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1492 콜럼버스 : 1492 Conquest of paradise
감독) 리들리 스콧 / 주연) 제라르 드빠르디유, 시고니 위버 / 1992년
1492 콜럼버스 (1492: The Conquest Of Paradise)는 스페인에서 제작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92년 모험, 드라마 영화이다.
제라르 드빠르디유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리들리 스콧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반젤리스 (Vangelis)가 음악을 담당했다.
이 영화는 컬럼버스의 여행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의해 개봉되었다.
500년 전 공포와 미신에 휩쓸렸던 스페인은 왕정과 무자비한 종교 재판으로 꿈을 갖는 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이 절대 권력에 강력히 도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운명적인 힘에 이끌리듯 어둠의 바다를 향해 나선다. 명예, 황금 그리고 더욱 위대한 주님의 영광 (and The Greater Glory Of God)을 찾아서…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리들리 스콧
제작: 로셀린 보스크, 마크 보이먼, 피어 파기스
기획: 미미 포크 기틀린
각본: 로즈 보쉬
주연: 제라르 드빠르디유, 시고니 위버
촬영: 아드리안 비들
음악: 반젤리스
협력프로듀서: 가스 토머스
미술: 노리스 스펜서
의상: 찰스 노드, 바바라 루터
배역: 루이스 디지아이모, 댄 파라다
개봉: 1992.12.24.
국가: 영국, 미국, 프랑스, 스페인
시간: 155분

– 출연진
제라르 드빠르디유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만드 아산테 – 산체스
시고니 위버 – 이사벨라 여왕
로렌 딘 – 페르난도 콜럼버스
안젤라 몰리나 – 베아트릭스 엔리케스
페르난도 레이 – 안토니오 데 마르체나
마이클 윈콧 – 아드리안 데 목시카
체키 카료 – 마르틴 알론소 핀존
케빈 던 – 멘데스 선장
프랭크 란젤라 – 루이스 델 산탄겔

○ 줄거리
서쪽 바다로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에스파냐 왕국으로 이민 온 이태리 출신 탐험가 콜럼버스.
그는 어린 아들 페르난도를 데리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의 모습을 보고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지구는 평평한 땅이라 끝까지 가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며 그곳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공포와 미신이 난무했고 기존의 권리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귀족들의 탁상공론까지 콜럼버스의 제안에 제동을 건다.
그러나 이자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을 지원하여 1492년, 드디어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3척의 배로 항해를 시작한다.
극심한 공포와 난관을 헤치면서 예정의 2배가 넘는 2개월여 동안 서쪽으로 항해하던 콜럼버스 일행은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과나하니 섬을 발견하고 그곳을 인도의 일부라 생각하고 식민지로서 개척한다.
본토 대륙을 발견하기 위하여 2번째 항해를 한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에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신세계를 건설하던 중 시련이 닥친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신대륙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킨다.
그러나 이주한 귀족들의 노동 거부와 원주민의 적의로 계획은 진전되지 않는다.
게다가 원주민과의 갈등, 동행한 귀족 목시카의 반란과 더불어 불어닥친 허리케인으로 그의 신세계는 황폐화되기도 한다.
○ 감독과 주연 배우들
– 감독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은 스타일리쉬한 비주얼과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고집으로 유명한 감독겸 제작자이다.
그는 빛보다는 어둠에, 남성보다는 여성에 강한 집착을 보여온 대표적인 비주얼리스트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블레이드 러너 : Blade Runner>는 그의 묵시적 계시에 관한 통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영화 속의 산성비와 안개, 황량한 빌딩의 공간적 구조는 그의 비주얼적 감각이 천재적 수준이라는 점과 그 천재성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기반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델마와 루이스 : Thelma & Louise> <지아이 제인 : G.I. JANE> 등의 작품들은 가부장적인 남성패권주의를 벗어나 ‘강한’ 여성이란 화두에 집착하는 리들리 스콧의 단면을 보여준다.
– 제라르 드빠르디유 : 콜롬버스 역
프랑스의 국민 배우라 불리는 제라르 드빠르디유는 1948년 12월 27일 프랑스 샤토에서 가난한 철공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에 집을 나온 제라르는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으로 도둑질과 소매치기로 교도소와 소년원에 들락거리는 등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신과 의사는 그의 이런 범죄 습성을 치료하기 위해 그에게 연극을 권유했는데 이것이 그가 영화를 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16살에 파리의 조그마한 유랑극단에서 운영하는 연기클래스에서 연기수업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다 영화는 <물속의 작은 태양>으로 데뷔하였다.
1974년 〈Valseuses〉에서 프랑스의 새로운 영웅상을 그려내며 대중적으로 유명해졌고, 그 후 1976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에서 소작농의 아들 올머 역으로 출연하여 국제적으로 드높은 찬사와 호평을 받았다.
더욱 분발한 그는 드디어 1980년 <종착역>으로 세자르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프랑스 혁명기에 공화정을 이끌다 로베스 피에르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알젤바이다 감독의 <당통>에서 당통역을 맡았으며, 1986년 대히트를 기록한 <은행털이와 아빠와 나>에서 무뚝뚝하면서도 가슴속에서는 정이 넘치는 루까역을 맡아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농의 샘>에서는 빠뻬와 위골랭의 음모에 희생되는 곱추 쟝 역으로 나왔고 1990년 <녹색 카드>로 헐리우드에 진출하자 마자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으며 역시 1990년에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작인 <시라노>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를 대표하는 프랑스 영화계의 톱스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그의 아들 기욤 드빠르디유 역시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다.

– 시고니 위버 : 이사벨라 여왕 역
시고니 위버는 1949년 뉴욕에서 NBC 사장이었던 아버지 펫 위버와 전직 여배우인 어머니 데지레 위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처럼 아버지와 어머니 뿐 아니라, 그녀의 삼촌 윈스테드 쉐필드 위버 (두들레스 위버) 또한 배우인 가족환경으로 인해 그녀는 자연스럽게 연예계와 관련을 맺게 된다.
본명이 수잔 알렉산더 위버인 그녀는 14살 때 소설 <위대한 갯츠비>에 나오는 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시고니 위버라는 보다 대중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에 그녀는 스탠포드와 예일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다. 우디 알렌의 영화 <애니 홀>로 데뷔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에이리언> 시리즈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또한 그녀는 <에이리언> 시리즈와 같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에서의 여전사 이미지 이외에 연기변신에 성공하여 <워킹걸>에서 연기력과 인기를 다시 한번 인정받게 된다.
시고니 위버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에이리언>에서의 용감한 여전사 이미지 뿐 아니라, <고스트 버스터즈>에서의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 그리고 <카피캣>의 정신분석학자 등 각각 다른 개성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1998년에는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한 바 있는 시고니 위버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위해 다양한 작품 속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다.
○ 관람평
영화는 전반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줄거리뿐만 아니라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묘사 중에서도 볼거리가 아주 많은 영화였다.
비록 콜럼버스의 영웅적 측면을 지나치게 미화한 면은 없지 않지만 목시카라는 허구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원래 문명을 파괴한 것을 나름대로 중립적인 시각에서 잘 그려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초라하고 무기력해지는 콜럼버스의 모습을 보면서 신분제도와 비합리적 사고가 만연했던 당시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도 느껴졌다.
1492년 8월 3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1450 ~ 1506)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의 팔로스 항구 출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1450년 10월 31일 ~ 1506년 5월 20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지만, 아메리카는 무주지가 아니었고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으므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유럽인 입장에서의 시각일 뿐이다.
또 유럽인 중에서조차 북유럽의 바이킹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한데다, 아메리카로 인식한 것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의 지속적 교류 계기를 만든 유럽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출생: 1450년 10월 31일,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사망: 1506년 5월 20일 (55세), 카스티야 연합왕국 바야돌리드
.국적: 제노바 공화국
.경력: 서회 항로 개척
.직업: 탐험가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콜럼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터잡은 신생 독립국가 미국은 자신들의 건국 서사시를 마련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예술계의 각 분야에서 콜럼버스의 항해에 관한 신화를 발굴하고 재창조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정치적으로도 수도를 ‘컬럼비아 구’로 명명한다든지, ‘콜럼버스의 날 (Columbus Day)’이 국경일로 정해져 있는 등 아직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독립국에게도 전파되었다.
1492년 8월 3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의 팔로스 항구를 출발하며 그의 대모험이 시작된다.
“콜럼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다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