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4년 11월 17일,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 ~ 1494) 별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년 2월 24일 ~ 1494년 11월 17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이자 철학자이다.
추기경 토마스 카예탄과 논쟁을 하였다.
–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이름: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출생: 1463년 2월 24일 이탈리아 미란돌라
.사망: 1494년 11월 17일(31세) 이탈리아 피렌체
.시대: 르네상스 철학
.지역: 서구 철학자
.학파: 르네상스 철학
.연구 분야: 정치, 철학, 역사, 마법 등
.주요저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 (De hominis dignitate oratio)
미란돌라가 1486년에 지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 De hominis dignitate oratio〉은 르네상스시대의 특징적인 저서로서 여러 철학에서 가장 훌륭한 요소들을 뽑아 자신의 작품 안에서 결합하는 혼합주의적 방법을 보여주었다.
○ 생애 및 활동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플라톤주의 철학자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는 1463년 2월 24일, 이탈리아에서 출생했다.
조숙했던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미란돌라라는 작은 지방의 군주였던 아버지 조반니 프란체스코 피코 덕분에 집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뒤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파도바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했고, 파리·피렌체에서 히브리어·아람어·아랍어를 배웠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뛰어난 플라톤주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만났다. 히브리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를 알게 된 피코는 그리스도교 신학을 옹호하는 데 카발라의 교리를 이용한 최초의 그리스도교 학자가 되었다.
1486년 그리스·히브리·아랍·라틴 등의 작가들한테서 끌어모은 900개의 논제를 옹호할 계획으로 유럽 전역의 학자들을 로마로 초대하여 공개토론을 벌였다. 이때 유명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을 지었다.
그러나 교황청 위원회는 이 논제 중 13개를 이단으로 탄핵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이 모임을 금지했다. 그뒤 이 논제들에 대한 〈변명 Apologia〉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피코는 프랑스로 도망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으나 프랑스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잠시 동안 투옥된 뒤 피렌체에 정착해 피렌체의 제후 로렌초 데 메디치의 보호를 받으며 플라톤주의 아카데미와 교류했다. 피코는 페라라로 잠시 여행한 일을 빼고는 줄곧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이단죄를 사면받았다.
말년에는 로렌초의 적이며 순교자인 엄격한 정통파 그리스도교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영향을 받았다.
미란돌라는 1494년 11월 17일 (향년 31세),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별세했다.
교회의 적에 대항해 쓴 피코의 미완성 논문에는 점성술의 결함에 대한 논의도 들어 있다. 비록 이 비판은 그 바탕이 과학이라기보다 종교였지만 17세기 과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영향을 미쳤다. 행성운동에 대한 케플러의 연구는 근대 천문학의 기반이 되었다.
피코의 다른 저서로는 자신의 7개 논점을 넌지시 알리는 〈헤프타플로스 Heptaplos〉(그리스어로 hepta는 ‘7’이라는 뜻)라는 제목으로 〈창세기〉를 설명한 것과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개요를 다룬 것이 있다. 완성된 저작 〈존재와 일자에 관하여 De ente et uno〉는 그 일부이다.
피코의 저작들을 처음으로 모아 펴낸 책은 〈요안네스 피코 미란돌라 해설서 Commentationes Joannis Pici Mirandulae〉 (1495 ~ 1496)이고 E. 가린이 1942년 현대판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 평가
미란돌라는 중세 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그의 철학은 독창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강조하며, 신과 인간 사이의 연결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인간의 위엄”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인간을 높이 평가하는데 기여했다.
미란돌라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인간의 위엄” (“Oration on the Dignity of Man”)이다. 이 작품은 1486년에 발표되었으며, 인간의 고유한 미덕과 가치를 강조하는 중요한 철학적 성전으로 여겨진다.
디도토 미란도라의 작품은 이후의 철학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인간의 자유와 가치에 대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현대 철학과 인문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 르네상스가 없었어도 종교개혁이 가능했을까? :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2.24 ~ 1494.11.17)
15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아주 짧게 살다간 인문주의자로써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다같이 능통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 철학과 유대교 사상을 하나로 묶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로써는 드물게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을 시도했습니다. 흔히 피코는 한 시대의 반항아로써 중세시대와의 단절을 부르짖으면서 자유사상가로서 기독교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불리웁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인간의 존엄’(De hominis dignitate)이 있는데 이 책은 1486년 로마에서 열렸던 ‘세계철학회의’에서 발표했던 주제 강연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Oratio de huminis dignitate)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이 모임은 피코 자신이 자비를 들여 당시 자신이 알고 있는 유럽 지역의 모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이루어진 회의였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피코의 이 연설문을 ‘르네상스 인본주의 선언서’라고 높이 평가하며 동시에 이후에 나온 데카르트의 ‘방법론 서설’(Discours de la method)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과 더불어 이 연설을 초기 르네상스 사상사의 방향을 결정한 문헌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연설은 16세기 르네상스는 물론이고 그 후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그의 연설문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두 가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철학과 신학 사이를 조화시켜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보수주의적 그리스도교 신학과 진보주의적 철학 사상을 하나로 묶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지닌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자들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열린 마음과 긍정적 자세와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피코는 종교재판으로 학문의 자유가 억압받던 시대 속에서도 편협된 진리관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진리관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정리한 ‘명제집’(Conclusiones)은 종교와 철학뿐만이 아니라 인류가 지닌 모든 지성들이 균형잡히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어떤 통일성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연설에서 기독교 신학과 다른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신학들 사이에서 평화를 모색하려고 했던 피코의 이런 자세를 ‘신학적 평화’(pax theologica)를 향한 노력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또한 일반 철학과 기독교신학 사이에서의 긴장관계 또한 넘어서 해석의 차이를 극복해 내려는 노력을 ‘철학적 평화’(pax philosophica)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24살 밖에 않되었던 젊은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입니다.
둘째로 그의 연설문에 나타난 기본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입니다. 그는 중세시대의 일반적 인간관에 반대했습니다. 그 시대는 인간을 오직 죄인으로만 보고 인간의 타락, 범죄, 죄성, 무가치성, 상실된 존엄성에 방점을 찍으면서 ‘인간의 비참함’(miseria hominis)에다만 시각을 맞추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코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인간’(ima go Dei)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그리스도의 화육:化肉 Incarnation)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인간 예수의 구속사를 덧붙입니다. 피코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체로써 죄인이라고 규정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이 만드신 또 하나의 우주적 신비를 지닌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피코는 인간이란 하느님이 만드신 하나의 작은 우주(小宇宙, microcosmos)로 이해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우주 만큼의 신비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인간의 존엄성’(dignitas huminis)을 주장한 근거는 이렇듯 성서를 다시 읽고 달리 해석해 보려는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 모두가 다 한 가지만 보고 그 방향으로만 달려 갈 때도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창조적인 안목입니다. 결국 이런 인문학적 사고방식과 접근 태도가 훗날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이 부분은 교황청 한국대사와 서강대학 교수를 지냈던 성염박사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학과 르네상스적 배경’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 홍길복 목사의 시드니인문학교실 “르네상스가 없었어도 종교개혁이 가능했을까? : 인문학적시각에서 보는 16세기 종교개혁과 오늘의 과제” 중에서
참고 = 위키백과, 시드니인문학교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