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20)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피렌체 (Florence)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들
10월 20일 (금)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이자 가장 큰 미술관 중 한 곳으로도 알려진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했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뛰어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조작 작품에서부터 18세기의 베네치안 회화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유명한 켈렉션을 연대순으로 전시했다.
우피치 미술관의 작품들을 감상한 우리 일행은 다음 행선지인 단테생가,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등을 둘러보았다.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광장이다.
시뇨리아 (Signoria)라는 말은 예전에는 투표권이 남성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남자들이 모여 투표를 행하던 광장이란 의미에서 시뇨리아 광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피렌체 공화국의 기원과 역사의 핵심이며, 여전히 도시의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과 베키오 궁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장 곳곳에는 피렌체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동상들이 서 있다. 이곳에서 처형당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기념하는 동판이 있다.
광장은 극장, 로마식 목욕탕, 직물 염색 작업장으로 둘러싸인 원래 로마 도시 플로렌티아의 중심 광장이었다. 나중에 로자와 거대한 5세기 대성당인 산 로몰로 교회가 있었다. 이것은 1980년대에 재포장되었을 때 광장 아래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보물에 의해 보여졌다. 신석기 시대 유적도 발견되었다.
광장은 1268년부터 기벨린 가문에 승리한 구엘프에 의해 철거되면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광장은 구멍으로 가득 찬 어수선한 상태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1385년에 처음으로 포장이 되었다.
1497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 광장에서 유명한 허영의 소각을 수행했다. 엄청난 책더미, 도박대, 고급 드레스와 시인의 작품을 불태웠다.
넵튠 분수 앞에는 둥근 대리석 명판 이 1498년 5월 23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교수형에 처해 불태워진 정확한 지점을 표시하고 있다.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들
르네상스의 중심지 피렌체는 어딜 가도 볼거리가 풍부한 고풍스러운 도시이다.
특히 피렌체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에는 다양한 조각상들이 있다.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수많은 조각상들을 다 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우리 일행은 여기에 있는 많은 조각상들 앞에서 시간을 갖을 수 없었다.
중요한 몇 개만 설명을 듣고, 다른 조각상들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아쉬움을 기록하며 달래본다.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베키오궁 입구에 위치한 다비드상은 1501년부터 1504년 6월 8일까지 제작한 대리석상으로, 높이는 5.17m이다.
원본은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 인접한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청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위엄있게 표현해냈다.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렌체에서 시청의 부탁으로 다비드를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았으며, 갈고리형으로 굽은 오른편 손목은 츠크네를 모방하였고, 세부의 해부학적 표현과 고정된 눈에도 전 시대의 잔재를 엿볼 수 있다(석재가 높이에 비하여 얇은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의 면모는 표정이 넘쳐 있고 그 거대한 크기와 더불어 전형적인 남성의 나체상이 되어 있다.
체구를 상반되는 두 방향축에 중심을 두면서 두 어깨의 위치에 높고 낮음을 만들고, 목줄기 근육을 과장하여 조각상에 긴박감을 부연하였다. 이 작품이 풍기는 긴장감과 불안정성은 헬레니즘 조각의 다방향성을 한층 강조한 것이다.
다비드상은 원래 피렌체 대성당 동쪽 끝의 지붕선을 따라 배치될 일련의 예언자 동상 중 하나로 의뢰를 했었다.
그러나 대신 피렌체 시청이 있는 베키오궁 외부의 공공 광장에 배치되어 1504년 9월 8일에 시뇨리아 광장에서 공개되었다.
동상은 1873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로 옮겨졌고, 나중에 원래 위치에서 복제품으로 교체되었다.
이 조각상이 상징하는 인물의 특성 때문에 동상은 곧 더 강력한 라이벌 국가와 메디치 가문의 패권에 의해 모든 면에서 위협받는 독립 도시 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에서 구현된 시민 자유의 수호를 상징하게 되었다.
다비드의 시선은 경고의 눈빛으로 메디치 가문이 살고 있는 로마를 향하고 있었다.
- 넵투누스 분수 (Fountain of Neptune)
시뇨리아 광장에 위치한 ‘넵투누스 분수’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 (Bartolomeo Ammannati, 1511년 6월 18일 ~ 1592년 4월 13일)의 작품으로 이 설계 업무는 본래 노년의 바르톨로메오 반디넬리에게 주어졌으나, 반디넬리가 사망하면서, 암만나티의 설계가 벤베누토 첼리니와 빈첸초 단티의 설계안을 이기고 의뢰를 얻어냈다.
1559년에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가 아들인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와 며느리이자 공작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요하나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을 의뢰하여 만들어졌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1537년부터 1569년까지 피렌체의 공작이며 여전히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피렌체의 방대한 건축물 및 예술품들이 그에게서 비롯했다.
분수는 바초 반디넬리가 설계하였지만,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가 1560년과 1574년 사이에 다른 예술가들과의 도움을 받아 제작하였다.
신화 속의 여러 인물들, 그리고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권력 및 프란체스코와 요아나의 결합을 상징화 한 도상학적 상징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넵튠은 그리스신화의 포세이돈 (Poseidon)이다.
반달 행위와 전반적인 관리 부실로 수 년간 많은 손상을 입었으나 2019년에 대대적인 복원이 착수가 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전체 모습은 포세이돈이 4두마차를 타고 있는 장면을 바다의 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포세이돈 정면에 앉아있는 것이 서열 2위인 바다의 여신 카리브디스 (Charybdis)이고 우측은 반인반수인 자연의 정령인 사티로스 (Satyr)이다.
- 메디치 사자상들 (Medici lions)
사자가 구체를 굴리고 있는 것은 용맹과 정복의 상징으로 메디치가가 애정하는 사자상들을 많이 제작했다.
판첼리와 바카가 각각 사자상을 제작했는데 하나는 판첼리아가 고대 로마시대인 2세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키가 1598년 제작한 것이다.
하나는 왼발, 다른 하나는 좀 늙어보이는 모습에 오른발을 구체에 올리고 있는 것이 다르다.
이 메디치 사자들 (Medici lions)은 1600년에 로마의 메디치 저택에 세워졌던 것을 1789년 이곳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란치의 화랑에 전면에 위치한 이 두 마리의 사자상은 메디가와 피렌체의 상징인 사자상으로 좌측이 마르조꼬 (Marzocco)의 로마시대 작품이고, 우측 사자상이 훌라미니오 바카 (Flaminio Vacca) 작품으로 159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포세이돈 조각 우측에 피렌체의 상징인 사자상이 베키오궁전을 지키고 있는데 교황의 문장인 십자가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이 다르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1460년,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졌다.
도나텔로가 성경에 나오는 유디트의 이야기를 주제로 조각했다.
유디트는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홀로페르네스를 응징하기 위해, 홀로페르네스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척 하면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여걸이다.
성폭행당한 피해자였으면서도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자주 그린 주제로도 유명하다.
도나텔로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진품은 현재 박물관에 있으며, 광장에는 복제품이 설치되어 있다.
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 / 도나텔로 (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 1386년경 ~ 1466년 12월 13일)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이다. 얕은 돋을새김 조각으로 유명하다.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연구하고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다. 작품 경향은 중세적 자연주의의 전통과 고전의 형태미에 의하면서 차츰 새로운 힘찬 사실주의로 발전하였다. 특히 원근법을 써서 입체감을 나타내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표현에 힘썼다. <가타멜라타의 가마상>은 특히 뛰어나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는 기베르티, 브루넬레스키와 더불어 ‘르네상스 초기의 3대 조각가’로 불린다. 대표작으로 <성 조르조 상> <다비드> 등이 있다.
도나텔로의 예술을 형성한 데는 브루넬레스코와 함께 로마에 유학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대머리이기 때문에 <로 츠코네>라 불리는 상은 피렌체 대성당 종루의 감실용으로 제작된 것인데(1423∼1425) 그의 철저한 사실을 실증하는 작품이다. 그는 미라고 하는 추상적 표준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억센 인간성을 극명하게 묘사하려고 시도했다.
-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
16세기 이탈리아-플라망 조각가 잠볼로냐는 단일 대리석 블록으로 조각된 3명의 인물 (여자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남자와 웅크리고 있는 두 번째 남자)으로 이 주제의 표현을 조각했다.
이 조각품은 잠볼로냐의 걸작으로 간주된다. 원래는 복잡한 조각 그룹을 만드는 예술가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주제인 전설적인 사비니족의 강간은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가 칙령을 내린 후에 발명해야 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로자 데이 란치에 공개 전시된다.
벤베누토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동상 맞은편에 제안된 조각 장소는 그룹이 피네우스의 안드로메다 강간과 같은 이전 작품과 관련된 주제를 설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촉발했다.
프로세르피나와 헬레네의 각각의 강간도 가능한 주제로 제기되었다. 결국 조각품이 사비니 처녀 중 하나로 확인되기로 결정되었다.
작품은 OPVS IOANNIS BOLONII FLANDRI MDLXXXII (“플랑드르의 불로뉴의 요하네스 작품, 1582”)에 서명했다.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국립 박물관에 2명의 인물만 있는 초기 준비 청동이 있다.
그런 다음 잠볼로냐는 이번에는 세 번째 그림으로 계획을 수정하여 현재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있는 두 가지 밀랍 모형을 사용한다.
1582년에 완성된 완성된 조각에 대한 예술가의 본격적인 젯소는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자와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는 고대 조각 라오콘 군상의 인물을 참조한다.
잠볼로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되고 다른 사람들이 모방한 조각품의 청동 축소는 19세기까지 감정가 컬렉션의 필수품이었다.
- 코시모 1세의 승마기념비
‘코시모 1세의 승마기념비’는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를 기리기 위해 잠볼로냐가 조각했다.
Cosimo I de’ Medici는 1537에서 1569 사이에 피렌체의 공작이었고 오늘날 피렌체에 존재하는 건축과 예술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초대 피렌체 공작이었던 알레산드로가 1537년에 암살당하자 권력을 계승하였으며 메디치의 방계 가문 출신으로 기울어가던 메디치 가문을 다시 부흥시켰다.
집권이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공화파들을 제압하고 피렌체에 귀족정을 뿌리내리게 하였다. 1557년에는 무력으로 시에나를 정복하는등 영토 확장에 성공하며 도시국가 수준의 피렌체를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만들었다. 그의 집권 초기의 피렌체는 1530년에 있었던 피렌체 공성전의 여파로 정치는 혼탁했고 경제는 피폐하였으며 사회는 무질서 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이기는 했으나 강력한 부국강병 정책을 통해 피렌체를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황제 카를 5세의 봉신임을 분명히 했으며 반-프랑스, 친-황제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이를 통해 당대에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적 세력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 피렌체의 독립성을 유지하였고 밀라노의 경우와는 달리 피렌체가 스페인의 속주가 되는 것을 막아냈다.
그의 외할머니인 루크레치아는 위대한 로렌초 (1449 ~ 1492)의 딸이자 메디치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누나이다. 이런 가문의 혈통으로 인해 교황 레오 10세는 코시모의 대부가 되어 주었다.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코시모와 6촌 형제지간이다.
예술 후원가였던 코시모 1세는 1559년 우피치 미술관을 착공하여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피치의 본래 의도는 다양한 조직, 기관들과 옛 공화국 시절에 창설된 길드들에 대한 코시모의 행정력 강화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에는 옛 메디치 가문에서 보유했었던,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컬렉션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는 시설이다. 우피치 건축은 조르조 바사리가 책임을 맡았다. 바사리는 베키오 궁전 개축작업에도 참여했으며 《미술가 열전》을 집필하여 1550년에 코시모 1세에게 헌정하였다.
코시모가 17세 때 니콜로 트리볼로가 만든, 빌라 디 카스텔로에 있는 그의 정원은 피렌체의 새로운 황금기를 알리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피렌체 가문의 덕과 웅장함을 표현하고 있다. 메디치 가문 일원들은 그곳에 분수, 미로, 인공 동굴, 독창적인 장식용 인공 폭포 등을 장식하였고, 이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의 원형이다. 메디치 가문은 18세기까지 이탈리아, 프랑스 정원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또한 메디치 가문의 본거지로서 피티 궁전 건설을 끝냈고 피티 궁전 뒤에 보볼리 정원 또한 만들었다. 그는 조상들이 해왔던 것보다 더, 그는 중요한 예술 후원가였고 여러 예술가들을 지원했는데, 그들 중에는 조르조 바사리, 벤베누토 첼리니, 폰토르모, 브론치노, 건축가 발다사레 란치, 역사가 스키피오네 아미라토, 베네데토 바르키 등이 있었다.
코시모는 또한 연금술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그의 할머니 카테리나 스포르차로부터 열정을 물려받았다.
잠볼로냐가 1598년에 만든 코시모의 거대한 청동 기마상은 여전히 피렌체의 주요 광장인 시뇨리아 광장에 서있다.
-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1554년에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가 제작한 ‘메두사 (Medusa)의 목을 베어 든 페르세우스 (Perseus)’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인 페르세우스를 형상화한 것으로, 조각상은 주변의 대리석 작품들과 달리 청동으로 만들어져서 강렬한 구리빛이 감돌고 있다.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1500년 11월 3일 ~ 1571년 2월 13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음악가 그리고 군인이다. 유명한 《자서전》에서 자칭한 바와 같이 모험가·무뢰한·호색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자서전》은 바사리의 《전기》와 더불어 당대 예술가의 특색을 전해 주며 열렬한 기백과 강한 개성을 풍긴다. 피렌체의 팔라초 베키오 전의 로지아 다 란치에 있는 〈페르세우스〉 (1554)를 주조하였을 때의 기사는 그 청동상 이상으로 박력이 넘친다. 상 (像)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는 메두사 (그리스 신화의 세 자매 괴물 고르곤의 하나)의 동부 (胴部)이고, 나머지 하나는 칼로 베어낸 머리를 들어올리는 영웅상이다. 주제가 가진 극적 내용은 남성의 근육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적인 과장과 주금가 (鑄金家)로서의 기술을 과시하는 첼리니의, 너무나 사소한 데 집착을 하는 버릇으로 인하여 그것을 잃고 있다. 두 육체의 수직선과 수평선이 군상 (群像)을 정시 (正視)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받침이 되고 있는 메두사의 발을 페르세우스의 왼발로 끌어들인다고 하는 기묘한 착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식성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극적인 박력을 희생한 점은 목에서 떨어지는 피의 표현에서도 볼 수 있다. 《자서전》 중에 조금사 (彫金師)로서 철저한 자기 주장은 페르세우스의 어깨로부터 비스듬히 걸린 끈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는 그에 대한 그 시대 사람의 비난을 예기하여 페르세우스의 투구 천변(天邊)에 자각상(自刻像)을 붙였다. 이 작품에 앞서서 그는 1540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가서 황금으로 〈식탁의 소금 단지〉 (1543)를 제작하였는데 대지의 여신과 해신 (海神)의 나상을 위쪽에 두고, 그 주위에 소금 넣는 데 (海産)와 후추 넣는 데 (陸産)를 나란히 두었으며, 동부 (胴部)에 인체와 짐승과 고기 등을 부조로 장식하였다.
시뇨리아 광장은 이번 여행지중에 내게 큰 감동을 선사한 공간이었다. 일정상 지나치듯 빠르게 스쳐갔지만 시뇨리아 광장을 떠나는 발걸음은 쉽지 않았다.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들을 살펴보고 우리 일행은 오찬친교 후 피렌체 두우모로 향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