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주술과 굿판의 산당 용산 대형에게(3)
국가반란 음모 수괴 용산대형?
주술과 무속의 신념으로 사로잡혀, 급기야는 12월 3일 늦은 밤, 친위 군사반란 쿠데타를 일으켜 반국가 내란 세력으로 전락한 용산 대형에게 세 번째 편지를 보내는 필자의 마음이 참담하고 불쾌하다. 이번 반 헌법, 반 법률적 국가 반란 음모는 삼권분립을 망각한 반역사적 폭거로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용산 대형의 무모(無謀), 무도(無道), 무례(無禮), 무속(巫俗)의 기행적 행동을 타도하고, 독자들과 함께 본질을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적 믿음, 도덕적 확신, 정치적 신념이 강하면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한다는 주장은 철학적, 정치적, 심리학적 맥락에서 여러 사상가와 저술가들이 제기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관점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그리고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주요 저서,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ity)’와, ‘선악의 저편(Beyond Good and Evil)’에서 종교적 믿음과 도덕적 확신이 절대화될 때, 인간의 사고와 관점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그는 전통적 도덕과 종교적 가치를 “노예의 도덕(Slave Morality)”로 규정하며, 이는 개인의 창조적 사고를 억압하고, 세상을 고정된 틀로만 바라보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강한 신념 체계는 “진리”를 고정된 것으로 만들고, 다른 가능성이나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초래할 수 있다. 이는 비판적 사고와 다원적 관점을 거부하게 만들어, 세상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은 ‘자유론(On Liberty)’에서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강조하며, 특정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신념이 절대화될 때 이는 사회적 진보를 저해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자유로울 때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관점이 등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밀은 강한 신념 체계가 비판적 사고와 상호 존중을 방해한다고 보았다. 세상을 넓게 보려면 다양한 관점과 신념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고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메시지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과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이념과 신념이 절대화될 때, 이는 인간의 사고를 경직시키고 정치적 자유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그녀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이러한 현상이 극대화된다고 지적하며, 강한 신념 체계가 타인의 의견과 다름을 배제하거나 탄압하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신념의 절대화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제한하고, 인간이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능력을 약화할 수 있다고 보고, 열린 대화와 공론장을 통해 넓은 시야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주제는 현대에서도 정치적 극단주의, 종교적 근본주의, 도덕적 우월감 등과 관련해 중요한 비판적 도구로 작용한다. 특정 종교가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며 타 종교나 비종교적 관점을 무시할 때, 이는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도덕적 확신이 강한 개인이나 집단은 종종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도덕적 우월감을 통해 타인을 판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적 이념이 강하게 작용할 때, 타당한 반대 의견이나 다른 관점을 배제하고 독단적 행동을 초래할 수 있다.
종교, 도덕, 이념이 중심이 되는 사회나 국가가 제국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주장을 종합해 보면 ‘국민의 자율성과 다원성을 억압(니체, 아렌트)’하고, ‘경제적 불평등과 계층 지배를 강화(베버, 마르크스)’하며, ‘국내외에서 제국주의적 행태를 조장 (사이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주술과 굿으로 정치하는 산당 두목 용산 대형?
그 첫 번째가 주술과 굿판이 판치는 산당 용산은 개각 당시, [설원]에 나오는 육정신(六正臣)인, 인격이 훌륭한 성신(聖臣), 어진 신하 양신(良臣), 충성을 다하는 충신(忠臣), 지혜로운 신하 지신(智臣), 지조가 곧고 바른 정신(貞臣), 강직한 직신(直臣)은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분야별 전문성과 능력으로 선별하지 않고 지인(知人)과 사주(四柱)가 기준이 되어 선발한 비서실과 내각은 오히려 육사신(六邪臣)만 뽑았으니 간사한 신하 간신(奸臣), 무능하면서 자리만지키며 녹봉만 챙기는 구신(具申), 왕에게 아첨하는 예스맨 유신(諛臣), 악한 술수와 중상모략에 능한 참신(讒臣), 군주에게 불충하거나 반역하는 역신(逆臣), 군주의 명령을 마음대로 하는 적신(賊臣),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신(亡國臣)들만 득실 거리고 있지 않은가?.
시정잡배들이 모인 육사신(六邪臣)의 용산 대형?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를 이어온 이유는 왕의 잘못을 따지는 대간제 덕분이라고 한다. 여기서 대간제는 군주를 견제하고 국정을 바로 잡기 위한 감찰과 언론 기능 기관으로, 정도전은 그의 정치 철학서 ‘정치문감’에서 대간의 지위는 낮지만, 역할은 재산과 동등하며 유일하게 왕과 시비를 걸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대간들은 간쟁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면 들고 간 도끼로 죽임을 당하겠다는 자세였고, 왕의 뜻이더라도 옳지 않으면 거부했다. 또 세 번 간(諫)해도 듣지 않으면 벼슬을 버렸다. 왕은 ‘아니 되옵나이다’를 외치며 대간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격노하지 않았고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용산 대형은 기자회견 때 “뭘 사과했냐?” 따진 기자에게 무례하다고 한 정무수석은 도대체 어느 시대 신하인가?. 1시간 회의 때마다 55분을 혼자 말하고 맘에 안 들면 격노하는 군주는 어느 시대 대형인가?
대통령실에서 근무하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전문성과 균형감각 그리고 충성심이다. 이론과 현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로 문제 해결 능력을 겸비한 전문성이 필수다. 정권의 지지 세력이나 특정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고 국정을 우선시하는 균형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민에 대한 충성심이 최고여야 한다. 산당 용산의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세 가지 조건은 보이지 않고, 김건희를 ‘작은엄마’라 부르는 행정관, 펀드메니저였다가 코바나 콘텐츠에서 도슨트를 했던 비서관, ‘김건희 황제 관람’을 기획한 비서관을 포함하여 언론 경력이 전부인 자들이다. ‘7상시’ ‘8상시’로 불리는 이들이 비서실과 수석비서관을 제치고 김건희에게 직보하며 국정을 주무른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더 나아가 김건희 주가 조작을 무혐의 처리한 검찰, 방송장악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방송통신위원회, 김건희 명품백 수수 사건을 종결 처리한 권익위원회, ‘파우치 조그만 백’으로 호명한 덕에 KBS 사장 자리에 오른 앵커가 있다. 한마디로 깽판 굿이 열리는 형국이다.
두 번째로 김건희가 조언을 구하는 무속인이 분야별로 7~8명이 있는데 풍수, 관상, 사주, 미래 예측 등 ‘주술’이 분야별로 있다는 것이다. 장관은 허수아비고 무속인이 각 부처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부창부수(夫唱婦隨)라 그런지 용산 대형이 나서기만 하면 뭐든지 잘 되고 기대가 되며 자신감이 충만하다. 부산 세계 EXPO도 열릴 것이고, 대왕고래에서 시가 1,900조 석유가 생산될 것이고, 우크라이나 전쟁 후 재건권을 가져올 것이며, 폴란드 원자력 수출도 성사되고, 민간 상권을 만드는 백종원 1,000명도 배출할 것이다. 더 나아가 친위 군사 쿠데타로 먼저 국회를 무력화해서 점차 국정 전반을 장악할 수 있고, 반국가 세력과 친북좌파 세력을 완전히 척결할 수 있다고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무모(無謀), 무도(無道), 무례(無禮), 무속(巫俗)에 빠진 용산 대형?
첫째로 무모(無謀)다.
신중함이나 계획 없이 성급히 행동하는 것으로, 칸트가 합리적 사고와 성찰이 인간 행위의 기본 원칙이라고 할 때, 계획과 숙고 없이 행동하는 무모함은 칸트 적 관점에서 도덕적 의무를 위반한 것이 된다. 용산 대형의 무속 정치는 철학적 사고와 근거보다는 비합리적인 신념 체계에 의존하는 정치를 하는 데 있다.
두 번째로 무도(無道)다.
정의롭지 못하고 도리에 어긋난 상대를 말하는 것으로 공공의 정의와 공정 윤리를 위반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치자의 도덕성과 정의 실현을 강조한다. 용산 대형은 부인 정치(무속 정치)와 검찰 정치가 권력 집중과 부패를 조장했다는 점에서, 이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데 반국가 세력이 된 셈이다.
세 번째로 무례(無禮)다.
예의나 존중의 결여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도덕적 태도를 간과하는 행위를 말한다. 공자는 예(禮)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 원리로 삼았다. 용산 대형은 반대 세력이나 국민의 소리를 억압하거나 무시했으며 공자의 관점으로 보면 무례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반대파나 비판적 언론을 무시하거나 탄압하는 태도는 용산 대형이 입에 달고 다니며 침이 마르도록 주장했던 자유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소통과 상호 존중이 없는 행동으로 다원사회를 약화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론적으로 파쇼 반국가 세력 윤석열 정권은 무속 정치와 검찰 정치로 무모함, 무도함, 무례함의 세 가지 측면에서 비판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합리적 근거 없는 정책 결정.
2, 권력 집중과 정의와 공정 훼손.
3, 국민과 반대 세력에 대한 소통과 존중 결여 등이다.
여기에 주술과 무속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실행하니, 계획과 과정과 결과가 없는 괴기한 사건들만 만들어지는 것 아니던가?
윤석열 정권이 이러한 문제를 피하려면, 민주적 가치를 강화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며, 특정 종교나 이념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 것을 삼가야 할 것이다.
필자는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친위 반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반국가 세력인 민족의 반역자, 독재자, 수괴자, 주술과 무속의 달인 용산 대형 윤건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미쳤나!??
취했나 2024년 봄!!
좋빠가
좋빠가
좋빠가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05/12/2024
시드니에서 전현구 보냄
P/S
1, 대형(Big brother)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허구의 독재자.
2, 좋빠가(윤석열 대선 구호) 좋아 빨리 가!!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배경음악/안치환 노래/ 똥파리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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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과 굿판의 산당 용산대형에게(3) 편지를 받고 사진 한 장을 보내준 친구에게
필자는 사진 한 장을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반란 자해 구테타’를 이르켰는데 서울이 의외로 조용하고 일상이 평화로운데 호들갑을 떨지말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다’. ‘무모한 행동으로 주제넘게 종교인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지 정치권이 권력다툼 한다고 달라질게 있겠는가?’. ‘살아 있는 권력이 계속해서 자해 구테타가 진행되고 있어 조심해라’로 해석 됩니다. 인품상 남에게 쓴소리를 못하는 친구가 걱정과 염려로 우외적인 권면으로 받았습니다.
40년지기 친구여!
이번 내란 구테타 전범인 육군 참모총장과 경찰청장에게 국회 국정조사에서“이 번 친위 내란 구테타는 위헌입니까?, 아닙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전범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답합니다.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청문회 내내 스치는 기시감 하나가 고구마 서너게 먹은 것 같은 답답이 조여왔습니다.
‘아, 역사는 언제 어디라도 반복되는 구나!’
이 순간이 역사적 기시감일까요? 한나 아렌트의 ‘죄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개념은 20세기 철학과 정치학에서 중요한 담론중에 하나였습니다. 아렌트의 개념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람하면서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쓰게 되는데 “죄의 평범성”은 악이 특별이 사악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평범하고 비판적 사고를 결여한 사람이 조직적으로 체계적인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단순히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600만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법죄를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도덕적 책임을 느끼지 않았음을 주목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악을 전통적으로 이해해온 ‘급진적 악’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악으로 새롭게 정의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저서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못한‘생각의 부재’로 전락했고, 관료적이고 체계적인 조직 내에서 개인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비극적 결과에 대해 무감각적‘비인간화’를 초래했으며, 전체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단지 돕니 바퀴일 뿐이라는 논리로 ‘책임의 분산’을 노렸다는 것입니다.
인생 절반을 함께 살아온 친구여!
인간은 두 가지 삶의 방식에서 늘 갈등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하나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선택이고, 또 하나는 시대적 어려운 상황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 앞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역사적 삶이 있다고 봅니다. 이 두 가지 삶의 방식 사이에서 고뇌와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필자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갈등의 연속이요, 선택의 연속임을 부인 못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이번 친위 반란 구테타 주역들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엄숙하고 존엄한 질문 앞에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이 절실하게 요구받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뒤에 숨을 것인지 앞에 있을 것인지 말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하시는 주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Quo Vadis, Domine 쿠오 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요한복음 13:36-38)”
아내 김건희 죄를 덮기 위해,
자기 정책에 대한 실수를 덮기위해,
장기집권을 위해
무리하게 반란 자위 구테타를 이르켜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탱크로 가로막는
반 국가적
반 헌법적
반 법률적
반 인륜적
도발을 멈추게 할 때입니다
초급을 다툽니다
자금도 민족의 역적 수괴 윤석열은 군.병력을 비상 대기 시켜 놓고 있답니다
언제 어디서 도발을 시작할 지 모릅니다
오늘날 21세기 과학 만능주의 시대에,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똑 같은 질물을 받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기성 세대가‘부머 리무버(Boomer Remover)’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깊은 심연의 호흡 후에 해맑은 하늘 한 번 바라보면 참 좋겠습니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진 한 장 감사합니다
6/12/2024
시드니에서 전현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