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9일, 대한민국의 목사 ‘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 김준곤 (金俊坤, 1925 ~ 2009) 별세
김준곤 (金俊坤, 1925년 3월 28일 ~ 2009년 9월 29일)은 대한민국의 목사로 ‘한국대학생선교회’ (CCC)를 설립하고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한 인물이다.
– 김준곤 (金俊坤)
.출생: 1925년 3월 28일
.사망: 2009년 9월 29일
.학력: 풀러 신학교
.저서: 예수 칼럼, 김준곤 예수칼럼(2판),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 성서조감 등
.설립 조직: 한국대학생선교회
본관은 김해 (金海)이고, 출생지는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이다.
본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이었으나 훗날 예장합동을 탈퇴하고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창설에 가담하였다.
신학자의 딸로서 구약신학자이며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의 총장인 김윤희 박사가 있다.
○ 생애 및 활동
유성 김준곤 목사는 1925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먼 친척뻘 되는 낙도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에게 첫 복음을 들었다.
만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봉천신학교에 입학을 했으나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끌려가다가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극적인 탈출을 시도해 만주에 있는 김인석 목사 (성결교 총회장 역임) 집에 피신해 있으면서 김 목사가 소장한 2,000여 권의 신학, 철학, 문학서 등을 읽고 영성과 지성의 깊이를 경험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자유주의신학사건으로 51인 학생들과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1950년 10월 공산좌익에 의해 부친히 학살을 당하고, 아내(인정진 사모)가 순교를 했다.
김준곤 목사도 거반 죽음의 상태에서 국군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출됐다. 김 목사는 부친과 아내를 죽인 공산좌익들을 예수 사랑으로 용서하는 탄원서를 올렸다.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 교장을 거쳐 미국 풀러신학교 유학 중 국제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나 한국CCC 사역을 제안받고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창설했다.
그때부터 소천 때까지 매일 아침을 금식하면서 민족복음화와 통일 한국을 위해 기독했다.
김준곤 목사는 1962년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1965년 2월 국회조찬기도회 창설, 1996년 3월 8일 대통령조찬기도회를 만들어 정, 관, 재계, 주한 외교사절 복음화에 나섰고, 민족복음화운동의 제3의 집단으로서의 나사렛형제들 창설 (1968년 8월), 전군신자화 운동 (1969년), 민족복음화운동 선언 (1970년 12월 31일 밤 0시), 민족복음화요원 1만명 강습회 (1971년 8월 대전충무 체육관), 엑스플로 ’74대회 (1974년 8월13일~18일, 32만 3419명 전도훈련), 59,000 자연부락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랑방 운동 등 만족복음화 운동을 주도했다.
1980년 8월에는 세계복음화대성회를 개최하여 10만 선교사 파송을 선언했다.
또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1979년 10월 부터 1981년 9월까지 2년간 『예수칼럼』을 매일 연재하면서 파스칼의 『팡세』에 필적할 만한 글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문서선교의 획기적인 장을 열었다.
이후 ’84 세계기도대성회, 엑스플로 ’85를 개최했으며, 1990년 7월과 8월 필리핀에 3,000명의 대학생을 단기선교사로 파송하여 한국교회 단기선교사 시대를 열었다.
김준곤 목사는 또한 1995년 5월 세계선교대회 (GCOWE Ⅱ)를 개최하여 10/40 윈도우 지역의 미전도종족 선교 전략을 제시했다. 김 목사는 그 기간 중 10만 대학생통일봉사단 발대식을 갖고 통일한국의 비전을 제시했다. 이후 기독교민족화합운동본부 상임대표, 2002 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 대표회장, 사랑의 다리운동,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 북한 43,000마을과 영친운동,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 북한사랑의옷보내기운동,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 등을 전개하며 우리 사회의 어려운 이웃돕기와 북한 동포돕기를 전개했다. 김준곤 목사는 그가 제창한 ‘한 손에는 복음을, 한 손에는 사랑을’이라는 쌍손선교를 몸소 실천했다.
김준곤 목사는 마지막까지 한국대학생선교회 이사장 및 총재, 성시화운동총재,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 공동대표로 섬기다가 2009년 2월 29일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그의 한맺인 기도와 꿈을 우리에게 남기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김준곤 목사는 조선대 문학과, 장로회신학교, 미국풀러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국립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세종대학교에서 명예교육학박사, 명지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에는 민족화합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 『리바이벌』,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 『예수칼럼』 등 다수가 있다.
– 학력
김 목사는 1925년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나 무안농업실수학교 (현 무안중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에서 일본군 징집을 피해 장기간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민족구원과 기독교사상에 심취했다.
1948년 서울 남산의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했다.
– 경력
그는 1948년 장로회신학교 (현 총회신학교 사당동측)를 졸업하였다.
동기생으로는 정규오 목사와 신복윤 목사, 조동진 목사 등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회자들이 있었다.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 교장을 지냈다.
– CCC와 김준곤
김 목사는 풀러신학교 유학시절 CCC 설립자 빌 브라이트 박사를 만나 한국에서도 대학생선교회를 시작하라고 지도 받고 귀국, 한국 CCC를 창설하고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을 직접 다니며 전도에 나섰다.
김준곤 목사는 대학 동아리형식으로 모여 선교와 봉사활동을 하는 한국대학생선교회를 1958년 11월 서울에서 창설해 오늘 날 330개 대학에 1만6천500명의 회원을 가진 단체로 길러냈다.
– 김준곤의 활동
김준곤 목사는 또 ‘민족’과 ‘봉사’의 개념을 선교에 도입해 민족복음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미국 유학시절 접한 조찬기도회를 모방하여 1965년 대한민국 국회조찬기도회, 1966년 국가조찬기도회를 창설했다.
김준곤 목사는 1968년에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나사렛형제들’을 창단했고, 지역단위 전도를 위한 사랑방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아울러 1998년부터 2006년까지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북한주민 돕기에도 나섰고, 2002년에는 이웃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직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김준곤 목사는 1974년 8월 30만여명이 5박6일간 여의도 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철야기도를 한 ‘엑스폴로 74’ 대회를 통해 CCC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다.
저서로는 『예수칼럼』 ‧ 『김준곤 문설집』 ‧ 『김준곤 명상』 ‧ 『김준곤 예화』 ‧ 『김준곤 설교 Ⅰ‧Ⅱ』 ‧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 ‧ 『리바이벌』 등이 있다.
– 김준곤의 영향
김준곤 목사가 2003년 2월 CCC 국가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CCC를 거쳐간 대학생은 약 30만명에 이른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는 CCC총무 출신,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도 CCC간사 출신이고, 정운찬 총리, 이광자 서울여대 총장, 주수일 칠성섬유 회장, 박세환 예비역 육군대장 등이 대표적인 CCC 출신인사들이다.
참고 = 위키벡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