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모딜리아니 : Modigliani
감독) 믹 데이비스 / 주연) 앤디 가르시아, 엘자 질버스테인, 오미드 다릴리 / 2004년
- 화가 아메데오 클레멘테 모딜리아니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 ~ 1920)의 치열한 삶을 담은 영화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아몬드 같은 눈에 긴 얼굴을 가진 독특한 그만의 초상화 화풍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피카소와 함께 파리에서 활동했던 화가로서 피카소와도 친분이 있었다. 실제로도 상당한 미남으로 여성들의 인기를 누렸다곤 한다. 모딜리아니 역을 맡은 앤디 가르시아의 잘생긴 얼굴과 눈빛 연기는 실제 모딜리아니의 모습과 많이 닮아서 더욱 놀라웠다.
당시 젊은 나이에 인정받아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누리던 피카소와 달리 모딜리아니의 삶은 너무나 처참했다.
알코올, 마약중독에 찢어지게 피폐한 삶으로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영화는 모딜리아니의 죽음 직전까지의 삶을 담은 작품으로서 그의 연인 쟌느 와의 사랑이야기를 강하게 다루었다.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믹 데이비스감독
제작: 안드레 드자오위 Andre Djaoui, 필립 마르티네즈 Philippe Martinez, 스테파니 마르티네즈 Stephanie Martinez
기획: 도널드 A. 바튼 Donald A. Barton, 캐린느 베어 Karinne Behr, 앤소니 블레이키 Antony Blakey, 폴 피텀 Paul Feetum, 앤디 가르시아 Andy Garcia, 스티브 마스던 Steve Marsden, 더글라스 W. 밀러 Douglas W. Miller, 게리 웅거 Gary Ungar, 마르코스 주리나가 Marcos Zurinaga
각본: 믹 데이비스 Mick Davis
촬영: 엠마뉴엘 카도쉬 Emmanuel Kadosh
음악: 가이 팔리 Guy Farley
편집: 엠마 E. 히콕스 Emma E. Hickox
미술: 지안티토 부치엘라로 Giantito Burchiellaro, 루이지 마치오네 Luigi Marchione, 블라드 비에루 Vlad Vieru, 가브리엘 네시타 Gabriel Nechita
의상/분장: 팸 도운 Pam Downe, 개비 크레탄 Gabi Cretan, 지아네토 드 로시 Giannetto De Rossi, 로렐라 데 로시 Lorella De Rossi, 미렐라 데 로시, 안나 루풀레스쿠 Ana Lupulescu, 클라라 투도스 Clara Tudose
캐스팅: 안드레아 타나세스쿠 Andreea Tanasescu, 제레미 짐머만 Jeremy Zimmerman
- 출연진
앤디 가르시아 (Andy Garcia, 모딜리아니 역)
엘자 질버스타인 (Elsa Zylberstein, 잔느 역)
오미드 다릴리 (Omid Djarili, 피카소 역)
이폴리트 지라르도
우도 키어
피터 카팔디
스티번 림커스
댄 아스틸리누
미리암 마고리스
- 수상 후보 선정
새틀라이트상 최우수 의상 디자인, 새틀라이트상 미술상
○ 줄거리
아메데오 클레멘테 모딜리아니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 ~ 1920)는 주로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 활동을 한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그보다 3살 위인 젊은 나이에 이미 인정받아 명성과 부를 누리던 세기의 화가인 피카소와도 친분이 있었다.
비록 ‘모딜리아니’라는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가 그린 눈동자가 없고 유난히 목이 긴 여인들이 그려진 그림은 누구나 한번쯤은 보았을 만큼 우리와 친숙하다.
그는 초기에 조각 활동을 했는데 30여점의 조각품에서도 목이 긴 여인들을 보여 주었으며 작업 중 발생하는 먼지로 인해 이미 결핵에 걸려 손상된 폐가 더욱 악화되는 바람에 조각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대마초와 알콜 중독으로 처참하리만치 가난하게 살던 그는 1917년 화가 지망생이었던 자신보다 14세 어린 쟌느 에뷔테른과 사랑에 빠지며 쟌느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는데 자신의 화가로서의 재질은 묻어둔 채 남편의 헌신적인 조력자로, 모델로서 참혹한 가난을 오직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이겨 나간다.
1920년 모딜리아니가 36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 다음날 뱃속의 둘째 아이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 감상평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절정은 카치니 (Giulio Cacciniu)의 “아베마리아 (Ave Maria)”가 아름답지만 다소 비장하게 흘러나오며 당대 최고의 다섯 명의 화가들이 최고의 작품을 위해 작업하는 모습이 번갈아 교차되는 부분이다.
특히 샤임 수틴 (Chaim Soutine, 1984 – 1943, 러시아 태생)이 광기어린 모습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도살된 동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섬찟한 느낌마저 들었다.
예술가는 타고난 재질과 어느 정도의 광기가 있어야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다시한번 내게 각인시킨 장면이다.
하지만 “쟌느”를 모델로 한 자신의 그림이 박수갈채를 받는 순간 모딜리아니는 끝내 자신의 찬란한 영화를 보지 못한 채 짧은 삶을 결핵으로 마감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유망한 미술학도였으나 화가로서의 열정과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었던 광기를 가진 모딜리아니를 사랑하며 그의 곁에 끝까지 있고자 했던 쟌느 에뷔테른는 곧 자기가 사랑하는 모딜리아니를 따라 영원한 안식처로 떠난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묘지에 있다.
천재적이니 예술가에게는 그들의 예술적 감성과 의욕에 불을 지피는 뮤즈가 있다.
이 역시 사랑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증명하는 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쟌느와 모딜리아니 사이에서 태어난 쟌 모딜리아니 (Jeanne Modigliani, 1918 ~ 1984)는 후에 (1958년) 모딜리아니의 전기를 썼다.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 ~ 1920) 개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이: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년 7월 12일 ~ 1920년 1월 24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Clemente Modigliani)
.출생: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
.사망: 1920년 1월 24일 (34세), 파리
.매장지: 페르 라셰즈 묘지 (1920 – )
.직업: 화가, 조각가, 데생화가
.국적: 이탈리아 왕국
.학력: 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
.스승: Giovanni Fattori, 콘스탄틴 브랑쿠시
.분야: 회화
.사조: 현대 미술
.동거인: Beatrice Hastings (1914 – 1916), 잔 에뷔테른 (1917 – 1920)
.자녀: 잔 모딜리아니
.주요 작품: Nudo seduto, Ritratto di Lunia Czechowska con ventaglio, Jean Cocteau, Portrait of Lunia Czechowska (1919), Frontal portrait of Jeanne Hébuterne
.영향: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폴 세잔, 콘스탄틴 브랑쿠시, 파블로 피카소
○ 생애 및 활동
1884년 이태리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에 있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단눈치오의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모딜리아니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어려웠지만 에우제니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굴리엘모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늑막염, 폐결핵, 폐렴 등 병치레가 잦아 평생을 고통받았다. 14세에는 병으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17세에는 결핵에 걸려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 베네치아·피렌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 파리로 나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빌렸고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독립 미술파에 속하며, 파리 화단의 특이한 화가로서 인정되었다. 조각도 하여, 브랑쿠시, 콕토 등과도 사귀었다. 그러나 돌조각에서 나오는 먼지로 폐가 나빠지자 조각을 그만두고 그림만 그렸다. 1912년 파리 가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고 초상화 한 점 당 10프랑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남으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에겐 모델을 자청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오를로프 (Chana Orloff)의 소개로 14세 연하의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 (Jeanne Ebuterne)을 만났다. 잔은 모딜리아니와 같은 아틀리에를 쓰는 일본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모델이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이었던 잔의 가족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마약을 하는 유대인 모딜리아니와의 교제를 싫어했지만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같은 해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주선으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외설적이라는 비판만 받은 채 전시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918년 모딜리아니는 잔과 니스에서 요양을 했고 딸 지오바나를 얻었다. 1920년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자선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4세에 요절하였다. 당시 임신 8개월째였던 잔은 모딜리아니가 죽고 이틀 뒤에 투신 자살했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페르 라 셰즈 묘지에 묻혔고,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었다.
-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지독한 사랑
“우수에 젖은 표정과 긴 목의 초상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 ~ 1920)와 그의 영원한 사랑이자 예술의 영감이 되었던 뮤즈, 잔느 에뷔테른 (Jeanne Hebuterne, 1898 ~ 1920)”
잔느는 모디의 아내로 그동안 미술사에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모디에게 모델로서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그와 함께 작업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표출했던 화가 지망생이었다. 모디는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저주받은 화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리브른느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선천적인 늑막염, 장티푸스, 폐렴 등으로 어려서부터 허약했다. 1913년경부터는 건강의 이유로 그가 좋아했던 조각을 하지 못하고 주위 아는 사람이나 창녀들을 모델로 주로 초상화와 누드를 그렸는데, 특히 아프리카의 원시조각상에 영향을 받은 그는 긴 목의 애수와 관능적인 여인상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15살의 나이에 이미 화가의 꿈을 지녔던 어린 잔느는 미술학교에 다니며 몽파르나스의 가난한 예술가들과 교우하고 때론 그들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잔느는 수업이 끝나면 카페 로통드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어느 날 깔끔한 코듀로이와 붉은 스카프를 두른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잘 생긴 외모에 교양과 매너가 있어서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으나, 너무 가난해서 빵을 사기 위해 헐값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술과 마약, 방탕한 생활에 의지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예술가였다.
1917년 봄, 조각가 Chana Orloff는 화가들의 모임에서 모딜리아니에게 잔느를 소개해준다.
1916년 몽파르나스에서의 가난했던 시절, 그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즈보로프스키는 그랑쇼미엘 8가에 있는 빌딩 꼭대기에 모디와 잔느의 작업실을 내어준다.
1917년부터 2년 동안 잔느는 수업이 끝나면 작업실에서 그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키워간다. 어릴 때 부터 폐결핵을 앓던 모디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로 둘은 니스의 해변으로 요양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둘은 부부로서 살았지만, 잔느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합법적인 예식을 치르지 못한다. 14살 연상에 알콜중독에 마약복용, 결핵으로 몸까지 성하지 않은 가난한 무명화가에게 딸을 보내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겠다.
하지만 잔느와 함께하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술도 줄였고, 마약도 끊게 되었다.
둘은 가난하지만 기쁨이 충만한 날들을 보내며 모딜리아니는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그려낸다. 이 시기에 모딜리아니의 대표적인 초상화들이 가장 많이 탄생했고,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딸 잔느 모딜리아니가 태어난 것도 니스에서였으며, 목이 긴 여인으로 유명한 잔느의 초상화들을 제작한 곳도 니스였다고 한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게요…”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못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와야 했고, 병원에 실려간 모딜리아니는 입원 3일 후 사망한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이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잔은 모딜리아니의 주검에 달라붙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근 이틀이 지난 1920년 1월 26일 새벽, 잔느는 가족과 함께 머물던 아파트 5층에서 창문에 몸을 던진다.
22살의 그녀는 8개월 된 둘째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모딜리아니의 연인이기 전에 화가로서 잔느의 재능을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그녀가 살아남아 계속 작품을 그렸다면 아마 뛰어난 화가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잔느는 자신의 재능도 삶도 모두 포기한 채 사랑하는 연인인 모딜리아니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한 길을 택했다. 모딜리아니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앙드레 살몽은 잔느의 죽음에 이런 시를 남겼다.
“편히 잠들라, 애처로운 잔느 에뷔테른이여.
편히 잠들라, 당신의 죽은 아이를 요람에 넣어 흔들었을 애처로운 여인이여.
편이 잠들라, 더 이상 헌신적일 수 없었던 여인이여.
생 메다르 교구의 마리아 상과 닮았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죽은 아내여.
편히 잠들라, 흙에 덮여가는 그 새하얀 은둔처에서.”
가난 속에서 죽었고, 죽은 후에 유명해진 모딜리아니와 영원한 사랑의 신화로 남은 잔느의 이야기는 어떤 비극보다도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사후
모딜리아니의 외동딸인 잔 (어머니 잔 에뷔테른의 이름을 따서 붙였음) 모딜리아니 (1918 ~ 1984)는 아메데오의 누나인 마르가리타가 양육했다.
화가가 되어 고생만 하다 죽은 남동생의 인생이 싫었던 마르가리타는 조카딸에게 부모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태인이라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시달림을 받던 잔은 프랑스로 피신하기도 했다.
나중에 부모에 대해 알게 된 딸 잔 모딜리아니는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서 아버지 모딜리아니에 대한 자료를 모아 평전 ‘모딜리아니 : 인간과 신화’ (1959)을 펴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