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3)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이탈리아 로마 (Roma)에서 이집트 카이로 (Cairo)로
우리 시드니인문학교실 2차 인문학여행단은 2023년 10월 12일 (목)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해 13일 하루 동안 바티칸 박물관과 카타콤베 일대를 방문한 후 오후 6시 30분 비행기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이집트 카이로로 향했다.
카이로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밤 11시 30분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로 이집트 입국수속 후 기다리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로 호텔에 도착하니 2시가 다되었다. 피곤하니 또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이집트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시나이반도에 걸쳐 있는 국가이다. 영토 면적은 100만여제곱km, 수도는 카이로이다.
고대 이집트의 국호로는 Kemet이 있는데, 이 말은 “검다”는 뜻의 kem에서 나온 말로, 이것은 나일강의 홍수로 형성된 비옥한 흑토에서 유래했다. 또 deshret라고도 하는데, “붉은 땅”을 뜻하며 이집트의 사막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이 이름은 이집트 언어의 콥트어 시대에는 kīmi, kīmə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어는 케미아 (Χημία, Khēmía)로 나온다. 다른 명칭은 t3-mry으로, “강가의 땅”이란 뜻이다.
상하 이집트는 각각 Ta-Sheme’aw (t3-šmˁw, “사초 <莎草>가 자란 땅”), Ta-Mehew (t3 mḥw, “북쪽 땅”)이라고 했다. 현대 이집트의 공식 국호는 미스르 (아랍어 Miṣr, 이집트 아랍어 Maṣr)이다. 영어 명칭 “Egypt”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굽토스 (Αίγυπτος, 에귑토스)에서 유래하여 라틴어 애급투스 (Aegyptus, 에귑투스)를 통해 전해진 말이다.
10월 14일 (토) 피곤하지만 빨리 눈이 떠졌다. 숙소를 옮기며 심리적으로 불편한 부분이 이었던 모양이다. 숙소에서 창밖을 둘러보니 카이로 일대가 눈에 들어왔다.
카이로 (Cairo)는 이집트와 아랍 연맹의 수도이며, 나일강의 물줄기가 여러 지류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 지역 최대의 도시이다.
서기 642년에 건설된 도시로, 도시권의 인구는 1700만에 달한다.
짧은 취침시간으로 피곤하지만 우리 일행은 다음일정을 위해 아침 7시경 호텔조식을 하고, 8시경 버스에 올라 일정을 시작했다.
오늘의 일정은 세라피움 신전 (폼페이 기둥), 마가 기념교회, 카이트베이 요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람 등의 일정이다.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로
우리 일행은 카이로에서 북쪽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카이로에서 200여 킬로미터, 2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의 이름을 붙여 처음 세운 이래 헬레니즘 이집트의 수도로 이집트와 지중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도 여전히 물류와 자원이 지나는 중요한 산업중심지이다.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도처에서 이집트의 자연을 엿볼 수 있었다.
척박하지만 나일강을 따라 지류들을 이용해 여러 마을들과 농장들이 경작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 나일 강 삼각주 (델타) 북서단에 위치하고 있어 토지는 비옥했고 지중해와 접해 환경은 좋았다.
알렉산드리아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기원전 331년으로 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유명한 건축가 디노크레테스에게 도시를 건설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동방 원정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완성을 보지는 못하고 결국 죽었지만 부하인 클레오메네스가 도시건설을 계속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그의 계승자 중의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건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고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한때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백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에는 고대에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있었고 고대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유클리드도 이 도시 출신이다.
종교적으로도 초기 기독교 중심지로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등 교회사에서 중요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고,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유대교 중심지로 큰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14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16세기 유럽 국가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터키와 영국의 지배하에 알렉산드리아는 재건되었고, 무함마드 알리의 근대화 개혁의 일환으로 수출상품로써 나일・델타에서 면화가 대대적으로 재배되고 그 면화의 교역 항구가 되어, 국제무역 도시로써 알렉산드리아는 세 번째 번영을 맞이하였다.
현대의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아랍 공화국의 공업, 경제 중심지로써 그리고 화학산업 등이 발달한 이집트 안에 손꼽히는 공업 도시로써 발전해 나가고 있다.
세라피움 신전터와 폼페이 기둥
우리 일행은 첫 일정으로 세라피움 신전 (폼페이 기둥)을 방문했다.
이집트 그리스 시대의 역사적 건축물 유적지로, 나머지 부분은 작은 스핑크스 만 남아 있다.
기초의 큰 플랫폼은 여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홀로 남은 품페이 기둥은 알렉산드리아의 랜드 마크 유적이다.
세라피스 숭배의 중심지는 바로 여기 알렉산드리아였고 세라피움은 바로 이 세라피스 신전이었다.
세라피스 (Serapis, 고대 그리스어: Σάραπις)는 헬레니즘 시대의 이집트의 습합신이다. 가장 유명했던 신전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치세에는 이집트인의 종교와 통치자 (마케도니아인)의 종교를 통합하는 노력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방침은, 외래의 지배자를 저주하는 이집트의 배타적인 신을 짓밟고, 양쪽 모두로부터 숭배되는 신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문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문은 상 이집트에서의 신앙이 독실한 신으로 그리스인의 지배력이 강한 하 이집트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또한 그리스 사람에게는 동물의 머리를 가진 우상은 별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스타일의 인간의 모습을 한 우상을 선택하여 아피스와 동일하다라고 선언했다.
그것이 아세르-하피 (Aser-Hapi, 즉 오시리스-아피스)라고 불려 세라피스가 되었다.
이처럼 세라피스 (Serapis)는 오시리스 숭배에 빠져있던 프톨레미 1세 (기원전 305 ~ 기원전 282) 시기에 나타난 신으로 성스러운 황소 아피스 숭배와 제우스나 아클레피우스, 디오니소스 같은 그리이스 신들에 대한 숭배도 함께 이뤄졌다.
세라피스 신전은 프톨레미 1세 시절에 처음 세워졌다가 이후 프톨레미 3세 시기인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22년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주후 391년 기독교인들에 의해 포위된 뒤 신전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품페이 기둥은 주후 298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이집트 장관이었던 푸브리우스가 당시 황제인 디오클레티안에게 봉헌한 건축물이다.
이 내용은 기둥 아래쪽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 알 수 있는데, 이 기둥이 폼페이 기둥이라고 불리는가에 대해서는 역사적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폼페이우스 (Pompeius, 기원전 106 ~ 기원전 48)가 카이사르에게 쫓겨 알렉산드리아로 도망 왔는데,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그의 목을 베어서 기둥 꼭대기에 매달았다고 해서 ‘폼페이의 기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1906년에는 폼페이 기둥 주변에서 두 개의 핑크색 스핑크스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또 다른 유적은 세라피움 지하에서 발견된 지하 공간이다.
이 안에서 고고학자들은 아피스 황소상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프톨레미우스 시대까지 아피스 황소 숭배가 만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마가기념교회 (The Church of St. Mark)
세라피움 신전터와 폼페이 기둥을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마가기념교회로 향했다.
콥트 (Copt)는 이집트에 사는 고대 이집트인으로 그리스도의 단성설 (單性說-神性)을 신봉하던 사람들을 말하며, 그 명칭은 그리스어 아이깁티오이 (Aigiptioi, 이집트인)에서 나온 아랍어 킵트 (Kibt) 또는 쿱트 (Kubt)에서 유래한다.
콥틱 (Coptic)은 콥트인 혹은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지칭한다.
주후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콥틱교회를 분리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人性)과 신성 (神性) 두 가지를 주장했지만, 콥틱교회는 신성만을 주장했기 때문인데, 그때 로마 가톨릭과 갈라진 이후 콥틱교회는 지금까지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콥틱교회는 자기들의 교회 출발 원년 (元年)을 주후 284년으로 한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 (Diocletian)이 즉위한 해다.
교회 역사에서는 이 황제가 통치한 기간을 ‘순교자 시대’라고 부르는데, 극심한 박해로 콥틱교인이 많이 순교했다.
콥틱교회에서는 순교자 시대가 시작하는 해를 콥틱교회 공식 원년으로 삼고 있다.
이집트는 국가 정책과 시민 생활을 종교가 좌우한다.
아버지의 종교에 따라 자녀의 종교가 결정되고, 신분증에도 종교 표시를 한다.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임에도 콥틱교인이 750만 명에 달하고, 전체 인구 중 15%를 점하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모슬렘이기에, 소수인 콥틱교인은 언제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콥틱교회는 이러한 종교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다.
콥틱교인은 오른 손목 안쪽 중앙부분에 하늘색으로 작은 십자가 문신을 하여 평생 변함없이 콥틱교인임을 자부한다.
카이로에는 콥틱교회 총 본산인 교황청이 있고, 그 안에 마가교회가 있다.
마가교회는 카이로 (람세스) 중앙역에서 약 3km 지점인 아밧시아 거리 (Abassia Street)에 있다.
카이로 시민은 마가교회보다는 콥틱 교황청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한다.
마가 요한은 사도 바울과 전도여행을 떠난 최초의 선교사였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
마가 요한이 알렉산드리아에 처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운 것을 시작해서 이집트 곳곳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
교황청 안에는 건물이 여러 채 있다.
교황청 앞에는 주후 1200년에 세운 루이스교회가 있고, 주후 1968년 그 인접 지역에 마가교회를 웅장하게 건축했다.
이 교회는 2층 전체가 본당이며, 1층은 마리아교회, 비쇼이교회 등 교회와 용도별 부속 사무실이 있다.
마가교회 뒤편 지하층에는 마가의 묘 (Shrine, 廟)가 있어 마가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후 여러 곳에 흩어진 유해를 모아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주후 9세기 그의 유체가 발견되어 수로를 통해 베네치아로 운반할 때에 여러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 베니스의 성마르코 교회는 마가의 유체를 가져와서 안장한 곳이다.
마가 요한은 베니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카이트베이 (Qaitbey) 요새 방문과 오찬
마가기념교회 방문 후 우리 일행은 카이트베이 (Qaitbey) 요새를 찾았다.
요새가 있는 자리에는 기원전 279년에 세운 파로스섬의 등대가 있었으나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파로스섬의 등대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또는 알렉산드리의 파로스 등대 (Lighthouse of Alexandria 또는 Pharos of Alexandria)로도 불리는데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의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세워진 거대한 등대다.
100m에 달하는 높이를 갖고 있었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유명하다.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이 만든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였다.
등대는 기원후 956년과 1323년 사이의 거대한 대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어 돌무더기로 변하고 말았다.
고대의 불가사의들 중 세 번째로 오래 살아남았으며 (첫 번째는 이집트의 대피라미드, 두 번째는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이것은 1480년까지 그 잔해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카이트베이 요새를 지으며 그 석조 잔해가 사라졌고, 파로스 등대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등대가 무너진 후 1477년에 맘룩 술탄인 카이트 베이 (1468 ~ 98)는 등대의 잔해를 이용하여 카이트베이 요새를 건설하여 방어기지로 삼았다.
카이트베이 요새 또한 19세기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이집트 고대 유물 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 이 요새 안은 사원과 이집트 해군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994년에,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의 동쪽 항구 바닥에서 등대의 잔해를 발견했다.
2016년에는 이집트 문화부가 바다 아래 가라앉은 잔해들로 ‘세계 최초의 수중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이 요새 안에는 사원과 해군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카이트베이 요새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나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지중해가 보이는 바닷가 식당에서 유쾌한 점심식사 후 우리 일행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사이에는 알렉산드리아 대학교가 위치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고등교육기관이 위치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대학교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으며, 뉴보그 엘 아랍에는 이집트-일본 과학기술대학이 위치한다.
아랍 과학, 기술 및 해상운송 학술원 (Arab Academy for Science, Technology & Maritime Transport, ABET), 프랑스에서 설립한 상고르 대학교 등이 위치해 있다.
우리가 방문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일 고관의 방문으로 대중 방문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우리 일행은 도서관을 둘러보고 단체사진을 찍는데 만족해야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고대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도서관이었다.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기념하고 그것에 필적한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2002년 옛 도서관 자리 근처에서 개관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3세기 건립된 이후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까지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기원전 323 ~ 기원전 283년) 혹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 (기원전 283 ~ 기원전 246년) 때 창설된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 (46 ~ 120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 실수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후속인 아킬라스가 카이사르의 해상 능력을 제한하려하자 카이사르의 배에 불을 질렀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한다.
반면에 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도서관이 391년 세라페이온의 파괴를 지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오빌로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 역시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부분적인 혹은 완전한 파괴의 원인은 4가지 가설로 압축된다. ①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방화, ② 3세기경, 아우렐리아누스의 침략, ③ 391년, 콥트교황 데오빌로의 칙령, ④ 642년 이후, 무슬림의 알렉산드리아 점령 등이다.
도서관이 파괴된 후에,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세라페이온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대신 이용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그 의미가 있다. 또한, 도서관의 기능과 학문 연구의 대학 기능을 동시에 했다는 점에서 국립학술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자연 과학 연구의 중심지였고,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들 책의 원본을 상당수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학자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연구실을 제공하고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수학, 천문학, 기하학, 의학, 응용과학 등의 분야에서 당시 학계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화의 중심지로써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주변의 고대 희랍 세계 문화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그리스 문명 수집과 보존에만 치우치다가 새로운 학문 저술이나 희랍 문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의 문헌 수집, 배열 주석 등을 부가하였고, 그리스 문헌을 취합함은 물론 주변 국가들과 지중해, 중동, 인도 등지의 모든 언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보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10월 14일 알렉산드리아 방문일정을 마치고 카이로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9시경이 되었다.
내일은 기자 피라미드 일정이 있는 날이다. 신비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볼 생각에 마음이 설랬다.
참고 = 위키백과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