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감독) Burt Brinckerhoff / 원작) Aldous Huxley / 1980년
“아. 이 멋진 인간들이여!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들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_ 야만인 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인용하며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1932년 발표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영화화 했다. 소설 ‘멋진 신세계’는 ‘1984’ 및 ‘우리들’과 함께 디스토피아 소설의 3대 고전이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경은 A.F. 632 년인데(After Ford) 헉슬리는 과학의 발전의 역사를 보자면 약 600년 후 미래는 “멋진 신세계”와 같은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만들어낸 연도다. 작품에 묘사된 디스토피아에 훨씬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현대 사회 덕분에 예언서쯤의 고전문학이 되면서 SF소설의 바이블에 올랐다.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Burt Brinckerhoff
장르: Science fiction
원작: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각본: Robert E. Thompson, Doran William Cannon
출연: Keir Dullea, Marcia Strassman, Kristoffer Tabori, Bud Cort, Julie Cobb
음악: Paul Chihara
제작감독: Milton Sperling
제작: Jacqueline Babbin, Norman Chandler Fox (associate producer)
촬영: Harry L. Wolf
편집: James T. Heckert
시간: 180분
제작사: Universal Television
배급사: NBC Universal
– 출연진
Kristoffer Tabori as John the Savage
Bud Cort as Bernard Marx
Keir Dullea as Thomas “Tomakin” Grahambell
Julie Cobb as Linda Lysenko
Ron O’Neal as Mustapha Mond
Marcia Strassman as Lenina Disney (Crowne)
Dick Anthony Williams as Helmholtz Watson
Jonelle Allen as Fanny Crowne
Jeanetta Arnette as Dwightina
Casey Biggs as Beta lighthouse guard
Reb Brown as Henry
Tara Buckman as Alpha Teacher
Nigel Bullard as Plant Manager
Shane Butterworth as John as a child
Lee Chamberlin as Head Nurse
Beatrice Colen as Gamma Female
Patrick Cronin as Gamma Male
Valerie Curtin as Chief Warden Stelina Shell
Murray Salem as Chief Engineer
Marneen Fields as Futuristic Factory Worker
Aron Kincaid as J. Edgar Millhouse
Carole Mallory as Miss Trotsky
Tricia O’Neil as Maoina Krupps
Victoria Racimo as Beta Teacher
Delia Salvi as High Priestess
배경 및 줄거리
대전쟁 이후 거대한 세계정부가 들어서, 모든 인간은 인공 수정으로 태어나며,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은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지능에 따라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가 결정되어 있다. 사람들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으로 나뉘는데, 대체적으로 알파 계급은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엘리트 계층, 베타 계급은 행정 업무를 맡는 중산층, 감마 계급은 하류층에 해당하며 델타나 엡실론 계급은 사실상 몇 가지 유전자 타입을 가지고 고의로 지적장애를 유발한 채 양산되어 단순 노동을 담당한다. 2000년대 이후 현대인이 본다면 로봇이나 디지털화된 공정으로 대체할 수 있는 부분 정도도 모두 저능아 클론들이 하는 것을 보면 설정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그저 사회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인류는 태아 시절부터 조건반사와 수면 암시 교육으로 자신의 계급에 맞는 세뇌 수준의 교육을 받는다.
촉감 영화라고 하는, 포르노에서 촉감까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오락 수단이 주요 여가 생활의 하나이며, 모든 성애(性愛)는 기본적으로 자유롭다. 심지어 7살짜리 아이들이 성놀이를 통해 성을 학습하는데, 오늘날처럼 결혼을 통해서 정해진 파트너와만 성관계를 갖는 것이나 성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이 추잡하다고 생각한다.
문명인에게는 소마라고 불리는 일종의 마약이 주어지는데, 이것을 복용하면 그야말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공장제 대량 생산의 고안자 헨리 포드를 신적 존재로 받들며 첫 번째 포드 모델 T의 생산일을 A.F.(After Ford)라는 연도의 기준으로 삼는다. ‘신’이란 말이 들어가는 격언에서 ‘신’만 ‘포드’로 바꿔서 쓰는(my Lord를 my Ford로 치환다) 장면이 정말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위가 잘린 채 포드 모델 T를 상징하는 ‘T’자로 남아있다.
얼핏 보기엔 진짜 멋진 신세계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바로 나쁘지 않은데?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가장 무섭다. 작품 속 세계는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말살된 채 철저하게 세뇌되어 살아가고 그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며,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책임과 윤리가 등한시되었음에도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인다며 멋진 신세계로 인식한다는 점이 말이다. 어쩌면 올더스 헉슬리는 사람들이 이 멋진 신세계를 동경하는 점을 가장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할수록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인간미도 점점 사라져가니 20세기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21세기 상황이 굉장히 나쁘다고 볼 수도 있다. 멋진 신세계 세계관에선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능에 맞추어 신분을 만들고, 그 신분에 맞추어 직장을 배분하기 때문에 원하는 지위에 오르지 못해 좌절할 일이 없다. 하위계급이라 해서 딱히 학대나 착취를 당하지도 않고 소마도 배급받으므로 아무런 불만이 없다.
모든 물자는 철저하게 통제되어 생산되고 배분된다. 모든 오락 수단은 자유롭게 즐길 수 있으며 결혼은 없어지고 모든 성행위는 자유롭다. 이 점에서 스탈린주의 사회를 기본 모델로 삼은 1984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위의 견해는 멋진 신세계의 ‘멋진’을 한쪽으로만 해석한 것일 뿐이다. 지능에 따라 신분을 만들며, 그 신분에 따라 사람들을 세뇌한다. 또한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핏 멋진 신세계일뿐 또다른 디스토피아가 맞다. 우민화 정책에 절어서 행복한 개, 돼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갈등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인 세뇌교육과 마약을 통해 없앤 것이라면 그게 긍정적인 것인가? 그런 사회를 진정 ‘갈등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는가?
이런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고, 세계정부에서는 이 사람들을 외딴섬에 유배를 보내서 불온사상을 퍼뜨리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들 중 한명인 버나드 마르크스는 우연히 아직까지 이런 ‘문명 사회’가 정착하지 못한 야만인 거주 구역으로 갔다가 야만인 존을 만나게 되고 자신을 한직으로 추방하려는 국장의 시도를 막기 위해, 국장이 임신을 시킨 뒤 야만인 거주 구역에 버린 여자와 그 여자의 아들을 국장 앞에 데려온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임신’이나 ‘출산’, ‘어머니’나 ‘아버지’ 등의 개념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추하고 더러운 것이 되어 있다. 이 야만인 거주 구역은 원주민의 문화를 보존해 둔 지역으로 ‘굳이 비용을 들여 개척할 필요가 없어서 남겨둔 곳’이다. 존은 문명 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진 셰익스피어 등의 문학 작품을 읽어 왔었는데, 처음에는 아버지의 나라인 문명 사회를 동경하여 그들을 따라와 무스타파 몬드 총통과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존은 문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가 원래 살던 곳의 방식으로 고행을 하면서 ‘문명인’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걸 견디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같이 따라온 야만인의 어머니 린다는 오랜만에 문명 세계로 돌아왔다는 기쁨과 자신의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비탄 등이 섞인 ‘위험한 감정’에 빠져 하루에 소마를 정량의 몇 배를 과다 복용하며 몇 달간 마약에 취해 누워 지내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고는 영안실에 들어가 아이들의 ‘사회화’를 위한 교재가 되어 버리는데, 여기서 받은 문화 충격이 존이 ‘문명 사회’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등장인물
.버나드 마르크스
이 작품에서 ‘문명 세계의 주인공’ 위치의 인물이다. 계급은 알파 플러스 계급으로 최고 엘리트 다음가는 인물이며 그의 직장인 인공부화소에서도 능력으로는 인정받지만, 계급에 맞지 않는 작은 체격으로 인해 아래 계급에게도 대놓고 무시당하고, 그로 인해 생긴 열등감 때문에 성격도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라서 같은 계급 내에서도 소외되는 인물. 정확히는 인공부화소에서의 처리로 체격마저 계급에 맞게끔 양산되는 세상에서, 버나드 혼자서 자기 계급보다 8cm이나 키가 작은 것이, 원래 베타 계급으로 가야 되는 사람인데 행정 착오로 알파 플러스 계급이 된 거 아니냐 혹은 베타 계급으로 부화할 수정란에 시행해야 하는 시술을 해버린 거 아니냐 라는 오해가 돌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 쪽이나 수정란 시기에 부화소에서 가하는 시술로 인하여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에서, 버나드가 알파 플러스 계급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인데 거기 있다며 버나드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직장 내에서도 뛰어난 외모로 인기를 가진 레니나 크라운을 짝사랑하지만, 데이트 신청하려고 할 때 하필 직장에서도 라이벌 관계인 헨리 포스터와 놀러가거나, 레니나를 그저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등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사회 시스템에 비판적인 말을 하는 등 작품 내의 사람들과는 심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가치관을 가졌다. 비록 열등감에 기반해 대사들을 내뱉지만 그래도 다른 등장인물들과 달리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능한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늘 각성하는데 반해 버나드는 각성은 커녕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에 혼자서 자부심을 느끼며 소인배적인 행동을 이어간다.
야만사회(아메리칸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존을 만나고 존을 런던으로 데려온다. 자신을 직장에서 전출시키려는 직장 상사가 야만인 존의 아버지임을 폭로해 상사에 대한 복수와 사회적 관심을 받는데 성공한다. 이후 문명사회로 온 존과 문명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사회적 명망과 관심을 받자 바로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 된 거마냥 오만해지고, 사회적 불만을 머릿속에서 비워버린 뒤 평소에는 멀리하던 마약과 성적 욕망을 탐한다. 이후 레니나와의 문화갈등, 어머니의 죽음으로 문명사회에 회의감을 느낀 존이 반사회적 행위를 하면서 그나마 능력을 인정받던 전과 달리 주변인들로부터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다시 예전의 성격으로 돌아오고, 그와중에도 존과 헬름홀츠가 시를 매개로 친해지자 열등감을 느끼며 토를 잡으려는 등 소인배적 행동을 이어가다가 아이슬란드로 추방되는 것이 결정된다. 이때도 총통에게 무릎꿇고 발버둥을 치며 사정하는 등 결국 세계의 한계를 넘지는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이를 받아들이고 사과한다.
.헬름홀츠 왓슨
버나드 마르크스와는 친구 사이이다. 신체조건이나 능력 등 모든 것이 너무나도 완벽하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친구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문명 세계에 대한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야만인 존이 문명 세계로 왔을 때 그도 버나드처럼 존을 이용해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어떻게 보면 더 나은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시 친구와 마찬가지로 예술을 진정 느끼지 못하고 문명 세계의 핵심인 과학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등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결말에서는 총통의 포클랜드행 제안을 받아들인다.
버나드와 헬름홀츠 모두 과학자는 아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의 ‘문명세계’에는 과학자가 없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된 주제의식 중 하나다. 과학기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은 차라리 배운 대로의 절차에 따라 행동을 반복하는 단순기술자에 가깝지, 창조적 재능을 발휘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과학자나 고급기술자는 아니다.
어린 시절의 존이 린다에게 책에 나온 각종 화학약품에 대해 물어봤을 때 린다는 그저 ‘창고에 있는 통에서 꺼내오는 것’이라고 대답했을 뿐 자신이 늘상 사용하던 약품들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점이나, 각종 돌발상황(특히 존, 버나드, 헬름홀츠등의 괴짜 난입)으로 인하여 작업 공정에 차질이 발생했을 경우 해당 공장의 담당자가 탄력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쩔쩔매면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매도하기만 한다는 점 등을 통해 이는 쉽게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세계는 진짜 과학자(창조적인 재능을 가진 자)를 사회를 파괴하는 위험분자로 간주하고 외진 섬에 격리되어 제한된 환경 내에서 그 재능을 발휘하게 하여 성과만을 취하거나, 아니면 무스타파 몬드처럼 철저하게 굴복하고 순응하여 오히려 창조성을 제재하는 체제의 앞잡이가 되게 하는 세계다. 이 점에서 보면 헬름홀츠는 (물론 과학자가 아닌 작가에 가깝지만) 작품 내에서는 그나마 문명 세계의 핵심인 과학의 본질에 가깝게 접근한 인물이지만, 그 본질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한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레니나 크라운
베타 계급인 그녀는 뛰어난 외모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다양한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는다던가 소마(마약)에 의존하는 등 전형적인 작중 문명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많다던가, 야만인 존을 사랑하는 등 문명인 치곤 약간 독특한 인물. 하지만 버나드에 비해 문명 세계의 상식을 좀 더 중시하는지라, 가끔씩 괴상한 이야기를 하는 버나드에 질색하기도 했다.
야만인 존과 사랑에 빠져 나중에 존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데, 존은 ‘야만인의 방식으로’ 즉 선물과 시(문학), 낭만 등등의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려고 하는데 레니나는 ‘문명인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성행위)하려 하자 존은 레니나를 비난하게 된다. 물론 그녀도 존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존에게 사랑 고백을 한 것인데, 그녀 역시 이 때 존이 보여준 너무 이질적인 행동에 충격을 받는다. 이 사건은 존이 문명 사회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문명 사회를 탈출한 존이 문명인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최후반부에서 헨리 포스터와 함께 헬리콥터에서 내리고 존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보려고 하나, 이 직후 격분한 존이 채찍질을 가하고 군중의 광기가 폭발한다. 이 상황에서 헨리 포스터는 도망가버린다.
.존
버나드가 레니나를 데리고 야만인 보호 구역으로 여행을 갔을 때 처음 등장했다. 한 때 문명인이었다가 야만인 보호 구역에 낙오된 어머니 린다와 함께 살고 있었다. 린다가 그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 읽게 한 셰익스피어 전집을 완전히 외우고 있으며, 그 때문에 작중에 셰익스피어 작품들에 나온 문구를 인용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야만인 세계에 살면서도 문명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어머니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해준 문명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문명 세계를 동경하며 자랐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을 때 버나드, 레니나와 만나 동경하는 문명 세계로 어머니와 함께 가기 위해 버나드를 따라 문명 세계로 갔다.
문명 세계로 간 뒤에는 문명인들에게 주목받게 된다. 그러나 이후 레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과정에서 레니나가 자신이 생각하던 격식인 문학과 낭만을 거부하고 오로지 성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자 이 모습에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 야만 사회에서 배운 도덕 관념, 셰익스피어 소설에서 보던 도덕 관념들과 충돌하면서 레니나를 마치 성행위만을 탐하는 악마처럼 바라보며 내버린다. 이후 문명인들과의 접촉에 신물이 난 존은 문명인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헬름홀츠와 시를 매개로 가까워지지만, 헬름홀츠 또한 셰익스피어 소설에 나오는 부모자식 관계, 사랑에 대한 개념을 이해 못하고 비웃으면서 큰 실망을 하게 된다. 이후 어머니가 소마(마약) 중독으로 급사하면서 기계처럼 행동하는 계급별로 똑같이 생긴 수많은 쌍둥이들과 사람들, 그리고 소마를 배급하는 모습을 보며 완전히 문명사회를 혐오하게 되고 자신이 살던 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소마 배급현장에서 난리를 피우며 자유를 외치다가 무스타파 몬드 총통을 만나 논쟁을 펼치게 된다.
야만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도덕관념과 종교관념을 토대로 주장을 펼치는 존은 자신보다 더 많은 지식과 안전하게 잘 굴러가는 사회라는 증거를 토대로 논리를 펼치는 총통에게 결국 먼저 말이 막히게 되고, 자신은 문명 세계에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버나드와 헬름홀츠처럼 섬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그러나 총통은 그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거부한다. 과거의 문명과 신세계의 문명을 다 체험한 자로서 존은 도시를 빠져나가 황무지로 도망쳐 신세계의 문명을 독이라 여기며 이에 반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평생 속죄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지만 홀로 야생생활을 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어머니 대신 레니나의 얼굴과 육체를 그리워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채찍으로 자해를 하지만, 문명 세계에서 구경꾼들이 몰려와 이를 묘기 취급하며 구경을 한다. 존이 분노하고 있을 때 레니나가 미련 때문에 자신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존은 레니나를 쾌락과 타락, 문명사회의 상징으로 여기며 악마같은 존재라고 되내이고 있었고, 악에 물든 사람들과 대치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의지가 분노와 환각상태와 결합해 레니나를 죽도록 채찍질하다가 다음날 자신이 한 일을 알아차리고는 목을 매어 자살했다.
레니나를 채찍질을 하는 장면을 본 문명인들이 이 행위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그 행위의 이유나 의미도 모른 채(소설 본문에서는 어렸을때부터 배워온 길들이기 훈련으로 마음속에 뿌리 깊게 심어진 일체감과 화합에 대한 욕망의 지배를 받아 협동하려는 습성과 내적인 고통에 대한 충동에 이끌렸다고 서술되어있다), 물론 존은 자신의 행위가 문명사회에 무슨 일을 일으켰는지 알지 못했다.
.린다 : 존의 어머니
인공부화소장과 야만인 보호 구역으로 여행을 갔다가 사고를 당해 혼자 낙오되고, 거기다가 소장의 아이를 임신까지 하는 바람에 보호 구역에 아이와 함께 정착하게 된다. 작중 시간대에서는 겨우 44살 밖에 안됐지만 이미 갖은 고생으로 인해 ]노쇠했으며, 신체 관리에도 실패해 뚱뚱한 몸이 되었다. 레니나 크라운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호 구역에 낙오되었는지 이야기를 해 주는데,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버나드는 자신이 여행 오기 전에 소장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일치한다는 사실로 그녀의 아들 존의 아버지가 소장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존과 버나드와 함께 문명 사회로 돌아온 린다는 기형적인 외형으로 인해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인물이었고, 린다 또한 다시 사회에 동화되도록 노력하는 대신 집에서 소마를 과다복용하며 환각 속에서 사는 것을 택한다. 이게 원인이 되어 건강이 악화, 병원으로 옮겨져 끝내 사망한다.
.인공부화소장 : 버나드 마르크스의 상관, 이름은 토마스
버나드를 능력으로는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그의 집단의식 부족이나 문명 사회에 대한 반감 등 불순분자로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심한 불만을 가져 그를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는다. 사실 야만인 존의 아버지이며, 때문에 버나드를 내쫓으려고 했을 때 존의 태생을 간파한 버나드가 그 사실을 알리며 소장 자리에서 은퇴한다.
.헨리 포스터
버나드의 직장에서의 라이벌 되는 인물이다. 잘생기고 능력이 좋아서 버나드도 열등감을 느끼는 장면이 있지만, 비중이 많지 않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면에 도시 근교에서 홀로 지내는 야만인 앞에 레니나와 함께 헬기를 타고 오는데 야만인이 자괴감에 분노해 레니나를 구타하는 동안 헬기로 도망쳐 숨는다.
.페니 크라운 : 레니나 크라운의 친구
상식인 포지션을 맡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 세계 문명인들 중의 상식인이란게 문제다. 하지만 헨리 포스터와 마찬가지로 일반인으로서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무스타파 몬드 : 서유럽 주재 세계 총통
전 세계에 10명뿐인 인류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인공부화소를 견학하던 견습생들이 그에게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총통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과학자였다. 대개 문명 세계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사실 문명 세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뛰어난 아이디어가 사용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탄식한다든지, 그의 비밀 금고에 금서가 잔뜩 쌓여있다든지 하는 등 일단 어느 정도의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인물들이 모순을 깨닫지 못해서 체제에 순응하는 것과는 달리, 무스타파 몬드는 체제의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체제를 지키기로 결심한 인물이다. 즉, 한계를 넘은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악용하는 인물에 가깝다. 과거에 일어난 세계대전, 그리고 전쟁으로 몰락한 사회에서 조차 한정된 자원과 직업을 두고 큰 혼란이 야기됐던 반면에, 현재의 시스템은 매우 안정적이며, 마약을 통해 상위부터 하위까지 모든 계급원들이 만족을 하며 사회에 동화되었기에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하며 행동한다. 작중의 모습을 보더라도 다른 인물들은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이상하다’고 무시해 버리지만, 무스타파 몬드는 그 작품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 작품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을 섬으로 보내서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며, 헬름홀츠에 대해 개인적인 호감을 표시하기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가 기존의 사회를 무너트릴 여지를 차단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실을 오히려 체제 유지에 활용하는 인물상은 1984의 오브라이언과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여러 문학 수업이나 평론 등지에서 둘이 같이 언급되는 사례가 많다.
.야만인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 보존을 위해, 그리고 황무지라 굳이 개발할 가치가 없는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서 옛 풍습을 고집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당하는 취급은 상당히 초라한데, 초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망이 보호구역을 둘러싸고 있으며, ‘문명인’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는 점이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이 문명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긴 하지만, 외래 문화 사람인 린다를 이해해주지 않거나, 야만인들이 위생관념이 거의 없고 바닥이 피로 물들 정도로 채찍질을 함으로서 종교적 의례를 행하는 등 다소 부정적인 묘사도 함께 등장한다.
야만인들은 비문명인보다는 현대인의 개념의 잔재로 보는 것이 옳다. 문명사회에선 잊어버린지 오래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이들의 마을에 남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 게다가 후반후 존과 총통의 논쟁에서 존은 도덕성을 근거로 주장을 펼치는데 그 도덕성은 바로 야만사회에서 배운 도덕관념이다. 즉 이 세계에서 살아온 존은 현대인의 사고를 가진 인물로서 문명사회를 바라본 셈이 된다. 원주민 보호구역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사실 옛 풍습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지역은 사실 상당수 될 듯하다. 허나 이들의 위생 상태라든지 야만적인 성인식 등을 보면 1930년대 기준으로도 현대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그들 중 아웃사이더로서 셰익스피어 작품으로 글을 배운 존이 매우 특별한 경우이다.
.섬 사람들
직접 등장하는 섬 사람은 없고, 지나치게 독창성이 뛰어나거나 성격이 특이해서 사회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섬들로 추방당해 살게 된다는 언급만 된다. 소마나 기존 사회 체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 섬으로 추방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애초에 개성이 지나쳐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기에 개성과 창의력을 맘껏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곳에서 더 행복할 듯하다. 심지어 총통은 섬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총통 자신도 과거에 지나치게 개성이 강한 인물임이 드러났을 때, 이 섬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자기 개성을 체제 유지에만 쓰는 대신 고위직에 오를 것인지 선택을 요구받았고, 그 때 고위직에 오를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버나드와 헬름홀츠도 결말에서는 이들에게 소속된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에서 몇 안되는 희망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오웰과 헉슬리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분류되면서도 두 소설이 그리는 디스토피아가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닐 포스트먼에 따르면, 오웰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공포와 기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올더스 헉슬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욕망과 말초적인 자극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오웰이 책을 금지할 자들을 두려워했다면, 올더스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읽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을 두려워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오웰과 헉슬리의 관점을 ‘1984’와 ‘멋진 신세계’로 비교하며 미래를 얼마나 잘 예측했는지로 SF소설의 우위를 결정하는 시각은 곤란하다. ‘멋진 신세계’의 미래 예측이 ‘1984’의 예측보다 더 정확하다는 분석은 냉전이 종식된 90년대 말~21세기 이후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양대 진영이 극단적인 대립을 벌이던 냉전 시기만 해도 ‘1984’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역시 충분히 예언적이었고, 결국 어느 지역은 현실이 되었다. 이는 결국, 소위 ‘이성의 시대’의 끝자락이던 1930년대에 쓰여진 ‘멋진 신세계’가 기술의 발전이 곧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리라던 이전 시대의 믿음에 대해 의문을 던진 작품인 데 비해, 1949년에 쓰여진 ‘1984’는 당장 눈 앞에서 시작되고 있는 극단적인 적의와 광기, 감시의 시대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적 특성 역시 가진 작품이라는 차이를 통해 접근할 문제이지, 한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더 우월하다고 볼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쾌락과 과도한 정보에 통제당하는 사회는 어디까지나 한국이나 미국 등 자유가 보장된 국가의 시선에서 디스토피아인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 등 과도한 통제와 억압에 사람들이 꼼짝 못하는 사회도 엄연히 존재하며 그 규모도 작지 않다. 1984이든 멋진 신세계이든 미래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예언한 것은 마찬가지이며 두 작품 모두 사실성이 있다.
또한 현대의 검열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1984와 멋진 신세계가 안 좋은 의미로 정반합하는 것이다. ‘나무를 감추려면 숲에 감추어라.’라는 말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현대의 검열은 단순히 나무를 숲에 두는 것에 끝나지 않고, 그 나무 근처에 접근하는 혹은 접근하려는 모든 이의 정보를 수집하고 제한하는데, 이건 오웰이 우려했던 것이다. 반면 숲인 만큼 다양한 나무가 있고 나무를 찾던 사람들이 다른 나무에 시선이 가게 하는데, 이건 헉슬리가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나무를 감춘다는 것에는 결국 헉슬리가 우려했던 시선 돌리기와 오웰이 우려했던 텔레스크린, 이 두 가지의 방법이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