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로메로 : Romero
감독) 존 뒤건 / 주연) 라울 줄리아, 리처드 조단, 아나 알리시아 / 1989년
현대사에서 예수의 삶처럼 살다간 로메로 주교에 대한 영화를 본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로메로 주교가 예수의 삶을 닮았다고 보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고 죽이는 그 모든 것에 반역하는 혁명가로 예수를 해석하는 견해가 설득력있기 때문이다.
수줍고 연약해 보이며 학구적인 로메로 신부가 인권과 정의를 위해 헌신하게 된 건 엘살바도르의 처참한 정치현실에서 비롯했다.
1977년 엘살바도르의 대통령 선거 즈음, 예상 밖으로 주교로 임명된 로메로 (라울 줄리아)는 동료들로부터 무능력한 주교가 될 것이라는 눈총을 받는다. 그의 주교 취임날 다른 한편에서 독재자 엠베르토 대통령 당선에 저항하던 군중이 무차별 총격을 받고 사살당한다.
군인들과 대치하던 주민들을 보호하려다 고문과 수모를 당하면서 로메로 주교는 적극적인 저항의 길을 걷게 되고, 끝내는 저격당해 숨진다.
영화를 굳이 정치적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극 전개 자체는 긴박감 넘친다.
영화에는 빠졌지만, 90년대 들어 구성된 진실위원회 보고서는 로메로 주교의 암살 배후로 집권 우익정당인 공화애국동맹을 창당한 육군장교 출신 로베르토 도뷔슨을 지목했다. 위원회는 그가 사실상 암살특공대였던 보안부대에 로메로 주교를 암살하도록 명령했다고 밝혔다. 감독 존 뒤건. 1989년작.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존 듀이건
제작: 엘우드 키저, 마이클 레이 로즈
각본: 존 새크레트 영
촬영: 제프 버튼
편집: 프란스 반덴부르그
캐스팅: 밥 모로네스
제작사: 폴리스트 픽쳐스
음악: 가브리엘 야레
미술: 로저 포드
수입: 하명중영화제작소
개봉일: 1989년 8월 25일 (미국)

– 출연진
라울 줄리아 ‘로메로 주교 役’
리처드 조단 ‘그란데 신부’
아나 알리시아 ‘젤라다’
에디 벨레즈 ‘콜루마’
알레한드로 브라코 ‘오수나 신부’
Raúl Juliá as Archbishop Óscar Romero, archbishop of San Salvador
Richard Jordan as Father Rutilio Grande, SJ
Alejandro Bracho as Father Alfonzo Osuña, SJ
Tony Plana as Father Manuel Morantes, SJ
Evangelina Elizondo as Josephina Gatedo
Lucy Reina as Lucia, Poor Campesino. (Fictional Character)
Ana Alicia as Arista Zelada, An Upper-Class Friend of Romero’s. (Fictional Character)
Omar Chagall as Rafael Zelada, The Minister of Agriculture and Arista’s Husband (Fictional character)
Harold Gould as Francisco Galedo, Arista’s Rich Father (Fictional Character.)
Eddie Velez as Lieutenant Ricardo Columa, Right-Wing Military and Political Leader (Fictional Character)
Robert Viharo as Colonel Ernesto Dorio (Fictional Character)
Harold Cannon as General Carlos Humberto Romero, Military Dictator of El Salvador from 1977 to 1979 (No Relation to Archbishop Romero)
Al Ruscio as Bishop Estrada, The Military Vicar of El Salvador and Opponent of Romero
Claudio Brook as Bishop Flores, Vacillating Bishop
Martin LaSalle as Bishop Arturo Rivera y Damas, Bishop of Santiago de María (He Became Archbishop of San Salvador After Romero’s Death)
Eduardo López Rojas as Bishop Cordova, An Ally of Romero
Tony Perez as Father Rafael Villez, Secretary of The Bishops’ Conference

○ 내용
1977년 엘 살바도르 (El Salvador)의 대통령 선거 전야. 정치에 관심 없는 학구파 오스카 로메로 신부 (Archbishop Oscar Romero: 라울 줄리아)는 엠베르토 장군 (General Humberto: 해롤드 캐논)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선거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며, 반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예상밖으로 주교로 임명된 로메로는 성당내의 동료들로부터 무능력한 주교가 될 것이라는 일부 신부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가운데 독재자인 엠베르토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주교로 취임되던 날 자유를 외치던 군중들이 무차별 총격에 의해 사살당한다.
어느날 시골길을 달리던 그란테 신부 (Father Rutilio Grande: 리차드 조단)가 저격을 당하고, 그란테 신부의 성당에 간 로메로 주교는 성당을 검거하고 있던 군인들에 의해 수모와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미사를 거행하게 된다.
주민을 살상한 군인들에 대치하여 오수나 신부 (Father Alfonzo Osuna: 아레얀드로 브라초)와 주민들이 성당내에서 대치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무기를 버리고 나오면 용서해 줄 것을 약속받은 로메로 신부는 그들을 설득하여 성당을 나오게 하지만 오수나 신부와 함께 로메로 주교 마져도 군인들에 의해 잡혀가 고문과 수모를 당한다.
자유를 염원하는 민중의 염원에 반하여 점점 탄압을 강화해오는 군사 정권은 마침내 로메로 주교를 암살할 것을 지령한다.

주교 회의에서 로메로 주교가 로마로 돌아가던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주교가 대신할 것을 토론하지만 로메로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신하는 고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로메로 주교가 성찬식을 거행하는 성당에 사복으로 위장한 군인이 들어와 저격을 한다
로메로 대주교 (Archbishop Romero)는 1980년 3월 24일 피살되었다. 그는 소위 불온한 진리 (Disturbing Turth)를 설파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80년에서 89년 사이 6만명 이상의 엘살바도르인 (Salvadorans)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평화와 자유와 정의와 인권을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저는 자주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를 죽일 때 저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흘린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이 곧 실현되리라고 신호가 될 것입니다. 사제는 죽을 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인 민중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 언론소개
– 로메로 대주교 생애 다룬「로메로」
.진정한 자유ㆍ평화회복 호소
.사제의 절규 통해 교회사명 부각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일치 유도
.제44차 세계성체대회 기념으로 제작
남미 엘살바도르에 있는 「산살바도르」대주교였던 오스카 로메로 신부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개봉됐다.
영화 「로메로」는 오스카 로메로 신부가 대주교로 임명된 1977년 2월부터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싸우다가 군사정권의 총탄 앞에 쓰러져간 80년 3월까지 만3년여 기간 동안의 로메로 대주교의 생애와 사회상을 다루고 있다.
영화 「로메로」는 77년 사회적으로는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시기의 엘살바도르의 현실과 교회적으로는 새로운 대주교의 임명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로메로」는 정치적 관심이 없이 학구적이고 온유했던 한 주교가 억압받는 민중의 고통과 염원에 눈뜨고 자신을 낮추어 민중과 함께 하며 지배세력에 대항하기까지의 변화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또 이 영화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고 착취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고발하고 인간애와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회복을 호소하고 있다.
더욱이 영화 「로메로」는 『우리 눈앞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 『교회의 사명은 가난한 자와 일치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성직자들의 절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과 생활이 일치를 이루는 삶을 생각하고 암울한 현실 속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반추하게 한다.
「로메로」는 서울에서 열리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기념해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로써 금년 1월 완성됐으나 10월에 전세계에서 동시개봉 될 계획으로 제작지인 미국에서도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특별히 성체대회 개최국인 관계로 사전개봉이 가능했다.
영화「로메로」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영화제작 추진 및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세계 천주교사제단과 세계교회 연합에서 영화제작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제작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약 2년에 걸쳐 제작ㆍ완성된 영화 「로메로」는 특히 엘우드 키에저 신부에 의해 기획ㆍ제작돼 영화중 많은 부분에 삽입된 미사전례나 가톨릭적 분위기가 세밀하고 완벽하게 재현된 것도 특징이다.
「로메로」는 하명중 영화제작소가 수입 배급했으며 서울 브로드웨이 극장 (511~2301)에서 8월 12일부터 상영되고 있다
한편 브로드웨이 극장은 개봉 전 8월11일에 유료전야제를 기획、수익금을 수재민을 돕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_ 김인옥 기자 (가톨릭신문, 1989.08.20.)

– 영화로 보는 라틴 아메리카]정치혼란 속에서 민중과 함께하는 종교의 역할 ‘로메로’
‘오스카르 로메로’라는 실존인물을 다룬 존 두이건 감독의 ‘로메로’ (1989)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중앙아메리카 엘살바도르의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심각한 갈등상황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로메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중의 대변자로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나 아르헨티나의 체 게바라처럼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로메로’는 가톨릭교회와 해방신학, 정치권력과 가톨릭교회의 관계, 권력과 결탁한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정책, 그로 인한 끝없는 빈부격차의 현실을 드러낸다.
영화 첫 장면은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집회다. 이는 엘살바도르의 현대정치사가 갈등과 유혈사태의 연속이었으며, 시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투표장 부근의 시민들의 대화는 정부가 소작농과 빈농을 갈수록 학대하고 있으며, 엘살바도르 사회가 심한 갈등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로메로가 대주교로 임명되었던 1977년에 엘살바도르는 내전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보수적이며 권력층과의 관계도 원만한 사람이다. 직접적인 현실참여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기보다는 책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인물이다.
로메로는 대주교 착좌식에서 엘살바도르의 교회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새롭게 확산되던 해방신학을 경계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해방신학을 옹호하는 성직자들을 사회적 갈등과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는 세력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친정부세력에게 암살되면서, 로메로 신부의 생각은 서서히 바뀐다. 정부가 이 사건을 미온적으로 처리하자, 고위 성직자들은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거부하고, 이는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이후 로메로는 극심한 빈부격차, 가난, 탄압적인 군사정권, 인권유린 등 엘살바도르 사회가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로메로는 민중들을 위해 과연 가톨릭교회와 성직자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엘살바도르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이후 군사정부는 반정부 시위자들에게 무차별적인 무력대응을 감행한다. 이는 결국 게릴라들이 더욱 강한 저항을 하는 계기가 되고 상황은 내전으로 치닫는다. 이제 그는 대다수의 가난한 엘살바도르 국민들의 편에 서서 이들을 대변하고, 군사정부의 탄압과 인권유린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그러자 군사정부는 1980년에 로메로 대주교를 살해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톨릭교회는 정복의 선봉으로 들어와 식민시대에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 이후 형식적으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만, 가톨릭의 영향력은 지금도 여전히 크다.
특히 정부의 주요 행사에 고위성직자들이 참석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정부에 대한 지지와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간접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이러한 정치권력과의 결탁은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심화시켰다.
‘해방신학’의 등장은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자성과 정치억압과 극심한 빈부격차로 고통받아 온 민중들의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한다. 또, 불평등과 부조리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사회참여를 중시했다.
영화 속의 이러한 사례 중 하나로, 가톨릭신부들이 빈민마을의 기초공동체를 이끌거나 돕고 있는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가톨릭에 기반을 둔 이러한 풀뿌리 조직은 특히 소외된 농촌지역에서 활성화 되었다.
이러한 도시 빈민지역과 농촌의 기초공동체는 지역 리더들에 대한 교육과 정치활동의 토대를 제공했고, 라틴아메리카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냉전 당시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정치를 어떻게 좌우하고 있었는지도 ‘로메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냉전 상황에서 미국의 관심은 인권이나 사회변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뒷마당이라고 여기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제2의 쿠바가 탄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한마디는 이러한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저는 오늘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더 이상 무기를 보내지 말라고, 이는 우리 국민들을 죽이는데 사용될 뿐이라고.”
‘로메로’에서 엘살바도르 사회는 극단적인 빈부격차, 혹독한 군부정권의 탄압, 심각한 정치 불안 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한 모습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엘살바도르와 중미국가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다.
이후 엘살바도르는 민주화되고 경제성장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과거와는 비교적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오랜 내전을 경험한 엘살바도르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나 과테말라 등은 그 후유증이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다. _ 이순주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경상일보, 2010.09.10.)

○ 오스카 로메로 (Oscar Romero, 1917 ~ 1980)
1970-80년대 남미 군부 독재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성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y Galdamez)는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 (El Salvador) 동부 산미겔 (San Miguel)의 시우다드 바리오스 (Ciudad Barrios)에서 산토스 로메로(Santos Romero)와 과달루페 데 헤수스 갈다메스 (Guadalupe de Jesus Galdamez)의 6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3년간 공립학교를 다니고, 지역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은 후 목공 일을 배우던 그는 목수가 되길 원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1930년, 열세 살의 나이로 사제가 되고자 산미겔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산살바도르에 있는 국립 신학교에 입학해 수학한 후 1937년 이탈리아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42년 4월 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여행 제한 때문에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로마에 머물며 수덕 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엘살바도르에 사제가 필요하다는 교구장의 부름을 받고 1943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나모로스 (Anamoros)에서 본당 사제로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한 후 산미겔로 이동해 교구장 비서, 교구 신문 편집장, 주교좌본당 주임, 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20년 이상을 보냈다. 주요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호하는 일에 전념하며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 되었다. 1966년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0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74년 가난한 시골 지역인 산티아고 데 마리아 (Santiago de Maria)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도 그는 조용하고 학구적인 성품의 보수적인 주교였다.
1977년 2월 23일, 로메로 주교가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정부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환영받았지만,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많은 사제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열네 가문의 지주들이 전체 경작지의 60%를 소유했고, 이 지주들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국가방위군과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 이들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은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실종되기 일쑤였다. 그중에는 가난한 소작농들뿐만 아니라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외치던 사제와 수녀들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기 전까지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가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임명되고 3주도 지나지 않은 3월 12일, 가난한 소작농들을 변호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오랜 우정을 나누던 예수회의 루틸리오 그란데 (Rutilio Grande) 신부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란데 신부가 아길라레스 (Aguilares) 성당에 미사를 봉헌하러 가던 중 암살단에 의해 피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로메로 대주교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정부의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지만 그의 요구는 무시되었고, 검열을 받는 언론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란데 신부의 장례미사가 열리던 날, 그의 교구에서는 단 한 대의 미사만 봉헌되었다.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사제들과 신자들이 주교좌성당에 모였다. 그는 강론 중에 “살인한 형제들이여, 당신들에게 말하고자 하노니,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당신들의 마음을 대신해 참회를 빈다. 왜냐하면 교회는 증오할 수 없으며 어떠한 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사제 가운데 한 명이라도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부의 면담 제의도 거부하고, 전국에 방송되는 라디오를 통해 주일마다 고문당한 이들과 살해당한 이들, 투옥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강론을 했다. 그는 더욱 용감하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폭력에 맞섰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만행과 박해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를 지켜볼 수 없었던 로메로 대주교는 주저 없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편에 섰고, 빈곤의 문제와 사회 정의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교구장 재임 기간 내내 살해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미사 강론과 교회 언론을 통해 정부의 부당함을 고발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기둥으로 우뚝 섰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피살되기 얼마 전 한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엘살바도르 민중 가운데 부활할 것이다. 살해 위협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그 순간 엘살바도르의 구원과 부활을 위해 내 피를 하느님께 기꺼이 바칠 것이다. 내 피를 희망의 표지와 자유의 씨앗으로 삼으소서!”
피살되기 하루 전에도 그는 강론을 통해 엘살바도르의 군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인권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저지르는 정부의 뜻에 따르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는 1980년 3월 24일 저녁, 산살바도르의 ‘하느님 섭리의 병원’ 성당에서 암 환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며 강론을 마치고 제단 중앙에 섰을 때, 성당 앞까지 자동차를 타고 온 무장괴한으로부터 가슴에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를 암살한 무장괴한들의 정체는 후에 밝혀졌는데, 미국 특수전 사령부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예비역 장교들이 군사정권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만행이었다.
3월 30일 산살바도르 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미사에는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고, 그의 시신은 주교좌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절차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지만, 그가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인지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시복 재판이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그 후 2007년 5월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 전임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는 그리스도의 미덕을 실천한 위대한 신앙의 증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새 전기가 마련되었고,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이 2015년 2월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인정하고 그를 순교자로 선포하면서 시복 일정이 확정되었다.
2015년 5월 23일, 산살바도르 시내 광장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Angelo Amato) 추기경 주례로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미사가 거행되었다.
시복식을 주례한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은 “로메로 대주교의 정신은 현재에도 살아 숨 쉬며 지구상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있다”고 언급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의 선택은 이념적이지 않고 복음적이었다”며 “로메로 대주교는 분열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이며, 아메리카 교회를 빛낸 별”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복 미사에는 주변 남아메리카 대통령들과 추기경들을 비롯해 30여만 명이 모였다.
제단은 로메로 대주교가 피살 당시 입었던 혈흔이 묻은 주교복과 꽃과 초로 꾸며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8년 3월 7일 교황청 시성성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인한 여성의 치유 기적을 승인한 시성 교령을 발표했다. 이는 시성에 필요한 마지막 단계인 기적심사가 통과되었음을 의미한다.
엘살바도르의 한 신문에 따르면, 임신중독증에 용혈, 간 기능 장애, 혈소판감소 등의 합병증이 더해진 헬프증후군 (HELLP Syndrome)을 앓던 산모가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살아났다고 한다.
체칠리아로 알려진 이 산모는 2015년 8월 헬프증후군을 앓아 간 기능 손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의사는 그녀의 남편에게 “아내가 죽게 되었으니 주님을 믿는다면 기도하라”고 당부했다.
기도하러 집에 돌아온 남편은 할머니가 전해 준 성경을 펼쳤는데, 성경 속에는 할머니가 보고 기도하던 로메로 대주교의 상본이 있었다. 남편은 로메로 대주교에게 아내를 살려달라며 전구 (轉求)를 청했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내는 다음 달 깨어나 완전히 회복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10월 14일, 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기간 중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의 시성 미사를 집전했다. 전 세계에서 7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례한 시성식에서 로메로 대주교뿐 아니라 바오로 6세 (Paulus VI, 9월 26일) 교황을 포함해 모두 7명의 성인이 새로 탄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론에서 로메로 대주교와 바오로 6세 교황에 대해 성덕을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증거자였다고 극찬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며 “오늘 시성된 성인들은 이 길을 따랐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이날 시성식 미사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혈흔이 남아 있는 띠를 매고, 바오로 6세 교황이 사용하던 팔리움과 목장, 성작을 사용했다.
두 성인은 서로 개인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는데, 바오로 6세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를 주교로 뽑았고, 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