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3월 9일, 프로이센의 국왕 겸 독일의 제2제국 초대 황제 빌헬름 1세 (Wilhelm I, 1797년 ~ 1888) 타계
빌헬름 1세 (Wilhelm I,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는 프로이센의 국왕 (임기: 1861년 ~ 1888년)이다. 북독일 연방의 의장 (임기: 1866년 ~ 1871년)이자, 독일 제국의 황제 (임기: 1871년 1월 18일 ~ 1888년)이었다.
빌헬름 1세는 군국주의로서 프로이센을 일등 국가로 만들려고 생각하였다. 1861년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대신 왕이 되자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몰트케를 참모총장으로 등용하여 독일의 통일을 꾀하였다. 그는 1864년 프로이센-덴마크 전쟁과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차례로 승리한 뒤,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황제가 되었다. 비스마르크를 신임하였으며 내외 정치에 수완을 보여, 독일을 유럽 제일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 자이네 카이저리헤 운트 쾨니클리헤 마예슈테트 빌헬름 1세 (Wilhelm I)
.휘: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폰 프로이센
.출생: 1797년 3월 22일,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888년 3월 9일 (90세), 독일 제국 독일 제국 베를린
.매장지: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성
.가문: 호엔촐레른 가
.부모: 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모) 루이제 추 메클렌부르크 공녀
.배우자: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녀
.자녀: 프리드리히 3세, 루이제 폰 프로이센 왕녀
*독일 황제
.재위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대관식 1871년 1월 18일
.전임: (신설) / 후임: 프리드리히 3세
*북독일 연방 의장
.재위: 1867년 7월 1일 ~ 1888년 3월 9일
*프로이센 국왕
.재위: 1861년 1월 2일 ~ 1888년 3월 9일
.전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후임: 프리드리히 3세
.섭정: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62~1866)
*군사 경력
.복무: 프로이센 육군
.복무기간: 1814년-1888년
.최종계급: 원수 (1854년)
.지휘: 슈테틴 근위향토방위대대, 제1근위사단, 제3육군단
.근무: 제1근위연대
.참전: 나폴레옹 전쟁,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제7차 대프랑스 동맹, 1848년 독일 혁명

○ 생애 및 활동
– 즉위 이전의 경력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폰 프로이센은 1797년 3월 22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었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왕위에 오를 것이라 예상할 수 없었고 일반적인 교육만을 받았다.
1814년 빌헬름은 군대에 입대하였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나폴레옹 1세의 군대와 싸웠다. 그는 워털루 전투와 리니 전투등에서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의 휘하에 있었으며 매우 용감한 병사였다고 한다. 1815년 이후에는 외교 업무를 겸임하였다.
1848년 독일 혁명 기간 동안 빌헬름은 그의 형이기도 하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노리는 반군을 성공적으로 제압하였다. 당시 빌헬름은 군중을 향하여 대포를 발포하였고 이로 인하여 ‘포도탄 왕자’ (독: Kartätschenprinz)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1854년 빌헬름은 육군 원수가 되었고 마인츠 요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85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뇌졸중으로 고생한 끝에 더 이상 군주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858년 1월 빌헬름은 형을 대신하여 프로이센의 대리청정을 맡았다.
– 즉위
1861년 1월 2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사망하자 대리청정으로 있던 빌헬름은 형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의 왕이 되었다. 빌헬름 1세는 즉위와 함께 자유주의 성향의 의회와도 맞닥드릴 수 밖에 없었다. 빌헬름 1세는 정치적 당파에 대해 중립을 유지한 채 비교적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대신,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하여 정치적 대립을 해결하게 하였고 이에 아울러 1862년 12월 1일에서 1866년 12월 31일까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에게 대리청정을 위임하였다. 당시의 프로이센 헌법에 의하면 수상은 국왕에 대해서만 책임을 다할 뿐 의회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듯 빌헬름 1세를 받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스마르크는 국무, 의회, 외교에서 매우 독단적으로 처신하였다. 결국 빌헬름 1세는 반대 여론에 밀려 이후 1873년 1월 1일을 기하여 비스마르크를 총리에서 해임했다.
– 암살 시도와 반사회주의자 법
1878년 5월 11일 배관공이었던 막스 호델은 베를린에서 행진 행렬중인 빌헬름 1세에게 총격을 가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6월 2일에는 카를 노빌링 박사가 두 발의 총격을 가해 빌헬름 1세가 실탄에 맞아 궁전으로 실려갔다. 가해자는 자살을 시도하여 결국 사망했고, 빌헬름 1세는 경상으로 그쳤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그들이 속했던 사회민주당의 확장에 위협을 느껴 반사회주의자 법을 제정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막아, 출판물등을 압수하였고,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급성장으로 인해, 비스마르크가 사임하자 다시 사회민주당은 급성장하였다.
○ 자녀
빌헬름 1세는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녀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이름, 생일~사망, 기타)
.프리드리히 3세, 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 , 제위 계승, 슬하 4남 4녀
.프로이센의 루이제, 1838년 10월 15일 ~ 1923년 1월 2일 (65세), 바덴의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 슬하 2남 1녀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