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3월 20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 1769 ~ 1821)이 엘바 섬에서 탈출해 파리에 도착하면서 100일 천하 시작
1814년 4월 11일 체결된 퐁텐블로 조약에 의해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 황제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은 황제의 지위를 유지한 채 세습되지 않는 엘바 공국의 대공이 되어 섬에서 9개월 21일을 머물렀다.
1815년 2월 26일 영국군의 감시를 피해 엘바 섬을 벗어나 3월 20일 파리에 입성한다. 그러나 이 백일천하는 곧 끝나고 나폴레옹은 다시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어 죽게 된다.
나폴레옹 1세 (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코르시카 소귀족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당시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지에서 전례 없는 승리들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정치적 지지 세력을 규합한 그는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 나아가 종신통령에 취임하였고 1804년 12월 2일에는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통치는 대내적인 개혁과 대외적인 정복으로 이어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812년에 실시한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이후 1814년에 몰락하였다. 1815년 잠깐 다시 정권을 장악하지만 워털루 전투 패배 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서 1821년에 사망하였다.

–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출생: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공화국 아작시오
.사망: 1821년 5월 5일 (51세),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롱우드
.가문: 보나파르트 가
.부모: 카를로 보나파르트 / 레티차 보나파르트
.배우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 마리루이즈 도트리슈
.자녀: 나폴레옹 2세
.종교: 로마 가톨릭
*지위: 프랑스인의 황제
.재위: 1804년 5월 18일-1814년 4월 6일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전임: 본인 (제1공화국 제1통령)
.후임: 루이 18세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혁명기 혁명 정부 (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로제타석은 세 면으로 나뉘었고, 윗면은 고대 그리스어, 둘째 면은 이집트의 평민어였던 데모닉 그리고 마지막은 이집트의 고대어 하이에로글리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비문을 해석하길 적극 권장했으나 살아서 이 돌의 해석을 보지 못하고, 후에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히 해석된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7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고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한다.이 승리로 영국 해군이 해당지역의 재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이때 프랑스 해군 전열함들이 전멸 당하고 두척만 생존한다. 이로 말미암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되고 만다. 나폴레옹은 본국과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하고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당시 오백인회와 원로원은 이 문제로 말미암아 거의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정국을 지켜보고서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시에예스,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백인회는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간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가 장악한 군대와 30여 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이 전쟁에 휘말렸으며, 많은 승리 뒤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나갔다.
하지만 스페인의 무장시민들의 끈질긴 쿠데타와 1812년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의 대육군은 스페인과 러시아에서의 실패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이후 재건된 프랑스 군대는 규모는 여전히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육군이었으나 내실에서는 결코 전성기 때 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그 동맹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고 엘바섬으로 유배 보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는 엘바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보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위암으로 결론이 났으나, 그의 사인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일부 학계 측에서는 비소 (만신재)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 이집트 정복 – 1798년 7월 21일,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전투 승리로 이집트 점령
피라미드 전투(프: Bataille des Pyramides) 또는 엠바베 전투는 프랑스 혁명 전쟁 중에 1798년 7월 21일 이집트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맘루크군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의 큰 승리 중 하나로,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대규모 사단을 방진 대형으로 편성하는 전술을 펼쳐 군사 전술에 중요한 기여 한 가지를 보탰다.
비록 피라미드들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수평선에서 희미하게 보였을 뿐이었지만, 나폴레옹은 훗날 이 전투를 이집트의 피라미드 전투라고 부르게 된다.

○ 서막
1798년 7월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다음 카이로를 향해 행군하였다. 카이로로 진군하던 중 그는 폭력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는 맘루크군과 조우하였다.
15km (9 마일) 거리에 기자의 피라미드가 있었고, 카이로와는 단지 6km(4마일) 거리였다. 맘루크들은 세력가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의 명령을 받고 기병들을 모집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진! 4000년의 기억을 가진 유적이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1798년 7월 3일, 아부키르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다음날 알렉산드리아에 침공해 손쉽게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이어 나폴레옹은 카이로를 함락시키기 위해 사막으로 행군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입던 두꺼운 군복을 그대로 입고 왔고, 사막에서 꼭 필요한 식수와 신선한 식품을 준비하는데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는 등 사막 행군에 필요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 인해 따라서 더위와 갈증, 식중독으로 사망하거나 낙오한 병사들이 적지 않았고 전체 행군 속도도 매우 느려졌다. 따라서 되려 7월 21일에야 카이로 근처의 나일강변의 마을인 엠바베에 도달할 수 있었고 엠바베에서 기다리고 있던 맘루크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라서 “피라미드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맘루크군은 오래전 몽고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는 당대 최강의 기마병으로 영국제 신형 기병총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변해 버린지 오래고 나폴레옹군의 머스킷 총검으로 만든 방진을 돌파하지 못하고 격파당했다. 결국 무려 3000기에 달하는 맘루크군 기병이 전사하고 아랍 보병대도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29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병사들이여, 4천년의 역사가 내려다보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지만 이는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쓴 회고록에 조작한 말로 보인다. 게다가 ‘피라미드 전투’라는 이름과는 달리, 당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실제로는 피라미드에서 15km 이상 떨어진 곳이라 날씨가 좋을 때에나 간신히 피라미드의 형체가 보이는 수준이었다.
○ 전투
나폴레옹은 무라드군의 진격에 대비하여 휘하 5개 사단에 각각 방진을 구성하게 하고, 방진 안쪽 중앙에는 기병 및 군수품을, 모서리에는 포병대를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군 사단들은 우익이 주도하고 좌익은 나일 강의 보호를 받으며, 사다리꼴 대형으로 남쪽으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로 드제, 레니에르 (프: Reynier), 뒤가 (프: Dugua), 비알 (프: Vial)과 봉 (프: Bon) 장군의 사단을 배치했다. 추가로 드제는 서쪽에 있는 근처 마을인 비크틸 (Biktil)를 점령하기 위해 소규모 분견대를 파견했다. 무라드는 우측 나일 강에 면한 엠바베 마을에 머물렀는데, 엠바베는 보병과 몇 문의 구식 대포로 요새화되었다. 그의 맘루크 기병은 사막에 배치되었다. 이브라힘이 이끄는 2군은 나일강 동쪽 강둑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며 전투에 전혀 개입할 수 없었다.
오후 3시 30분, 맘루크 기병대는 사전 경보 없이 프랑스군에게 달려들었다. 드제, 레이니어 그리고 드가가 지휘하는 사단들의 방진은 견고하게 자리를 지켰으며, 포병 및 머스켓 소총의 직사 화력으로 기병들을 물리쳤다. 프랑스군 배치 진형에 변화가 없자, 당황한 맘루크 기병들은 드제가 파견한 분견대를 공격했다. 이것마저 실패로 끝났다. 한편, 나일 강과 가깝게 배치된 본 (Bon) 사단은 공격 대형으로 전환하고 엠바베 마을로 돌격했다. 마을을 돌파한 프랑스군은 수비대를 패주시켰다. 강과 프랑스군 사이에 갇힌 맘루크와 보병들이 안전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러나 이미 수백 명이 물에 빠져죽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피해를 전사 29명 부상 260명으로 보고했다. 무라드의 손실은 훨씬 커서 충원이 불가능한 맘루크 기병 3,000여명과 정확한 피해 상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상당한 규모의 보병을 잃었다. 무라드는 1799년 말 드제에 쫓겨 궁지에 몰리기 전에 상부 이집트로 탈출했고, 그곳에서 게릴라 항전을 벌였다.

○ 전투의 여파
이 전투의 결과로 카이로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했고 나폴레옹은 7월 25일 카이로에 입성하여 이집트 정복은 3주 만에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에 격분하여 대프랑스 동맹에 가세하고 나폴레옹에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나폴레옹의 뒤를 쫓던 넬슨은 8월 1일, 아부키르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을 습격해 섬멸시켰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보급과 퇴로가 막히고 말았다. 더욱이 카이로에서 도망친 맘루크군은 나일 강 상류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고, 프랑스군과 카이로 시민들과의 관계도 험악해져갔다.
맘루크군의 패배소식은 실로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카이로에 있는 맘루크군은 흩어졌으며, 시리아에서 재편성해 다시 공격을 하였다. 피라미드 전투는 700년간 이집트를 지배해온 맘루크들의 종말의 계기였다. 그러나 이 행운에도 불구하고,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 승리를 거두어, 이로써 10일 후 나폴레옹은 중동 정복을 포기하게 되었다.
10월 21일, 카이로에서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군 300명이 살해당했고 프랑스군은 보복으로 카이로 시민 2500명을 학살했다. 반란군의 거점이었던 알 아즈하르 모스크는 이슬람 교리 상 무기를 든 채로 들어갈 수 없었으나 프랑스군은 모스크 내부로 기병대를 투입시켜 진압했다. 이 때문에 이집트인의 반감은 더욱 심해졌다.
나폴레옹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나일 강 상류에 별동대를 파견하여 맘루크군을 격파하게 하고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을 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시리아로 진군하기 시작한 나폴레옹군은 1799년에 팔레스타인에 진입하여 야파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자르 파샤가 이끄는 니자므 제디드 군대의 분전과 시드니 스미스 경이 이끄는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악카 (아크레)에 대한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고 설상가상으로 야파에 주둔한 프랑스군 사이에 페스트가 창궐하였다. 이때 나폴레옹은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방치한 탓에 오늘날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나폴레옹 본인도 이에 대한 비난을 걱정했는지 야파의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방문하는 자신을 그리게 하기도 했다. 안토닌 얀 그로스가 그린 ‘야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이 바로 그 그림이다.
본래 나폴레옹은 프랑스 내의 이집트 학자들을 만나서 나름 이집트에 대해 치밀하게 연구했다. 로마 시대부터 부유하기로 유명했던 이집트의 명성을 곧대로 믿으며, 이집트를 점령하면 자체적으로 보급도 가능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 부유한 이집트는 이미 옛말이 되었던 지라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아 오히려 적자만 지속되었다. 다만 과거에 비해 줄긴 했다지만 곡물 생산량은 당대에도 유럽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식량이 넘쳐나서 프랑스군은 굶주리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 본국에서는 오스트리아가 공세를 재개했고 나폴레옹의 정치적 입지도 좁아져가자 결국 나폴레옹은 이 전쟁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아부키르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한 뒤인 8월 22일,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들만을 이끌고 프리깃 두척에 나눠타서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귀환했다. 그리고 클레베르 장군이 남은 프랑스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탈출한 뒤, 지휘권을 클레베르에게 인계하고 황급히 떠났다. 클레베르는 사막에서 조금씩 죽을 수 없던지라 나폴레옹의 지시대로 바로 영국군을 통해 투르크군과 항복 협상을 벌였다. 한편, 드제가 이끌던 나일 강 상류의 별동대는 맘루크의 수장 무라드 베이의 잔존 병력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격파하는데 성공하는 등 선전하고 있었다.
클레베르는 투르크군 증원군이 항복요청을 거부하고 계속 전진해오자, 오히려 헬리오폴리스 전투에서 1만의 프랑스군으로 6만의 투르크군에게 승리하는 등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풍부한 보급과 충원이 가능했던 영국군과 오스만군의 공세에 간신히 저항하는 수준이었고, 얼마 후 클레베르 장군이 암살당하면서 프랑스군의 항전 의지도 점점 줄어들었으며, 결국 1801년 오스만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한 후 살아남은 1만 5천의 프랑스군은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비록 영국과 인도 사이를 차단해 영국을 견제한다는 나폴레옹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동행한 학술 조사단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집트 신성문자를 해독해내는 결정적 역할을 한 유물인 로제타 석을 발견했고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과 왕가의 골짜기 같은 곳에서 처음으로 학술 조사를 한 것이 대표적이다.
* 명작감상 – 자크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자크루이 다비드 / 1806년 / 루브르 박물관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은 다비드가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제작한 그림이다. 루브르 박물관 소장.
나폴레옹은 제정 (帝政)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네 개의 초대작 (超大作)을 명했는데, 다비드는 ‘생 드 마르스에서의 군기 수여식’과 이 ‘대관식’을 완성시켰다. 의식은 1804년 12월에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 거행되었고, 로마에서 교황 비오 7세가 초청되었다. 황제는 월계관을 쓰고 앞으로 나와서 꿇어 앉은 황후 조제핀에게 바야흐로 왕관을 주고 있다. 가운데 깊숙이 들어간 높은 곳에는 황제의 모친이 그려져 있고, 한 단 낮게 장군과 고관들이 줄지어 있는데 좌우에 줄지은 수많은 인물도 정확한 초상으로서 그려져 있다.

– 자크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연도: 1805년–07년
.매체: 캔버스에 유화
.크기: 979 × 621 cm
.소장: 루브르 박물관
– 그림설명
원래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스스로 관을 쓰는 장면을 그리려다가 교황 측의 항의에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 씌워주는 것으로 바꿨다고 한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스스로 관을 쓰는 모습을 그린 수정 전 스케치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또 원래 다비드는 교황이 맥없이 손을 떨구고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리려고 했으나, 이 초안을 본 나폴레옹이 “대관식 구경이나 시키자고 짐이 교황을 로마에서 여기까지 모셔왔단 말이냐”고 말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어쨌든 그 그림의 배경에 있는 교황청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않음은 당연한 셈이다. 그림에 나온 교황은 비오 7세로, 나폴레옹에 의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여러 번 감금당하는 수난을 겪은 교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오 7세는 수도회 출신의 거룩한 성품과 인격을 구비한 사람이었으며, 결국 나폴레옹의 최후의 순간에 절해고도에 고해 사제를 파견하여 나폴레옹의 마지막을 지켜주도록 함으로써, 원수를 은혜로 갚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에선 다들 복장이 화려해서 누가 교황인지 혼란스럽지만 나폴레옹 바로 뒤에 앉아 흰 사제모를 쓰고 옷깃에 검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으며 힘없이 손을 든 검은 머리의 남자가 비오 7세이다.
이 그림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몇 개 더 있는데, 조제핀과 나폴레옹 가족들의 관계는 지극히 나빠서 실제 대관식에서는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 보나파르트와 누이들 전부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림에서는 화목한 가정을 원했던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근엄하게 즉위식에 참석한 가족들의 모습이 새로 그려졌다. 그림 중앙에서 약간 왼쪽 귀빈석 중앙에 흰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는 귀부인이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 보나파르트이다.
그리고 조제핀에 대해서도 역시 나폴레옹의 요청에 따라, 필요 이상으로 성녀 이미지로 미화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림에서는 20대의 순결한 성처녀처럼 그려졌지만, 대관식 당시 조제핀은 40대였다. 물론 조제핀은 미모의 여자였던 건 맞다.
다비드의 초안 스케치에서는 나폴레옹이 스스로 관을 쓰기 위해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실제로 그릴때는 똑바로 서서 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몸을 뒤로 젖혔던 그 빈 공간에 사람을 하나 새로 그려넣었는데,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위 그림에서 나폴레옹 등 바로 뒤에 서있는 머리숱 적은 남자가 카이사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 자신은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지만, 서구 사회 모든 황제의 권위의 근본이 된 사람이다. 당장 그의 이름인 ‘카이사르’가 로마 황제의 호칭 중 하나였고, 이후에도 ‘황제’를 뜻하는 명사의 어원이 되었다.
그 밖에도 이 그림에서 실제로 대관식에 참석한 프랑스 주재 오스만 제국 대사인 무함마드 에펜디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슬림인 자신이 황제를 우상숭배하는 것처럼 그려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다비드에게 요청하여, 그를 스케치하던 걸 지웠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눈치챘겠지만, 다비드의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실제 그대로 묘사했다기보다는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살리기 위해 대관식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상당부분을 각색한 창작품에 가깝다.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이 그림을 그릴때 여러번 찾아와서 보고 수정을 지시하곤 했었는데, 한시간 이상 그림을 묵묵히 보던 나폴레옹이 다비드에게 문득 “당신을 존경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그림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루브르에 걸려있는 것과 베르사이유에 걸려있는 것이 있는데, 두 그림의 차이는 하나, 그림에 있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중 한명의 드레스가 베르사이유 버전에선 핑크색으로 칠해져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비드가 그녀를 짝사랑했기에 그렇게 몰래 그렸다는 얘기가 있다.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황제에서 폐위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는 1815년 6월 18일 오늘날의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북부군은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의 주요 2개국 군대에게 패배를 당했다. 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 주축의 연합군과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2개국 군대였다. 이 전투로 인해 나폴레옹 전쟁은 완전히 종결된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가 되자 수많은 유럽 국가들은 그에 대항해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고, 그 후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웰링턴과 블뤼허의 군대는 프랑스 북동부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들으 각개격파하여 다른 연합군이 그들과 협조하여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을 차단하려고 했다. 6월 16일 나폴레옹은 리그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성공적으로 공격했고, 프랑스의 일부 군대는 콰트레바스 전투에서 영국 주축의 연합군을 공격 중이었다. 콰트라바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프로이센 군의 패배로 웰링턴은 17일에 워털루로 이동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웰링턴과 나란히 후퇴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그의 병력 제3파를 보냈다. 이 후퇴 동안 프로이센의 선봉과 프랑스군은 우아브르 전투를 벌였다.
프로이센군이 그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웰링턴은 몽생장의 브뤼셀 도로에서 전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곳에서 18일까지 프랑스군의 반복되는 공격을 막아냈고, 이 무렵 격렬한 전투 끝에 이곳에 도착한 프로이센군이 영국군을 지원했다. 저녁에 나폴레옹은 마지막 예비군인 제국친위대를 투입해 마지막 공격을 가했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다시 격퇴시켰다.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의 우익을 돌파하면서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주축의 연합군 역시 중앙에서 반격을 개시했고, 프랑스군은 궤멸했다.
워털루 전투는 워털루 전역과 나폴레옹 전쟁의 결정적 전투였다. 웰링턴에 따르면 “전투는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본 것 중 가장 아찔한 것”이었다. 4일 후 나폴레옹은 폐위되었고, 7월 7일 연합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워털루 전투 패배는 나폴레옹의 통치를 끝냈고, 그의 백일천하도 이 전투로 끝났으며, 프랑스 제1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 배경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다음해 4월에 폐위되어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빈 회의에서 전후처리 문제로 연합군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본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엘바섬을 탈출해 남프랑스의 주앙에 상륙한 뒤 병사를 모으면서 파리로 향했다. 도중에 나폴레옹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네 원수와 술트 원수를 만났지만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동조하여 군대 7천 명을 이끌고 3월 20일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동맹국에게 공존을 주장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복귀 소식은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그 이상으로 프랑스 제국의 해체로 인해 생기는 영토와 이득을 욕심낸 연합국은 일제히 단결하여 각 방향에서 프랑스를 향해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신규로 징병한 병력을 더해 각 방향에 대한 방어를 준비하면서 주력군 12만 8천 명과 대포 366문을 북쪽 방향에 집중시켰다. 웰링턴군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출발한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의 10만 7천 명에 달하는 연합군으로 대포 216문을 보유했다. 동시에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발한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군과 대등한 병력 12만 8천 명과 대포 312문을 보유하여, 병력을 비교한다면 총 합계에서는 프랑스군은 연합군에게 크게 뒤지지만 각각 나눠 비교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따라서 신속하게 기동하여 각개격파를 성공시킨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중핵은 역전의 대륙군이 차지하고 있었고, 불패를 자랑하는 근위대도 건재해 있었다. 질적인 우위는 나폴레옹에게 있었다.
웰링턴이 이끄는 병력 10만 7천 명 중 대부분은 영국해협의 항구들을 지키고, 겐트, 브뤼셀등 플랜더스 지방을 보호하기 위해서 파견되었기 때문에 6월 16일 카트르 브라-워털루로 집결할수 있었던 병력은 고작 3만 6천 명에 불과 하였다. 프로이센군도 프로이센군대로 많은 요새화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상당수의 병력을 할애하여야 하였으므로, 6월 16일 리니에서는 10만 명 미만 병력만 동원할 수 있었다.
먼저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 위해 네 원수에게 병력 2만 4천 명을 맡겨 웰링턴군과 카트르 브라에서 전투를 벌이게 하고는 자신은 8만 병력을 이끌고 리니에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였다.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한 나폴레옹은 병력 8천여 명을 잃고 프로이센군에게 사상자 2만 5천여 명을 안겨주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완벽하게 격파한 것은 아니었다. 퇴각한 프로이센군은 블뤼허 원수가 중상을 입어 참모장 (參謀長)이었던 그나이제나우 장군이 대신 지휘를 맡게 되었다. 카트르 브라에선, 네 원수 휘하의 레이유 장군의 군단이 미숙한 네덜란드-벨기에 병사들을 신속하게 격파하였으나, 공격 시간을 지연하였던 탓에 상당수의 베테랑 병사들을 보유한 웰링턴의 5사단과 6사단 소속의 여단들이 이들의 진격을 저지 하였다. 네원수는 카트르 브라에서 사상자 4300명, 웰링턴은 사상자 3463명을 내었다.
웰링턴은 블뤼허와 합류한 뒤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으나 블뤼허가 후퇴했기 때문에 자신의 군도 후퇴시켰다. 그는 몽을 지키기 위해 병력 2만 9천여 명을 파견하고, 남은 6만 8천 병력을 워털루 쪽으로 후퇴시켰다. 그 선봉과 전투를 벌였던 네 원수도 나폴레옹과 합류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완전히 퇴각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다음날 아침 에마뉘엘 드 그루시 원수에게 별동대 3만 4천 명을 주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웰링턴과의 합류를 목표로 서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호우 속에 후퇴한 웰링턴군은 몽-생-장에 구축한 방어 진지에 도착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우회할 것을 두려워해 1만 5천 명을 우익에 배치해 수비를 굳건히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웰링턴군 정면에 포진했다. 보병 사단을 전면에 배치하고, 기병 여단을 그 후방 양익에 배치했다. 거기에 좌우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중앙 후방에는 근위군을 결전용 예비 병력으로 배치했다. 웰링턴은 보병대를 전면에 전개하고 중앙 후방에 기병 사단을 집중 배치했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를 우선시 하겠다는 포진이었다.
전날밤의 비로 인해 땅이 진흙탕처럼 변해버려 대포의 이동이 늦어지는 것 때문에 나폴레옹은 공격 개시 시간을 아침 9시에서 오전 11시로 늦추었다. 이것이 나중에 프랑스군이 패배한 한 가지 결정적인 원인 되었다.

– 진행과정
여기저기 병력을 분산한 결과 프랑스군 7만 2천 명에 맞서 웰링턴군 6만 8천 명이 워털루에서 맞붙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연속으로 포격을 가해 웰링턴군 전선을 압박해 보병 사단의 진출로를 여는 한편, 아군 좌익에 위치한 우구몽 성 저택에 공격을 집중해 그곳을 교두보로서 노리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실제 그곳은 커다란 전략적 가치는 없었고, 나폴레옹은 이 공격을 통해 웰링턴의 중앙 병력을 유인해내기를 기도했지만, 웰링턴은 이에 넘어가지 않고 다만 우익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약간의 병력을 보냈을 뿐 예비 병력을 풀지 않았다.
웰링턴이 의지하고 있던 진지는 가로로 긴 산등성이로 횡대로 포진하기엔 아주 좋은 방어 진지였다. 웰링턴군은 방어에 매진하면서,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부대를 산등성이 너머로 후퇴시켜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하길 계속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보냈던 그루시 원수를 불러들이기 위해 전령을 보낼 것을 지시했으나, 참모장을 맡은 술트 원수는 겨우 1명의 전령만을 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에 나폴레옹은 “베르티에였다면 스무명은 보냈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전에 주로 군단 사령관을 맡았던 술트 원수가 참모장 노릇을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와 동시에 몽-생-장의 산등성이에 맹포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산등성이 너머로 후퇴한 웰링턴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을 때, 정오를 지나면서 프로이센군의 전위가 전장에서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각개격파 전략을 달성하려면 양군이 합류하면 안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그곳에 도몽 장군 휘하 4개 사단을 급파했다. 병력의 여유는 이제 없었다.
오후 1시를 넘기며,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에르몽이 지휘하는 중앙 4개 사단이 전진했다. 대대 단위로 3열 횡대. 정면병력 200명, 27열의 밀집횡대에 대해 웰링턴은 우익의 라-에-상트에 있던 농가를 방어 거점으로 삼아 방어했으나, 이 공격으로 격전 끝에 함락당했다.
나폴레옹은 흉갑기병대를 풀어 공격 성과의 확대를 기도했다. 웰링턴은 이에 맞서 중기병 2개 여단을 출격시켜 발도 돌격으로 프랑스 흉갑기병을 격파하고는 프랑스 포병 진지를 습격하기 위해 전진했으나 좌측으로 들이닥친 나폴레옹 휘하 폴란드 창기병에게 격퇴되었다. 그 사이 에르몽의 보병 4개 사단은 웰링턴군 제1방위선 하노버, 벨기에 사단을 분쇄했다. 전선에 생긴 균열에 비집고 들어가 제2방어선까지 전진하다 픽튼의 제5사단과 맞붙었다. 픽튼 장군의 전사란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에르몽은 격퇴당했다.
보병의 정면 돌격에도 열리지 않아,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하기 전에 결판을 지어야 하는 나폴레옹은 포격을 재개했고, 웰링턴은 병력의 소모를 막기 위해 전선을 산등성이 너머로 후퇴시켰다. 이것을 본 네는 적의 퇴각으로 오판, 일거에 승리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직속 기병에 근위기병을 합쳐 일제돌격을 가했다. 보병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돌격하는 기병의 대집단에 나폴레옹은 제지하였으나 멈추지 못했고, 곧 웰링턴도 놀라 26개 대대의 보병을 13개 방진으로 만들어 제1선에 7개, 후방에 6개를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기병 5천 기 돌격에 방진도 무너질 수 있었으나,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방진의 총검을 두려워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방진으로 기병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방어가 되었기에 이 돌격은 실패로 끝났다.
오후 3시경, 네는 다시 한 번 기병 돌격을 준비했다. 켈러만 예비 기병 사단, 거기에 근위 기병 사단도 소집했고, 이번엔 보병을 합쳐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격은 성공해 웰링턴군의 전선을 흔들릴 정도로 깨뜨렸다. 다만 이 진로에 참호가 있었기 때문에 추락한 병사가 많아 전과의 확대가 크지 못했다. 네의 공격에 호응하여 우익 에르몽 사단이 웰링턴군 좌익에 돌입했다. 이것을 호기로 본 네는 나폴레옹에게 증원을 요청했다. 그 시점에서 예비대로 쓰여야 할 도몽의 군단이 프로이센 군을 막으러 떠났기에 나폴레옹의 손에는 불패를 자랑하는 근위대뿐이었고, 그는 네의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오후 6시 프로이센군이 도착해 무너진 좌익을 보강하자 웰링턴은 보병을 4열 횡대로 산개시켰다. 나폴레옹이 근위사단을 투입할 시기, 영국 보병 사단은 산등성이의 뒷면에 모습을 숨겼고, 나폴레옹의 근위대는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전진했다. 산병과 격전 끝에 능선을 확보한 순간, 영국 근위 사단이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불패의 근위병은 이 공격에 무너졌고, 반격도 격퇴되었다. 웰링턴은 거꾸로 영국 기병대를 내보냈다. 거기에 프로이센군이 우익에서 돌격하자 프랑스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그 속에서 그 때까지 투입되지 않았던 고참 근위대의 일부가 정연히 방진을 조직하여 나폴레옹의 퇴각을 엄호했다. 그 희생으로 나폴레옹은 전장을 무사히 이탈했고, 프랑스군은 패주했다. 이 때 나폴레옹은 자신의 부하들이 죽든 말든 포병사격으로 영국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퇴각했다.

– 결과
나폴레옹의 전략은 분리된 적이 합치기 전에 기동하여 각개격파를 노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 섬멸이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추격군으로 3만을 보낸 것이 패전의 한 가지 이유였다.
그 지휘를 맡긴 그루시는 결단력이 부족해 워털루 전투가 시작된 것을 알면서도 프로이센군 추격을 계속했으나,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웰링턴은 방어에 치중하여 승리를 얻었다.
기병대는 기동력과 타격력을 지닌 반면 방어력이 부족해서 총검의 벽을 만든 보병 방진에는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완전히 실각하여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으며 미셸 네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죄로 죄로 인하여 체포당했다가 그해 말 총살당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크림 전쟁 이외에는 국가간의 무제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