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8)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룩소르 (Luxor)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에서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으로
2023년 10월 16일, 룩소르에 도착해 첫 일정으로 ‘멤논의 거상’ (Colossi of Memnon)을 방문한 후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을 들렸다.
‘왕가의 계곡’은 이집트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 약 5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와 귀족들이 묻힌 곳이다.
와디 지형을 기반으로 암반을 깎아 조성한 곳으로 피라미드가 산처럼 하늘을 향했다면 왕가의 계곡 무덤들은 지하로 내려가는 형태였다.
신왕국시대 왕들의 분묘는 테베의 ‘왕가의 계곡’에 횡혈식으로 만들어졌고, 도굴에 대비하여 입구는 비밀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장제전 (葬祭殿)은 멀리 떨어진 사막의 대지 끝이나 평지 위에 세워졌다.
델 엘 부하리에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경사진 길로 연결된 3개의 단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데, 중정 (中庭) 둘레에 콜로네이드 (列柱)를 세운 형식으로, 배경을 이루는 단애의 경관과 잘 조화되고 있다.
무덤 3곳을 방문하고 이어 우리 일행은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Mortuary Temple of Hatshepsut)으로 향했다.
파라오 하트셉수트 (Hatshepsut, BC 1477 ~ BC 1456)
하트셉수트 (Hatshepsut, 기원전 1477년 – 기원전 1456년)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5번째 파라오이다.
하트셉수트란 이름은 “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의미이다.
이집트학 학자들은 하트셉수트의 치세를 역대 파라오의 치세 중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던 치세로 본다.
하트셉수트의 재위 기간은 이집트의 역대 파라오 중 가장 긴 약 20여년이다.
하트셉수트에게는 하트셉수트라는 이름 외에도 파라오로서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황금의 호루스로서 신성한 모습을 지닌 여인 ‘네테레트’, 창조의 권능이 풍부한 여인 ‘우세레트’, 해마다 녹음을 일구는 여인 ‘아우제트 렌푸트’, 파라오로서 신성한 빛의 규칙을 상징하는 여인 ‘마아트 카 라’, 신성한 라의 딸로서 아몬과 한 몸이 된 여인 ‘케네메트문’ 등이 있다.
하트셉수트는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정비 (正妃)인 아모세-무트노프레트 (Ahmose-Mutnofret) 와의 사이에서 둔 유일한 자식으로, 이복동생 투트모세 2세와 결혼했다.
병약했던 투트모세 2세가 요절하였을 때, 의붓아들인 투트모세 3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하트셉수트가 섭정이자 공동 파라오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투트모세 3세는 그의 의붓아들인 동시에 배다른 조카이기도 했다.
하트셉수트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여러 고대 사료는 그녀의 치세에 대해 매우 빈약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근대 초기 역사가들은 하트셉수트가 조카 투트모세 3세가 7살이던 기원전 1477년부터 21살이 되는 기원전 1456년에 이르기까지 투트모세 3세의 섭정으로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기술하였다.
현대 사학자들은 그녀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였고, 기원전 3세기의 역사가 마네토가 기록한 것처럼 21년 9개월 동안 통치하였다고 보고 있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Mortuary Temple of Hatshepsut)
고대 이집트어로는 ‘Ḏsr-ḏsrw’, 즉 성소 중의 성소라고 불렀다. 특유의 단정한 아름다움 덕분에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여자의 몸으로서 파라오에 등극한 하트셉수트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일환의 하나가 바로 데이르 엘 바하리에 세운 장제전이었다.
장제 신전 (葬祭神殿)은 특정한 왕의 장례와 제사를 위한 것으로서 신왕국 시대에 성행하였으나 구조적으로는 일반 신전과 큰 차이가 없다.
고왕국이나 중왕국시대에는 피라미드 옆 예배실에서 장례의식을 치렀으나 신왕국시대에는 계속의 바위 속에 숨겨놓는 형태의 장제전을 별도로 지었다.
중왕국 시대의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초안을 작성한 뒤 건설 도중 몇 차례 설계를 변경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장제전은 하트셉수트의 재상 세네무트 (Senemut)에 의해 설계되었다.
재상 세네무트는 여왕의 총애하는 신하이자 애인이었다고도 전한다.
세네무트의 지휘하에 장제전은 그녀의 재위 기간중에 세워졌다.
3층 구조의 열주 회랑으로 장식된 테라스식 장제전 벽면에는 하트셉수트의 탄생과 생애, 푼트와의 교역 등 재위 시기의 업적 등을 묘사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장제전 앞으로는 너비 37미터의 도로가 펼쳐져 있었고, 도로 양 옆으로는 스핑크스들이 세워져 있었다.
20여년간 공동왕으로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장제전이 완공된 이후에는 아문 신전으로서의 역할도 겸하여 매년 계곡 축제를 열거나 하트셉수트 여왕과 투트모세 1세를 기리는 중심 사원으로서 기능했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은 중앙의 경사로를 따라 좌우 대칭형으로 1-2-3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은 열주와 테라스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오벨리스크를 옮기는 장면, 사냥하는 장면등이 새겨진 벽화가 있었다.
2층에는 여왕의 생애와 업적을 표현한 벽화를 중심으로 ‘하토르 신전’과 ‘아누비스 신전’을 좌우에 배치했다.
‘하토르’는 암소의 얼굴을 가진 여신으로 태양신 라의 달이자 태양신 호루스의 아내이다.
‘아누비스’는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이끄는 신으로 사자의 서에 등장하고 있다.
3층은 태양신 ‘아몬’과 하트셉수트를 모시는 지성소가 위치해 있다. 이 암굴 지성소는 하트셉수트의 무덤으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지성소 앞에는 하트셉수트를 의미하는 ‘수염을 단 오시리스’ 조각 (석상)들이 세워져 있다.
‘오시리스’는 죽음과 부활의 신으로 최고의 여신 이시스의 남편이자 오빠이며, 태양신 호루스의 아버지이다
아트셉수는의 장제전 입구에는 그녀가 푼트 (소말리아 일대) 원정을 통해 가져왔다고 하는 나무의 흔적이 있다.
안내 표지판에는 “이 나무는 하트셉수트의 원정으로 푼트에서 가져 왔으며, 신전벽화에 그려진 그 나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의 수난
하트셉수트 여왕이 사망한 이후에는 장제전도 수난을 겪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투트모세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재위 20년차부터 하트셉수트 지우기에 착수, 이 과정에서 장제전에 새겨져 있던 하트셉수트의 이름을 지우거나 장제전에 세워졌던 그녀의 조각상들을 부숴버렸다.
하지만 이 행위는 오래가지 못했고, 후일 아멘호테프 2세 즉위 2주년부터는 하트셉수트 지우기가 완전히 폐지된다.
물론 투트모세 3세 시절에 지워졌던 흔적을 복구한 건 아니었지만 더이상 하트셉수트 장제전에 파괴 행위가 가해지지는 않았다.
투트모세 3세 이후 아케나톤이 기존 종교를 배척하고 아톤 신앙을 포교하며 신전에 새겨졌던 아문의 형상을 지워버렸지만 아케나톤 사후 즉시 아톤 신앙이 몰락하며 다시 복구됐다.
투탕카멘, 아이, 호렘헤브 등의 파라오를 거치면서 아문의 형상이 다시 새겨졌다.
이후에도 장제전은 여전히 신앙의 중심지로 잘 쓰였다.
특히 신왕국이 망하고 들어선 혼란기 제3중간기인 제21왕조와 제25왕조 등에서는 왕족 뿐만 아니라 아문과 몬투 사제들의 묘지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장제전 자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까지만 해도 이집트 고대 신앙의 중심지로 잘 쓰였으나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점점 버려졌다.
서기 6세기 경에는 콥트 교회가 장제전의 폐허 위에 지어졌고 기존의 부조 위에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습이 덧그려지는 등 훼손도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더 흐르자 이마저도 없어지며 장제전은 완전히 사람들에게 버려지고야 말았다. 가끔씩 순례자들이나 일부 사제들이 장제전 유적을 방문해서 참배했지만 자주 오지는 않았다.
순례자들이 장제전에 새긴 1223년의 마지막 기록 이후, 장제전에 관련된 기록은 더이상 없다.
잊혀진 장제전의 발굴
장제전은 모래 속에 반쯤 묻혀져 무너져가다가 서양인들의 관심 덕에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다.
근대에 장제전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1737년의 영국인 리처드 포콕이다.
물론 다른 서양인들이 먼저 방문했겠지만 확실한 기록을 남긴 건 포콕이 최초다.
이후 1798년에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도중 프랑수아 졸루아와 르네 에두아르 드벨리에 등이 방문했다.
1817년에 조반니 바티스타가 단순 관광 목적이 아닌 고고학적 발굴, 혹은 이를 빙자한 도굴 목적으로 방문했고, 1850년대와 60년대에 어귀스트 마리에트가 최초로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장제전 위에 세워졌던 기독교 수도원 유적이 싹 헐려나갔고 중앙 테라스의 남쪽 열주를 모래에서 꺼낼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하워드 카터가 1893년과 1906년에 걸쳐 모래를 완전히 치워냈고 이후 학계의 공조 하에 1900년대 초중반에 걸쳐 사원을 대부분 복원할 수 있었다.
발굴 과정기에는 아무 곳에도 들어갈 수 없었지만 2000년에 안뜰, 상부 테라스, 현관이 개방됐고 2015년에는 태양 숭배용 안뜰이, 2017년에는 아문 지성소가 개방되면서 거의 모든 공간에 다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현재는 대부분의 공간들이 관광객들에게 공개된 상태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을 둘러본 우리 일행은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으로 향했다.
카르낙 신전 (karnak)은 고대 이집트의 신전으로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은 3km 거리를 두고 마주해 있다.
카르낙 신전은 현존하는 신전 가운데 최대 규모의 신전이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여전히 전체의 10%밖에 발굴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