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봉건사회의 붕괴와 교황권의 쇠퇴
– 서설
11세기에 이루어진 중세사회의 전반적인 안정을 배경으로 중세 유럽은 밖으로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반격과 팽창을 시도하고 안으로는 봉건적인 농촌경제와 길드적인 도시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사회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12, 13세기에는 크리스트교적이며 봉건적인 중세문화가 꽃피었다. 그러나, 14세기로부터 15세기에 걸쳐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는 붕괴내지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13세기까지 성장을 계속하던 봉건경제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하고, 심각한 기근, 가공할 흑사병, 장기간에 걸친 대전쟁, 농민 반란 등이 발생하여, 영주제는 위기에 당면하고 장원제도가 붕괴하게 된다. 도시에서도 부유한 상인과 금융가들이 폐쇄적인 도시귀족으로 변함으로써 도시의 하층민 내지 노동자의 폭동과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길드적인 도시경제의 틀이 흔들리게 되었다.
정치면에서는 봉토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가 깨어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인 통일 국가의 형성이 촉진되지만, 백년전쟁이나 장미전쟁과 같은 큰 전쟁의 진통을 격지 않으면 안 되었다.
13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교황권도 14세기에는 교회의 대분열등으로 쇠퇴하고, 가톨릭 교리에 도전하는 이단설이 나오고, 종교개혁의 선구적인 움직임이 나타난다.
– 제 1절 : 봉권제도의 붕괴와 근대국가로의 발전과정
장원제의 핵심은 노동지대였다. 그러므로 장원제도의 붕괴는 기본적으로 부역의 소멸, 직영지의 소멸 또는 그 경영 형태의 변화는 농노 해방, 즉 농노제의 소멸을 뜻한다. 농노에 의한 직접 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던 봉건제도는 농노의 부역에 의한 조세제도가 금납에 의한 조세제도로 변경되면서 서서히 붕괴해 갔던 것이다. 금납화 (commutation)는 빠른 경우 12세기에 시작되고 있으며, 13세기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1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부역이 공납화로 변하는 경우, 장원제도는 그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주들은 지대납부와 기한부로 분할해서 임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정기 소작제 (lease-hold)이다. 이렇게 부역이 소멸하고 직영지가 임대로 대여되게 되자, 구태어 농민을 억매어 둘 필요는 없었다. 그리하여 자발로 또는 농민의 요구와 압력으로 농노를 해방시키게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에는 장원제도의 붕괴가 순조로웠다.
그러나 엘베강 이동의 독일 동부지역에서는 ‘농노제의 재판’ (the secondserfdom)이라는 구츠헤르샤프트 (Gutsherrschaft: 영주농장제), 즉 예속적인 농민의 노동력에 입각한 영주제적인 대농장 경영이 성립하여 농민들은 농노와 다름없는 예농으로 전락하였다.
장원제도의 붕괴원인은 이렇다.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발전,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나날이 발전하는 시장경제, 이런 경제 발전에 따른 영주들의 욕구 증대는 농민들에게 부담을 증가시켜 압박을 가하게되었다. 여기에 따른 농노의 도망, 14~5세기 흑사병 유행, 큰 규모의 기근, 대전쟁에 따른 전반적인 인구감소와 농촌의 황폐는 영주 수입을 격감시키고, 이러한 위기에 처한 영주들은 부역의 금납화, 농노해방으로 양보하지 않을수 없었다.
.흑사병
14세기 중엽에 나타난 흑사병은 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상이 감소하게 만들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농촌에서의 가장 뚜렷한 결과는 격심한 노동력의 부족과 경작되지 않은 많은 토지, 그리고 농업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였다.
.농민반란
14세기의 농민반란은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그 자체에 대한 도전적인 성격을 띤 심각한 것이었다. ‘자끄리’로 알려진 프랑스의 농민반란은 백년전쟁과 흑사병, 그리고 봉건귀족들의 압박의 가중에 시달려 극도로 비참해진 농민들이 터뜨린 분노와 절망의 폭발이었다.
1381년 영국에서는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격감하여 임금이 앙등하고 이로 말미암아 자유노동을 얻기 어렵게 된 영주들이 흑사병 이전에 진행되던 금납화를 취소하고 부역을 부활하려 하였으며, 흑사병 직후 임금을 동결시키기 위하여 제정한 ‘노동조례’는 노동자 계층의 불만을 자아냈으며, 백년전쟁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의회가 신설한 인두세의 1381년도 분은 특히 빈민층에 과중한 것이었다는 여러 요인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농민들이 그들의 해방과 자유를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반봉건적인 성격이 강한 반란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외친 구호 속에는 평등사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영국의 발전
에드워드 1세 때 성립한 의회는 14세기에 발전을 계속하여 에드워드 3세 때는 상.하원이 분리되고, 의회의 권한도 강화되었다. 왕실의회의 대제후와 귀족이 따로이 상원 (House of Lords)를 구성하고, 주와 도시대표들은 하원 (House of Commons)를형 성하게 됐다. 하원은 입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입법이 하원에서 발의되고, 과세나 왕이 필요로 하는 돈의 교부 등의 결정이 하원에서 행해졌다. 에드워드 3세는 의회의 승인없이 직접세를 징수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여, 의회는 영국의 통치기구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 때의 또 하나 중요한 발전은 치안판사의 설치이다. 치안판사는 gentry층에서 왕으로부터 직접 임명되었고, 지방에서의 왕권대행자였으나 원칙적으로 보스가 없기 때문에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지방자치의 중추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귀족들의 압박과 반항에 시달리면서도 의회는 의회내에서의 발언에 대한 면책권과 개회중의 의원의 신체의 자유보장을 확보하고, 의회를 통과한 법령에 대한 국왕과 왕실회의의 내용수정이 불가는하게 되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백년전쟁
백년전쟁의 원인은 프랑스 발로아 왕조의 성립과 이에 관련된 왕위계승권 문제이다. 카페왕조는 오래 왕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필립4세는 후계자를 가지지 못하였다. 많은 논의 끝에 필립 4세의 동생의 아들인 바로아백이 필립 6세로서 왕위에 오르고 바로아 왕조가 성립케 되었다. 그러나 여자가 직접 왕위 계승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만일 그녀의 아들에게 계승시킬 수 있다면 영국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 이사벨라의 아들이 왕위계승자라는 주장이 성립할 수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는 표면적인 명분이었고, 실은 다른 문제가 있었다. 노르만디공의 영국정복 이래 영국왕은 프랑스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고, 역대 프랑스왕들은 이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여 양국사이에는 언제나 전쟁과 대립이 그치지를 않았다. 바로 이 가스코뉴의 영유문제와 플랑드르 지방의 문제는 분쟁과 대립의 씨앗이었다.
백년전쟁이 시작될 무렵은 프랑스는 인적, 물적 자원이 훨씬 유리하였다. 그러나 실제 쓸수 있는 재원은 서로 비슷하였다. 프랑스군의 핵심은 중무장을 한 봉건귀족의 기사가 그 핵심이었고 영국군의 경우는 봉건군대에 보태어 새로운 무기인 장궁을 가진 자영 농민 출신의 보병대가 실전 경험을 가지고 참가하고 있었다. 최초의 큰 전투는 1346년의 크레시 전투이다. 흑색 갑옷을 입고 출전하여 흑태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은 프랑스 국왕 장과 그의 아들 필립, 많은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그 결과 양국 사이에는 브레티니의 휴전이 성립하였다.
흑태자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3세, 샤를르 5세가 사망하자 양국은 국내문제로20년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어린 샤를르 6세가 왕위에 오르자 왕족인 오를레앙家와 부르고뉴家 사이에 치열한 붕당 싸움이 계속되어 완전히 분열상태였다. 영국에서도 랭카스터 왕조를 연 헨리 4세의 치세는 농민반란, 국내 대제후들의 세력다툼으로 어수선하였다.
그러나 헨리 4세를 계승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분열상태를 가만두지 않고 쳐들어갔다. 헨리 5세는 ‘왕태자 샤를르의 왕위 계승권을 부인하고, 헨리 5세가 샤를르 6세의 딸 캐더린과 혼인하여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가 되는’ 트로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샤를르 6세와 헨리 5세가 잇따라 사망하자 프랑스는 생후 수개월의 헨리 6세와 그에 결탁한 브르고뉴家가 지배하는 북프랑스와 부르즈에 도읍한 왕태자 샤를르에 속하는 남프랑스로 양분되었다.
1428년 영국은 프랑스 전체를 지배하려 남하하여, 프랑스군은 큰 위기에 쳐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쟌 다르크였다. 쟌은 렝스에서 왕태자를 즉위시키라는 성인들의 계시를 듣고 왕태자를 만나게 되었다. 쟌은 왕태자와 그 주변, 프랑스군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주는데 성공하였다. 렝스로 진격하여 샤를르7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콩피에뉴에서 포로가 되어 마녀로 규정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샤를르 7세는 그녀가 처형된 후 종교재판을 다시 열어 부당한 선고를 뒤집었다.
그녀의 죽음 뒤에도 전쟁은 프랑스군에 유리하게 되어 갔으며 부르고뉴공과 샤를르 7세가 아라스의 和約을 맺음으로 프랑스에게 전쟁은 더욱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프랑스는 1450년에는 노르만디에서 승리하고 1452년에는 보르도에서의 승리로 영국의 가스코뉴 지배를 종식시켰다. 이것으로 백년전쟁은 끝나게 되었으며, 영국의 수중에는 칼레시와 그 주변의 지역만이 남게되었다.
.백년전쟁 후의 프랑스
백년전쟁의 싸움터 였으며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급료때문에 도적단으로 변한 프랑스 용병대의 약탈로 프랑스는 황폐의 극치에 도달했다. 백년전쟁은 이러한 프랑스에 두 가지 이점을 주었다. 영국으로부터의 영토회복과 새로운 국민의식의 성장이다. 샤를르7세는 15개의 기사군단을 설치함으로써 약 6천명의 상비군을 가지게 되었다. 이 상비군의 출현과 小火器의 출현, 훈련받은 보병부대의 등장 등은 종래의 전술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왕권 강화와 봉건기사의 몰락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루이11세 때는 왕권과 시민권의 제휴가 강화되고 그의 현실적인 정치로 王族領과 대제후령을 흡수하여 영토적 통합을 크게 진전시키고, 절대왕정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중세말의 영국
백년전쟁이 영국에 끼친 영향은, 영국 역시 국민의식이 강화되고 특히 섬나라로서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중세 말 영국 사회의 정상에는 약 50명의 대제후가 군림하고 있었다. 광대한 토지재산으로 부터의 지대를 비롯한 막대한 수입으로 그들은 성채에 거주하며, 필요한경우에는 사병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러한 사병 동원을 가능케하는 요인은 군역 제공에 대한 급료 (livery)와 법정에서 보호 (maintenance)였다. 이 급료와 보호에 의하여 종래의 봉건제와는 다른 새로운 사적주종관계가 성립하게 되었으며, 이를 擬似封建制度 (bastard feudalism)라고 한다. 이 새로운 봉건제도는 끊임없는사회불안과 무질서의 원천이 되었으며, 대제후는 私兵을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사용할 위험이 있었다. 이들 대제후는 작위소유자이거나 곧작위를 가지게 될 유력자들이었다.
작위귀족이나 곧 그 지위로 상승할 부유한 기사의 하위에 있는 것이 젠트리 (gentry)였다. 젠트리란 농업생산에 직접참여 하지 않고 토지 지대 수입으로써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토지 소유자, 즉 지주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는 대부분이 젠트리였고, 치안판사는 젠트리라야만 했다. 이리하여 개인적으로는 작위귀족과 어깨를 겨눌 수가 없었으나, 집단적으로는 유력한 사회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젠트리에게는 상업 종사의 자유가 있었다. 젠트리의 차남들은 상인으로 진출하여 재산을 축적 하였고, 부유한 상인들은 토지를 매입하여 한 세대후에는젠트리로 행세할 수 있었다.
젠트리 밑에 위치한 것이 독립적인 자영농민층 (yeomanry)이었다. 요우먼 (yeoman)은소규모의 자유토지 보유농으로 직접 농사에 종사했으나 임금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계층과 마찬가지로 자영농민층도 유동적이었다. 헨리 6세 때는年收 40실링 이상의 자유토지 보유농에게 주기사 선거권이 부여되는바, 年收 40실링의 작은 액수로서 선거권을 가지게되었으며, 백년전쟁 때는 요우먼이 창병이나 궁병으로서 활약함으로서 그들의 중요성을 증대시켰다.
.장미전쟁
장미전쟁은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카스터家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家와의 왕위 쟁탈전이었다. 정신이상이 된 헨리6세를 요크가의 리처드가 섭정하자 이를 위협시 여긴 왕의 부인이 리처드를 추방하였다. 그가 돌아와서 장미전쟁이 시작되었다.
랭카스터왕군은 요크군을 격파하고 리처드가 전사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랭카스터군을 무찔르고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4세).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였을 때 두 젊은 왕자와 왕녀가 있었으나 의회는 왕자를 서자라고 선언하고 섭정이었던 리처드가 왕위에올랐다.
이에 어머니 계통으로 왕실에 연결된 랭카스터家의 유일한 왕위 요구자인 헨리 튜터가 프랑스의 루이11세의 지원을 받아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헨리 7세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장미전쟁은 끝나고 튜터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중세 말의 독일
영국과 프랑스가 통일국가로 발전을 걷고 있을 때 독일은 領邦國家와 자치도시, 기사령 등의 수많은 대소의 독립적인 정치단위로 분열의 길을 걸었으며, 그러한 추세는 황제권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황제자리는 이 왕가에서 저 왕가로 전전하다가黃金勅書 (Golden Bull, 1356 : 또는 금인칙서라고 부르기도 한다)로 7명의 선제후에 의하여 선출되게 되었다.
선제후는 다른 제후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되고 완전한 주권군주와 다름없게 되었으며 그들은 또한 제국의 전반적인 사태에 관한 감시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이 황금칙서는 황금선출에 관련된 분쟁의 발생을 방지하거나 그것을 감소시키게되었으나, 황제권의 약화 내지 유명무실화를 확인하고 이를 확정지은 것이기도 하다.
13세기 후반과 14세기에 걸쳐 유력한 봉건제후들은 領邦단위로 영토를 다지고 집권화를 추진하면서 독립적인 경향을 강화시켰다. 15세기에 이러한 발전이 특히 현저했던 것은 브란덴부르크, 바이에른, 메클렌부르크 등으로서 신분제 의회의 소집권을 장악하고, 의회로 하여금 영방군주의 과세권을 안정시켜 그 수입으로 능률적인 행정기구를 발전시켰다. 이리하여 19세기까지 독일의 정치질서의 중추적인 존재가 된 영방국가가 성립하였으며, 15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친 영방국가는 봉건적질서로부터 근대적인 절대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신분제 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그 외의 국가들
스위스: 13세기 중엽에 합스부르크家가 이 지역에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자 삼림지대의 3개주가 동맹을 맺고 이에 저항하여 14세기 초에 합스부르크군을 격파하였다 (모어가르텐 전투). 이것이 오늘날 영세중립국 스위스의 출발이다. 그 후 다른 주들도 동맹에 참가하여 14세기 말 합스부르크군을 격파하여 독립의 기반을 굳혔다. 그 후 영토를 더욱 확대하고, 1477년에는 남쪽으로 팽창하려는 부르고뉴공 샤를르를 격파하여 전 유럽에 그 용맹을 떨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탈리아로 진출하려다가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한 뒤 도로 알프스 산맥으로 올라갔고, 그 이후 지금까지 영세 중립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의 이른바 북구 3국은 칼마르동맹으로 통합되었으나 스웨덴의 민족주의적 반란이 거듭된 끝에 스웨덴이 따로 독립하여 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13세기에 몽고족의 침입 이래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봉고족의 통제하에 막대한 공납을 바치게 되었다. 이반 3세때 몽고족의 내분과 이로 인한 약화를 틈타 몽고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다른 러시아공국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재정복을 통해 성립한 아라곤, 카스틸라, 포르투갈의 크리스트교 3왕국이 그라나다의무어인 이슬람 국가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도시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 의회인 코르테스도 발전하였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틸랴의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에스파니아 왕국이 탄생케 되었다.
– 제 2절 : 교황권의 쇠퇴와 중세문화의 조락
교황권의성장은 민족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몰락으로 조성된 혼란과 무질서상태라는 중세초기의 역사적인 상황과, 지방분권적인 봉건 사회의 구조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엇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말에 이르러 봉권사회의 붕괴, 집권적인 통일국가 성장에 따라 교황권은 존립기반을 상실하면서 세속적인 왕권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교황권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3세기말 프랑스 필립 4세가 가스코뉴 공령의 쟁탈전에 필요한 전비를 염출하기 위하여 국내 성직자에게 과세하려 하자, 국하게되었다. 이에 필립 4세는 프랑스로부터 교황청으로 금전유출을 금지하고 날카로운 대립을 벌였다. 교황은 이에 맞서 “만일 세속권이과오를 범하면 영적 권력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야 하며, “영적 권력은 위엄이나 고귀함에 있어 어떤 세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우남상크탐’을 발휘하였다.
이내 필립은 교황을 습격하여 사로잡았다. 다시 풀어주나 충격과 굴욕으로 곧 교황은 사망하였다. 1305년 새로운 교황으로 크레멘트 5세가 선출됐다. 그는 28명의 추기경을 새로 선출하였는데, 그 중 25명이 프랑스인 이였고, 그는 거처를 남불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아비뇽은 프랑스 세력 하에 있던 곳으로, 이 사건으로 교황권은 완전히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사건을 ‘교황의 바빌론 유수’ (The Babylonia Captivity of the Pope, 1309-1376)라고 한다.
1377년 교황청은 다시 로마로 돌아가게 되고 로마 시민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반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나, 곧 추기경들과 대립하게 되어 새로이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선출하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 사건으로 교황청은 로마와 아비뇽으로 갈라지고 이른바 ‘교회의 대분열’ (Great Schism, 1378-1417)로 알려진 크리스트교 세계의 양분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회의 대분열의 사태수습 방법으로 두 교황의 퇴위가 결정되고,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으나, 기존의 구 교황이 퇴위를 거부하여 세 사람의 교황이 있게 되는 형세가 되었다.
1414년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이단을 억압하며 교회의 개혁을 도모하기 위하여 콘스탄츠 의회 (Council of Constance)가 소집됐다. 신앙 문제와 관련하여 공의회의 정당성과 권위를 규정하고, 교황도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결정이 채택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교회의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 마무리
장원제도의 붕괴와 도시의 변화는 봉건제도의 붕괴과정에 따른 한 과정이었다. 도시의 반란은 자본적인 세계 경제의 출현을 예고하는 조짐 이었으며, 왕권을 중심으로 형성되가던 새로운 집권적 통일국가의 등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농민의 반란은 유럽사회가 봉건 사회를 탈피하고 근대사회로 발전하기 위하여 치루어야 했던 ‘성장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장미전쟁은 왕가와 대제후 및 귀족들 사이의 싸움이었으며, 양측이 다 일반민중에게 손상을 미치지 않도록 유념하였으며, 대도시들도 중립적인 태도를 지켰다. 그 결과 주로 피해를 입은 것은 내란에 참가한 귀족들이었으며 많은 귀족들이 살해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장미 전쟁은 말하자면 ‘귀족층이 스스로의 몸에 가한 流血의 手術’ 이었으며 일반 국민은 물론 젠트리와 시민계급은 귀족의 횡포와 무질서를 증오하고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의 출현을 갈망하였다. 절대왕정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대분열시에 영국과 독일은 로마를, 프랑스와 에스파니아는 아비뇽을 지지하였으며, 이러한 세속적인 세력의 지지가 교회의 분열을조장하고 장기화 시켰다. 대립하는 두 교황과 세속군주와 결탁은 교황권의 위엄을 손상시킴은 물론, 교회 전체를 타락시키는결과를 가져왔다.
14, 155세기에는 봉건사회와 중세 문화가 붕괴하고 시들어갔으나, 그 밑바닥에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움트고 태동하고 있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