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23)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이탈리아 최종행선지 로마 (Rome)
10월 20일 (금) 우리 일행은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3시간 30분 정도 로마로 이동해 1박했다.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에서의 일정은 매우 인상깊었다. 세계적인 우피치 미술관과 단테생가, 베키오 궁전,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의 조각상들, ‘피렌체대성당’ 그리고 ‘산 조반니 세례당’과 ‘천국의 문’, ‘산타 크로체 광장’ (Piazza Santa Croce)과 ‘산타 크로체 성당’ (Basilica di Santa Croce) 등을 둘러보는 순간순간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10월 21일 (토) Ergife Palace 호텔에서 조식 후 우리 일행은 로마행 버스에 올라 첫 행선지인 트레비분수로 향했다. 오늘 일정은 트레비분수를 시작으로 베네치아광장과 엠마누엘 3세 기념관, 고대로마 공화당 터, 대전차경기장,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일대를 방문하고 로마국제공항에서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한다.
약간 비내리는 창밖으로 보이는 로마시내 풍광은 놀라웠다. 로마의 일곱 언덕중 하나이며 핵심적인 언덕인 ‘팔라티노 (Palatino) 언덕’을 보는 순간 고대 로마의 역사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초기 로마 도시형성이 팔라티노 언덕과 주변 언덕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아이네아스의 선조이자 전쟁의 신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테베레 강가 동쪽에 위치한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건설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테베레 강가에 버려져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형제 사이 불화로 싸움이 일어났고, 형인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의 주도권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 후 로물루스는 자기의 이름을 따서 도시 국가의 이름을 로마라고 했고, 로마의 건국 시조로 추대받고 있다.

로마 개관
로마 (Roma)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라치오주의 주도이며, 테베레강 연안에 있다.
고대 로마의 기원 설화에 따르면, ‘로마’라는 이름은 도시의 첫 번째 왕이자 설립자인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학자들은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도시 로마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따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학설들이 존재한다. Rumon, Rumen은 테베레강의 옛이름인데, ‘흐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동사의 어원이기도 하다. 로마라는 단어가 이 동사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힘’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시의 인구는 400만 명이 넘지만 밀라노나 나폴리 대도시에 비해 면적이 3~4배 넓은 편이고 되려 로마시의 면적과 밀라노와 나폴리의 대도시의 면적이 비슷하므로 세 도시 모두 300만 정도로 비슷한 규모의 도시라 볼 수 있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3000여년 전에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 (Caput mundi)’, ‘영원한 도시 (la Città Eterna)’라고 부른다.
로물루스의 건국 이후 244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한 로마 왕정체제를 이뤘다. 기원전 509년에 마지막 왕이 폐위되었고, 이후 로마는 귀족들에 의해 주도되는 로마 공화정체제로 약 450년간 운영되었다.
로마는 기원전 2, 3세기에 세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 ~ 기원전 146년)과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212년 ~ 기원전 168년)으로 지중해를 장악했고, 지중해의 가장 강력한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권력층 사이에 권력투쟁이 두드러지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사이에 내전 (기원전 88년 ~ 기원전 80년)이 발발했으며,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 (기원전 59년 ~ 기원전 54년)가 뒤따르며 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기원전 58년 ~ 기원전 51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내전 (기원전 49년 ~ 기원전 45년)의 승리를 통해 종신 독재관으로 권력을 잡지만, 기원전 44년 공화정 지지파인 브루투스등에 의해 암살당한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 의한 제2차 삼두정치 (기원전 43년 ~ 기원전 33년)가 뒤따랐지만,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유일의 권력자가 되어 로마제국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68년까지 100여년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 황제의 자살로 막을 내리고, 네 명의 황제의 해라 불린 서기 68년 내전의 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 (서기 69년 ~ 96년)가 열린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 이후, 로마제국의 황금기인 오현제 시대 (96년 ~ 169년) 또는 팍스로마나 시대라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뒤따랐다.
제국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트라야누스 황제시기 (98년 ~ 117년)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된다. 이 시기 로마는 인구 수는 100여만명이 넘어가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192년, 콤모두스 황제의 암살이후 내전이 벌어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패배하면서 세베루스 왕조 (193년 ~ 235년)를 열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암살 이후, 40여년간 20여명의 황제가 암살되고 바뀌는 혼란의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리는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 정치를 창안하여 제국의 위기를 막으려 했다.
50여년간의 사두 정치 체계이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때 현 이스탄불 위치에 있는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고 천도하였고, 395년에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사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게 된다.
로마제국의 수도는 사두 정치 체제때 로마시를 벗어나 지금의 밀라노인 메디올라눔, 현 터키지역의 니코메디아, 현 독일지역의 트리어, 현 세르비아지역의 시르미움 네 군데로 나눠 제국을 통치하였고, 이후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제국은 이후 라벤나로 천도하면서, 로마시는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4, 5세기에 훈족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서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약탈을 받으며 서로마제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410년에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 (로마 약탈, 410년) 되고, 455년에는 반달족에 의해 로마가 다시 함락 (로마 약탈, 455년) 된다. 476년, 게르만 용병 장군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만 역사·종교·문화적으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과거의 민중사학적 믿음과 달리 로마는 파트리키 같은 강자에 호의적이고 빈자나 약자를 혐오했던 국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가 빠르게 퍼진 원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로마의 유적들
고대 로마의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도 고대 로마 제국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지만, 로마시가 일시적으로 몰락했던 고대말~중세초 정도를 제외하면 교황령의 르네상스 시대나 근현대의 통일 이탈리아 시대까지 다른 모든 시대의 흔적도 아주 많이 남아있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곳이 로마 구경이다.
- 고대 로마 유적
도무스 아우레아, 로마 가도 (아우렐리아 가도, 카시아 가도, 플라미니아 가도, 팔라티노 언덕 <Monte Palatino>, 아피아 가도), 아우구스투스 영묘, 카라칼라 욕장. 콜로세움, 판테온, 포로 로마노 (포룸 로마눔) 등이 있다.
- 광장 · 공원 · 분수대
나보나 광장, 캄피돌리오 광장 (Piazza di Campidoglio),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의 상, 라테라노 광장 (Piazza Laterano), 분수대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분수대, 세나토리오 궁), 마르첼로 극장의 유적, 베네치아 광장 (Piazza Venezia),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콜론나 광장 (Piazza Colonna),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 (Piazza di Campo dei Fiori) 등이 있다.

- 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in Vincoli),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성당, 도미네 쿼 바디스 성당 (Chiesa di Domine Quo Vadis),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Sopra Minerva), 산 안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 (Sant’ Andrea della Valle) 등이 있다.
- 궁전
라테라노 궁전, 알템프스 궁전 (Palazzo Altemps, 로마 국립 박물관), 퀴리날레 궁전 (palazzo del Quirinale) 등이 있다.
- 미술관 · 박물관
카피톨리니 미술관 (Museo Capitolino), 악기 박물관 (Museo Nazionale degli Strumenti Musicali), 베네치아 궁전 박물관 (Museo Nazionale del Palazzo di Venezia) 등이 있다.
- 그 외
산탄젤로 성, 치르코 마시모 (Circo Massimo, 고대 전차 경주장), 진실의 입 (Bocca della Verita), 헤라클레스 신전 (Tempio di Ercole Vincitore) 등이 있다.

로마 첫 방문지, 트레비 분수
우리 일행은 로마 시내에 들서며 버스에서 내려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는 로마를 상지하는 분수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니콜라 살비에 의해 지어졌고, 높이는 26.3m, 너비는 49.15m이다. 로마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분수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세계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분수이다. ‘로마의 휴일’과 같은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며 로마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트레비 분수가 자리한 곳은 옛 로마 시대에 물을 공급하던 수로가 끝나는 곳이었다. 이 수로는 로마에서 13km나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와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했고, 무려 400년 동안이나 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1629년,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반 8세가 새로운 분수를 짓기로 결심하며, 베르니니에게 새 분수의 디자인을 맡겼다. 하지만 설계가 다 끝나기 전 교황이 서거하며 분수의 건축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따라서 베르니니의 계획이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베르니니의 자취는 여전히 트레비 분수 곳곳에 남아있다.
바로크 시대에 들어서며, 국가 간 경쟁이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각 나라의 국왕과 교황은 서로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는 데 열정을 기울였다. 1730년 교황 클레멘스 12세가 새로운 분수를 짓기로 결정하며, 공모전을 벌였다. 이 공모전에서 니콜라 살비의 안이 처음에는 채택되지 못했으나, 국제 정세에 의해 결국 그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1732년에 분수가 착공되었다.

니콜라 살비는 1751년에 분수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나, 혹시라도 후대의 건축가들이 그의 작품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매우 구체적인 설계도를 남겼고, 이 분수의 조각을 하기 위해 4명이나 되는 조각가들이 고용되었다. 트레비 분수는 1762년에 완공되었으며,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군중들에게 개방되었다.
1988년에 스모그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복구 공사에 들어갔고, 1998년에 조각 전문가들이 돌에 간 금을 모두 메우고 떨어져 나간 부분들을 복원하였다. 또한 펌프를 사용하여 물이 끊임없이 순환하게 하였다.
2013년 1월에, 이탈리아의 패션 회사가 220만 유로를 트레비 분수의 보존을 위해 기부하였다. 이는 트레비 분수의 복원 역사상 가장 많은 기부금이었다. 복원 작업은 2014년에 시작하여 2015년에 끝났다. 11월에 상징적인 의식을 치르고 군중들에게 개방되었으며, 더 극적인 야간 모습을 위해 100개에 달하는 LED전구가 추가적으로 설치되었다.
트레비 분수 가운데에는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가 서있고, 이를 양 옆에서 바다의 신 트리톤이 보좌하는 모습이다. 트레비 분수의 왼쪽은 격동의 바다를, 오른쪽은 고요한 바다를 상징하며 바다의 두 이면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오케아노스를 포세이돈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케아노스는 빛을 이용한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 기둥 위에 서있고, 그의 옆에는 풍요의 여신이 항아리에서 물을 흘려보내는 모습, 건강의 신이 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석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참고로 트리톤과 말의 자세는 최대한으로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당대의 장식적이었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 던지기는 매우 유명한 전통 중 하나이다.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면 좋은 일이 찾아온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간혹 1개를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고, 2개를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올 수 있다는 내용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은 오랜 전통으로 남아있다. 이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거나 언젠가 다시 로마에 오게 된다고 믿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오른손에 동전 세 개를 들고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면 행운이 온다는 말도 있다.
매일 3,000유로 정도가 트레비 분수대 바닥에 쌓이는데, 로마 시에서는 매일 밤 이 동전을 수거하여 로마 내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쓰고 있다. 한편, 자석을 이용해 이 동전을 훔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모여 티타임을 가졌다. 이어질 로마의 방문지들이 기대되는 티티임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