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헨리 5세 : Henry V
감독) 케네스 브래너 / 주연) 케네스 브래너, 폴 스코필드, 데릭 자코비, 이안 홀름, 엠마 톰슨 / 1989년
영국의 왕 헨리 5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책을 멀리하고, 시종잡배와 어울리며, 주색잡기 등을 일삼아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주었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자 이론은 논리정연했고, 군인으로도, 무인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또한 그는 충신을 보는 안목도 있어 겸허한 자세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덕망 높은 왕이 된다.
그러나 조부 에드워드 3세의 직계로서 프랑스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 출연 / 제작
– 제작진
감독: 케네스 브래너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
제작: 르네상스 필름스
촬영: 케네스 맥밀란
음악: 패트릭 도일
수입: 삼호필림
– 출연진
폴 스코필드
데릭 자코비
이안 홀름
엠마 톰슨
알렉 맥코웬
주디 덴치
크리스찬 베일
사이먼 셰퍼드
– 수상
아카데미 의상상,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감독상, 유럽 영화상 남우주연상 등

○ 줄거리
장차 영국 왕실을 이끌어갈 어린 왕자 헨리 5세는 일찍부터 잡기와 장난에 눈을 더 도무지 학문에는 뜻을 두지 않아 왕실 어른들의 근심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헨리 5세의 한심한 행동거지는 성장함에 따라 점점 심해져서 지정잡배와 어울려 다니며 주색과 잡기에 몰두해 황태자로서의 신분에 먹칠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도둑의 무리에 끼여 부랑 생활을 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왕실에서는 헨리가 과연 영국의 왕으로서 적합한 인물인가하는 회의와 우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413년 헨리 4세가 서거하고 영국 왕실은 걱정 속에 헨리 5세를 왕위에 옹립한다. 그런데, 천하의 망나니 왕자였던 헨리 5세는 왕이 됨과 동시에 그의 모든 악행을 청산하고 의젓한 왕으로서 변신, 앙실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학문에는 게을리 했었지만 그의 이론은 논리정연했고, 무술을 연마히자 않았어도 그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훌륭한 군인이요 무사였다. 게다가 그는 충신을 볼 줄 아는 밝은 눈을 가졌으며 정사를 돌봄으로도 현명하고 검허하게 임했다. 헨리 5세가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덕망 높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에드워드 3세의 직계 후손임에도 프랑스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데에 분노한다. 헨리 5세는 마침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한다
이어진 아쟁쿠르 전투에서 2만의 영국 군대와 9만명의 프랑스 군대가 대치한 불리한 전투.
나무 기둥을 뾰족하게 깎아 방어진을 구축하고 가까이 근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화살을 퍼붓는 전략, 왕이 직접 진두지휘, 독려하는 싸움은 진흙탕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도 힘든 이전투구의 싸움이었지만 숫적인 열세에도 잉글랜드는 대승을 거둔다.
이후 헨리 5세는 영국 왕실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프랑스 공주 까드린느와 결혼하여 반목과 전쟁으로 얼룩졌던 과거 역사를 청산한다.

○ 감독 케네스 브래너
1960년 12월 1일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공장 지대 주변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케네스 브래너는 그의 나이 열 살 무렵에 이미 소문난 셰익스피어 광이었다. 그가 왕립연극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연극무대에 섰던 20대 무렵에 그는 이미 연극비평가들로부터 ‘새로운 올리비에’라는 호칭을 얻었다. 23살에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 들어가 1984년 공연된 <헨리 5세>의 주역을 맡음으로써 그는 로렌스 올리비에의 뒤를 잇는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로 두각을 나타냈다. 1987년 케네스 브래너는 영화 <한창 때>에서 조연을 맡고, <시골에서의 한달>의 주연을 맡으며 영화계에 데뷔한다. 이 무렵 그는 데이빗 파핏과 함께 르네상스 씨어터 컴퍼니를 창립하여 <햄릿>을 공연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고, <리어왕>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는 연기자로서만이 아니라 직접 극본을 쓴 <퍼블릭 에너미>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1989년 그는 르네상스 씨어터 컴퍼니의 운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서전 『시작 (Beginning)』을 출판했다. 같은 해 그는 처음 감독 데뷔작으로 <헨리 5세>의 영화화를 시도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로렌스 올리비에의 계승자였고, 그에 대한 도전자였다. 그는 언제나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배우들과 자신이 비교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로렌스 올리비에나, 오손 웰스’가 아니라 케네스 브래너 자신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독 데뷔작으로 1944년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과 타이틀 롤을 맡았던 <헨리 5세>를 택했는지 모르겠다.
전쟁 중 국민들의 사기앙양을 위해 영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이루어진 영화 <헨리 5세>와 달리 케네스 브래너의 <헨리 5세>는 매우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 설령 그 자신이 로렌스 올리비에처럼 하늘을 뒤덮는 화살 세례를 촬영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그럴 만한 자금이 없었고,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로렌스 올리비에의 시대와 케네스 브래너의 시대는 달랐다.
케네스 브래너의 시대는 애국적인 분노에 휩싸여 있던 로렌스 올리비에 시대의 전쟁은 사라지고, 단지 오래전에 자국 영토였다는 이유만으로 이역만리 떨어진 아르헨티나 앞바다의 섬 하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영국 젊은이들과 아르헨티나 젊은이들이 죽어야 했던 전쟁을 치른 직후였다.
케네스 브래너는 우국충정의 전쟁 스펙타클보다는 음산하고 침울한 분위기로 백년전쟁 중 일어났던 아쟁쿠르 전투를 재현해내고 있다. 그는 비장한 대사들과 현실 역사에 기댄 해석을 통해 <헨리 5세>를 재현해냄으로써 비평가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고, 뉴욕비평가협회를 비롯해 유럽 전역의 감독상을 휩쓴다. 영화 <헨리 5세>를 통해 아카데미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케네스 브래너는 이후 엠마 톰슨과 결혼해(결혼은 6년간 유지되었다) 할리우드로 직행한다. 그는 공공연히 셰익스피어가 자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틀림없이 희곡 대신 시나리오를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1991년 <환생>을 감독하고 주연배우로 출연하고, 1992년엔 영국으로 돌아와 코미디 드라마 <피터의 친구들>을 감독했다. 그는 시시때때로 할리우드의 주류 세계 속에 편입되고 싶은 열망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할리우드’적이기엔 너무 ‘셰익스피어적’이었다. 그는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결국 셰익스피어로 돌아왔다.
1997년 케네스 브래너는 희곡 『햄릿』을 4시간짜리 <햄릿> 영화로 옮겼다. 그는 자신의 은퇴작으로 자신이 직접 감독, 주연을 맡은 <리어왕>을 촬영하고 싶다는 열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그는 우선 좀더 늙어야 할 것이다. 물론 늙어가는 중에도 여전히 할리우드 작품들에 출연하며 재능을 축낼 것이고, 몇 번의 실패와 성공을 거듭할 것이다. <리어왕>은 그런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테니까.

– Filmography
1989년 헨리 5세 (Henry V)
1991년 환생 (Dead Again)
1992년 피터의 친구들 (Peter’s Friends), 스완송(Swan song) – 단편
1993년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
1994년 프랑켄슈타인 (Mary Shelley’s Frankenstein)
1995년 햄릿 만들기 (In The Bleak Midwinter)
1996년 햄릿 (Hamlet)
1999년 베티 쉬멜 이야기(The Betty Schimmel Story) – 다큐멘터리
2000년 사랑의 고통이 사라지다 (Love’s Labour’s Lost)

○ 영화 이모저모
Non nobis domine domine
저희에게가 아니라, 주여 주여
Non nobis domine
저희에게 아니라 주여
sed nomini sed nomini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이름으로.
tuo da gloriam
영광을 돌리소서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은 다큐멘터리와 TV물 이외에 단 두 편의 극영화 사운드트랙만을 지휘했다. 바로 베를린 필과 함께했던 ‘향수’, 그리고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각색·주연을 도맡았던 셰익스피어 원작의 ‘헨리 5세’뿐이었다.
‘헨리 5세’는 영국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창작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의 견해다. 온갖 기행을 일삼던 망나니 왕자 헨리 5세는 아버지 헨리 4세의 서거 이후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새롭게 마음을 다진다. 과거 부랑자들과의 생활을 통해 민심을 정확히 읽어내고, 훌륭한 군인으로, 그리고 올바른 정치적 신념으로 다수의 신임을 얻어내던 중, 오만한 프랑스와의 마찰로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가 이끄는 6000명의 영국군대가 2만명의 프랑스군대를 격파해내면서 승리를 쟁취한다.
1989년 당시 겨우 32세였던 케네스 브래너가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색채가 선명한 미술, 연극에서는 불가능한 요소들을 살려낸 연출, 그리고 명배우들의 당당한 연기가 캐네스 브래너의 해석을 더해 비로소 완성됐다. 특히나 그는 내면적인 묘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현시대의 내래이터가 직접 개입하는 장면들 또한 이색적이었다. 캐네스 브래너는 이후에도 꾸준히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영화화해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작곡가 패트릭 도일이 있었다. 왕립 스코틀랜드 음악원을 졸업한 그의 첫 영화음악이 바로 본 작이었으며, 이후에는 ‘해리 포터’와 ‘토르’, 그리고 ‘혹성탈출’ 등과 같은 블록버스터 또한 담당하게 된다. 시적인 열정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영국적인 고전미로 점철된 본 작은 캐네스 브래너의 표현대로 멜로디에 대한 패트릭 도일의 강한 본능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그리고 무엇보다 위풍당당한 곡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이먼 래틀의 지휘, 그리고 버밍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이 곡들은 녹음된다.
전쟁 직전 헨리 5세의 장문의 연설 장면은 희곡으로도 무척 유명하다. 많은 배우들이 가장 연기하고 싶어하는 대목이기도 했는데, 영국군의 사기를 올리는 이 연설장면 뒤에 ‘성 그리스핀 축일’ 테마가 흐른다. 음악 또한 감동과 고양감으로 중무장하고 있는데, 패트릭 도일의 콘서트에서는 실제로 캐네스 브래너가 출연해 연주되는 음악과 함께 대사를 읊어내면서 감동을 재연시키곤 했다.
전투 직후 사망한 아역배우 시절의 크리스천 베일을 등에 업고 헨리 5세가 전진하는 4분간의 대규모 롱테이크 장면에서 영화는 정점에 이른다. 직접 출연한 패트릭 도일이 노래를 시작하고 서서히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더해지는 ‘저희가 아닌, 주께 (Non Nobis, Domine)’가 이 장면에 삽입된다. 시편의 구절을 인용한 이 합창곡은 마치 숭고하고 비장한 장송곡처럼 울려 퍼졌다.
시대를 넘어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이 뜨거운 감정은 영국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는 드문 해피엔딩인 본 작을 역사물, 혹은 액션 활극 정도로 단순히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젊은 날 캐네스 브래너의 패기, 그리고 놀라운 데뷔를 치러낸 패트릭 도일의 천재성이 집결된 비범한 ‘격전지’로 훗날 기록될 것이다.

○ 언론소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599년경 쓴 것으로 추정되는 희곡 <헨리 5세>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이미 두 편의 걸출한 작품이 세상에 나와 있다. 2차 대전 말기, 전시 체제의 영국민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든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주연의 클래식 <헨리 5세>(1944)와 역시 영국출신의 배우 케네스 브래너의 혁신적인 세익스피어극 <헨리5세>이다. 이 두 작품은 곧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더 킹: 헨리 5세>와 달리 세익스피어 원작에 충실하다. 특히 케네스 브래너 작품은 더욱 그러하다.
– ‘헨리 5세’와 세익스피어
(나중에 ‘헨리5세’가 되는) ‘할’은 1386년 헨리 오브 볼링브룩(헨리 4세)의 큰아들로 태어나서, 웨일스 공이 되었고 아버지가 죽자 1413년 왕위에 오른다. 당시 머리에 씌워진 왕관의 무게는 잉글랜드의 국왕이며, 아일랜드의 영주이며, (프랑스에 있는) 아키텐의 공작이다.
랭카스터의 공작이었던 아버지 볼링브룩은 (사촌인) 리처드 2세가 런던을 비운 사이 왕위를 찬탈하고는 헨리 4세가 된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귀족의 도움을 받았기에, 왕위를 찬탈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는 등 제왕의 자질을 보여주었고, 그것 때문에 부왕과의 알력도 있었다. 세익스피어는 ‘헨리 5세’를 드라마틱하게 왕좌에 올린다. 젊은 시절의 ‘할’은 존 폴스타프라는 난봉꾼과 어울리며 술집을 전전하며 방탕한 세월을 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고 왕위를 이어받자, 어느 순간 개과천선한, 혹은 용의주도하게 왕위를 준비한 젊은 개명군주처럼 행동한다. 왕궁의 의심스런 작자들-귀족들, 성직자들-의 배신과 (젊은 시절의 방황에 대한) 경멸 등의 눈초리를 일거에 제압하고, 프랑스와 일전을 치르게 된다.
세익스피어는 <헨리 5세>에서 왕이 어떻게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 땅에 발을 디딘 후 하플뢰르 성과 아쟁쿠르 (애진코트, Battle of Agincourt)에서 프랑스군을 격멸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연극무대에 올리는 ‘대본’을 쓴 작가이기에 보여주는 이야기는 순전히 장엄한 나래이션과 몇몇 무대 위 배우들의 과장된 제스처로 전달될 것이다.
그러니, 왕궁의 화려함도, 귀족들의 뺀질거림도, 아쟁쿠르의 아비규환도 바랄 것은 없다. 대신, 언어의 연금술사 셰익스피어는 헨리5세의 용맹함을 글자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에 녹여낸다.
– 영민한 케네스 브래너
케니스 브래너 감독은 세익스피어와 로렌스 올리비에가 쌓아올린 찬란한 <헨리 5세>에 다시 한 번 도전한다. 영국 왕립 셰익스피어극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29살에 이 영화를 만든다. 감독 데뷔작이자, 주인공 헨리5세 역을 직접 해낸다. 그는 세익스피어의 장엄함과 영화적 재미를 완벽하게 결합시킨다. 물론, <브레이브 하트>이후 쏟아지는 블록버스터의 기풍을 기대하지는 마시라. 기본적으로 세익스피어극은 대사와 배우들의 진지함으로 완성되는 서사극이니 말이다.
넷플릭스 ‘더 킹’에서 ‘할’과 함께 맹활약을 하는 ‘폴스타프’ 캐릭터는 원래 세익스피어의 또 다른 희곡 ‘헨리4’ (1부, 2부)에 비호감 인물로 등장한다. ‘헨리5세’에서는 ‘할’왕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 런던의 더러운 여관방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그를 따르는 무리의 대사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아마도 케네서 브래너의 <헨리 5세>를 보면서 제일 궁금한 것은 ‘폴스타프’란 존재여부보다는 프랑스 공주 캐서린의 대사일 것이다. 헨리5세는 프랑스어를 모르고, 공주는 영어를 모른다. 이제 프랑스를 접수한 헨리5세는 ‘전리품’으로 프랑스 공주를 얻고 로맨틱하게 프로포즈를 하게 된다. 삶과 죽음이 희롱하는 전쟁, 국가적/민족적 자부심과 자존감이 걸려있는 이야기에서 두 남녀의 혼담 장면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특히, 전세가 기울 때 캐서린 공주는 시녀에게서 몇 마디 영어 단어를 배우는 장면이 있다. ‘왓차플레이’에 올라온 자막은 불친절하기 그지없다. 세익스피어 희곡에도 그 장면이 실제 나온다. 귀엽다. (실제, 헨리 5세 역의 케네스 브래너와 캐서린 역의 1989년 결혼했다. 물론, 이후 헤어진다.)
이 영화는 이제는 보기 어려워진 중후하고도, 장엄한, 우아하고도, 치열한, 그러면서도 인문학적 아우라가 물씬 풍기는 셰익스피어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KBS미디어 박재환)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