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7)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룩소르 (Luxor)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
카이로에서 룩소르까지는 650여Km거리로 교통수단으로는 비행기, 기차, 버스, 배편, 자가용 등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슬리핑기차를 이용했다.
10월 15일, 저녁 8시가 다되어 기차 침실칸 2층에 누워 밖을 보니 점점 어두워져 도시를 벗어나자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좁은 침대칸이지만 피곤한 몸으로 룩소르를 상상하다 곧 잠이 들었다.
이집트 남부에 위치한 룩소르 (Luxor)는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해 왔으며 인구는 40만 명 정도이다. 룩소르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룩소르신전, 카르낙신전, 멤논의 거상 등을 포함한 유적들이 위치해 있고 서안지역에는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있다.
이집트의 도시들은 대부분 나일강을 따라 늘어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남북으로 흐르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서안과 동안으로 나누어진다. 룩소르도 예외는 아니다. 기차역이나 공항 같은 시설과 여행객들을 위한 숙소들 대부분은 모두 동안에 있고, 카르낙 신전이나 룩소르 신전 같이 유명한 유적지들도 동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서안에 유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룩소르에 도착해 첫 일정인 멤논의 거상 (Colossi of Memnon)이 서안에 위치해 있다.
10월 16일 오전 8시경, 기차 침대칸에서 조식을 해결하자 룩소르 기차역에 도착했다. 첫 일정으로 멤논의 거상 (Colossi of Memnon)을 방문하고 이어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을 찾았다.
왕가의 계곡으로 가는 도중 만난 첫 유적이 멤논의 거상이었는데 무슨 교통수단을 선택하더라도 서안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고대의 유산은 ‘멤논의 거상’이라고 한다.
기원전 1351년에 완공된 멤논의 거상은 높이 18m, 780t에 이른다. 조각상 2구는 실제로는 아멘호테프 3세를 묘사한 석상이지만 고전기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전쟁 신화에 나오는 아이티오피아 왕 멤논의 조각상으로 오해했는데, 아마 이름이 비슷해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조각상은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에 의해 금이 가 있었다.
–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으로
‘멤논의 거상’ (Colossi of Memnon)을 관람하고 기념촬영 후 우리 일행은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으로 향했다. ‘멤논의 거상’에서 출발해 10여분 이동하니 ‘왕가의 계곡’에 도착했다.
‘왕가의 계곡’ 입구에서 우리 일행은 입장권을 구입해 5-6명씩 전기차를 이동해 계곡으로 들어갔다.
‘왕가의 계곡’은 이집트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 약 5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와 귀족들이 묻힌 곳이다. 와디 지형을 기반으로 암반을 깎아 조성한 곳이며, 이곳을 중심으로 테베 네크로폴리스가 형성되었다. 크게 두 가지 구역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대다수 왕릉이 늘어서 있는 동쪽 계곡, 다른 하나는 원숭이 계곡이라는 별칭이 있는 서쪽 계곡이다.
‘왕가의 계곡’을 두고 고대 이집트인들이 불렀던 공식 명칭은 ‘테베 서쪽 수백만 세월의 국왕과 생명과 권력과 건강이 묻힌 위대하고 장엄한 공동묘지’였다.
왕가의 계곡 (Kings Valley) 무덤들의 번호는 영문의 약자 KV를 사용한다. 다만 서쪽의 무덤은 따로 WV로 매기기도 한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의 수는, 가장 최근인 2005년에 발견된 새로운 석실 한 곳과 2008년 발견된 무덤 입구 두 곳을 더하면, 총 65개의 무덤과 석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규모는 구덩이 한 개 수준에 불과한 KV54부터, 람세스 2세의 아들이 묻힌 무덤으로 120개 석실로 구성된 KV5까지 매우 다양하다. 왕릉의 경우 이집트 신화의 전통 벽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시대의 장례 절차와 사후 세계관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다수 무덤이 고대부터 노출되어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집트 파라오가 지녔던 부와 권력을 가늠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우리 일행은 왕가의 계곡에서 3곳 (람세스와 세티, 투탕카멘)의 무덤을 방문했다. 왕가의 무덤들은 많은 훼손과 도굴이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규모로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 ‘피라미드’에서 ‘왕가의 무덤’으로 변화
왕가의 계곡 무덤은 기자의 피라미드와는 또 다른 형태였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산처럼 하늘을 향했다면 왕가의 계곡 무덤들은 지하로 내려가는 형태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 (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 (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건축상 주목되는 최초의 분묘형식은 왕조 성립기 전후에 나타난 마스터바 (아랍어로 걸상)라는 왕과 귀족의 묘로서, 처음에는 지하에 현실 (玄室)과 그 부속실을 만들고 지상의 상부구조에 몇 개의 방을 두어 부장품을 넣었으며, 그 위를 양건 (陽乾) 벽돌로 쌓아올려 직사각형의 대 (臺)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마스타바는 고왕국시대에 들어와서 귀족의 묘로 발달하여 현실은 땅속 깊숙이 파고들어간 수혈 (竪穴)에 접하여 만들고 상부구조의 측면은 경사가 져서 사다리꼴을 이루었으며 그 안에 영혼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과 예배소, 조상실 (彫像室)을 배치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득한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왕족들의 무덤은 광대한 지역에서 흙벽돌로 작은 사각형 모양으로 만든 마스타바라고 불리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에는 사카라 지구에서 석회암으로 만든 어머니 젖가슴과 같은 봉분형태에서 점차 삼각형태로 발달하면서 피라미드가 축조되었다.
그리고 축적된 기술들로 상당히 큰 계단식으로 피라미드는 거듭 발달하게 된다.
여기에서 발달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광대한 지역으로 굴절식 등 중형의 피라미드로 이어지다가 기자지구에서, 우리가 말하는 현존하고 있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최고라고 꼽는 쿠푸, 카프라, 맨카우라의 3대 피라미드로 왕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카프라 피라미드 축조 초기부터 가뭄 때문에 나일강에서 화강암을 조달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그 후 왕들의 무덤은 피라미드 축조에 많은 석회암 돌들과 피라미드 내부에 화강암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석회암 절벽을 파내 왕들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왕가의 계곡이다.
중왕국시대에 중 (中) 이집트 등 사막이 나일강 가까이까지 뻗은 지방에서는 귀족의 분묘를 절벽 중턱에 설치하였다.
신왕국시대 왕들의 분묘는 테베의 ‘왕가의 계곡’에 횡혈식으로 만들어졌고, 도굴에 대비하여 입구는 비밀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장제전 (葬祭殿)은 멀리 떨어진 사막의 대지 끝이나 평지 위에 세워졌다.
델 엘 부하리에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경사진 길로 연결된 3개의 단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데, 중정 (中庭) 둘레에 콜로네이드 (列柱)를 세운 형식으로, 배경을 이루는 단애의 경관과 잘 조화되고 있다.
– ‘왕가의 계곡’ 탐사의 역사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외부인이 왕가의 계곡을 자주 방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계곡 내 무덤 곳곳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낙서가 있다.
쥘 바이예의 조사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낙서의 수가 2,100건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페니키아어, 키프로스어, 리키아어, 콥트어 등의 소수언어로 적힌 낙서도 그 수는 비록 적지만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고대인의 낙서가 가장 많이 발견된 무덤은 KV9로 천여 개 남짓 발견되어 전체 낙서 중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가장 오래된 낙서의 연대는 기원전 2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동행한 프랑스 고고학자 가운데 도미니크 비방 드농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학자들이 왕가의 계곡을 방문하여, 계곡의 전체 지도와 당시 외부에 노출되어 있던 무덤의 평면도를 처음으로 작성하였으며, 프로스페르 졸루아와 에두아르 드 빌리에르 뒤 테라주는 서쪽 계곡의 아멘호테프 3세 무덤 (WV22)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기록을 남겼다.
당시 학자들이 작성한 탐사 보고서인 ‘이집트 개관’ (Description de l’Égypte)의 전 24권 가운데 두 권에서 테베 유적지에 대해 다루었고, 왕가의 계곡에 대해서도 처음 소개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인의 테베 유적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조반니 벨초니가 헨리 솔트의 의뢰로 계곡 탐사에 나섰다.
벨초니는 여러 개의 무덤을 발견하였는데 1816년에는 서쪽 계곡 아이의 무덤 (WV23), 1817년에는 세티 1세의 무덤 (KV17)을 발견하였다. 탐사가 끝날 무렵 벨초니는 모든 무덤의 위치를 확인한 동시에 이곳에 더 이상 주목할 만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비슷한 시기 계곡 탐사에 나선 인물로 프랑스 주재 총영사였던 베르나르디노 드로베티가 있는데 벨초니와 솔트의 경쟁자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영국의 존 가드너 윌킨슨은 1821년부터 1832년까지 이집트에 거주하면서 왕가의 계곡을 방문, 당시 외부에 노출된 무덤 내에 새겨진 상형문자와 벽화의 모사본을 남겼다. 때마침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이 처음 이뤄지면서, 계곡의 무덤 내에 있는 글귀에 대해 완전히 해독할 수는 없어도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을 알아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와 더불어 윌킨슨은 왕가의 계곡에 있는 각 무덤에 처음으로 순번을 매기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왕가의 계곡을 방문한 유럽 고고학자들은 유물을 단순히 수집하는 것보다 보존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리트가 주도한 ‘이집트 유물관리국’이 이 시기에 활동하였는데, 1883년 외젠 레페뷔르, 1888년 초 쥘 바이예와 조르주 베네디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1898년~1899년 빅토르 로레의 탐사가 이어졌다. 빅토르 로레는 기존의 무덤 목록에 16곳의 무덤을 추가로 발견하였으며 기존에 발견된 무덤도 여러 곳 탐사하였다. 같은 시기 조르주 다레시는 오늘날 KV9라 불리는 무덤을 발굴하였다.
이후 가스통 마스페로가 이집트 유물관리국 국장에 재임명되면서 왕가의 계곡 발굴 작업이 재개되었다. 마스페로는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를 상이집트 최고조사관으로 임명하였다. 당시만 해도 젊은 나이였던 카터는 여러 개의 무덤을 새로 발견하고, KV42와 KV20의 내부를 발굴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미국의 탐험가 시어도어 M. 데이비스가 계곡 발굴허가를 받았다. 데이비스의 발굴단은 에드워드 R. 에어튼이 주로 이끌었으며 여러 개의 왕족 무덤과 일반 무덤 (KV43, KV46, KV57 등)을 발굴하였다.
1907년에는 KV55에서 아마르나시기의 은닉처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후 KV54와 KV58에서 투탕카멘의 무덤 매장품 일부를 회수한 뒤, 왕가의 계곡 전역의 탐사를 완료하였으며, 더는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데이비스가 1912년에 발표한 ‘하르마비와 투아탕카마의 무덤’ (The Tombs of Harmhabi and Touatânkhamanou)에서는 마무리에 “왕가의 계곡이 고갈될까 두렵다”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1915년 데이비스가 사망한 뒤 왕가의 계곡의 발굴 허가는 영국의 카나본 경에게 넘어갔다. 카나본 경은 하워드 카터에게 발굴 작업을 의뢰하여 왕가의 계곡을 계속 탐사토록 했다.
하워드 카터의 발굴단은 계곡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수색 끝에 1922년 11월 투탕카멘의 실제 무덤 (KV62)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현재도 왕가의 계곡에서는 새로운 구덩이가 발견되고 있으며, 기존에 발굴된 무덤에 대한 재조사와 더불어 테베 유적지에 대한 연구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
2001년에는 테베 매핑 프로젝트라는 발굴 정보 DB가 시작되어 왕가의 계곡 내 각 무덤에 대한 기본정보와 발굴이 완료된 무덤의 평면도를 구축하고 있다.
–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으로
우리 일행은 왕가의 무덤 인근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으로 이동했다. 하트셉수트 장제전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례 신전이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Ḏsr-ḏsrw’, 즉 성소 중의 성소라고 불렀다. 특유의 단정한 아름다움 덕분에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여자의 몸으로서 파라오에 등극한 하트셉수트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일환의 하나가 바로 데이르 엘 바하리에 세운 장제전이었다.
장제 신전 (葬祭神殿)은 특정한 왕의 장례와 제사를 위한 것으로서 신왕국 시대에 성행하였으나 구조적으로는 일반 신전과 큰 차이가 없다. 고왕국이나 중왕국시대에는 피라미드 옆 예배실에서 장례의식을 치렀으나 신왕국시대에는 계속의 바위 속에 숨겨놓는 형태의 장제전을 별도로 지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