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 / 콘스탄틴 대제 : Constantine and the Cross / Costantino il grande
감독) 리오넬로 데 펠리체 / 주연) 코넬 와일드, 벨린다 리 / 1962년
– 기독교 옹호한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일대기
로마가 사두정치에 의해 통치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던 시절. 콘스탄티누스는 부친 클로루스와 함께 변방에서 야만족과 전투를 하며 공을 세우고 있다. 동로마와 서로마를 다스리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용맹한 콘스탄티누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장차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 임명하려 한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은 욕심에 로마 교외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친위대의 눈을 피해 몰래 집회를 열던 기독교도들에 의해 구출되면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로마로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는 평소 그를 좋아하던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를 만나 사랑을 확인한다. 법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재판을 지켜보던 콘스탄티누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엘레나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투기장에서 사자 밥으로 던져지는 기독교도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황제에게 청원해 엘레나를 포함한 기독교도들의 목숨을 구한다.
결국 막센티우스의 계략에 걸려든 콘스탄티누스는 잠시 로마를 떠나 부친인 클로루스에게로 몸을 피신하지만, 얼마 후 클로루스는 전사한다. 죽기 전 클로루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생모에 대해 말을 하며 그녀가 기독교도라고 밝힌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기독교를 알게 된 후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를 옹호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영웅적 면모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황제이자 인간으로서 겪는 고뇌와 갈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 이 영화는 야심을 위해서는 부모를 포함한 가족까지 기꺼이 희생시키는 로마 집권층의 비열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 / 콘스탄틴 대제 (Constantine and the Cross / Costantino il grande)
.감독: 리오넬로 데 펠리체
.주연: 코넬 와일드, 벨린다 리
.제작: 페르디난드 펠리시오니 (Ferdinand Felicioni)
.각본: 마이클 오들리 (Michael Audley), 엔니오 데 콘치니 (Ennio De Concini), 리오넬로 데 펠리체 (Lionello De Felice), 디에고 파브리 (Diego Fabbri), 어네스토 귀다 (Ernesto Guida), 풀비오 팔미에리 (Fulvio Palmieri), 프랑코 로세티 (Franco Rossetti), 구글리엘모 산타젤로 (Guglielmo Santangelo)
.촬영: 마시모 달라마노 (Massimo Dallamano)
.음악: 마리오 나심베네 (Mario Nascimbene)
.편집: 마리오 세런드레이 (Mario Serandrei), 가브리엘르 발리알 (Gabriele Varriale)
.미술: 프랑코 롤리 (Franco Lolli)
.의상/분장: 지안카를로 바르톨리니 살림베니 (Giancarlo Bartolini Salimbeni)

○ 출연
코넬 와일드: 콘스탄틴
벨린다 리: 파우스타
마시모 세라토: 막센티우스
크리스틴 카우프만: 리비아
포스토 토찌: 하드리안
티노 카라로: 막시미아누스 황제
카를로 닌치: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
비토리오 사니폴리: 아풀레이우스
엘리사 세가니: 엘레나
리아 안젤레리: 클라비아
프랑코 판타지아: 로마인 군인
라우로 가졸로: 아모디우스
난도 가졸로: 리치니우스
베리아노 지네시: 토투러
로리스 기지: 로마인 검찰관
엔리코 글로리: 리비아의 아빠
조레 마우로: 세리
안니발레 닌치: 갈라리우스
카를로 탬버라니: 디오클레티안
레나토 테라: 교도관

○ 줄거리
로마가 사두정치에 의해 통치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던 시절, 콘스탄티누스는 부친 클로루스와 함께 변방에서 야만족과 전투를 하며 공을 세우고 있다.
부친 클로루스는 서로마의 부제 (부황제)로, 당시 각각 동로마와 서로마를 다스리던 정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용맹한 콘스탄티누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장차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 임명하려 한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은 욕심에 로마 교외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친위대의 눈을 피해 몰래 집회를 열던 기독교도들에 의해 구출되면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된다.
로마로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는 평소 그를 좋아하던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를 만나 사랑을 확인한다.
법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재판을 지켜보던 콘스탄티누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엘레나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얼마 후 투기장에서 사자 밥으로 던져지는 기독교도들에게 연민을 느끼곤 황제에게 청원해 엘레나를 포함한 기독교도들의 목숨을 구한다.

결국 막센티우스의 계략에 걸려든 콘스탄티누스는 잠시 로마를 떠나 부친인 클로루스에게로 몸을 피신하지만, 얼마 후 클로루스는 전장에서 전사한다.
죽기 전 클로루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생모에 대해 말을 하며 그녀가 기독교도라고 밝힌다.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엘레나가 자신의 생모임을 알게 된다. 부친이 사망한 후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의 황제가 된다.
당당히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금한다는 칙령을 발표하고, 파우스타를 자신의 궁으로 불러 결혼한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교활한 막센티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를 희생시키며 상원을 설득해, 콘스탄티누스를 왕위에서 밀어내고 자신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
황제가 된 막센티우스는 기독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콘스탄티누스를 파멸시키기 위해 엘레나와,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인 파우스타까지 볼모로 삼는다.
결국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생사를 건 결전을 치르고,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의 상징을 앞세워 승리한다.

○ 콘스탄티누스 / 콘스탄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AD 280 ~ 337) 대제의 생애
흔히 우리가 콘스탄틴 대제라고 부르는 로마 황제의 본명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AD 280 ~ 337)이다. 무척 긴 이름이다. 그러나 흔히 콘스탄틴 대제, 혹은 콘스탄틴 1세라고 부른다. 로마 황제가운데 기독교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황제 가운데 최초의 기독교인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공인했기 때문이다. AD 313년의 일이다. 그 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한 사람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로서 AD 393년의 일이다.
콘스탄틴은 로마 군대 장교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Constantius Chlorus)와 어머니 헬레나 (Helena)의 아들로 AD 280년 2월 27일 태어났다. 헬레나는 해방된 동방의 노예로서 미인이었고 독실한 기도교인이었다고 한다. 헬레나는 콘스탄티우스와 결혼은 했지만 법률상의 아내는 되지못했다. 당시 로마법은 고급장교들에게 속주의 주민들과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은 서부 유럽을 장악한 통치자로서의 탁월한 정치력을 보였는데 312년 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폭군으로 규정하고 그를 물리치기 위해 이탈리아로 출정하였다.
로마의 티베르 강에 놓여있는 밀비안 다리 (Milvian Bridge)에서 막센티우스의 군대와 마주 쳤을 때 상대방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고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승산이 없는 전투 같았다. 콘스탄틴은 그러나 전투 전에 꿈에서 그의 군대가 승리할 수 있는 표징 (sign)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싸인으로 이겨라 (In this sign, Conquer)”라는 라틴어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그는 로마로 진군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이 전쟁의 승리는 결국 콘스탄틴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그 사인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312년 10월 28일에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틴을 최고통치자로 영접하였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하였다.
여기서 그는 환상을 보여 준 것이 태양신이라고 믿었는데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부족한 이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밀비안 다리 전투를 도와준 이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때부터 그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전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콘스탄틴은 313년 봄 누이동생과 리키니우스 (Licinius) 황제의 결혼식에 참석하기위해 밀라노에 갔고 거기서 두 황제는 세계사에 너무 잘 알려진 밀라노 칙령 (Edict of Milan)이란 포고령을 선포했다.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에 관한 관용정책으로서 기독교는 그때부터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법률 앞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음지에서 고난 받던 기독교가 양지로 옮겨오게 되었다. 몰수되었던 교회 재산이 반환되었고 국가가 교회를 보조하고 성직자에겐 공적인 의무가 면제되었다.
이때부터 베드로 대성당, 예루살렘 무덤성당, 베들레헴 예수 탄생성당 등이 건립되는 등 기독교 예술과 건축이 꽃피기 시작했다. 현재 로마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은 그 후 여러 번 개축되었지만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의 대리석 조각이 성당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헬레나는 동방종교에 의해 성자로 추대되었다).

콘스탄틴은 315년 십자가 처형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321년에는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공인하였고 국법에 의해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하였고 이로써 교회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통치기간동안 로마 제국의 수도를 당시의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유럽과 소아시아 두 대륙을 통치하는 최선의 장소로 그 곳을 생각한 것이다. 330년 5월 이 도시를 콘스탄티노플, 즉 ‘콘스탄틴 황제의 도시’라고 명명했다.
콘스탄티노플은 한때 융성했고 서기 395년 로마제국의 분열로 인해 동 로마 제국, 혹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로마와 콘스탄틴노플은 점점 멀어져서 11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로마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크게 비난하고, 교황 레오 9세의 화해 사절을 받지 않아 파문당함으로 분열이 확정되어, 마침내 그리스 정교회 (동방 정교회)로 분리되었다. 지금까지도 로마 캐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는 여러 번의 통합시도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콘스탄틴노플이 공포된 지 천년의 역사가 지난 후엔 오토만제국의 침략을 받아 도시 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뀌게 되었다. 더구나 비잔틴 제국의 융성했던 그 시대 기독교 문화의 상징인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터키 여행을 가면 비잔틴 시대의 벽화 등은 회칠한 채 벽속에 숨어 있고 이슬람의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을 만나게 된다.
콘스탄틴 황제는 AD 325년 당시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면서 여기저기 논쟁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공의회 기간 동안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 채택, 예수를 신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 하는 등의 일련의 중요한 신학적 정리 작업이 실행되었다. 콘스탄틴이 직접 이 종교회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토론에 참여하는 등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지고 있다.
“정말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인이었나?” 이 질문에는 여러 이론이 존재하고 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 황제로서 기독교 공인 등 그의 정치적 결단은 교회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그는 왜 세례를 미루면서 죽기 전에 겨우 세례를 받았을까? 무언가 미심쩍은 데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틴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천재였기 때문에 다만 기독교를 정치에 이용한 것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콘스탄틴으로 인해 새로운 환경을 맞이한 기독교가 더욱 신학연구에 몰두함으로 아타나시우스, 갑파도기아 교부들, 제롬, 앰브로스, 어거스틴과 같은 위대한 교부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고 보는 긍정적인 견해가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견해는 기독교의 공인이 결국 교회 타락의 문을 활짝 열어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쉽게 신자가 되고 정치 군사적인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고 이름뿐인 엉터리 신자 시대를 도래하게 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콘스탄틴으로부터 시작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선은 교회에 대한 축복 보다는 오히려 손해를 더 많이 가져왔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