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마태복음 :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Il vangelo secondo Matteo)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 주연) 엔리크 이라소퀴 / 1964년
‘마태복음’ (이: Il vangelo secondo Matteo)은 1964년 개봉한 이탈리아의 전기 드라마 영화이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으며, 마태오의 복음서가 영화의 원작이다.
1964 베네치아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다.
“파졸리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자연주의로 예수에게 인간성을 부여하여 파졸리니 자신만의 예수를 창조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된 이 작품은 예수의 사도들과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신을 담아낸다.” (전주국제영화제)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각본: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원작: 마태복음서
촬영: 토니노 델리 콜리 (Tonino Delli Colli)
음악: 루이스 바칼로프 (Luis Bacalov), 카를로 러스티첼리 (Carlo Rustichelli)
편집: 니노 바라글리 (Nino Baragli)
미술: 루이지 스카치아노체 (Luigi Scaccianoce)
의상: 다닐로 도나티
영화사: Arco Film S.r.L., Lux Compagnie Cinematographiqu
개봉: 1964년 9월 4일(베네치아 영화제), 1964년 10월 2일(이탈리아), 2001년 3월 24일(대한민국)
시간: 137분
국가: 이탈리아, 프랑스
언어: 이탈리아어
- 출연진
– 주연
엔리케 이라조퀴
마르게리타 카루소
수잔나 파솔리니
– 조연
마르셀로 모란테
알폰소 가토
○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 영화의 내용적 특징과 인물 묘사
파졸리니 영화의 내용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금기된 것에 대한 이탈이 엿보인다. 반사회 적이고, 반문명적이며, 비도덕적인 것에 대해 대담하게 거리낌없이 표현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일상의 폭력과 현실의 이중성 속에서 비웃으며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린다. 항상 지배체제에서 일탈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현대인간의 가면 속에 숨겨진 위선을 폭로하고자 함이라 생각된다.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파졸리니가 의도하는 반사회적인 인물에 공감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걸인>의 빅토리오, < 마태복음>의 예수 외디푸스, <돼지 우리>의 식인 청년은 본질적으로 반역자이며 인간의 가치와 도덕에 대립 되는 인물로 표현된다.
개인의 본능적인 야만성과 체제에 의해 위장된 야만성을 구별한다. <걸인>에서도 주인공이 가정에 대하여 극도의 무관심에 대해 동정적인 묘사를 한 것과 비슷하다.
파졸리니 영화에 등장하는 무산계급과 유산 계급의 인물 묘사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무산 계급의 인물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하층계급에 대한 애정이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마 로마>에서 어머니와 아들 <백색치즈>의 스트라치 <매와 참새> 의 토토 와 니네토는 순응주의적인 인물들이다.
파졸리니가 <걸인>의 빅토리오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니네토 다볼리가 연기한 인물들은 그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프리울리와 로마 의 평범한 민중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돼지우리>에서 마지막 시퀸스에서 파졸리니 내면의 두 측면을 대변하는 식인청년과 자본가의 아들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은 소박한 농민들임을 볼 때 파졸리니 자신이 무산계급에 가지는 연대감을 중요시 여김이 나타난다.
반면에 유산 계급의 인물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백색 치즈>에서 오슨 웰즈가 연기한 영화 감독, 상류층 인물들, <살로 소돔의 120일>의 가해자들은 욕망과 무기력이 가득차 있으며 위선적이다.
그는 영화속의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유사한 것을 찾으려 한다.
배역도 극중인물과 실제로 동일한 배경의 출신을 고르며, 연기가 비록 좀 떨어지지만 그들이 몰입할 경우에 나타나는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마태복음>에서는 마리아역에 자신의 어머니를 기용하고, 친구들도 많이 출연시키고 있다.
- 영화의 표현 양식적 특징
표현 양식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것으로부터 이탈한다. 파졸리니는 영화 연출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 기법이 단순하고 거친 면이 있다.
촬영기법의 섬세함이나 특수효과 같은 영화적 기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촬영기법은 들고 찍기와 경치를 보여주기 위한 수평이동, 고정 촬영기로 고정된 인물을 촬영하는 것의 기초적인 세 가지 방식으로 한정된다.
복잡한 장면구성을 피하고, 매우 빠른 속도로 촬영을 진행시킨다. 중세 회화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대부분의 1인 쇼트들은 망원 렌즈로 촬영한다.
그는 결코 스튜디오 촬영을 하지 않으며, 세트도 만들지는 않는다. 현실에서 유사한 곳을 찾는다. 이것은 무성 영화들의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회화를 장면 설정의 토대로 삼는 것은 파졸리니의 중요한 특징이다. 볼로냐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바 있으며, 재능있는 비전문적인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가 신화적인 분위기의 공간이 많은데, 색체 사용에 있어서 신중하게 하였다.
대사의 최소화, 정지된 촬영기와 인물, 초상화 같은 어깨 너머 쇼트, 색채의 뛰어난 감각은 그의 회화적 재능이며 그의 관심이다. 그리고. 2차원적이고 원근감이 제거된 화면 구성은 중세 회화의 시각적 특징과 연관성을 갖는다.
동시 녹음을 하지 않는다. 모든 음향은 스튜디오내에서 만들며 다른 사람에 의해 더빙되기도 한다. 파졸리니는 더빙에 의해서 등장인물의 성격이 더 신비롭고 복합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하였던 파졸리니 자신이 말하는 혼용기법이다. 파졸리니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영화의 중심은 신성함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신성함이 일상생활 속에서 실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삶의 궁극적인 실재는 신성함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이는 반드시 표출된다.”
○ 관람평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영화 감독인 파졸리니는 1975년 ‘성자의 날’ 한 청년에 의해 거리에서 의문사 하였다.
파졸리니의 삶과 죽음과 그의 영화 <마태복음>을 한 자리에서 논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데, 특히 한국적이고 기독교적인 정서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파졸리니는 맑시스트였고 동성애자였으며 동시에 우리가 대표적인 기독교영화로 여기는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나사렛 예수>보다 더 복음서에 충실하고 영감있는 영화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 <마태복음>을 만들었다.
파졸리니를 먼저 알았던 사람들(필시 영화학도거나 매니아)은 그가 <마태복음>을 만들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놀랄 것이다.
동시에 “그가 만들었다면 상당히 파격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성경을 그대로 영상으로 찍어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감마저 깃든 영화를 보고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파졸리니의 팬들이 알고 있는 “파졸리니적인 영화”란 <살로, 소돔의 120일>처럼 종교적인 주제라 할지라도 차마 눈을 뜨고 영상을 지켜보기가 힘들만큼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인간성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해부하는 파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국제비평가협회 대상/촬영상 수상, “OCIC 국제 카톨릭, 기독교 영화제” 대상 수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진 <마태복음>은 2002년에 와서야 극장에서 개봉되고 (그럼으로써 “기독교 영화”로 알려지고), 전주 국제 영화제와 서울 시네마테크의 ‘폭력과 성스러움 – 파졸리니 특별전’을 통해 뒤늦게 한국관객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러나 사드적이고 잔혹한 <살로, 소돔 120일>이 아닌 <마태복음> – 문자 그대로 성서에 충실한 – 이 제피렐리의 <나사렛 예수>보다 뒤늦게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진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유는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이기 때문이다. 반면 <나사렛 예수>는 제작방식이나 영화의 내용, 구성 형식 등이 대중적이다.
올리비아 핫세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잘 알려진)를 비롯한 기존의 스타시스템을 활용한 이 영화는 유명한 배우들로 인해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측면에서도 고전적인 드라마투르기를 구사하여 대중이 이해하기 쉬웠다.
대대적인 홍보 또한 이 영화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대중적이기 때문에 이 영화의 기독교적 메시지가 약화되었는가? 물론 그렇게 단정하는 옳지 않다.
두 영화가 원본으로 삼는 복음서는 화법이 지극히 단순한 반면 이해하기 쉬운 텍스트는 아니다.
복음은 1세기 유대지역이라는 낯선 문화와 환경, 구체적인 인물들로 옷 입고 있으며, “예수”를 역사적인 실존 인물이자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메시야로 선포함으로써 동시대의 종교의식, 시대정신과의 긴장과 충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제피렐리가 잘 한 것이 있다면 복음서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체를 영화형식 속에 잘 녹여냈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중들이 상상하는 예수와 주변 인물들을 상투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예수의 존재 그 자체가 당시 유대사회와 우리에게 던져주는 도전과 의미를 되새기기보다 “아멘”을 연발하며 드라마에 빠지도록 만든 것은 실망스럽다.
한 마디로 <나사렛 예수>는 대중의 감동 (사유와 도전이 아닌)을 위해 영화적으로 각색된 예수이다. 그리고 이 점은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이 경계하고 훌륭하게 극복해낸 지점이기도 하다.
파졸리니는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이태리 농민의 소박한 신앙을 알고 있었고, 당대의 세계적인 영화논객들에게조차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시적 리얼리즘”이라는 자신만의 뚜렷한 영화미학을 확립한 상태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마태복음>은 유대지방의 자연환경을 셋트에 의존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비전문 배우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한 번도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를 낯선 모습 그대로 화면에 등장시킨다.
물론 배우가 유명하기 때문에 혹은 잘생겼기 때문에 성경의 인물들이 잘 표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얼굴을 잘 알지 못하는 배우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쉬운 감동보다는 관찰을 유도한다.
또 이 영화의 인물들의 대사는 모두 성서의 기록을 토시 하나조차 충실하게 전달하며, 극적인 효과를 위한 불필요한 대사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대중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방법이지만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그래서 우리가 행간 행간의 의미를 숙고해야하는 여백들 (대사 없는 행위의 기록들)을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모차르트의 곡들, 흑인영가 등으로 채움으로써 관객이 “예수님이 진실로 어떠한 분이신가 (이었던가)”를 사유하는 공간을 창조한다.
때문에 관객은 영화가 모든 걸 다 얘기해주고 십자가와 부활의 위대한 대단원으로 자신을 끌고 가기까지 팔짱만 끼고 쳐다보거나 아멘만 연발하고 있을 수가 없다.
비그리스도인에게나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파졸리니의 영화가 유용한 것은 제피렐리가 “우리가 다 아는 얘기지?”라며 관객의 동의를 전제하고 감동적으로만 장면을 연출하지 않고, 복음서가 그렇듯 아이나 어른이나 믿거나 안 믿거나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약한 한 인간이자 동시에 성스러움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써 복음서가 제시하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을 “낯선 배우들이, 사건 순서대로, 성서 그대로의 대사만을 전달하며 유대광야의 황량한 풍경과 외소한 나사렛의 시골 마을 속에서 전달한다는 것”은 분명 여러분이 생각하는 흥미로운 헐리우드 영화와는 다른 이미지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스라엘 영화를 한 번도 혹은 거의 보지 않았을 것이고 관심도 없지 않은가? 바로 이런 이유로 파졸리니의 사실주의적인 <마태복음>은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 것이다.
이 영화가 <나사렛 예수>에 비해 덜 알려진 두 번째 이유는 바로 파졸리니 자신의 이력 때문인 것 같다.
제피렐리가 자타가 공인하는 그리스도인 영화감독이었다면 파졸리니는 좌파이자 동성애자였으며 그의 마지막 죽음조차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처참했다.
이 영화를 한국에 소개했고 또 그리스도인에게 알린 영화사에서 파졸리니의 삶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것도 그리스도인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보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여겨 배려한 것이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이 복음적인 영화임을 역설하면서도 그의 삶의 어두운 면을 밝히는 것은 우선은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이고 통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견해, “감독 (예술가)의 삶과 인생관 (신앙)이 영화나 예술작품의 내용과 질과 직결된다 (혹은 동일하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작가의 삶과 세계관은 원재료로서 예술 속에 반영된다. 그러나 날 것 그대로는 아니다. 당신이 ‘언어’로 ‘마음’을 100퍼센트 표현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면 작가의 삶과 예술이 완벽하게 부합된다는 주장의 모순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를 이해하는 것은 작품에 접근하는 가장 유력한 통로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비교적 낯선 인물인 파졸리니와 그의 영화작업의 근간이 된 정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