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제 (These) 이해
테제 (독: These, 영: thesis)는 철학•사회 용어로 기원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정의한 철학 용어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 (定, These), 반(反, Antithese), 합(合, Synthese)으로 규정한다
한국어로는 정 또는 정립(定立)이라고 번역하며,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명제 또는 주장을 의미한다. 식물의 씨앗을 예로 들면 기본이 되는 씨앗은 테제(정), 그 씨앗이 흙에서 뿌리를 내려 나무가 되면 그것이 안티테제(반), 그리고 그 결과물인 열매가 진테제(합)이다.
즉, 안티테제는 그 자체가 테제로 발전할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테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테제에 대한 부정이므로), 테제와 안티테제가 모순을 일으키면 그것이 통일된 상태인 진테제 (합)가 된다. 쉽게 표현하자면 테제는 명제, 안티테제는 명제에 대한 부정 (否定), 진테제는 그 부정에 대한 부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 반정립 (反定立, antithese)
– 테제 (These, thesis, 정립: 定立) : 원래는 ‘하나의 계기’를 뜻하는 헤겔 철학의 용어로, 정립(定立)이라 번역되는 말
– 안티테제 (Antithese, antithesis, 반정립: 反定立) : 안티테제. 특정한 긍정적 주장에 대응하는 특정한 부정적 주장
– 진테제 (Synthese, synthesis, 종합: 種合) : 테제가 안티테제에 의해 더 나은 방향으로 되는 현상. 역사의 진보
○ 정반합 (These, Antithese, Synthese: 定反合)
철학용어로 논리의 전개 방식의 하나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도식화한 것이다.
기본적인 구도는 정 (테제)이 그것과 반대되는 반 (안티테제)과의 갈등을 통해 정과 반이 모두 배제되고 합 (진테제)으로 초월한다는 것이다. 풀어서 설명 하자면, 여기서 ‘정’은, 어떤 것이 모순적 면모를 지닌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정’을 부정하여, 모순을 털어버린 상태를 ‘반’이라 한다. 하지만 ‘반’은 모순을 극복하였다고는 하나, 이 세상 모든 물체들은 모순적 면모를 지닐 수 밖에 없으므로, 그것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한 상태인 ‘합’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합 또한 모순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합’은 다시 ‘정’이 된다. 이러한 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 정반합 이론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정과 반의 갈등에 초점을 두어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의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다.
논리의 전개 과정에서 테제 (these, 定立)는 긍정, 안티테제 (antithese, 反定立)는 부정, 진테제 (synthese, 綜合)는 부정의 부정에 해당한다. 정립 (定立, these)과 반정립 (反定立, antithese)이 모순을 일으켜 그것의 통일된 상태인 ‘종합’ (綜合, synthese)이 된다.
한편, 정립 (定立)이라 번역되는 테제 (these)는 원래 ‘하나의 계기’를 뜻하는 헤겔 철학의 용어로, 증명 되어야 할 주장 · 명제를 의미하던 것이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일정한 전략 · 전술 단계에서 혁명운동의 방향 · 형태 · 슬로건 등을 결정하는 방침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 강령
이러한 철학적 정의가 사회적 정의로 확대되면서 나온 의미가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에서 사용하는 기본 방침이나 운동 규범을 의미하는 강령 (綱領)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대표적으로, 여기서는 일정한 단계에서 혁명운동의 방향이나 형태 등을 결정하는 방침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17년 4월 17일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설 등을 결정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4월 테제(April Theses).
○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 – 카를 마르크스 (1845)
1.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 (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Wirklichkeit), 감성 (Sinnlichkeit)이 단지 ‘객체 또는 관조 (Anschauung)’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되는 관념론 (이것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는 알지 못한다)에 의해 추상적으로 전개되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사유객체와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감성적 객체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Wesen des Christenthums) 본질’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 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단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 하고 고정시켰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인’, ‘실천적·비판적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2.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즉 그의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 및 현세성 (Diesseitigkeit)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유의 현실성 혹은 비현실성에 대한 (이 사유가 실천적으로 유리 되어 있다면) 논쟁은 순전히 ‘공리공론적인 (scholastische)’ 문제에 불과하다.
3. 환경과 교육의 변화에 대한 유물론적인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문 (그 중 한부분은 다른 한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다.)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4.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소외 (selbstentfremdung)라는 사실, 즉 세계가 종교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중화 (verdopplung)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기초 안에서 해소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세속적 기초가 그 자신으로부터 이탈하여 구름 속에서 하나의 자립적 영역으로 고착된다는 사실은 이 세속적 기초의 자기분열 및 자기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속적 기초 그 자체는 우선 그 모순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다음에는 이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컨대 지상가족이 신성가족 (heilige Familie)의 비밀임이 폭로된 이상은 이제 지상가족 자체가 이론적 및 실천적으로 전복되어야 한다.
5. 포이에르바하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고 ‘직관 (Anschauung)’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6.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 (ensemble)이다. 이렇듯 현실적 본질에 대한 비판으로 들어서지 못한 포이에르바하는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 1) 역사의 진행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Gemuet)을 그 자체로서 (fur sich) 고정시키며, 따라서 하나의 추상적인 (‘고립된’) 인간 개체를 전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단지 ‘유(Gattung)’로서만, 다수의 개인들을 ‘자연적으로’ 결합시켜주는, 내적이고 침묵을 지키는 보편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7.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성’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 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분석한 추상적 개인이 사실은 일정한 사회형태에 속해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8.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는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 (Mystizism [us])로 유도하는 모든 신비는 인간적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개념적 파악 속에서 그 합리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9. 직관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개별적 인간의 직관, 즉 시민사회의 직관이다.
10. 구태의연한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적 인류 (die gesellschaftliche Menschheit)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_ 마르크스 – 엥겔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