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개조 계획 (Transformations de Paris sous le Second Empire, 1852 ~ 1870)
파리 개조 계획은 1852년부터 1870년까지 진행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재건설 사업으로, 20세기 초까지 진행하였던 사업이다.
19세기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 (프: 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년 3월 27일 ~ 1891년 1월 11일) 이전의 파리는 중세 도시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좁은 길들이 미로같이 얽혀 있어서 파리 시민들은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렸고 루브르궁과 같은 역사적 건물들은 무질서하게 건축된 허름한 건물들에 포위되어 그 위용을 나타내지 못했다. 상수도와 하수도 체계의 부재와 녹지 부재는 생활 상의 불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염병 창궐과 같은 심각한 위생 문제를 야기했다. 여러모로 파리보다 현대적이었던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나폴레옹 3세는 예전부터 파리의 재건설을 생각해왔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새로운 파리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1853년 파리 지사 자리에 오스만 남작 (Baron Haussmann)을 임명하고 파리의 도시 구조 개혁을 명하였다.
– 파리 개조 계획 (Transformations de Paris sous le Second Empire)
.명칭: 제2제국의 파리 개조 계획 (프: Transformations de Paris sous le Second Empire)
.유형: 도시계획
.진행기간: 1852 ~ 1870년
.장소: 파리 (Paris)
.계획자: 나폴레옹 III세 (Napoleon III), 조르주 외젠 오스만 (Georges Eugene Haussmann)
○ 배경
비좁고 꼬불꼬불하며 오물과 악취로 가득 찬 더러운 도시. 19세기 중반까지 파리의 모습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인구 급증에 따른 도시 환경 악화. 인구 65만명이던 1832년에는 콜레라가 발생, 시민 2만여명이 숨졌다. 불결한 환경에도 도시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산업혁명을 맞아 농촌은 붕괴하고 농민들은 살 길을 찾아 도시로 몰렸다. 1836년 인구 100만을 넘어선 파리는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난개발에 몸살을 앓았다. 하층민이 몰리는 뒷골목은 툭하면 전염병이 번졌다.
도심 슬럼가의 인구밀도는 ㎢당 약 10만명. 오늘날 인구 223만명 (교외지역까지 합치면 1,240명)인 파리 시내의 평균 인구밀도 ㎢당 약 2만명보다 훨씬 높았다. 1841년 도시를 바깥 성벽까지 확대했어도 사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당대 작가들의 소설에는 파리의 어두운 구석이 나온다. 오노레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에서 파리를 지옥과 매춘의 도시로 그렸다.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 파리 변두리 서민들의 비참한 삶을 담았다. 마침 도시의 통풍시스템이 건강을 결정한다는 이론이 퍼지자 프랑스는 1841년 5월3일 파리 재개발법을 만들었다. 질병에 대한 공포가 유서 깊은 도시의 재개발을 촉진한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돈이 딸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도 엇갈려 논의만 무성할 뿐 사업은 조금도 진행되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들은 재개발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지만 1848년 유럽을 휘몰아친 혁명 분위기 속에서 빈자들을 도심 슬럼가에서 쫓아낼 수 없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나폴레옹3세의 등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라는 후광을 업고 1848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1851년 친위 쿠데타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나폴레옹3세는 파리 개조 사업을 세느현 지사 조르주 외젠 오스만 (Georges Eugene Haussmann)에게 맡겼다.
○ 과정
나폴레옹 3세에게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것은 질병과 마찬가지로 공포였다. 혁명에 대한 공포.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도 등장하는 1832년 봉기에서 파리 시민들은 골목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진압군에 맞섰다. 권력은 마차 두 대만 엎어놓으면 군대의 기동이 불가능한 파리시의 미로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넓고 곧은 방사형 순환도로와 녹지 공간은 군대의 기동로와 임시 주둔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나폴레옹 3세는 파리에서 혁명의 온상이었던 복잡한 사육장 같은 거리는 없애고 그의 기병대가 도시혁명을 진압하기 쉽게 대로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오스만은 다섯 가지 원칙 아래 도시를 파헤쳤다. 첫째, 교통을 위해 도시를 관통하는 50개 대로를 건설하고 둘째로 가로축에 개선문과 콩코드 광장, 루브르궁 같은 거대한 상징물을 설치했다. 셋째, 도로와 주요 관공서는 파리시가 직접 개발하되 나머지 부지는 민간에 분양해 간접 개발하는 혼합방식을 택했다. 넷째, 상·하수도와 학교, 병원 등 인프라를 확보하고 다섯째, 녹지 공간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오스만은 1870년까지 재임하며 시내 비위생 구역을 정리하고 하수도 600㎞와 방사형 도로망, 철도 환상 (環狀線)을 깔았다.
파리 시내에서는 주요 건물 500m 범위 안에 반드시 공원을 유치한다는 계획 아래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대형 도심 숲과 28개의 중소규모 녹지를 조성했다. 덕분에 파리시에도 나폴레옹 3세가 영국 망명 시절 부러워했다는 런던의 공원과 버금가는 녹지가 생겼다.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은 1870년 일단 멈췄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코뮌, 대화재 등 정치 사회적 격변이 잇따르며 막 내린 것이다. 대규모 재개발은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다.
오스만이 사업을 총지휘하던 17년 동안 새로 들어선 건물이 7만5,000천동. 대부분 5층 이하로 형태와 구조가 똑같아 ‘오스만 양식’으로 불린 신축 빌딩의 1층에는 노천 카페와 음식점이 입주하고 위층에는 부자들의 살림집이 들어섰다. 파리 도심은 급속하게 부촌으로 변해갔다. 반면 건물을 짓느라 빈민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가옥 2만5,000동이 헐렸다. 멀쩡한 건물도 오스만이 지도에 그은 직선에 따라 잘려 나갔으니 불만도 컸다. ‘도시 재개발의 모범 사례’라는 평가 이면에 ‘매혹적인 옛 도시 파리에 대한 분별없는 학살’이라는 비판이 동시에 나왔다.
더 큰 문제는 자금. 오스만은 세 가지 방법으로 재개발 자금을 충당했다. 첫째는 정부의 직접 지출. ‘생산적 지출 (depenses productives)’이란 이름 아래 정부 예산의 일부만 공사에 투입하고 나머지 예산은 대출금 이자를 갚는데 썼다. 이자 부담은 계속 커졌어도 한정된 예산으로 여러 공사를 동시에 펼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파리시 개발채권’ 발행. 개발 이익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재원을 마련했다. 세 번째 방식은 민간기업에 대한 지불 유예. ‘위임 채권’이라는 이름을 붙여 민간업체에 대한 대금 지급을 채권으로 줬다. 사실상의 어음이었다.
오스만은 이런 방식으로 약 25억 프랑을 끌어썼다. 사업이 한창이던 1858년 정부 예산이 18억5,800만 프랑보다 훨씬 많았다. 이자까지 합치면 사업비 규모는 40억 프랑대로 늘어난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 재개발 부채를 20세기 초반에서야 갚았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될 결과 파리시는 확연하게 달라졌지만 사회적 불만이 팽배하고 국가 재정은 휘청거렸다. 부유층은 만족했어도 빈민들은 부글거렸다. 부자들이 한적한 교외를 찾아 도심을 떠났던 영국과 정반대로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들이 추방 당한 도심을 차지, 시샘을 받았다.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는 유독 심한 계층 간 갈등을 겪었다. 오스만이 물러날 즈음 터진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전쟁배상금으로 50억 프랑을 바쳤다. 오스만의 고향인 알자스 지방은 물론 로렌까지 독일에 떼줬다.
프랑스는 파리를 아직도 개발하고 있다. 오스만이 도심을 꾸몄다면 20세기의 도시계획은 파리 메트로를 유기체로 보고 도심과 교외의 양극화 해소와 공동 발전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파리의 아름다움은 150년 역사를 두고 진행된 결과물인 셈이다. 그래도 프랑스는 운이 좋은 셈이다. 경제가 날로 성장하던 산업혁명기에 도심 대개발을 진행, 경제가 그나마 버텨줄 수 있었으니까.
도시화 비율이 81.5%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도 재개발이 필요한 도시가 많지만 경제가 받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구촌도 마찬가지다. 오는 2030년이면 도시인구가 50억명에 이른다는데 궁금하다. 도시의 기능을 갖추는데 얼마나 많은 자금이 들어가고 양극화에 찌든 도시가 다시금 질병과 혁명의 공포에 짓눌릴지 말이다.
○ 성과
나폴레옹 3세의 기본 개혁 방안에 더해진 오스만의 구체적인 계획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의 바탕이 되었다. 오스만은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최초로 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건설했다. 오스만 이전의 유럽의 신도시 건설은 주로 군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아름다운 도시 건설에 치중하였으나 오스만은 도시 기반 시설부터 도로 체계, 녹지 조성, 미관 관리, 도시 행정에 이르는 도시의 건설과 운영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간과하지 않고 중세 도시 파리와는 전혀 다른 근대화된 파리를 창조했다. 기차역과 주요 광장들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대로가 만들어졌고 도로 주위에는 오스만 양식 건물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식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파리 각지에 크고 작은 녹지가 조성되었고 주택과 함께 각종 공공 시설과 문화 시설이 세워졌다. 또한 상수도망과 하수도망의 건설은 파리 시민의 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그 밖에 노트르담 성당과 같은 기존의 역사적 건물의 대대적인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고 오페라 갸르니에 같은 후대에까지 빛날 건물들이 세워졌다. 공들여 보수하고 새로 지은 주요 기념물들은 대로가 끝나는 부분에 위치하게끔 해서 최대한 사람들의 시야에 노출되게 배려하였다.
○ 유산
오스만의 새로운 파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파리 시민들은 과도한 공사 비용에 불만이 많았지만 파리를 방문한 많은 외국인들은 오스만의 파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파리의 도시 계획은 서구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오스만의 파리 개조 사업이 놀라운 것은19세기 중반에 건설된 도시가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없이 훌륭히 도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유효한 19세기 도시 미학은 세계 각지에서 파리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의 도시 설계는 파리가 유럽 최대의 도시 경제권 (일-드-프랑스)의 중심 도시로 기능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