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소경대왕실록 (宣祖昭敬大王實錄) / 선조실록 (宣祖實錄)
《선조소경대왕실록》 (宣祖昭敬大王實錄) 또는 《선조실록》 (宣祖實錄)은 1567년 음력 7월부터 1608년 음력 2월까지 조선 선조 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한편 《선조실록》은 훗날 기사의 질적 문제와 당파의 영향으로 인해 그 내용을 수정하여 다시 편찬되었으며, 이를 《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 (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 또는 《선조수정실록》 (宣祖修正實錄)이라고 한다. 총 42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선조수정실록》에 대한 내용도 본 항목에서 함께 서술한다.

- 개론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료 부족으로 인하여, 《선조실록》의 임진왜란 이전의 기사는 아예 기록되지 않은 달이 있는 등 부실한 면이 많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는 사초 보관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기사가 조잡하거나 당파 성향에 의해 공정하지 않게 기록된 경우가 있다. 이에 따른 권수의 편차도 커서, 선조 즉위 때부터 1592년 음력 3월까지 약 25년분의 실록은 26권에 불과하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선조 승하 때까지 약 16년분의 기사는 무려 195권이나 된다. 이로 인해 《선조실록》은 역대 실록 중 가장 질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선조실록》의 활자는 갑인자체 목활자와 을해자체 목활자, 새로 제작된 목활자 등이 쓰여 여러 글씨체가 섞여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새로 인쇄한 이전 왕의 실록들의 활자에는 주자가 섞여있어 인쇄 상태가 깨끗한 편이나, 《선조실록》은 모두 목활자인데다가 그 새김도 거칠어 인쇄가 조잡하다. 한편 이전 왕의 실록에 사용된 활자들도 포함하여 모두 “선조실록자”로 일컬었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선조실록》의 인쇄에 쓰인 목활자만 “선조실록자”로 칭하는 것이 맞다는 견해를 보인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수정실록》의 권수가 42권인 것은 1년 분의 기사를 1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중 선조 즉위년부터 재위 29년까지 총 30권은 이식이, 재위 30년부터 재위 41년까지 총 12권은 효종 때 김육, 채유후 등이 편찬한 것이다.
1657년 《선조수정실록》 편찬의 전말을 기록한 의궤인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가 간행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의 활자는 《선조실록》의 활자보다 크기가 조금 더 크고 경오자체인 “인조실록자” 계통을 사용하였다.

○ 내용
1567년(선조 즉위) 7월부터 1608년 (선조 41)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221권 116책으로 된 인본 (印本)으로, 정식 이름은 ‘선조소경대왕실록 (宣祖昭敬大王實錄)’이다. 1609년 (광해군 1)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11월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서인 (西人)인 이항복 (李恒福)이 총재관 (摠裁官)으로 이를 담당했으나, 뒤에 북인 (北人) 기자헌 (奇自獻)이 대신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의 인원 구성을 보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摠裁官) 기자헌,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摠裁官) 이항복, 지춘추관사 (知春秋館事, 都廳堂上)에 이호민 (李好閔)· 유근 (柳根)· 이이첨 (李爾瞻)· 이정구 (李廷龜)· 박홍구 (朴弘耉)· 조정 (趙挺)· 민몽룡 (閔夢龍)· 정창연 (鄭昌衍)· 이상의 (李尙毅)· 윤방 (尹昉)· 윤승길 (尹承吉)· 김신원 (金信元)· 박승종 (朴承宗)· 이시언 (李時彦)· 김상용 (金尙容)· 오억령 (吳億齡)· 송순 (宋諄) 등 17인이 있었다.
이 밖에도 동지춘추관사 (同知春秋館事, 各房堂上)에 박건 (朴健) ·최유원 (崔有源)· 정광적 (鄭光績)· 신식 (申湜)· 이수광 (李睟光)· 박이장 (朴而章)· 박진원 (朴震元)· 정사호 (鄭賜湖)·구의강 (具義剛)· 이성 (李惺)· 김시헌 (金時獻)· 김상준 (金尙寯)· 김권 (金權)· 최관 (崔瓘)· 이경함 (李慶涵)· 남근 (南瑾)· 이시발 (李時發)· 한덕원 (韓德遠)· 이필영 (李必榮)· 유공량 (柳公亮)· 이정신 (李廷臣)· 강홍립 (姜弘立)· 강첨 (姜籤)· 유인길 (柳寅吉) 등 24인과 편수관 (編修官)에 윤효전 (尹孝全) 등 48인, 기주관 (記注官)에 김유 (金紐) 등 52인, 기사관 (記事官)에 송일 (宋馹) 등 81인이 있었다.

이 실록은 방대한 분량이나,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이전의 분량은 적다. 즉, 『선조실록』 전체 221권 중에 선조 즉위년 7월부터 선조 25년 3월까지의 기사는 26권에 불과한 반면,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사는 195권이나 된다. 임진왜란 이전의 기사가 적은 것은 임진왜란 이전의 『춘추관일기 (春秋館日記)』·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각사등록 (各司謄錄)』 등 국가 기록이 전화로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1595년 (선조 28) 2월 15일, 경연관 (經筵官) 정경세 (鄭經世)의 건의로 춘추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기억을 기록해 제출하게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보 (朝報)· 정목 (政目)과 개인의 일기 및 야사 (野史) 등을 춘추관에 납입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유희춘 (柳希春)의 『미암일기 (眉巖日記)』와 이정형 (李廷馨)의 『동각잡기 (東閣雜記)』 등의 일기류를 여러 종 수집한 데 불과한 듯하다.
그 뒤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료를 재차 수집하였다. 그러나 배삼익 (裵三益) 및 이기 (李芑)· 이수준 (李壽俊) 등의 집에 보관하고 있는 조보의 단간 (斷簡)과 사대부 집에 전하는 문집 (文集) 중에 들어 있는 소 (疏)· 차 (箚)· 비명 (碑銘)을 수집하는 데 그쳤다. 그런 관계로 임진왜란 전의 기사는 기사가 없는 달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또 당월(當月)에 기재했어야 할 기사를 전월에 계속 기재하고 그 달을 표시하지 않은 것도 더러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는 전란을 치르는 과정에 사건이 많은 데다 자료 보관이 가능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기사가 조잡하고 당파 관계로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것이 많다. 따라서 역대 실록 가운데 가장 질이 떨어진다는 평을 면치 못한다. 특히 서인 이이 (李珥)· 성혼 (成渾)· 박순 (朴淳)· 정철 (鄭澈) 및 남인 유성룡 (柳成龍) 등에 대해 없는 사실을 꾸며 비방하는가 하면, 이산해 (李山海)· 이이첨 등 북인 일파에 대해서는 지나친 칭찬을 하여 시비 및 선악이 많이 전도되었다. 그러므로 인조 반정 후 서인이 집권하자, 곧 수정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선조수정실록 (宣祖修正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다. 이 실록은 1955∼1958년에 걸쳐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전질을 영인, 간행함에 따라 널리 보급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한민족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