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A Single Spark
감독) 박광수 / 주연) 홍경인, 문성근, 임일찬, 이주실 / 제작) 1995년
법대생 김영수 (문성근)는 수배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평화시장 청계 피복노조의 한 노동자였던 전태일 (홍경인)의 분신자살사건 이후 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전태일의 어머니를 찾아가 그의 일기장을 받아오고, 그를 알던 사람들의 증언을 취재하며 그 노동자의 불꽃 같았던 짧은 삶과 죽음울 되살려 내려고 애쓴다. 그 작업은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김영수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유일한 일이다.
영수는 자신과 동거하는 정순(김선재)을 통해 노동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태일의 평전을 준비하면서 구체적으로 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한국 노동현실의 모순에 눈을 떠간다. 그러면서 과거 전태일의 활동은 현재 영수의 활동을 성찰하게 하고 영화적으로 두 가지 시간대가 동시에 진행된다.
– 노동자로 살다 화염 속 이슬처럼 죽은 전태일의 일생을 담은 영화
이 영화는 전태일 시대의 역사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김영수의 70년대 중반 상황을 끌어들여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한 청년 노동자가 전태일 평전을 손에 든 채 95년의 그 거리에 나타나고, 김영수가 그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 세계에 제2, 제3의 전태일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박광수 감독은 95년 11월 전태일 분신 25주년 기념작으로 이 영화를 제작했다. 또한 이 영화는 노동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15억원이 들어갔고, 이 돈은 노동자나 노동 단체 등을 중심으로 모금되어 만들어졌으며, 당시 전국 80만의 관객을 동원했고 이익금은 다시 소액 투자자에게 돌아갔다.
○ 출연
박광수 – 감독
홍경인 – 전태일 역
문성근 – 김영수 역
김선재 – 전순 역
이주실 – 전태일 모
명계남 – 전태일 부
독고영재 – 김영수 선배
유순철 – 김영수 부
박광수 감독은 일관되게 리얼리즘 화법을 구사하며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작가감독이다. 1955년 속초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재학 중에 가입한 영화서클 ‘얄라셩’과 졸업 후에 결성한 ‘서울영화집단’을 통해서 8mm영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등 7편을 감독했으며, 1985년 프랑스 영화학교 ESEC를 졸업한 후 이장호 감독의 [이장호의 외인구단]에서 조감독을 했다. 장선우 감독과 함께 80년대 뉴웨이브라 칭할 만한 흐름을 조성했다.
데뷔작인 88년 [칠수와 만수]는 주변부 삶을 살아가는 청년 둘을 통해 한국사회의 모순을 통렬하게 풍자해 성공을 거두었다. 90년 [그들도 우리처럼] 역시 전작의 기조 위에 탄광촌의 보다 구체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서 호평을 받았다. 분단 모순을 해외로케로 그린 91년 [베를린 리포트]는 다소 미진했지만, 93년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아름다운 유년 시절에 깊이 스며든 이념의 문제를 설득력있게 잡아냈고, 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담담하게 70년대 어느 노동자의 삶이 현재에까지 닿아있음을 드러냈다. 99년 [이재수의 난]은 구한말의 시대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반외세, 반봉건과 맞선 민초의 반란을 다룬 시대극이었지만, 감독 특유의 객관적 영상어법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관객들과 멀어진 작품이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보기 드물게 잘 짜여진 회화적인 화면과 구도를 자랑하는데, 종종 내러티브와 융화하지 못하는 점이 눈에 띈다.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 디지털 작업에 참여하였다.
연출하는 영화마다 늘 사회적 주목을 받고 국내외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로 20년간 재직했다.
[필모그래피] 칠수와 만수(1988)|감독 / 그들도 우리처럼(1990)|감독 / 베를린 리포트(1991)|감독 / 그 섬에 가고 싶다(1993)|감독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감독 / 이재수의 난(1998)|감독 / 눈부신 날에(2005)|감독
○ 수상
1995년 청룡 영화제 3개 부문 수상, 춘사 영화제 5개 부문 수상, 홍콩 국제 영화제 초청, 베를린 영화제 본선 진출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16회 청룡영화상 – 작품상, 감독상 (박광수), 촬영상 (유영길)
○ 내용
– 암울한 한국 현대사의 상징, 전태일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영화 / 전태일 열사의 사랑과 삶, 불의한 사회의 모순한 항거한, 우리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영화
뿌연 먼지, 미싱 돌아가는 소음이 가득한 평화시장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전태일은 언젠가는 돈도 벌고 못다 한 공부도 계속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15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과 인간 이하의 생활 속에서 언제나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근로기준법을 발견하고부터 전태일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동료들과 함께 바보회를 조직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시도하지만 계속 현실의 두꺼운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곳에도 쓸모 없는 근로 기준법전을 자신과 함께 불살라 버리는 일뿐.법대를 졸업했지만 수배자인 김영수는 막연한 이미지와 관념의 덩어리로부터 전태일이란 인간의 영혼을 느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전태일의 어머니로부터 넘겨받은 일기를 읽고, 그를 알던 사람들의 증언을 취재하며 그 노동자의 불꽃같았던 짧은 삶과 죽음을 되살려 내려고 애쓴다. 그의 삶을 파고들수록 김영수는 전태일에게 집착하게 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전태일에게 오버랩시키게 되며 그 작업은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김영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비상구가 된다. 그러나 전태일의 삶이 역사와 가까와질수록 결단을 요구받았던 것처럼 김영수의 개인적인 삶도 자기희생의 통과제의를 거쳐야만 한다. 김영수에게는 `사랑의 실천`과 `실천의 사랑`을 저울질하는 정순이 있다.
–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해 결단코 투쟁을 해야겠다”
이 영화는 노동자 전태일의 일대기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김영수 (문성근)는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에 대한 평전을 준비한다. 영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를 받고 있으며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영수는 자신과 동거하는 정순 (김선재)을 통해 노동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태일의 평전을 준비하면서 구체적으로 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한국 노동현실의 모순에 눈을 떠간다. 전태일은 서울에 상경하여 우산을 파는 행상을 하다가 청계천의 재봉공장에 입사한다. 재봉공장은 열악한 근무조건과 노동 착취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곳이었다.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노동 현실 속에서 노동법이 무력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과거 전태일의 활동은 현재 영수의 활동을 성찰하게 하고 영화적으로 두 가지 시간대가 동시에 진행된다. 전태일은 결국 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해 근로기준법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분신한다. 전태일의 희생은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과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한 밑거름이었으며 대학생 영수의 시선으로 재조명된다.
○ 의의와 평가
코리안 뉴웨이브 세대 작가들은 한국의 사회 현실과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영화적으로 재현하는 작품을 썼다. 그 중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노동자의 삶과 수배 받은 대학생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노동문제와 학생운동에 대한 성찰을 다룬 리얼리즘의 영화에 속한다. 박광수 감독의 중심 주제는 분단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모순 재현과 노동 문제를 통한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이다. 이 작품은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재현한 리얼리즘계열의 작품이다. 박광수의 작품은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기대하는 의미에서 피사체와 객관적인 거리를 두는 카메라와 역사적 현실을 바라보는 등장인물의 시선이 개입된다. 이 작품도 김영수라는 인물의 개입과 거리를 둔 카메라를 통해 역사를 객관화하고 있다.
○ 인간 전태일 (全泰壹, 1948 ~ 1970)
전태일 (全泰壹, 1948년 9월 28일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2],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이 전신에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그는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명동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방치하였다. 결국 당일 밤 10시에 요절했다.
– 유서 [전문]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