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감상
폴란드계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Moritz Moskowski, 1854 ~ 1925)의 Piano Concerto No. 1 in B minor, Op. 3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독: Moritz Moszkowski, 프: Maurice Moszkowski, 1854년 8월 23일 ~ 1925년 3월 4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겸 교사이며,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그의 형 알렉산더 모슈코프스키는 베를린에서 유명한 풍자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는 “모슈코프스키는 쇼팽 사후 피아노곡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모든 피아노 연주법을 망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오늘날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모슈코프스키는 19세기 말 당시에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 생애 및 활동
부유한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자비에르치에 근처에 있는 필리카에서 1854년에 프로이센의 브레슬라우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로 이사해와 그를 낳았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경시하던 때에 모슈코프스키는 열렬한 유대교 신자로 남아있었다. 그는 아주 어린나이부터 재능을 보여주었고, 1865년에 가족이 드레스덴으로 이사해가면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그는 음악 학교를 다니며 피아노를 계속 배우다가, 1869년에 줄리우스 스턴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에듀아르드 프랑크에게서 피아노를, 프리드리히 킬에게서 작곡을 배웠으며, 테오도르 쿨락의 신음악학교 (Neue Akademie der Tonkunst)에 입학하여 리하르트 뷔에르스트에게 작곡을, 하인리히 도른에게서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다. 여기서 그는 자브레 샤브렌카, 필립 샤브렌카 형제와 친교를 가지게 된다. 1871년에 그는 쿨락의 제안을 받아들여 학교의 교사가 되는데, 오케스트라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1873년에 모슈코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되는데, 곧 인근 도시들에 연주여행을 다니며 경험과 평판을 쌓기 시작한다. 이년 후 그는 아침 공연 (matineé)에서 두대의 피아노를 위해 편곡된 자신의 피아노협주곡을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리스트가 초청한 관객들 앞에서 연주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1875년부터 그는 베를린 음악원에서 교사직을 이어가며 프랑크 담로슈, 호아킨 닌, 어니스트 셸링, 호아킨 투리나, 칼 라크문드, 버나드 폴락, 에른스트 요나스, 빌헬름 작스, 헬렌 폰 샤크, 알베르트 울리히, 요한나 벤첼 등의 제자를 둔다. 그 후 모슈코프스키는 유럽 전역에서 연주여행을 가지며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서 성공적으로 명성을 쌓아가고, 지휘자로서의 평판 역시 얻게 된다. 1884년 모슈코프스키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의 여동생인 헨리에타 샤미나드와 결혼하고, 마르셀이라는 이름의 아들과 실비아라는 이름의 딸을 둔다. 그러나 1880년대에 그는 팔 신경에 문제가 생겨 작곡, 교사, 지휘 등의 연주회 활동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게 된다. 1887년에는 런던에서 초청을 받는데, 여기서 그는 본인이 작곡한 관현악곡들을 소개하고, 이로써 로열 필하모닉 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받는다. 삼년 후 그의 부인은 시인인 루드비히 풀다와 바람을 피고 이년 후 이혼하게 된다.

1897년 부와 명예를 가진 모슈코프스키는 파리로 이사하여 류 블랑셰(Rue Blanche)와 그의 딸과 함께 살아간다. 파리에서 그는 교사로서 음악가들을 교육하는데 힘썼다. 여기서 그는 블라도 페를뮈테르, 토머스 비첨 (1904년에 앙드레 므싸제의 조언을 받아 모슈코프스키에게서 관현악법을 배움), 요제프 호프만 (모슈코프스키는 그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선언함), 반다 란도프스카, 그리고 비공식적이지만 가비 카자드쉬를 가르쳤다. 여름에는 몽티니 줄 루앙 근처에 있는 소설가 앙리 뮈르제의 빌라를 빌려 생활했다. 1899년에는 베를린 아카데미가 그를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미국에서는 많은 피아노 제작사들이 그를 불러 많은 사례를 주겠다며 자신의 피아노를 사용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언제나 거절하였다.
1908년에 54세의 모슈코프스키는 건강상의 문제로 음악계를 떠나게 되고, 이로써 그의 유명세는 점점 사라지고 기울어져간다. 그는 더이상 제자들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 “그들이 스크랴빈, 쇤베르크, 드뷔시, 사티 등 예술적으로 미친놈들처럼 곡을 쓰고싶어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모든 저작권을 팔아 전부 독일, 폴란드, 러시아 채권 및 유가증권에 투자했는데, 후에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종잇장과 같이 되면서 가난한 말년을 보냈다. 그의 제자 요제프 호프만과 버나드 폴락이 그를 돌봐주러 왔는데, 폴락은 모슈코프스키의 오페라인 《보압딜(Boabdil)》의 피아노 편곡을 라이프치히의 피터스 출판사에 보내 모은 1만 프랑을 로열티인것으로 위장해 호프만의 사비 1만 마르크와 자신의 사비 5천 마르크와 함께 전달하였다. 1924년 12월 21일, 지병에 막중한 부채까지 있던 모슈코프스키를 위해 그의 친구들과 팬들은 그의 원조를 위해 카네기 홀에서 15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두고 커다란 기념 연주회를 열었다. 오십 가브릴로비치, 퍼시 그레인저, 요제프 레빈, 엘리 나이, 빌헬름 박하우스, 해롤드 바우어가 연주자로 참여하였으며, 파데레프스키는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과를 전보로 보내와 대신 프랑크 담로슈가 지휘하였다. 이 콘서트는 13,275달러 (2017년 5월 기준으로 187,793.67달러와 같은 가치)의 수익을 냈는데, 이 수익은 모슈코프스키의 빚을 갚기 위해 일부는 뉴욕 내셔널 시티 은행의 파리 지점으로 옮겨졌으며,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으로도 옮겨져 모슈코프스키가 매년 1,250달러의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모슈코프스키의 병세는 계속 그를 좀먹었고, 결국 이듬해 3월 4일 기금이 전달되기 전에 위암으로 사망하게된다. 이 기금은 대신 그의 부인과 아들에게 전달되었고, 장례식 비용으로도 사용되었다.
○ Moritz Moszkowski: Piano Concerto No. 1 in B minor, Op. 3
I. Con spirito – Allegro 0:00
II. Adagio 10:36
III. Scherzo: Molto vivace 24:00
IV. Allegro sostenuto – Allegro con spirito 31:38
- Ludmil Angelov, piano
- Rzeszow Philharmonic Orchestra
- Vladimir Kiradjiev, conductor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