 시에나화파에 속한다.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는 시에나에서 태어나고 훈련받았으나 작품 스타일은 그가 오랬동안 활동하던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15세기 들어 피렌체가 르네상스 회화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16세기 정치, 경제적으로 시에나가 사향길에 들어가자 피렌체에 예속돼 버렸다.
–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동방박사의 예배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Gentile da Fabriano, 1370년 ~ 1427년)는 이탈리아의 화가로 15세기 초 국제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베네치아ㆍ로마ㆍ피렌체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대표 작품 ‘동방박사의 경배’ (1423년)는 ‘국제 고딕 양식’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그 화려함만으로도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초기 르네상스의 대표적 작품중 하나로 손꼽히며 이 작품도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중이다. 피렌체 갑부의 부와 사치를 맘껏 드러내주는 이 작품은 젠틸레가 밑그림 그리는데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작품은 산타 트리니타 (Santa Trinità)에 있는 피렌체 교회의 가족 예배당을 위한 제단화였다. 실제 금박과 보석이 들어가 있는 유화 물감 쓰기 이전의 템페라 (Tempera) 작품으로 어두운 예배당을 눈부시게 밝혀주는 미묘한 조명 효과가 있다.
작품만큼이나 독창적인 액자 형 프레임 (Frame)은 정교하게 조각을 한 후 금박을 입혔다. ‘동방 박사의 경배’는 르네상스 시대에도 루벤스와 다빈치 등 유명한 화가들이 앞 다투어 그렸던 주제이다. 그러나 같은 주제여도 파브리아노의 작품만큼 독보적인 것은 없다. 무엇보다 이 주제는 주문자의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었다. 또한 예술가들의 장인 정신을 과시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었다.
– 파올로 우첼로: 산로마노 전투 (그림)
파올로 우첼로 (Paolo Uccello, 1397년∼1475년)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원근법의 연구에 몰두한 우첼로는 마사초의 후계자, 또는 원근법의 발명자라고 불리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시적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화려한 색반 (色斑)과 풍부한 금을 사용하여 장식적 효과를 높이는 고딕의 전통에 살아 온 작가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유명한 ‘산 로마노의 전투’ (1440년)는 1432년 산 로마노에 있었던 시에나군 (軍)을 격파한 니콜로 다 톨렌티노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다.
기마전은 일대 야외극 (野外劇)으로서 장식풍으로 그려져 있고, 여기저기에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단축법 (短縮法, 지상에 가로누운 병사와 말)과 원근법 (遠近法, 떨어진 창의 방향에 주의)을 구사하고 있는데, 서 있는 말은 마치 회전목마처럼 정지하고 있다.
–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로히어르 판데르베이던 (네: Rogier van der Weyden, Roger de la Pasture, 1399년 또는 1400년 ~ 1464년 6월 18일)은 플랑드르 파 화가이다. 1427년 투르네 화가조합의 장로인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의 화실에 도제로 들어가 5년 동안 그의 화실에서 일하며 세밀한 사실주의 기법을 배웠다. 또 브뤼헤 출신의 화가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아 우아하고 섬세한 화풍을 익혔다.
판 데르 베이던은 1432년 투르네 화가조합의 조합원으로서 독립된 장인이 되었고, 1435년 이후에는 브뤼셀에 정착했다. 이듬해인 1436년 브뤼셀의 공식화가로 임명되어 시청사를 장식할 벽화를 주문 받고 4개의 대형 판넬화를 그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1695년 프랑스 군대에 의해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시 (市)의 공적인 주문을 맡아 국제적인 명성과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공(公)을 포함해 명망 있는 외국 후원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판 데르 베이던이 제작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다룬 제단화들이다.
그중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중인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Lamentation of Christ, 1460년~1463년)가 유명하다. 로히르는 공간의 개념을 연출했다. 마치 인물들이 제단화의 나무 면에 존재하는 것처럼 공간적으로 능숙하게 배치했으며, 이들을 견고한 금빛 배경에 대비시켰다. 인물들이 마치 밀실에 갇힌 듯, 빽빽한 느낌을 한층 더 강화시켜주는 그림 테두리의 환영적인 장식 틀은 로히르 그림의 혁신적인 특징이다. 로히르의 추종자들은 이 대가에 필적하는 드로잉과 도안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뤼셀 회화에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 프라 필리포 리피: 성모자상, 성모의 대관
프라 필리포 리피 (Fra Filippo Lippi, 1406년? ∼ 1469년 10월 8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마사초의 유일한 수제자라고 하는 그는 어린 시절에 양친을 잃고 피렌체의 카르미네회 (會) 수도원에 맡겨져 수도 화가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프라 안젤리코와 달라서 종교화를 현실적으로 그린 최초의 화가인데, 당시 유행한 의상과 머리모양을 그림에 대담하게 채용하였다.
또 운동 묘사(특히 옷이 접힌 주름의 표현)와 섬세한 색채로 널리 알려졌다.
수녀 루크레치아 부티의 유괴사건은 그의 만년을 먹칠한 추문이었으나 (1456년),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필리피노 리피 (1457년∼1504년)도 뛰어난 색채화가였다. 또 발도비네티 (1425년 ∼ 1499년)와 멜로초 다 포를리 (1438년 ∼ 1494년) 등도 색채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유려한 선과 인간 감정의 정묘한 표현으로 알려진 화가들이다.
자유분방했던 필리포 리피는 성화에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입힌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중인 ‘성모자상’에는 세속적인 아름다움, 즉 지상의 아름다움으로 신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기 예수는 딸 알렉산드리아 라고 한다. 물론 성모마리아는 필리포 리피의 아내인 루크레치아 부티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는 인물들 외에도 그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멋진 풍경이다.
다빈치의 명작, ‘모나리자’처럼 인물들 뒤에 환상적인 자연 배경을 배치해 인물들을 돋보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그림의 배경은 실제 풍경이 아니라 액자 속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그림인 셈인데 이러한 기법은 필리포 리피가 거의 처음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모의 대관’ (The Coronation of the Virgin, 1445년)은 하나님이 직접 성모 마리아에게 관을 씌워주고 있고 우측에 낙타털 옷을 입고 십자가를 들고 서 있는 성 요하 모습도 보인다.
아치형 뒤로는 성모 마리아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이 활짝 피어있고 좌측 수도승 뒤에 턱을 고이고 있는 사람이 필리포 리피 자화상이라고 한다.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과 바티스타 스포르차 공작부인 두폭 제단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이: Piero della Francesca, 본명 Piero di Benedetto, 1415년경 ~ 1492년 10월12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투시도법을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이것을 작품에다 응용하였다. 그의 작품은 너무 이론적인 것 같아 보이나 풍부한 감정이 넘쳐 흘러 벽화나 초상화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처음 피렌체로 나아가 도미니크 베네치아의 조수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1445년경에 그린 <자바의 마돈나>는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오래 된 제단화라고 전해진다.
성 프란체스코 사원의 벽화 <성 십자가 이야기>는 최대의 걸작으로서, 세련된 색채와 완전한 구도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초상화로 <우즈비노 공의 초상> 등이 있는데, 주로 옆얼굴을 많이 그렸다. 그 밖의 작품으로 <시바 여왕의 예배>가 있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중인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과 바티스타 스포르차 공작부인 두폭 제단화’ (Portraits of the Duke and Duchess of Urbino, 1467~1472년)는 우르비노의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프란체스카의 대표작 중 하나로 토스카나 지방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공작과 부인 모두 고대 로마 황제가 메달이나 동전에 등장할 때 취하던 정측면상 자세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지체 높은 귀족은 언제나 위엄이 넘쳐 보여야 했고, 이 때문에 그림에서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엄격한 분위기의 귀족 초상화에 비하면 작은 방 안에서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있는 아르놀피니 부부는 훨씬 더 다정다감해 보인다.
그림 속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는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장군이었다. 서출로 태어났지만 자기 실력으로 공작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 초상화에서 왼쪽 얼굴만 보여주는 데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그는 마상 경기를 하다가 오른쪽 눈을 창에 찔려서 실명했고 이 때문에 왼쪽의 정측면상은 그에게는 다친 눈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자세였다. 한편 그는 오른쪽 눈을 잃고 나서 높은 콧등 때문에 반대쪽을 볼 수 없자 스스로 콧등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눈으로 백 개의 눈보다 더 잘 볼 수 있다”고 외쳤다고 한다. 실제로 그림 속에서 그는 매부리코를 자랑하고 있다.
그는 한쪽 눈으로 자신의 두 번째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를 마주 보고 있다. 부인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하지만 창백한 피부가 뭔가 사연이 있음을 암시한다.
바티스타는 결혼 후 여덟 명의 딸을 낳다가 기대하던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후 폐렴으로 사망하고 만다. 아마도 이 부부 초상화는 우르비노 공작이 죽은 아내에 대한 애도를 담아 두 사람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연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공작 부부가 품위를 지키며 서로를 고결하고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가 거울 속에 반전을 숨겨놓았다면,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그림 뒷면을 통해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풀어낸다. 마치 비석처럼 아래 단에 부부의 덕목을 예찬하는 시를 적었고, 그 위에서 부부가 각각 사랑의 신 에로스가 모는 마차를 타고 행진하고 있다.
–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그리스도의 세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Andrea del Verrocchio, 1436년 ~ 1488년)는 이탈리아의 예술가·화가·조각가이다.
피렌체에서 출생한 그는 피렌체의 대표적인 화가로 사람의 근육과 움직이는 모양을 특히 잘 묘사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페루지노, 산드로 보티첼리 등이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가 특히 유명하다.
그 외의 작품으로 《작은 꽃다발을 안은 부인》, 조각으로 《클레오니 기마상》 등이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 (The Baptism of Christ, 1475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1475년 완성한 작품이다.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리스도의 세례’는 베로키오가 그 제자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인정하여, 스승의 작품 속에 천사를 추가로 그리게 한 사실이 입증된 종교화이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피렌체의 산 살비 수도원이 우피치 미술관에 기증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베로키오의 유일한 회화작품이다.
– 휘호 판 데르 후스: 포르티나리 제단화
휘호 반 데르 후스 (Hugo van der Goes, 1440년 벨기에 Ghent ~ 1482년 벨기에 Auderghem) 는 벨기에 북쪽 플랑드르 (Flandre)의 화가로 1467년 겐트 (Gand)의 화가조합에 등록해 벨기에 브뤼헤 (Brugge)에서 활약했다. 휘호 판 데르 후스의 ‘포르티나리 제단화’는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중으로 반 데르 후스는 이 명작을 통해 포르티나리에게 멋진 찬사를 적절히 바쳤을 뿐 아니라 예수탄생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부유한 이탈리아 사업가이며 브뤼주의 메디치 가문 대리인이었던 토마소 포르티나리는 피렌체에 있는 가족 예배당에 걸기위해 이 제단화를 주문했다. 그가 헨트의 화가 휘고 반 데르 후스를 선택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고향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플랑드르에서의 자신의 성공을 기념하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화가 반 데르 후스는 이 명작을 통해 포르티나리에게 멋진 찬사를 적절히 바쳤을 뿐 아니라 예수탄생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이 대형 제단화에는 누가복음(2장 10~19절)의 설명에 따라, 성가족과 양치기들의 경배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중앙 패널은 예수 탄생의 기쁨을 찬양하고 있는 동시에 성가족과 농부들의 겸손함을 강조한다. 화가는 중요도에 따라 크기에 차등을 두는 고풍적인 방식을 재도입, 성가족을 가장 크게 그리고 기부자와 천사들은 그에 비해 작게 그려 넣었다. 인물들은 성모 마리아의 손을 중심으로 하는 대각선 축을 기준으로 배열됐다. 이와 같은 특이한 구성으로 인해 약간은 불안하고 역동적인 운동감이 느껴진다. 중앙 패널에 보이는 바닥의 각도는 당대에 공연된 종교극을 반영하는 것 같다. 무대 바닥은 좀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기울어져 있고 인물들은 신비극에 적합한 의상을 입고 있다. 서 있는 수호성인과 무릎을 꿇고 앉은 기부자들이 양쪽 패널에 재현됐다. 반 데르 후스는 반 에이크의 뛰어난 일루저니즘,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의 기념비적인 성격, 디렉 바우츠의 풍경을 이 멋진 그림속에서 융합해냈다.
– 산드로 보티첼리: 봄, 비너스의 탄생, 동방박사의 예배와 그외 작품들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년 3월 1일 ~ 1510년 5월 17일)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 (Alessandro di Mariano Fillipepi)이지만, ‘작은 술통’이라는 뜻을 가진 보티첼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메디치 가문과 그 가문의 추종자들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의 초상화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후기 작품은 고딕 양식을 재수용하면서 감정적으로 강한 표현을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그의 회화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요소를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재수용했고, 유겐트슈틸도 선과 장식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그로부터 몇 가지를 차용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인 마리아노 디 반니 (Mariano di Vanni)는 제혁업자이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봄’, ‘비너스의 탄생’, ‘동방박사의 예배’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우피치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 깊은 화가는 산드로 보티첼리로 그의 작품 ‘봄’과 ‘비너스의 탄생’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봄’ (1482년, 또는 ‘프리마베라’ Primavera)는 1482년경 보티첼리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세스코 데 메디치의 카스텔로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섬세하고 매끄러운 선과 가벼운 느낌의 옷, 여리고 서정적인 선율과 같이 보티첼리의 독특한 스타일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중앙에는 베누스와 큐피드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제피로스와 플로라가 그려져 있다. 왼쪽에는 케뤼케이온을 든 메르쿠리우스가 그려져 있고 그 사이로 플로라와 카리테스가 그려져 있다.
보티첼리의 다른 작품 ‘비너스의 탄생’ (La nascita di Venere. 1486년)은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비너스가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바다에서 탄생하면서 해안에 상륙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너스의 탄생은 1483년경 보티첼리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카스텔로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몇몇 학자들은 피에르프란세스코가 보티첼리에게 비너스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릴 것을 제안했고 조르조 바사리가 그 외의 그림들을 현재까지 피렌체에 전시해 놓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줄리아노 데 메디치 (1478년 파치 음모로 암살됨.)의 연인이자 포르토베네레 출신의 미인이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달력” 그리고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시편”은 보티첼리에게 영감을 주는 데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고전적인 여신 비너스는 물 위에 떠 있는 조가비에서 나온 채로 정신적인 사랑의 상징인 제피로스 (서풍)가 부는 바람을 타고 해안에 상륙하고 있으며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의 한 명이 꽃에 덮인 외투를 비너스에게 건네주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라파엘로와 같은 르네상스 화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엄격한 고전적 사실주의와 차이를 두고 있다. 비너스의 목은 비현실적으로 길고 왼쪽 어깨의 기울기는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친구가 폐가 좋지 않아 한쪽이 꺼진 것을 묘사한 것이다
– 미켈란젤로: 성가족 (도니 톤도)
미켈란젤로 디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이: 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이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피렌체, 로마 등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노, 신앙을 미적으로 잘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중인 ‘성가족’은 1503년에서 1504년 사이, 혹은 1506년에서 1507년 사이에 거행된 아뇰로 도니와 마달레나 스트로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성가족이 위치한 앞부분은 그리스도교의 세계를, 전라의 남성들이 있는 뒷부분은 이교도의 세계를 의미한다.
요셉이 아기예수를 두손으로 보호하여 마리아의 뒤편에서 어깨 너머로 마리아에게 건네 보내는 자세로 그려져있다.
그리고 중간 조금 밑으로 선이 그어져 보는 사람으로 부터 안정감을 갇게하며 뒤의 배경으로는 멀리보이는 돌성각과 시원한 하늘을 단순하게 표현하여 앞의 성가족과 뒷면의 나체의 남성들은 새로운 약속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 이그림에서는 정확한 구조와 원근법을 제시하였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스도의 세례,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예배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의 예술가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석학 (polymath)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와 직업을 갖고 활동했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 ~ 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한다.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제1 밀라노 시대이후 1500 ~ 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와 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장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이후 제2 밀라노시대를 거쳐 노년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며 유작을 남겼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중인 그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 (1472년~1475년)는 베로키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왼쪽의 천사를, 베로키오는 오른쪽의 천사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교회의 통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수태고지’ (1475년~1480년)는 예수를 잉태한 성모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왔다는 누가복음서의 탄생 본문을 소재로 그렸다.
‘동방박사의 예배’ (1481~82년경)는 목판에 유채로서 화면이 누렇게 변색된 미완성으로 밑그림으로만 남아 있으나 탁월한 걸작에 속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주문받아 그리는 도중에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떠나게 되어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 피에로 디 코시모: 안드로메다를 풀어주는 페르세우스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 (이: Piero di Cosimo de’ Medici, 1416년 9월 19일 ~ 1469년 12월 2일)는 1464년에서 1469년까지 사실상의 피렌체의 통치자였다. 통풍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인하여 활발히 활동하지 못했고 치적도 많이 쌓지는 못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그의 장남 로렌초 데 메디치 대에 이르러 크게 융성하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예술을 후원하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의 취향은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작품까지, 아버지 보다 다방면으로 넓었다. 그는 또한 진귀한 서적 수집을 지속하여, 많은 책들을 메디치 컬렉션에 추가하였다.
화가이기도 한 피에로 디 코시모의 작품 ‘안드로메다를 풀어주는 페르세우스’ (1513년경)도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스 신화에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로 바다괴물을 돌로 만들어 버리고 안드로메다를 구해 주었으며, 둘은 결혼해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후에 이 부부가 죽은 후 별자리가 되었는데 각각 안드로메다자리 (Andromeda)와 페르세우스자리 (Perseus)다.
– 알브레히트 뒤러: 동방박사의 예배
알브레히트 뒤러 (독: Albrecht Dürer, 1471년 5월 21일 ~ 1528년 4월 6일)는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이며, 특히 목판화, 동판화 및 수채화에서 독창적 재질을 보였다.
그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및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의 저서도 내고, 또 이상미 (理想美)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주로 종교화·초상화·풍경화 등을 제재로 하였으며, 동판·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한 묵시록> 등이 있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중인 ‘동방박사의 경배’ (1504년)는 세 동방박사가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바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에는 요셉이 보이지 않는다.
동방박사들의 경배 장면에서 아기예수의 아버지가 빠지는 일이 종종 있다.
마태도 동방박사들의 경배 장면에서 요셉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리아의 뒤쪽으로 외양간이 놓였다. 털이 누런 황소와 잿빛 나귀가 목을 빼고 멀리서 온 손님들을 바라본다.
– 라파엘로: 오색방울새의 성모, 레오 10세의 초상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 (이: 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예술가·화가이며, 흔히 라파엘로 (Raffaello)라고 불린다.
《아테네 학당》이 특히 유명하다. <아테네 학당>은 에피쿠로스, 피타고라스, 안티스테네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가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소장중인 ‘오색방울새의 성모’ (Madonna of the Goldfinch, 1505~1507년)는 라파엘로의 대표작으로 Madonna del cardellino 혹은 Madonna of the Goldfinch 라고도 불린다.
오색 방울새는 엉겅퀴와 가시나무를 먹는 새로 알려져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새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친구 모직 상인 로렌초 나시 (Lorenzo Nasi)의 결혼 선물로 그린 그림인데 불행하게도 1547년 그의 집이 붕괴되면서 그림이 17 조각으로 찢어지고 말았다.
450여년간 원화가 손상된 채 보존되어 왔지만 우피치 미술관에서 10년의 긴 시간을 피렌체의 미술품 복원소인 Opificio delle Pietre Dure 를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한다.
– 티치아노: 플로라, 우르비노의 비너스
티치아노 베첼리오 (이: Tiziano Vecellio, 1488-90년경 ~ 1576년)는 북이탈리아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출생한 이탈리아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했던 화가이다. 그의 창작 시기는 베네치아 공화국 회화의 황금기와 맞아 떨어졌다. 그 당시 베네치아는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 ‘플로라’ (Flora, 1515~1517년)는 베네치아의 예술가 중에서도 색상과 톤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 제목은 ‘꽃’이라는 의미로서 ‘플로라’의 알레고리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피터 드 요드의 약혼녀를 암시하고 잇는 것으로 추정된다. 플로라라는 한 인물 묘사에 집중하여 이루어졌다. 갈색을 뒷배경으로 젊은 여인이 한 손에 꽃을 한 움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들은 제비꽃과 작은 장미, 그리고 자스민이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 양식의 옷을 입고 있는데 흰색의 얇은 도포는 오른편으로 흘러내리면서 가슴을 노출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기울인 머리와 시선은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공들여 이루어진 그녀의 얼굴은 16세기 르네상스의 미적 규준인 창백하면서도 반짝이는 피부와 핑크빛 뺨으로 되어있고, 길게 늘어뜨린 구리빛 색상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다. 그녀의 머리색은 특별히 티치아노 빨강 (Titian red)으로도 불렸다. 플로라라는 주제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비디우스 (Ovid)의 ‘변신이야기 (Metamorphoses)’에 등장한다. 작품은 네덜란드 역사가인 요아힘 본 산드라트 (Joachim von Sandrart)에 의하여 1635년 경 암스테르담 주재 스페인 대사 알폰소 돈 로페즈 (Don Alfonso Lòpez)의 컬렉션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후 로페즈가 오스트리아의 대공 (Archduke) 레오폴트 빌헬름 (Leopold Wilhelm)에게 그림을 팔았는데 1793년에 피렌체 (Florence)로 옮겨졌다. 이는 투스카니의 대공과 오스트리아 황제 소유의 비엔나 벨베데레 화랑 (Belvedere gallery) 사이의 교환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림은 너무나 유명하여 16세기 이후 여러 점의 판화로도 제작되었다. 이 그림 역시 스승 지오르지오네 (Giorgione)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506년 작품 ‘젊은 여인, 로라 (Young woman, Laura)’로부터 여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그림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로라’는 비엔나의 미술역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에서 볼 수 있다. 베니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미녀 (Beauty, Belle)’로 알려진 여인의 아름다움과 관능을 나타내는 하위장르 속의 그림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이미지는 그저 음란하기만 했던 삽화들이나 암시적 만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겸손 속에 감추어진 관능의 연결이라는, 고도의 방법론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 1538년)는 르네상스 시대 귀족사회의 결혼의 의미와 기능과 연관된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사랑과 관능의 여신 비너스를 그린 에로틱한 그림으로, 장미꽃은 비너스 혹은 사랑을 뜻한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누워 있는 새하얀 침대보는 순결을, 붉은 침대는 장미의 붉은 색과 더불어 사랑을 은유한다.
–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
지롤라모 프란체스코 마리아 마졸라 (Girolamo Francesco Maria Mazzola, 1503년 1월 11일 ~ 1540년 8월 24일)는 파르미자니노 (이: Parmigianino)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매너리즘 화가 겸 판화가이다. 피렌체, 로마, 볼로냐, 파르마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은 실제보다 길게 표현된 인체적 특징과 단축법과 과장법을 과장해서 표현하였다. 마니에리슴 회화는 그에 의하여 정점에 달한다.
그는 고국 파르마에서 코레지오의 작품에 접하고 1524년부터 1527년까지 있었던 로마 체류 시기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매우 우미·섬세한 여성미를 묘사하였다.
그가 처음 로마에 나오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 (1523)은 볼록렌즈에 비친 상을 그려, 마치 오늘날의 어안 렌즈와 같은 효과를 가져서 특이한 작품이 되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소장한 대표작 ‘목이 긴 성모’ (1534년?)는 화면 전체에 걸쳐 불합리한 요소가 산재한다.
전·중 후경에 논리적 관계가 없고, 성모자의 일단 (一團)이 실내에 있는지 실외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인체는 마치 좌단 천사의 암포라형 단지가 상징하고 있는 듯한 형태를 갖는다.
초상화 ‘안타에’ (1540년?)는 ‘목이 긴 성모’에 있던 한 소녀천사가 성장한 모습이라 여겨지는데, 그 화사한 손가락과 크게 뜬 눈과 스커트의 주름에 스민 신경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후년 연금술에 빠져 그의 죽음을 재촉하였다.
– 카라바조: 바쿠스, 이삭의 희생, 메두사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년 9월 29일 밀라노 ~ 1610년 7월 18일 포르토 에르콜레)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카라바조의 강렬하고 참신한 작품은 그 자연주의적 특징으로써, 가끔은 거칠기도 한 사실주의로써, 그리고 테네브리즘 (ténébrisme)까지 나아가는 명암 (clair-obscur) 기법의 강한 사용으로써, 17세기 회화를 변혁했다.
카라바조는 당대에도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으며, 카라바조주의 (caravagisme)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카라바조는 수많은 위대한 화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카라바조가 끼친 영향은 그가 로마를 떠난 1607년경에서 1620년경까지, 그 고장에 있으면서 강한 명암의 대비 (tenebrism) 때문에 테니브러스 (tenebrous=暗黑派)라고 불리던 화가들에게 그 자취가 가장 뚜렷이 남아 있다.
그 중 독일인 엘스하이머, 프랑스인 발랭탱, 네덜란드인 테르브르흐·혼토르스트 등이 1620년 전후까지 알프스 북쪽에 이 화풍을 이식하였다.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로마에 있던 만프레디 (1580 ∼ 1620), 사라체니 (1585 ∼ 1652) 특히, 오라치오 젠틸레스키(1565 ∼ 1638) 등이 직접 이 화풍을 계승하였다.
카라바조의 ‘바쿠스’ (Bacchus, 1596년)는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제공하는 그리스도가 바쿠스의 형상으로 세속에 나타난 것을 표현했다.
포도주와 다산의 로마 신이 포도밭에 기대어 왼손에 포도주 잔을 들고 있는 바로크 회화의 걸작이다.
그리고 카라바조는 ‘이삭의 희생’ (Sacrifice of Isaac, 1603년)에서 다른 화가들과는 매우 달리 희생되는 이삭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는 순종의 행동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희생할 준비를 하는 비장함을 표현한 걸장이다.
한편 카라바조의 ‘메두사’ (Medusa, 1595~1598년)는 메두사의 잘린 머리를 그렸지만, 메두사는 여전히 의식이 있는 모습이다.
그는 메두사의 격앙된 표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결합을 강조했다.
카라바조는 메두사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기 위해 메두사가 죽는 순간에 자기 얼굴을 봤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봐야 했다.
찡그린 눈썹과 휘둥그레진 눈, 크게 벌린 입 등 메두사 최후의 격앙된 표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우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년 7월 8일 ~ 1652/1656년 사이)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이다. 카라바조 화풍의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젠틸레스키 시대에 여성 화가는 화가 커뮤니티에서 배척당하였고 후원자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분위기에도 젠틸레스키는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구매자가 나섰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신화나 성서에 등장하는 강력하고 고통받는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다니엘서의 수산나가 두 장로에게 희롱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수산나와 두 장로》를 여러 점 그렸는데 특히 독일의 포머스펠덴에 있는 1610년 그림이 유명하다.
또한 1614-20년 작으로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디트로이트 미술 협회에 있는 1625년작 <유디트와 하녀> 역시 대표작으로 꼽힌다.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20년)는 구약성경 외전인 유딧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방사상으로 뻗어있는 여러 개의 팔과 인물들의 머리를 환하게 조명을 받은 목을 베는 동작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 렘브란트: 헝클어진 머리의 자화상, 노인의 자화상, 노인의 초상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 (네: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년 7월 15일 ~ 1669년 10월 4일)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빛의 화가라고도 불리는 그는 일반적으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예술 분야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거장들과 네덜란드 예술가들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초상화 화가로서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뒀으나, 말년은 개인적인 비극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의 일생 동안 인기가 있었고, 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20년 동안 그는 많은 중요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가르쳤다.
렘브란트의 동시대의 초상화, 자화상, 성경 장면의 삽화는 그의 가장 위대한 창조적 업적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에서 그는 고전적 도상학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그가 자신의 경험의 필요조건에 맞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성경 장면의 묘사는 그의 특정 텍스트에 대한 지식, 고전적 구성의 동화, 그리고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인구에 대한 그의 관찰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렘브란트 전시실에는 그의 ‘자화상’ 연작이 있다.
그의 그림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서 어두운 배경에 투박하고 거친 터치의 유화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에는 자신만만한 20대부터 고통이 시작된 중년을 거쳐 삶의 나락에 이른 노년의 정신까지 느껴진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명작1001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