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마라톤 전투 : The Battle of Marathon / The Giant of Marathon
감독) 자크 더네르, 마리오 바바 / 주연) 스티브 리브스, 미레느 드몽조 / 1959년
마라톤 전투는 기원전 490년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의 칼리마코스와 밀티아데스가 지휘하는 아테네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찌른 전투로 이 전투에서 올림픽 경기의 마라톤 경주가 유래되었다.
스티브 리브스가 주연을 맡은 대작사극으로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거장 미리오 바바의 초기 연출작이다.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Jacques Tourneur, Mario Bava
각본: Ennio De Concini, Augusto Frassinetti, Bruno Vailati
원작: Alberto Barsanti and Raffaello Pacini의 An idea
제작: Bruno Vailati
주연: Steve Reeves, Mylène Demongeot, Sergio Fantoni
촬영: Mario Bava
편집: Mario Serandrei
음악: Roberto Nicolosi
제작사: Titanus, Galatea Film, Lux Compagnie Cinematographique de France, Societe Cinematographique Lyre
개봉: 1959년 12월 3일 (Italy), 1960년 5월 11일 (USA)
시간: 84분

– 출연진
Steve Reeves as Phillipides
Mylène Demongeot as Andromeda, Creuso’s daughter
Sergio Fantoni as Theocritus
Daniela Rocca as Charis
Philippe Hersent as Callimachus
Alberto Lupo as Miltiades
Daniele Vargas as Darius I, King of Persia
Miranda Campa as Andromeda’s handmaid
Gianni Loti as Teucro
Anita Todesco as Andromeda’s friend
Ivo Garrani as Creuso
Sergio Ciani as Euros
Franco Fantasia
Carlo Lombardi
Ignazio Balsamo
Gian Paolo Rosmino

○ 줄거리
이야기는 페르시아 군대가 고대 세계를 휩쓸고 있는 메딕 전쟁 (Medic Wars) 시기인 기원전 490년을 배경으로 한다. 올림픽 우승자의 월계관을 아테네로 가져온 필리피데스는 독재자 히피아스가 추방된 지 1년 후 도시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는 근위대의 사령관이 된다.
히피아스의 아테네 지지자들은 테오크리테스의 하인 카리스와 결혼하여 필리피데스를 제지하고 경비병을 무력화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거대한 군대가 그리스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모든 것이 보류된다. 오크리테스는 Miltiades에게 팔라스 신전을 방어하도록 지시하고 대신 다리우스와 조건을 협상할 것을 제안하지만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으면 그리스 국가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러 가운데 필리피데스는 공모자들의 목숨을 건 다툼에서 살아남으며, 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를 점령하기 위해 피레우스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Miltiades는 필리피데스를 앞서 보내어 그의 희망하는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맞서 싸우고, 그 위험한 전쟁중에 페르시아를 성공적으로 물리친다.

○ 영화 이모저모
– 촬영중 해프닝
영화 ‘The Giant of Marathon’은 이탈리아에서 촬영되었다. 개봉 10일 전, 마리오 바바 감독은 몇몇 엑스트라들이 카메라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포착되어 외부 장면을 다시 촬영해야 했다.
– 개봉
이탈리아에서는 1959년 12월 3일에 영화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북미 개봉을 위해 영어로 더빙되었다. 개봉 당시 스파이크를 심고 페르시아 선박과 함께 싸우는 병사의 여러 수중 장면이 포함되었다. 이 영화는 1960년 5월 11일 브루클린과 롱 아일랜드에서 “선공개” 개봉을 했고 현충일 무렵 미국에서 개봉했다. 1960년 5월 20일 로스앤젤레스에서, 1960년 5월 25일 뉴욕에서 열렸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Giant of Marathon으로 출시되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Battle of Marathon으로 출시되었다.
당시 이 영화는 미국과 캐나다 박스 오피스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마라톤 전투 (Battle of Marathon) 발발
마라톤 전투 (Battle of Marathon)는 기원전 490년 9월 12일,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의 칼리마코스와 밀티아데스가 지휘하는 아테네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찌른 전투로, 이 전투에서 올림픽 경기의 마라톤 경주가 유래되었다.
이오니아 반란 때 아테네가 개입하여 명분이 생긴 다리우스 대왕은 이에 대해 응징을 결의하고 BC 492년에 마르도니우스의 지휘하에 원정군을 보내나, 폭풍우로 인해 함대의 절반을 상실하고 마르도니우스 자신도 트라키아 일대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원정이 중지된다.

이후 다리우스 대왕은 BC 491년에 다시 사절단을 그리스 각지에 보내 복종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는데, 여타 다른 국가들은 모두 이에 복종했지만 아테네는 이들 사절들을 재판하고 바위틈 속으로 던져버려 저항 의사를 표현한다.
이에 다리우스 대왕은 재차 원정군을 보내 이오니아 반란 때 반란군을 도운 에우보니아 섬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응징하고자 원정군을 파견한다. 또한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후 그리스 정복의 거점 마련이란 목적도 있다고 한다.
이 원정군은 로도스, 사모스, 낙소스를 거처 에우보니아 섬에 상륙, 7일 만에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아티카 반도로 기수를 돌려, 9월 1일에 마라톤 지역에 상륙한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로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나, 스파르타는 카르네이아 제전과 메세이나인들의 반란을 제압해야 한다는 이유로 15일이나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했고, 어쩔 수 없이 아테네는 마라톤에 먼저 가서 9월 3일 헤라클레이온이란 지역에 진영을 구축한다. 이후 에레트리아를 지원하러 움직였던 아테네 식민도시의 지원병들과 총동원령을 내려 아테네를 돕기로 결정한 플라타이아이인들 역시 마라톤에서 합류한다.
9월 3일부터 9월 11일까지, 마라톤 일대에서 양군은 대치에 들어갔다.
아테네군은 대다수가 중장보병 (호플리테스)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총 수효는 9천이었다. 이는 아테네 시민뿐만이 아닌 노예에게는 자유를, 외국계 자유민이나 해방된 노예들에게는 아테네 시민권을 제시해 가면서 모은 병력이다. 여기에 플라타이아이군 1천이 가세해 중장보병 1만의 전력을 보유했다.
아테네군의 총지휘관은 칼리마코스였고, 밀티아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 아리스티데스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플라타아이아군 지휘관은 아림네스토스이다.
페르시아군은 대략 2만 5천의 육군과 600척의 함대를 마라톤 일대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에레트리아 공성전 및 점령지와 진지에 일부 배치한 병력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손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페르시아군의 편제는 크게 천인대 (하자라밤)와 만인대 (바이바라밤)로 구성된다. 궁병 (탄바르바라)과 이를 엄호하는 방패병 (스파라바라)으로 구성된 보병 바이바라밤, 그 외에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으로 구성된 정예 창병 (아르스티바라)과 사카족 도끼병 (타카바라)으로 구성된 하자라밤이 서넛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기병 2천을 보유하여 이를 다 합치면 대략 2만 5천 명이 된다.
그러나 11일 당일에 페르시아군은 일부 병력을 함선에 태워 아테네를 우회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기병 전체와 보병 절반가량 (1개 만인대)을 탑승시켜놓고 있었다.
페르시아군 지휘관은 다티스와 소 아르타페르네스이며, 이 중 아르타페르네스는 크세르크세스의 2차 원정군에도 참전한다.
결론적으로 볼 때 양군 모두 1만 내외였을 것으로 보이되, 페르시아군이 약간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 마라톤 전투 (Battle of Marathon)
.내용: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일부
.날짜: 기원전 490년 9월 12일
.장소: 그리스 이타카 북동부 마라톤
.원인: 이오니아 반란 이후,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관계악화
.결과: 그리스의 결정적 대승리, 아테네 유산 시민층 입지상승
.교전국: 그리스 아테네 (칼리마코스)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1세)
.병력: 아테네 1만명과 플라타이아이인 1천명 (총1만1000명), 페르시아군 1만5천명
.전사: 그리스측 칼리마코스 등 192명, 페리시측 6400명
○ 배경
그리스는 기원전 6세기 이래 번영을 구가해 왔으며, 소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 한편 동방에서는 페르시아가 통일제국을 형성하여 팽창정책을 추구하고 있었기에 이 양대 세력의 대결은 불가피해졌고, 3차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92 ~ 479)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
원래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의 서남부에 상륙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정치적인 이유이다. 아테네에 곧바로 상륙할 경우, 그리스 동맹국가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딛힐 것이 예상되었다. 이에 페르시아는 마라톤에 상륙함으로써, 막강한 군대의 규모를 보여주고, 이에 따른 반응으로 그리스 동맹간의 이견 차이 (전쟁이나 항복이냐)에 대한 내부갈등을 일으켜 분열을 유도하여 전쟁을 쉽게 끝내고자 함에 있었다.
두 번째로는 군사적인 이유이다. 그리스의 주병력은 팔랑크스라는 중무장한 밀집 보병형태였기 때문에 움직임이 둔하였으나 충격력은 강력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경무장한 보병들과 경기병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넓은 평야에서 싸움을 하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마라톤 평야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전투를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서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 싸움을 강제한 쪽은 페르시아였기에 많은 유리함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의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다리우스 1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공격한다. 페르시아가 침략하자 아테네에서는 군대를 소집해 장군 10명을 1일씩 돌아가며 지휘를 맡도록 한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쪽과 적의 공격을 기다리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고, 마침내 문관 칼리마코스가 공격을 주장해 문제가 타결되고, 아테네는 1만 명과 플라타이아이인 1000명을 이끌고 출병한다.

○ 병력 배치 및 전투
아테네와 페르시아는 바다에 수직으로 포진했다. 병력 양에서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정예 보병들과 지휘관이 위치했고, 좌우익에는 궁병과 방패병으로 이루어진 일반 보병을 배치했다. 아테네는 이에 전열의 길이를 같게 하기 위해 보통 8열로 이루어지는 방진을 중앙 부분은 4열로 줄이고 그만큼 좌우로 페르시아군과 전열을 맞추어 포진했다. 플라타이아군은 최좌익에 위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아테네군은 걸어서 전진하다가 페르시아군의 화살 공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200m 정도 거리서부터는 뛰어서 돌진해 맞붙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전투는 장시간에 걸처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때 중앙의 페르시아 정예 보병대는 상대적으로 얇은 아테네군 중앙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아테네군 중앙은 훗날 소로스가 세워진 지역까지 후퇴한다. 그러나 페르시아군 우익이 플라타이아군과 아테네군의 좌익에 의해 무너져 내렸고, 이후 페르시아군 좌익도 마찬가지로 붕괴했으며, 그 후 아테네군은 밀고 들어온 페르시아군 중앙을 집중 공격해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페르시아군 우익은 전열이 붕괴한 이후 지형에 대한 무지로 인해 후방의 대습지 방향으로 도주했다가 이후 쫓아온 아테네군에 전멸당했고, 페르시아군 중앙과 좌익은 함대로 도주하는 데 성공한다. 아테네군은 이를 추격했지만 함대 정박지에서 벌어진 난전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함대가 출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페르시아군 함선 7척 손실).
아테네군은 이 함대가 아테네로 우회해 공격에 나설 것이라 생각하고 서둘러 아테네로 돌아왔는데 이들은 중무장을 한 채로 30km 떨어진 아테네까지 3시간 만에 주파,[9] 간발의 차로 먼저 도착한 아테네군이 방어에 나서자 페르시아 함대는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아테네군은 192명의 전사자 (플라타아이아인과 노예 제외)를 냈고, 페르시아군은 6,4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고 한다.
마라톤 전투가 5천 명의 아테네군과 4천 명의 페르시아군 후미가 맞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대로라면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우회공격을 위해 승선한 상태였고, 남아있던 페르시아 후미가 숫적으로 우세해진 아테네군과 싸웠으며, 후미정리대까지 승선을 함으로써 비로소 전투가 완료된 것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현재의 전투 발생 추정지점은 페르시아군 정박지에서 깊숙히 들어간 (그 사이에 습지도 하나 있다) 내륙지점인 데다 전투 직후 패주한 페르시아군 일부가 길을 잘못 들어 습지로 들어갔다가 전멸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딱히 신뢰도 있는 주장은 아니다. 정박지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리라 보았던 과거의 전투 추정지점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그저 ‘이설’ 중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전투 과정
아테네군은 넓은 평야에서 최강의 페르시아 기병대와 싸워 이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언덕에서 주둔한 아테네군과 평원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은 며칠을 대치한다. 식량이 조금씩 고갈되어가던 페르시아군은 기병 5천명과 보병 5천명을 배에 태워 비어있는 아테네를 공격하기로 한다. 이 사실을 알아챈 총사령관 밀티아데스가 병력이 줄어든 페르시아 군대를 공격한다.
1만 1000명의 아테네군과 플라타이아이인은 1만 5000명의 페르시아군 주력 부대를 중앙으로 유인해 포위했다. 거의 완전 포위된 페르시아군은 전사자만 6400명에 달했다.
○ 의의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인해 페르시아의 1차 원정은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후 10년 뒤의 2차 원정이 있을 때까지 아테네는 안전하게 되었다.
소수의 병력으로도 전술이 뛰어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아테네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하여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승리로 유산시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중장보병의 입지가 높아졌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포기하지 않았고, 10년 뒤의 2차 원정으로 아테네를 불태우는 데 성공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