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창조과학의 한계와 문제 그리고 성서
1. 들어가는 말 (Prologue)
필자는 ‘창조과학의 한계와 문제 그리고 성서’라는 주제를 논하기 전에 한 과학자의 고뇌에 찬 고백을 전하며 시작하려고 한다. 전 국립 과천과학관 관장이었던 이정모 교수는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삶의 지평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우리의 과학은 인생의 거대한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거대한 질문은 기술의 도움으로 답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질문을 그만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연과 우리 존재의 문제에 대해 더 겸손하게 접근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과학 발전에 노력하겠지만 그 자체는 아니다. 과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창의성과 호기심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과학은 거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원히 투쟁하겠지만 마지막 일전에서 패배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어둠을 밝히는 과정은 여전히 가치가 있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무지 경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모른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CBS 강의 중에서 녹취)
소크라테스 (Socrates)도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라며 정한 지혜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의미로,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필자는 한 과학자와 철인이 말한 동사 ‘모른다’라는 담론을 감히 빗대지 않아도 자연과학에 대하여 정말로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한가지는 성서신학을 전공한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는 측량할 수 없어서 아무도 모른다 (욥 38-39 장)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2. 명제를 위한 명제
하나의 명제가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한두 개의 검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명제가 검증이 이어져야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몇 가지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은 명확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가져야 하며, 경험적 검증 가능성과 이론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또한 동료 학자들의 검토와 비판을 통해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하며, 실용적 유용성과 철학적 기초를 세워야 한다. 이런 과정과 조건을 충족할 때 하나의 명제는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학문적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창조과학을 살펴볼 것이다.
3. 창조 과학자들의 창세기 1, 2장의 해석과 주장
1) 먼저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기간을 문자 그대로 6일 동안 차례대로 우주와 지구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6일은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하며 “하나님이 이르시되…”로 시작하여 하루하루 차례대로 창조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각 날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로 마무리되므로, 이를 근거로 실제 24시간의 하루로 해석한다.
2) 창조과학은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수천 년 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에서 인간의 역사를 계산한 통계치다.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을 합산하여 지구의 나이를 산출한 것이다. 이 계산은 지구가 약 6,000년에서 10,000년 정도의 나이로 산출한 것이다.
3) 창조과학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이 질서있게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강조한다. 이 순서는 하나님이 질서있고 계획적으로 창조하셨다는 신학적 해석과 연결된다.
4) 창조과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특별히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창 1:26)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독특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한다.
5) 창조과학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실제 역사적인 인물이며 모든 인간의 조상이라는 주장을 한다. 에덴 동상은 지리적으로 실제 존재했던 장소로 해석한다. 그 근거로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달리 독특한 창조 과정에 의해 탄생했음을 나타낸다고 보고 있다.
4. 창조과학의 창세기 1, 2장의 해석에 대한 한계와 문제다.
과학적 관점에서 이 텍스트들을 분석할 때 몇 가지 모순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은 주로 현대 과학의 발견과 창세기의 내용 사이에서 발생한다.
1)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창조 순서가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창세기 1장]
첫째 날: 빛의 창조 (1:3-5)
둘째 날: 하늘과 물의 분리 (1:6-8)
셋째 날: 육지와 식물의 창조 (1:9-13)
넷째 날: 해, 달, 별의 창조 (1:14-19)
다섯째 날: 바다 생물과 새의 창조 (1:20-23)
여섯째 날: 육지 동물과 인간의 창조 (1:24-31)
[창세기 2장]
2장에서는 창조 순서가 다르게 서술된다.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에덴동산에 식물이 자라며, 동물이 창조된 후 하와가 창조된다.
이것은 과학적 모순으로, 동일한 사건에 대한 일관된 기록이 아닐 수 있어서 해석의 어려움이 된다. 과학적으로는 태양 (넷째 날)이 생기기 전에 빛 (첫째 날)이 창조되었다는 설명이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지구상의 생명은 태양 빛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2) 빛의 창조 (첫째 날)와 태양의 창조 (넷째 날)에 대한 해석의 문제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빛은 주로 태양광 같은 별에서 발생한다. 태양과 별이 창조되기 전에 빛이 존재했다는 설명은 현대 물리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3) 지구와 생명의 나이 문제다. 성경의 족보를 바탕으로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약 6000~10,000년이라 주장한다. 지구의 나이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같은 현대 지질학적 방법에 따라 약 45억 년으로 추정한다. 우주의 나이 또는 빅뱅 이론에 따르면약 137억 년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연대 차이는 창조과학의 주장과 현대 과학의 관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4) 인간의 기원 문제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창조된 최초의 인간이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과 인류학은 인간이 진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종들로부터 발전해 왔다고 설명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나타났으며, 이 과정은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로 이해한다. 이와 반대로 창세기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는 독립적으로 바로 지금의 형태로 창조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5) 전 지구적 홍수 문제다. 창세기 7~8장에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전 지구를 덮는 대홍수를 묘사하며, 이는 창조과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현대 지질학에서는 전 지구적인 홍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홍수와 관련된 지질학적 증거는 지역적인 홍수일 가능성이 크며, 이는 창세기에서 묘사된 전 지구적인 홍수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과학적 모순들은 창세기 1, 2장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현대 과학의 발견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창조과학은 이 순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종종 과학적 엄밀성에서 벗어나거나 신앙적 해석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와 과학자들은 창세기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신학적 또는 상징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5. 창조과학의 장점
1) 특정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과학적 해석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신앙과 과학이 대립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2) 생명과 우주의 기원에 대해 진화론과 다른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논의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관점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
3) 신앙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과학적 논의 속에서도 유효하다는 위안을 줄 수 있다.
이는 신앙과 과학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4)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신앙 공동체가 과학적 발견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해 왔는 지를 알 수 있다. 이는 과학과 종교의 상호작용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성경을 근거로 창조론을 뒷받침하며, 성경의 무오성과 문자적 해석을 강조한다. 성경의 기록이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지 않으며, 현대과학이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로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류가 없으며,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2) 고고학적 자료와 지질학적 자료로 성경적 시간 척도에 맞추어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 결과 젊은 지구 이론을 주장한다.
(3) 성경의 신학적 메시지가 과학적 탐구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태도에서, 창세기의 기록을 문자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해석을 강조한다.
6. 구약성서 학자들은 창세기 1 장과 2 장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한다.
1) 문헌적 해석 (Literary Analysis)은 창조의 구조와 형식을 가지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창세기 1장은 7일 동안의 창조 과정을 설명하며 문학적으로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는 방면, 창세기 2장은 좀 더 서사적이고 개인적인 접근을 통해 인간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세부 사항을 다룬다. 문헌적 해석자들은 이 두 장이 서로 다르다고 한다.
2) 신학적 해석 (Theological Interpretation)은 하나님의 주권과 질서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우주를 질서있게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명령하심으로 창조가 시작되고, 매일의 창조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강조한다.
창세기 2장은 인간의 역할과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으로 ‘평등한 관계’임을 신학적으로 해석한다.
3) 역사적 해석 (Historical-Critical Interpretation)은 출처 비판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의 자료가 서로 다른 출처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가지고 해석한다. 1장은 ‘제사장 전통’ (Priestly Tradition)으로, 2장은 ‘야훼 전통’ (Yahwistic Tradition)으로 분류한다.
4) 상징적 해석 (Symbolic Interpretation)은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즉 창조의 과정은 인간의 존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본다.
5) 기독교적 해석 (Christian Interpretation)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방법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 이야기를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연결지어 해석하는 방이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구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심에 있는 신적인 존재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해석들은 나름 학문적 접근방식과 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다양한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를 통해 창세기 1,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풍부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7. 창세기 1, 2장을 구약성서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한 한계는 무엇인가?
1) 문헌적 해석에서 창세기 1, 2장의 문헌적 배경의 차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하고, 출처 비판적 접근은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여 문헌의 기원을 밝히려 하지만, 이를 통해 텍스트의 문학적 의미나 신학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2) 신학적 해석에서 개인의 신학적 관점이나 전통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에 따라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다양한 신학적 해석이 제시될 수 있으며 객관적인 해석 기준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 특히 교훈이나 메시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텍스트의 전체적인 문맥이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3) 역사적 해석의 한계는 텍스트의 배경과 탐사 사회적, 문헌적 맥락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러한 맥락이 현대 독자들에게는 항상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고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텍스트의 의미를 왜곡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해석은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할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4) 상징적 해석은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상징적 메시지를 찾으려 하지만, 문자적 의미를 간과할 수 있다. 또한, 상징적 해석은 독자에게 주관적인 해석을 허용할 수 있어, 해석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상징적 해석은 문화적 배경을 반영할 수 있지만 현대 독자나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다.
5) 기독교적 해석은 구약 성서를 신약 성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텍스트나 의도를 왜곡할 수 있다. 신약 성서의 관점을 통해 해석할 때, 구약 텍스트의 본래 의미를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내에서도 교파와 신학적 전통이 존재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교파에 따라 다를 수 있어 해석의
다양성을 초래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한계와 문제들은 성서 해석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나타내며, 다양한 해석 접근 방식이 각기 다른 장단점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해석자는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텍스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성서해석의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텍스트에 어느 해석 방식이 좋을지를 주의깊게 살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구약 성서학자 궁켈 (Hermann Gunkel)은 그의 [성서 해석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삶의 자리” (Sitz im Leben)를 제시했다. 이 용어는 본래 문학적 비평과 구전 전통의 연구에서 사용되었으며, 궁켈은 이를 성서 연구에 적용했다.
“삶의 자리”는 특정한 성서 구절이나 문서가 어떠한 역사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발생하고 사용되었는지를 의미한다. 즉, 성서 텍스트가 기록되기 전, 구전되거나 편집된 과정에서의 구체적인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는 단순한 문헌
기록이 아니라, 당시 공동체의 생활, 예배, 의례 등에서 실제로 쓰인 텍스트로서 그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성서 본문 안에 있는 상황 (Context in text)도 살펴봐야 하지만 성서 본문이 어떤 상황 속에서 (Text in context) 성서 본문이 기록되었는지를 먼저 살피는
해석방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의 기록 시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기록하고 전승하려는 필요에서 기원전 10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하나님과의 언약, 그리고 세계 창조와 인간의 역할을 설명하며, 그들의 신앙적,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와 같은 성서 해석방법으로 창세기 1장은 바벨론 포로기를 배경으로 기록되었다 (구약: 이군호 / 숨겨진 비빌 99가지, 27쪽).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우상에게 발목이 잡히자, 결국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주전 587년). 그런 한 맺힌 망국민 (亡國民)의 설움을 전하는 것이 시편 137 편에서 내적인 고통을 아프게 전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순서가 셋째 날과 넷째 날이 뒤바꿔졌다는 사실이다. 해와 달과 별이 없이 식물은 자랄 수 없다. 이건 상식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서 기자의 숨은 뜻이 있다.
해와 달과 별은 바빌론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하던 대상이었다. 바벨론 사람들이 신으로 숭상하는 것들은 사실 야훼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이 준다고 믿었던 먹거리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을 성서기자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이라는 말은 제정일치 시대의 왕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던 말이었다. 여기서 성서기자는 이 단어를 모든 인간에게 적용함으로,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힘이 없고, 부모가 없고, 장애인으로 태어나도 그리고 식민지 백성이라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간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거대한 제국주의 바벨론에 대한 거역인 동시에 심오한 인권선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왕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어 차이가 차별이 안 되는 세상을 지향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외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창조 이야기는 바벨론 포로 히브리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끝으로 창세기 1, 2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여러 동사들은 각각 독특한 의미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
주요 동사와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창조하다 (히 , 바라)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신적 행위로 간주된다. (창 1:1)
(2) 형성하다 (히 , 야차르)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가지고 형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사는 보다 세밀한 형성을 나타낸다 (창 2:7).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땅의 흙을 사용하여 형성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만들다 (히 , 아사)는 어떤 것을 만드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나타내며, 창조의 과정 중에 사용된다 (창 1:7).
(4) 지으시다 (히 , 나탄)는 주거나 제공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창조의 결과를 보여줄 때 사용된다 (창 1:29).
‘바라’는 새로운 것을 전혀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는 신적 행위를 강조하고, ‘야차르’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로 세밀하게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며, ‘아사’는 일반적인 제작 행위를, ‘나탄’은 창조의 결과를 제공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이군호).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창세기 1, 2장은 결국 우주 발생에 대한 기원 (起源) 이야기가 아니라,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했다.
이런 면에서 창조과학은 사이비 지식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의 질문 두 가지를 할 수 있다.
1) 창조과학을 자연과학 교재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2) 창조과학을 수많은 신학대학에서 신학 교재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8. 나오는 말 (Epilogue)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라고 했다. 과학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닫힌 세상을 열어주는 것이다. 닫힌 곳에는 교육이 필요 없게 된다. 왜냐하면 질문이 없기 때문이다. 성서가 닫힌 곳에는 이단이 판치는 세상이 된다. 성서는 닫힌 세상을 열어준다. 질문함으로 열어주는 것이다. 질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소통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단인가? 답만 있고 질문이 없는 것이 사이비고 이단이다. 그래서 질문을 두고 하나님의 높고 깊고 넓은 창조 세계를 관조하며 마음 평수를
넓히는 것이 신앙인이다. 창조과학과 교회는 이런 질문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 질문이 없는 학교와 교회는 진리는 사라지고, 그 자체가 사이비고 폭력이다.
욥기 38-42장은 침묵하고 계셨던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대답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욥이 겪어야 했던 온갖 고통과 절망과 좌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욥의 절박한 질문과 요구에 대해 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욥에게 온갖 질문을 던지신다.
‘세계의 창조와 유지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자연과 동물 생명의 질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에 대해서 너는 아느냐?’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창조뿐만 아니라 창조의 질서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의 도덕적 확신에서
벗어나서 너를 핍박하고 저주하고 심판했던 세 명의 친구를 용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도덕적 잣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비로소 너의 고난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를 알게 될 거라 선포하신다.
이때 욥이 고백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귀로 듣던 것이 이제는 눈으로 보고 회개합니다” (욥 42:1-6).
종교적 믿음, 도덕적 확신, 정치적 신념이 강한 사회나 국가는 넓은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좁고 편협한 사고로 묻혀 종교적 믿음은 이원론에 빠져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덕적 확신은 왜곡된 기준으로 진리를 잃어버리게 하며, 정치적 신념은 편 갈라 줄 세워 폭력이 난무하게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흑암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갈등과 충돌로 수십만, 수백만 명 사람들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 여호수아 헷셀은 ‘인간의 역사는 악몽이다’라고 했다.
지난 8월 시드니 인문학 모임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우리가 왜 인문학 모임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즘 인터넷과 모발폰 그리고 챗 GPT 로 해결할 수 있는데 꼭 인문학 모임은 정말 필요한가?”였다. ‘여기서 우리는 학교에 왜 가는가?’ ‘학교 교육은 필요한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것은 호기심을 해결하고 지식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얻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어쩌면 하나님 말씀인 성서에서 새로운 질문을 얻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으면 성서는 또 하나의 아론의 금송아지가 될 수 있다.
9/9/2024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배경음악: 하이든의 오라트리오 천지장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