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4)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이집트 기자 (Giza) 피라미드 (Pyramid)와 스핑크스 (Sphinx)
2023년 10월 15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맞는 주일 아침이다. 주일 아침을 출애굽의 배경이 된 도시에서 맞은 것이다. 성경본문으로 출애굽기 7:1-7을 묵상했다. 7절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에 눈이 갔다. 현지에서 보니 남다른 마음이 들었다. 이웃 이스라엘은 팔레스틴 하마스와의 전쟁이 격해지고 있다는데 안전하게 여행일정을 마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잠시 묵상하고 숙소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늘 일정은 기자 (Giza)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파피루스 공장, 나일강 범선 체험, 나일강변에서 점심, 이집트 문명사 박물관 (Egypt Museum of Civilization), 모카탐 동굴교회 방문 후 기차를 이용해 룩소르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만만찮은 일정이 될 듯하다.
기자 (Giza)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호텔 조식 후 버스에 올라 기자 피라미드로 향했다. 기자 피라미드로 향하는 동안 내 마음은 오랫동안 목격하고픈 현장을 간다는 생각에 흥분되었다. 특히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방문한 후 뭔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현장방문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보지 않고 어찌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서다.
카이로에서는 남서쪽으로 10여km 떨어진 기자 (Giza)는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이집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아프리카 내에서도 킨샤사, 라고스, 카이로 다음으로 인구가 네 번째로 많은 도시이다. 기자주의 중심 도시이며 2017년 이집트 인구 조사 당시 총 인구가 4,872,448명이었다. 카이로 중심부에서 반대편 쪽인 나일강 서안에 위치했으며, 대카이로의 일부에 속한다. 기자는 파라오 나르메르의 집권기인 대략 기원전 3100년경 통일 이집트 왕국의 수도였다.
고대 이집트 이래 도시로서, 쿠푸의 대피라미드를 비롯해 3대 피라미드와 대스핑크스가 있는 유적지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 피라미드 (Pyramid)에서
마침내 우리 일행은 피라미드가 위치한 주차장에 도착해 단체 입장권을 구입하고 피라미드로 향했다. 멀리보이던 피라미드가 점점 눈앞에 다가올 때 드는 기분은 압도적이었다. 피라미드에서 느낀 누멘적 (numinous) 감정! 피라미드 앞에서 느낀 누멘적 (numinous) 감정은 상상했던 스탈당신드롬 그 이상이었다.
루돌프 옷토 (1869 ~ 1937)는 그의 저서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종교에는 명확한 개념적 이해와 언어적 표현을 초월하는 어떤 비합리적인 요소가 누멘적 감정”이라며 논리를 전개하는데 이런 느낌이 그것인가보다 생각했다.
너무 비현실적이고,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압도감, 두려움, 신비스러움 등의 비합리적인 감정들로 가득해 어리둥절하며 둘러봤던 순간이다. 옷토에 앞선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의존적 감정’을 말했는데 피라미드 앞에서 그 생각도 절로 들었다.
한편으로 여러 개의 피라미드를 목도하며 이렇게 과도한 권력자의 갑질이 왜 필요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피라미드는 북쪽으로 이집트 카이로 북부에서 남쪽으로 수단까지, 나일강을 따라 약 1500킬러미터가 넘는 지역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대략 3000년에 걸쳐 300개 이상 지어졌다. 현재까지 발굴된 피라미드는 138개이고, 이들은 대부분 카이로 서쪽 아부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나일강 서안 사막에 흩어져 있다.
오늘 우리가 본 기자의 피라미드군 (Giza pyramid complex)은 이집트 기자 평원에 자리한 피라미드군이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카프레의 피라미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의 3대 피라미드를 비롯하여 그에 딸린 소규모 피라미드와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아우르는 명칭이다. 고대 이집트의 고왕국 제4왕조 대에 지어졌으며, 피라미드군 외에도 여러 묘지와 노동자 숙소 유적도 남아 있다.
기자 시 나일강변에서 약 9km 떨어진 서부 사막지대 끝자락에 자리해 있으며,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는 남서쪽으로 13km 떨어진 위치에 있다. 대피라미드와 카프레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시대에 지어진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그 장대하고 인상적인 외관 덕에 예로부터 서양에서는 이집트 하면 흔히 떠올리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의 시돈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포함시키면서부터 벌어진 일이다.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에서도 그 건설 연대가 제일 오래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현존하는 유일한 불가사의이기도 하다.
피라미드는 갑자기 나타난 건축 양식이 아니라 이전의 마스타바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발전하였다. 마스타바는 무덤으로 이곳에 왕을 매장했다. 마스타바는 아랍어로 직사각형 벤치라는 의미이다.
파라오 조세르 (Djoser) 시대에 마스타바를 더 높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하여 다층 마스타바 혹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임호테프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후 파라오 스네프루 (Sneferu, Snefru)는 현재 우리가 아는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나 당대의 피라미드 건축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붕괴하고 만다.
스네프루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피라미드 각이 너무 예각이었던 탓에 다시 붕괴 위험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공사 중 각도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굴절 피라미드라고 한다.
그러나 스네프루는 굴절 피라미드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더욱 상징적이고 미적으로 완성된 피라미드를 짓기 위한 노력했으며, 이 사업은 성공적으로 끝나 현재 우리가 보는 이집트 피라미드 이미지와 같은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다음의 파라오 쿠푸 (Khufu)는 이미 완성된 선대 파라오의 피라미드에서 그 규모를 극대화하여 대규모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쿠푸의 피라미드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대피라미드는 최대 높이 146.6m (현재 높이 138.8m), 밑변 길이 약 230m로 3대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크다. 이 자리에 대피라미드가 들어서게 된 이유는 기자 평원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안정된 지반을 자랑하고, 건설 자재였던 석회석을 인근 채굴장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어 건설에 유리했던 점이 꼽힌다. 대피라미드는 겉에 돌을 쌓아올린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건축 당시에는 화장석으로 겉을 마감하여 매끄럽게 되어 있었다. 이후 풍화와 인위적 훼손으로 인해 표면이 벗겨져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마감뿐만 아니라 기단부에도 아직도 소수의 포장석이 남아 있으며, 근처 지역에서 채취한 백색의 고운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
대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존재하며, 큰 회랑을 거쳐 피라미드 중심부에 자리한 ‘왕의 방’까지 들어가 볼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있던 입구는 현재 폐쇄된 상태이며, 9세기경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인 알마으문이 남쪽 방면에서 뚫은 도굴 구멍을 통해 내부로 접근한다. 이곳으로 입장할 수 있는 관람객 수 역시 하루에 300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피라미드 내부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왕의 방 외에도 회랑에서 수평 통로를 통해 이어지는 ‘왕비의 방’이나 피라미드 지하부에 있는 ‘지하실’ 등의 공간이 존재한다. 또 왕의 방 바로 위쪽에는 피라미드의 중량을 분산시키기 위한 공간도 존재한다.
쿠푸의 피라미드 유적군에는 대피라미드 외에도 계곡 사원 유적이 존재하는데, 지금은 나즐렛엘삼만 (Nazlet el-Samman) 마을 지하에 파묻혀 있다. 이곳에서 휘록암 바닥재나 화폐석회암 벽재 파편이 발견되었으나 사원 터 자체가 발굴된 적은 없다. 계곡 사원은 둑길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마을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었다. 둑길 한쪽 끝에는 쿠푸왕의 장제전 (Mortuary temple)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장제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은 화강암 보도 뿐이다. 장제전을 넘어서면 바로 쿠푸의 대피라미드와 이어진다.
대피라미드 한 켠에는 여왕의 피라미드 3기가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으며, 동쪽에는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마스타바군이 늘어서 있다. 왕을 장사지낼 때 ‘태양의 배’가 묻혔던 갱 5곳도 남아 있다. 이 다섯 곳 중 피라미드 남쪽에 위치한 두 갱에서는 발굴 당시 배들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중 한 척은 복원 과정을 거쳐 전용 공간을 두고 전시중이다.
.카프레의 피라미드군
카프레의 피라미드 유적군은 왕의 피라미드와 계곡사원, 스핑크스 사원, 둑길, 장제전 등의 부속건물로 구성된다. 기원전 2570년경에 완공된 왕의 피라미드는 인접한 쿠푸의 대피라미드보다 크기와 규모가 모두 작지만 부지의 고도가 높은 탓에 더 커보이고 경사도 가팔라 보인다. 피라미드 꼭지 부분에 마감재가 일부 남아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계곡 사원 내에는 한때 카프레의 석상이 여러 점 놓여 있었다. 이들 중 몇 점은 지난 1860년 마리에트의 조사에서 사원 바닥에 묻혀 양호한 상태로 발굴되기도 했다. 나머지 석상들은 시글린, 융커, 라이스너, 하산 등 여러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차례차례 발굴되었다. 계곡 사원 외에도 다섯 척의 배가 묻혀있던 선박갱과 세르답이 딸린 부속 피라미드도 아우른다.
카프레의 피라미드군에 위치한 대스핑크스는 카프레 왕 치세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석조물이다. 본래 신왕조 대에 아멘호텝 2세가 하우론-하레마켓 (Hauron-Haremakhet)을 기리는 사원을 봉헌한 뒤 후대의 왕이 스핑크스상을 덧붙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멘카우레의 피라미드군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유적군은 왕의 피라미드와 계곡사원, 둑길, 장제전 등의 부속건물로 구성된다. 왕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150년 경에 완공되었으며, 여왕의 피라미드 세 군도 나란히 세워졌다. 계곡 사원 내에는 한때 멘카우레 석상이 여러 점 놓여 있었다. 제5왕조 시기에는 안타형 사원이 계곡 사원에 추가로 들어서기도 했다. 장제전에도 멘카우레 석상을 여럿 두었다. 하지만 이들 네 유적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왕의 피라미드가 유일하며, 그마저도 석회암 외부마감재는 허물어지고 없는 상태다.
.켄트카우스 1세의 무덤
제4왕조의 왕족이었던 켄트카우스 1세는 기자에 장사지냈으며, 무덤은 멘카우레 계곡사원 인근의 중앙 평원에 위치해 있는데, ‘LG 100’이나 ‘G 8400’이라고도 부른다. 켄트카우스 피라미드 유적군으로는 피라미드와 선박갱, 계곡신전, 사제들이 살던 피라미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쿠푸 왕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 노역하라고 명령했다. 10만 명은 아라비에 산맥의 채석장들에서 네일로스강까지 돌을 견인해 가게 하고, 10만 명은 돌들이 배에 실려 네일로스강 건너로 전해지면 다시 리비에 산맥까지 끌고 가게 명령했다. 그들은 각각 3개월 동안 노역했고, 돌을 운반하는 길을 닦느라 10년 동안 고생했다. 피라미드 자체를 만드는 데 20년이 걸렸다”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 발굴로 여러가지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1989년 피라미드 근처에서 피라미드 마을이 발견되고 발굴조사 이후 사람들 인식이 바뀌었다. 마을에는 노동자가 살았던 숙소, 공방, 저장고, 물품 관리소, 관리들이 살았던 저택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 묘지의 벽화를 보면 사람들이 빵, 맥주, 고기, 채소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물과 상형문자는 마을 사람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만족하며 일했음을 보여 준다. 실제 동원된 사람들 숫자도 2만 명 내외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전까지 고대 이집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 건축 기술의 개량과 발전이 바탕이 된 것이며 단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이후 거대한 피라미드가 정점을 이루고, 평민들까지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게 되면서 사람 크기 정도의 작은 피라미드들도 만들어졌다.
– 스핑크스 (Sphinx)에서
피라미드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버스에 올라 스핑크스로 이동했다. 7-8분 정도 버스로 이동후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를 걸어 스핑크스 앞에 모여들었다.
스핑크스로 향하던 중 미이라 만드는 신전을 들러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미이라 제작법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사실 파라오나 대귀족 등 부유층에게나 최고급 미이라 제작법이 적용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값비싼 방법은 당연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중산층이나 소귀족은 삼나무 오일을 주입, 장기를 녹인 후 소독해 70일 간의 염장이 끝나면 기름기를 제거한 후 붕대를 감고 추가처리를 거쳤다. 붕대를 감은 미이라는 관에 넣어 마찬가지로 부장품과 함께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기자의 피라미드군 스핑크스는 대스핑크스로 불린다. 기자의 대스핑크스는 전체 길이 70미터 높이 20미터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 대스핑크스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쌓아 만든 게 아니고 원래 있던 바위산을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보통 대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기 때문에 카프레 왕 때인 기원전 255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우선 카프레 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제작법이 다르고 석재의 산지와 공법도 달랐다. 그리고 최근 스핑크스 주위에 있는 벽에서 큰 홈들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지질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홈들은 홍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홍수는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때에나 있었다. 하지만 빙하기에 이런 거대한 석상을 세울 만큼의 문명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현재로서는 널리 알려진 바가 없다.
스핑크스는 코가 없다. 나폴레옹이 대포를 쏘아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나, 문화재에 심취해 있던 나폴레옹이 그러한 일을 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슬람교의 우상 숭배 금지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슬람 교도들이 코를 부수면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오스만 제국 병사들이 코를 상대로 사격 연습을 하였다는 설도 있다.
‘스핑크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절 이집트와 거래하던 그리스 상인들이 그리스 전설의 스핑크스의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그리스 상인들 사이의 은어였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계가 이집트의 왕이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스핑크스’라는 명칭이 통용되었다. 이후 그리스 문화를 향유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제국이 약 천 년을 지배하면서 ‘스핑크스’라고 정착했고, 이슬람이 지배한 지 천수백 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스핑크스라 불린다.
돌을 쌓아 만든 피라미드와 달리 스핑크스는 상체와 머리는 석회암 언덕을 깎아서 만들었으되 팔과 몸통 일부분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몸통은 평지를 파내서 제작했는데, 세월이 지나면 사막에 부는 모래바람 때문에 점점 모래가 차올라 몸통이 잠기므로 지속적으로 관리해줘야 한다. 원래 표면은 붉은 황토색으로 채색했다고 한다.
머리는 마치 파라오처럼 관을 쓴 형상이었다. 얼굴 부분에서 코가 부서져서 사라졌다. 코 외에도 이마에는 파라오 왕권의 상징인 코브라가 있었고 턱에는 턱수염도 달렸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스핑크스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대스핑크스가 규모면이나 역사적으로 대표적이라 하겠다.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 (지평선상의 호루스)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 (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 (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 (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스핑크스와는 다르다.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여성적 이미지인데 이집트는 대부분 남성 이미지이다.
우리 일행은 기자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인 파피루스 공장으로 향했다. 사실 기자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면 뭔가 정확한 정보로 생각들을 잘 정리할 수 있을줄 알았는데 방문하니 보았지만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더 강하게 들었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